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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 과 비움 /윤동주

생명의 서 / 유치환

생명의 서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위 /  유치환
 
내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가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그리움  /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그리움2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한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