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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대림성탄

<대림 제2주일>(12.5) -인권 주일.사회교리 주간-

 2021년 대림 제2주일
 
세례자 요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바룩 5:1-9
2독서: 필리 1:4-6, 8-11
복음: 루카 3:1-6
 
이번 주일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 인류를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의 존재에 대해 한 번이라도 되짚어 보지 않고 성탄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아버지 즈가리야로부터 예언자로서 추대되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
 
오늘날 우리도 예언자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모든 사람이 예언자를 찾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반복하여 물은 마법 같은 질문은(적어도 원탁의 기사의 서사시에는) ‘성배는 어디에 있습니까?’였습니다. 오늘날 질문은 ‘예언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입니다. 예언자들은 인류의 눈과 같은 존재입니다. 예언자가 없으면 인류는 눈이 먼 것과 같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릅니다. 유배 후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불행은 성전에 먹을 것이나 제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희의 표지는 볼 수 없고 예언자도 더 이상 없으며 언제까지일지 아는 이도 저희 가운데에는 없습니다(시편 74:9)
 
 
그 누가 참 예언자입니까?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이를 일깨워 줍니다.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인물(루카 7:28)’라고 선포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선 그는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뒤를 이어 압제와 사회적 불의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 우리는 그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네 동네에서 묻은 발의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놓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만은 알아두시오.’ 하고 일러주어라(루카 10:11)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억압하는 세리들에게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라.’라고 강하게 요청하였습니다. 폭력을 즐기는 군인들에게는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1-14).’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과 같이 ‘산은 낮아져야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해져야 한다’는 말은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매우 부유한 사람들()과 매우 가난한 사람들(골짜기) 사이의 모든 부당한 사회적 격차는 제거되거나 적어도 감소되어야 합니다. 부패와 기만의 구불구불한 길은 곧게 펴져야 합니다.
 
지금껏 우리는 예언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변화를 지지하고, 체제의 비뚤어진 방식을 비판하고, 종교적·경제적·군사적 형태의 권력에 감히 반대하는 자로 말입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또 한 가지 일을 더 합니다. 그는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루카 1:77)’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그를 예언자로 받아들이게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예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언자들은 다가올 구원을 선포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미래의 구원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에 존재하는 분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그분(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떨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가 지금 그들 앞에 서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의 예언의 위대함이 들어나는 지점입니다. 전통적인 예언자들은 동시대 사람들이 시간의 벽을 넘어 미래를 볼 수 있도록 도왔지만, 그는 오히려 더 두꺼운 오늘날의 반대의 벽을 넘어 사람의 사람으로 오신 메시아를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미래의 구원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숨겨진 그리스도의 임재를 계시함으로써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예언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줍니까? 먼저, 우리는 예언자의 두 가지 사명, 하나는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과 다른 하나는 복음 선포에 참여해야함을 알려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공허하고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앙을 선포하거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익한 항의로 끝날 것입니다.
 
 
Gospel proclamation and battle for justice are not to remain side by side, as two mutually separate things. It is precisely the Gospel of Christ that drives us to fight for respecting humans, so that everyone may see the salvation of God. John the Baptist did not preach against abuse as a social revolutionary, but as a herald of the Gospel, to prepare a people fit for the Lord (Luke 1:17).
 
On an Advent Sunday just like today, in 1511, a Spanish Dominican friar, Fr Antonio de Montesinos gave a sermon on the words we heard at the beginning: A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He was speaking to a congregation of conquistadores in one of the recently colonized   lands of Latin America. His words were like stones that struck his listeners on the head. He said: What justice or law justifies your holding these Indians in such horrible and cruel slavery? What authority justified your waging so many hideous wars with these peoples who lived quietly and peacefully in their own lands and killing so many of them? Why do you keep them under such oppression and toil, without giving them anything to eat or treating their diseases? Do you even care that they should know their God and creator? These people are human beings, are they not?  Are they not endowed with a rational soul? Are you not compelled to love them as yourselves?
 
Bartolomeo de las Casas, the well-known writer who handed down this sermon to us, says that some of the people present got angry, others were touched and saddened. It was John the Baptist who inspired this prophetic claim that John Paul II recalled when celebrating the fifth centenary of the evangelization of Latin America, as the most genuine interpretation of the Gospel in those times. Campesinos, just like John the Baptist, seems to have paid with his own life the courage to cry out to the conquistadores his own non licet, it is not lawful for you.
 
Even nowadays John the Baptists austere and fascinating profile should not cross our eyes in vain in the liturgy, but provoke us to take similar, courageous stances in the name of the Gospel.
 
 
There is a field in which we are called to take on the role of the accused rather than that of the accusers. Comparing relevant data, it has been remarked that in the north of the world, a dog has access to seventeen times more goods than a child of the South of the world. Bearing that in mind, it is impossible not to recall John the Baptists outcry: Whoever has two tunics should share with the person who has none. And whoever has food should do likewise. And whoever has food should do likewise. The same applies to Campesinos outcry to the conquistadores: Are they not human beings like yourselves?
 
We said that John the Baptist pushes us to fight against injustice to be able to proclaim the good news to everyone including the poor and, before closing, we need to see what lessons may be learnt from this. How does the Precursor proclaim Jesus? What is his method? He does not teach us anything in terms of content.  He lies at the dawn of faith, his Christology is simple and basic; he is yet to learn the higher titles of Jesus: as the Word, the Son of God, the Lord. On the other hand, he has an extraordinary ability to make Christ feel close and important for life. He cries out: In your midst there is someone you do not know. He conveys the urgency of a decision (the ax lies at the root!) and the importance of what is at stake. His winnowing fan is in his hand, that is: before him, one decides who stands and who falls, who will be good grain and who will be chaff blown away by the wind.
 
That way John the Baptist reminds us that, to take part in the Churchs effort to evangelize, one does not necessarily need deep theological knowledge or ability for difficult reasoning. Rather what is required is courage, conviction, experience (of Christ, I mean) and a consistent lifestyle. Everyone can speak of Christ as the Precursor did, even those who have not studied.
 
John the Baptist defined himself as a a voice of one crying in the desert. Let us hope that even nowadays he will not be crying in the desert, but that his voice may reach out to many and bear in them the desire to truly prepare in their hearts the way for the coming of Christ.
 
<대림 제2주일>(12.5) -인권 주일.사회교리 주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6)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은 '마흔 번째 맞이하는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주간(12.5-12.11)의 첫 날'입니다.

'인권주일'은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사회나 국가나 정치권력에서 나오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그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Imago Dei)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권은 참으로 소중하고 모두가 평등합니다.

하지만 지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이러한 인권이 힘과 돈, 정치권력, 종교와 이념 논리에 의해 심하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선구자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뒤를 이어 오시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그분은 "보시니 참 좋았다." 라는 하느님 원창조 질서의 회복인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3,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선인 모두의 구원'을 위해 강자가 약자를 힘들게 하는 것을 반대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서로 연대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지금 여기에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교리'가 말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사회교리'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요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소명을 이루기 위한 '사회. 경제 생활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힘을 모읍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대림 제2주간 월요일>(12.6) -사회교리 주간-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5,20)
'죄와 구원의 중개자!'
오늘 복음(루카5,17-26)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중풍병자를 남자 몇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하지만 군중이라는 장애에 막혀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을 수 없자,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 구원의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5,21)
이렇게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의 메시아, 곧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는 죄가 병의 원인이라는 것이었고, 죄를 용서 받아야 병이 낫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다고 여겼습니다.
복음 안에서 보면 죄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유다교 지도자들이 생각한 죄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의 본질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을 뛰어넘어,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이사35,1-10)는,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누리게 될 '구원(부활)'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희망의 대전제는 '믿음과 돌아섬(회개)'입니다.
오늘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과 말씀으로' 나에게 오십니다.

이 '구세주'를 기쁘게 맞이합시다!
그래서 나의 죄를 용서받고,
나도 너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중개자가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12.7) -사회교리 주간-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오늘은 예로니모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서기 340년 무렵 로마에서 태어나셨고, 밀라노의 주교로 사목하셨습니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아주 검소하게 살면서 많은 저술 활동을 했으며, 날마다 미사를 봉헌했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관료들과 이교도들과 혼란스러운 가톨릭 신자들 및 회개하는 죄인들과 끊임없이 상담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했던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싸우면서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인 삼위일체교리를 지켜내셨고,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이원론 종교인 영지주의에 속한 '마니교 이단'에 깊이 빠져 있었던 아우구스티노를 회개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는 양 백 마리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인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나 신자들 모두가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함께 살기), 곧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있는가?

가톨릭교회, 한국천주교회, 각 교구와 본당이 그리고 그 구성원들인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와 신자들이 '탁상공론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시노달리타스'를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티모테아 고모 : 잊어버린 한마리 양이 나자신이다.
길을 잃고 헤매일때도 나를 찿아나서시는 분..그분이 계시기에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나이다.^^♡♡♡

네 고모님 잃어버린 한마리 양 아네스  모든것이 부족하고 두렵고 하지만   함께살기 시노달리타스곧지금 여기에서 함께살기 아멘 아멘    울 고모님 사랑해요 고모님이 계서서 참 좋아요

? 인생의 주소 ?

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만 줄을선다.
아! 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인 것을...

어느 이른 아침, 커피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내 앞에 남루한 옷을 입은 비쩍마른 한
여인이 커피 한 잔의 값을 치루기 위해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세고있자 계산대
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 가세요.”
여인이 잠시 멈칫하자, 직원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제가 사는 거에요. 오늘이 제 생일
이거든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 여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빵 하나를 들고 나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내가 그 남자 직원에게 말했다.
“생일 날 그 여인을 위해 빵을 사 주다니 멋집니다! 생일을 축하해요!”

계산대의 직원이 고맙다는 시늉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그 옆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직원이 말했다.
“가난한 사람이 오는 날은 언제든 이 친구의 생일이에요. 하하하“

그러면서 내가 말을 이을려고 하자 계산대의 직원이 말했다.
“저는 그저 그 분이 먹을 것을 살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는 커피를 들고 나오면서 잔돈은 필요 없다며 말했다.
“그것은 당신 거예요.“

“손님, 하지만 이건 너무 많은데요?"
그 때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우리 모두 매일매일이 생일인 것처럼, 넉넉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멋진 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인 만큼 길지 않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덕(德)을
쌓아 갑시다.

덕을 쌓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8)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1,30)
'성자의 합당한 거처가 되자!'
오늘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성모님을 기억하는 큰 날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요 주님의 어머니로 간택되신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듦이 없으시다는 것이 믿을 교리로 선포된 것을 기억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리아'는 성자의 합당한 거처로 간택되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인 '예수님의 잉태 예고 말씀'(루카1,26-38)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의 이 순종으로 보잘 것 없었던 나자렛 처녀 마리아, 남자를 알지 못했던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 고백하는 이들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공경'합니다.
'나도 성모님처럼 성자의 합당한 거처가 되자!'
오늘 제1독서(창세3,9-15.20)는 아담이 지은 원죄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순종의 죄를 짓고 동산에 숨은 아담을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아담처럼 하느님을 피해 숨으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깨끗하지 못해 부끄러워서.

아담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죄의 물듦으로 숨어 있는 나를 부르십니다.
하느님 부르심에 아담과 하와처럼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응답합시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총애)로 다시태어 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티모테아수녀] 여성사제가필요한이시기에교회는모두이많은하느님백성믜의견을들어야해요.
본당은아니어도
수도회.사회복지시설.병뭔등등...
여성사제가필요한시대라고.보여요.예수님이시라면어떻게하실까!
------ 네 시대가 요구하나봐요
참으로 좋으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심을 믿습니다
고모님 깨어있게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큰회개와 큰 은총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티모테아수녀]  오늘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성모님의 대축일을 마음가득 축하드립니다~
특별히 성모님의 보호안에 은총과 축복가득히 받으세요~^^
[최장명]] 네. 고모님도요

<대림 제2주간 목요일>(12.9) -사회 교리 주간-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11,12)
'폭행의 참의미!'
예수님께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주 큰 예언자이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며,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른 별개의 나라도 아니요, 유토피아적인 나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요,
지금 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그리고 우리가 실행해야 할 '하느님의 뜻'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내 뜻대로 내 좋을대로 살고 있다는 의미로...

지금 여기에서 기뻐 감사하지 않고,
평화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의미로...

서로 용서하지 않고,
서로 화해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폭행을 멈춥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울 고모님
숨은꽃 목련꽃 아름답네요
감사드립니다. 울 수녀님 울 고모
아름다우신 티모테아고모
싸랑해용 ㅎㅎ
[티모테아수녀] [오후 7:16] ☆☆판공을 준비하며☆☆
이해하기보다는 비판에 앞섰고,
덮어 주기보다 들추기를 즐겼으며,
싸매주기 보다는 아픈 데를 건드렸고,
별 것 아니면서 잘난 체 한 것들을
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에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 주셨기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 준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때때로 가시를 주셔서 잠든 영혼을 깨워 주셨고,
한숨과 눈물도 주셨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도 배웠습니다.
실수와 실패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소서.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편리한 세월에 태어난 것과,
세어도 세어도 끝이...


[최장명] [오후 8:01] 판공을 준비하며
이해하기보다 비판하고
덮어주기보다 들추기
싸매주기보다 아픈데 건드리고
ㅜㅜ

제일 주요한것은 죄중에서도 하느님쪽으로
넘어지면 주님께 손내밀며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이끄시고 성모님과함께 하고
묵묵히 자기길을 가야겠지요
묵주알들고 기도하면서요
웬지 마음이 아프네요 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