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 (전도 4.12).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1고린 13,13).
대 신 덕(향주덕)
15. 세 가지 대신뎍(향주 삼덕)은 하느님 외에 모든 것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는
역활을 하기에 마땅히 하느님과 영혼의 합일을 도모한다.
16. 만약 영성 생활에서 이 세가지 덕을 굳건히 실천하지 않으면
오롯한 하느님 사랑에 이를 수 없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6).
신 덕
17. 바르고 확실한 단 하나의 길은 믿음의 길이다.
이 길은 덕에 나아가려는 사람의 길이다.
감성의 온갖 것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사사로운 온갖 빛에
눈을 감고 걸어가야 할 길이다.
18. 영감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경우,
하느님의 계명과 믿음에 근거한 동기가 언제나 기준이다.
영혼은 완전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
19. 믿음의 빛과 진리에 충실한 영혼은 오류에 빠질 위험 없이 안전하게 간다.
보통 빗나간 길을 걷는 영혼은 자기의 욕구, 경향, 기호, 개인적인 생각이나
이치를 따른다.
이런 것은 하느님 봉사에 맞지 않는 경향을 띠게 하고 지나치거나 또는 부족해서 죄를
범하게 한다.
20.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셨다.
21.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느님과 합일하려면,
영혼은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지 못한채
모든 피조물을 말끔히 잊고 나아가는 것이 좋다.
피조물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 과 '항시 변하는것' 을 버리고
영원히 변치 않고 알아 들을 수 없는 존재,
즉 하느님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22. 순수한 믿음만으로
하느님을 찾아라.
물질 세계에서의 빛은
걸려 넘어지려는 사람을
구해 주지만
하느님 일에서는 그와 반대다.
보지 않는 것이
훨씬 좋을 뿐만 아니라
영혼은 더욱 안전하다.
23. 이승에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그러하시다"보다는
"그렇지 않으시다"를 통해서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영혼은
할 수 있는 한
일체의 자연적, 초자연적 지각을
온전히
버려야 한다.
24. 하느님의 사랑에
성장하려면
어떠한 초자연적 사정을
느끼거나 아는 것보다
온갖 빛을
송두리째 벗어난
생소한 믿음과 소망의
아주 작은 행위가
훨씬 큰
도움이 된다
25. 생물 발생의 법칙대로
생물이 새로운 형태를 취하려면
먼저 이전의 형태를 탈피해야 하듯이
영성 생활에서도 영혼은
동물적, 감각적인 생명을
벗어나지 않는 한
순수한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없다.
26. 그대의 영혼에
하느님의 모상을
뚜렸하고 조촐히 간직하려면
어떤 피조물에도
기울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온갖 피조물에서
이탈하고 정신을 비워라.
그래야 그 어떤 피조물과도 닮지 않는
하느님의 빛안에서
걷게 되리라.
27. 가장 오롯한 잠심은
신앙 속에 잠기는 것이다.
거기서 성령은 친히
영혼의 빛이 되어 주신다.
그러나 영혼의
믿음이 완전해져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하고
조촐하게 되면 될수록
주부(注賦)적 사랑과
초자연적 빛의 은총을
훨씬 퐁요롭게 받는다.
----------------------------------------
28. 현세에서 영혼에게 베푸시는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은총 중의 하나는
- 물론 영구적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매우 선명하고 높은
직관과 느낌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은총으로
현세에서 영혼이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인식과 감각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신다.
29. 자신의 지식, 기호,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향하는데 몹시
위험스러울 뿐만 아니라
조금도 목적에 맞지 않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안내자인 믿음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쉽게 길을 잃고
제자리 걸음을 할 뿐이다
30. 현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심스러운 현상은
자신의 영성적 관념을 지니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묵상동안 마음 저 밑바닥에서 그 어떤
- 그들의 말에 의하면 - '내적 소리'를 듣고
즉시 그것을 초자연적 계시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확신에서 아주 예사롭게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은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대답을 주셨다." 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며
그러기를 바랐던 자신에게 속아
자문 자답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런 것을 가끔 보게 된다.
31. 오늘날 환시나 계시를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만
눈길을 쏟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분명 이렇게 대답하시리라.
"이(그리스도)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유별난 가르침을 바라지 말라.
그에게 나는 다 말했다.
그 안에서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나는 그를 네 형제, 스승, 벗, 속죄 그리고
보상으로 주었다."
32. 매사에 그리스도와 성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무지와 영적 나약함을 고치는
약이 있다.
그 가르침은 바른 길을 걷는 자에게 주어지고
온갖 악을 예방하는 약이 된다.
이 길을 떠난 사람은
호기심의 죄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기 스스로 나타낸다.
33. 초자연적 방법으로
보여진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직자들의 견해와
일치되지 않는 한
결코 진리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34. 계시를 원하는 것은 적어도 소죄다.
이런 소망을 부추기거나 동의 하는 사람도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 지향이 좋다 해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행동하는데는
인간의 이성과 복음의 가르침으로
넉넉하기 때문이다.
35. 계시를 원하는 영혼은
믿음 가운데 쌓은 성덕을
점점 잃어 간다.
그것은 악마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악령은 영혼이 바라는
계시와 비슷한 여러가지를 제시하여
참된 계시인 양 교묘하게 속인다.
36. 성인들의 예지란
하느님의 법규와 복음적 권고를
깔축없이 실천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견고히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줄 아는 것이다.
망 덕
야훼를 믿고 살면 행운의 문이 열린다(잠언 16,20).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1데살 5,8).
37. 흔들림 없는 망덕은
하느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의 합일에 이르려면
오로지 희망으로써
하느님께만 의지하여
나아가야 한다.
희망 없는 영혼은 아무것도
차지할 수 없다.
38. 하느님을 향한 힘찬 망덕은
영원한 것에 대해 뛰어난 비약과 용기를 준다.
이런 희망을 지닌 사람은
이승의 모든 것이 영원한 생명에 비해-사실이 그렇다-
황량하고 보잘것없고 생명이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39. 망덕이 충만한 영혼은
흔연히 모든 것에서 이탈하며
온갖 세속적 의복과 장식을 벗어 버리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현재나 미래에도 희망을 두지 않고
이승에서부터 유일한 기쁨인
영원한 생명의 보화를
바랄 뿐이다.
40. 하느님께 대한 생생한 희망에 의해
인간은 현세의 사물에서 마음을 완전히 초탈할 수 있고
세속의 올무에서 보호된다.
이런 영혼들에게는 지상적인 것에 애착하거나
거기에서 무엇을 찾는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존재마저 잊게 된다.
'가르멜 > 잠언과 영적권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영혼의 정화’ : ‘능동적 정화’와 ‘수동적 정화’ (2) | 2012.02.09 |
---|---|
* 365개로 되어 있는 십자가 성 요한의 잠언 =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14 (0) | 2011.03.26 |
겸손 (0) | 2011.03.26 |
[스크랩] 365 정신적 청빈 (0) | 2010.03.23 |
[스크랩] 355 정신적 청빈 (0) | 2010.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