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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대림성탄

2021년 대림 제1주일 보라, 그날이 온다!

2021년 대림 제1주일
 
                                                               보라, 그날이 온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예레 33:14-16
2독서: 1 테살 3:12-4:2
복음: 루카 21:25-28, 34-36
 
대림절 제1주일인 오늘부터 새로운 전례력이 시작됩니다. 3년 주기 중 세 번째 연도(올해)의 중심 복음은 루가 복음서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전통적으로 루가 복음을 통하여 몇 가지 주제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것은 자비의 복음(탕자에 관한 비유와 같은 일부 잘 알려진 비유로 인해), 가난한 자의 복음(특별한 관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설교의 사회적 차원), 기도의 복음, 성령의 복음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루가) 복음에서는 역사적 문제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프롤로그(첫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출처와 복음서 초안 작성에 '신중한 조사'를 있었음을 알립니다. 마찬가지로, 다음 장에서 그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의 역사적, 지리적 사실을 알리는 것에 공을 드렸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독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매해 초에 그러는 것처럼 기대하게 만듭니다. 모든 동사는 미래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독서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예레 33:14-15).’”
 
마지막 날에 메시아께서 다시 돌아오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내용을 담아 기대로 가득차게 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7).”
 
화답송의 시편을 통해서는 만조 때에 바닷물이 차오르듯 신자들에게 앞을 내다보고 우리의 영혼을 다시 고양하도록 합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시편 25:1).”
 
전례를 통하여 다시 시작하도록 고취시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실생활에서 실패한 후에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가진 가장 놀라운 능력 중 하나입니다. 갈대가 바람으로 꺾이더라도 다시 곧게 펴듯 모든 인간은 역경이 있을 때마다 다시 희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가장 큰 능력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능력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능력이 없어진다면 불쌍한 우리 삶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사는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하는 능력,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능력,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신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 외에 가장 심오한 실존적 존재의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엔진은 '회복 속도'로 그 능력이 판단됩니다. 인간은 어떤 실망에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판단됩니다. 그들이 싸워온 것을 이루지 못한다해도, 그들의 투쟁과 모든 좌절에도 희망으로 돌아가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희망)는 그들을 어떤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은 인지와 지혜의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성 바오로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적 차원에서도 정말 그렇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희망은 삶을 아름답고 살기 좋게 만드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시인 레오파르디(Leopardi)연감 판매자와 행인의 대화라는 짧은 작품에서 이와 같은 진리를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해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한 행인(시인을 대표함)이 길모퉁이에 있는 달력 상인 쪽으로 걸어 갔습니다. 달력을 사기 전에 그는 달력 상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행인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행인: 이번 새해는 행복한 한 해가 될 것 같나요?
상인: , 확실합니다.
행인: 작년만큼 행복할까요?
상인: 훨씬 더 그럴 것입니다.
행인: 작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상인: 더 행복할 것입니다. 선생님.
행인: 새해가 지난 시절 중 한 해와 같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상인: 아닙니다. 선생님. 그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행인: 이후의 20년을, 아니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살고 싶지는 않습니까?
상인: , 선생님.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인: 하지만 이미 살아온 세월에서 느꼈던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다시 겪어야 한다면요?
상인: 그렇다면 다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행인: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상인: 하느님과 같이 어떤 (제약) 조건도 없이 나에게 주어지길 원합니다.
행인: 그것은 내가 내 삶을 다시 산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과거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입니다. 운명은 새해에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새로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상인: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행인: 당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연감(달력)을 보여주세요.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할 수 있지만, 이미 살아온 것과 똑같은 과정을 밟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부족할까요? 희망, 그것이 바로 새로움입니다. 그리고 새로움이 없는 삶은 무엇입니까? 무의미하고 죽은 반복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롭게 솟아나는 희망이며, 새로운 해를 시작할 때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이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희망이 솟구치는 아주 훌륭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중 하나는 예레미야의 세 번째 애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배 기간동안 도시가 황폐하고 백성이 굶주림으로 지친 상태에서 가장 완전한 황폐함을 느겼을 때 예언자는 애가를 부릅니다. 예언자는 멈추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그 간단한 단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한탄의 어조가 가벼워지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래서 나 그분께 희망을 두네(애가 3:24).’라고 말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선택을 통해 놀라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해도, 희망에 대한 다른 측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희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희망에도 위험 요소가 있어,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바를 깨닫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 번, 우리는 지금이 적절한 때임을 확신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고 기도의 응답을 기다려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응답받지 못하였다 느낍니다. 우리는 완전한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참을성 있게 기다려 왔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에게 다시 희망을 걸 때 그분에게 우리가 기회를 주는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를 잊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매년 새해가 시작될 때 그분은 이제 적절한 때라고 생각하시며 희망하십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이는 명백합니다. 우리의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몇 년 동안 기다리셨을까요? 아마 저에게는 76년 정도입니다(10년은 계산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회심을 논하기엔 너무 어린 시절이었으니까요.)
 
여기에서 저는 제가 사랑하는 시인 샤를 페기(Charles Péguy)의 아이디어를 빌려올까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희망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거슬러 본인의 의지없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탕자의) 아버지가 한 것 외에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희망? 탕자의 아버지는 가끔 창밖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 희망의 면류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야 하는 감정이 무엇이든, 우리를 위해 그것을 먼저 갖은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믿으라고 요청하시지만, 그분께서 먼저 우리 인간을 신뢰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희망을 요구하시지만, 우리에게 먼저 희망을 주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끝을 보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를 희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인의 변덕을 기다리시며, 우리 죄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전례에 있어 새로운 연도를 맞이하며 우리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해가 하느님께 적절한 해가 될까요? 우리가 우리의 회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조금 생각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한 그분의 희망과 기대에 면류관을 드릴 수 있는 해가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얻으실 수 있는가입니다. 그분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어 그분께서는 우리의 빚을 함께 갚고 모든 기대를 충족하고 용서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대림 제1주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21,28)

'새해 첫 날!'

오늘은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새해(다해)의 첫 날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 첫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드립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더 충만하시길 기도드리면서 빕니다."

오늘부터 4주간 동안의 시기는 전례주년 중에서 첫 번째 시기인 '대림시기'입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말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된 말로 '기다림'을 뜻합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이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회개와 속죄의 시기'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나아가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린 것은 더욱 더 큰 기쁜 일이며, 그 기다림은 우리의 큰 희망입니다.

다가오는 주님의 성탄과
다시오시는 주님의 재림이 참으로 나에게 기쁨이요 희망의 사건으로 다가오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하며, 늘 깨어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예수님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고, 장차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억이 나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하고,
죄에 빠진 나를 구해줍니다.

내게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많은 것을 내려놓고 가벼워진 마음,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합시다!

새해에는 내가 머무는 공동체가,
'더 기억하는 공동체',
'더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안에 머물러 있는 예수살이공동체',
'더 기뻐하고 감사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11.3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4,20)

'부르심과 응답!'

오늘은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이고,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며, 동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4,19)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의 그룹인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곧바로 응답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제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으뜸 모습은 '스승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는 것', '스승의 말에 곧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스승의 제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자신이 아니라 스승을 드러내야 합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를(나를) 부르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특히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나를) 부르십니다.

매일 들려오는 복음의 시작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들려오는 복음이 2천여 년 전에 있었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복음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로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다고 약속한 우리는 늘 '말씀(복음)'을 가까이 해야 하고, '말씀(복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삶으로 '말씀(복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대림 제1주간 수요일>(12.1)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15,31)

'몸과 마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셔서 산에 오르시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음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조금을 가지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화를 전합니다.

이는 모두 너를 향해 있는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영과 육의 건강, 영과 육을 함께 살리시는 너를 향해 있는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을 마음에 담아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폐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있고, 어떤 자매는 유방암, 췌장암, 그밖에 다른 암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지니고 있는 이런저런 아픔들은 왜 나를 찾아왔을까?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올 만 했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내게 올 만 했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 주범은 마음 안에 쌓인 스트레스,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스트레스,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내가 살려면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스트레스를 줄여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치유하시는 분, 내 안에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 분, 그래서 나의 영과 육을 함께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이런 주님께로 나의 몸과 마음이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대림 제1주간 목요일>(12.2)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계시(드러남)되었습니다.

그 뜻은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공동선(공동이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백성의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치열하게 싸우셨고, 결국에는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약 220년 전, 사도 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억강부약과 대동세상'을 이루려고 했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억강부약(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움)과 대동세상(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

정조가 이루려고 했던 것이 바로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이루시려고 하셨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사회 정의와 공동선'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이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보조성의 원리'와 모든 사람이 형제애로 서로 돕고 돌보아야 하는 '연대성의 원리'가 실현되는 바로 그곳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는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이사야 예언서 26장 4-5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고모님 
저는  장독이 참 좋습니다
늘 고모님의 포근한 마음이 저를 미소짓게 한답니다. 
싸랑해용 
대림성탄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12.3)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분들과 성인의 모범을 따라 선교지에서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는 모든 선교사를 기억하면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스페인의 변방 지역이라고 불리는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나셔서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으시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일본과 중국의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일본에서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시던 중에 1552년 12월 중국 본포가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46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만약 신부님께서 그때 선종하시지 않았다면 아시아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페인을 떠나 복음 전파를 위해 이역만리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그 힘은 '믿음의 힘'이지 않았을까??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었던 '믿음의 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고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었던 '믿음의 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는 말씀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한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믿음의 힘!'

그렇다면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겸손한 마음 안에서 나의 믿음을 조금씩 조금씩 키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믿고 있고, 누구를 믿고 있고, 정말로 믿고 있고, 제대로 믿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늘 오늘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대림 제1주간 토요일>(12.4)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마태10,8)
 
오늘 복음(마태9,35-10.1.6-8)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십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에게도 당신의 일을 내맡기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끝맺습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지금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큰 병폐 중에 하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가엾은 마음인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이에 크게 역행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너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온 병폐입니다.

'주고 받는 것'(보편적인 선을 주고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친교(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주고 받는 것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는 것은 '비그리스도의 모습'이며, '비구원의 모습'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거져 받았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주시는 것을 잘 받고, 잘 나누어야 합니다.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기쁘게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은 기쁘게 나눌 줄도 압니다. '주고 받음이라는 역동성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고, 받은 것을 너와 함께 잘(기쁘게) 나눕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