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너와 나 둘이 모두 똑같이 좋아할
그러한 음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우리가 떠난 그 먼 곳, 그 천국에나 그런 음식이 있겠지.
언젠가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세속의 기쁨에 취해 스스로 즐거워하는 그날,
우리는 식욕의 자비에 몸을 던진 신세로 남게 되고,
하느님은 천국의 문을 닫아 버리신다.
이제 혼란과 참패의 절망에 빠지게 된 우리는 그분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자비와는 먼,
그분을 이용하려는 우리의 욕심에 끌려 그분을 찾을 뿐이다.
너를 따르다 잃게 된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절망은 깊어진다.
하느님께 경멸을 받아도 마땅할 난, 또한 너에게도,
그리고 지옥의 경멸도, 이 땅의 경멸을 받아도 마땅하다.
나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를 따르던
나는 이 세상 하찮은 것의 하나가 되었다.
나의 생각을 따라 내가 원하던 이 세상의 것들,
나의 조바심을 부추기던 너의 식욕과 쾌락을 모두 가졌을 때도
나는 내가 찾던 평화를 얻지 못했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욕망을 채워 줄 이 세상 것을 얻겠다는
희망을 붙들고 나의 혼란에 저항하고 있다.
필요라는 가면을 쓴 육신의 욕망을 따르다.
필요의 흥청거림에 빠진 나는 곧 죄악에 묻히고,
그리고 나는 이내 무겁고 황폐한 이 세상의 것이 된다.
육신의 음식과 식욕 그리고 자애심이 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자애심, 너는 나와 나의 육신에 빈틈없이 들러붙어
나를 숨막히게 한다.
욕망에 눈이 먼 나에게 아직 쓸모 있음은 오직 후회뿐,
하지만 후회마저 나와 함께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나는 수치를 안겨 주는 그러한 것에 나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하느님과 멀리멀리 멀어질수록 나의 슬픔은 더 커진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한숨 속의 나의 기다림,
다만 나에게 주어진 본능으로 하느님을 찾고 있었을 뿐이지.
당신의 창조물을 버리지 않으시는, 온전한 선의 하느님
그분은 때때로 말씀과 증표를 내리시어
스스로 조심하는 이를 도우며 자신의 입장을 거부하는 이들은
더욱 심한 처지에 빠지게 됨을 알려 주시지만
나의 배은망덕은 나의 죄악을 더욱 깊게 만들고
그 죄악에서 기쁨을 찾고 싶어하는 나의 욕구는 더 강렬해진다.
은총을 받을수록 나의 눈은 더욱 멀어지고
나는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내가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주지 않으셨던가?
아, 이 비참한 나를 하느님밖에 누가 건져 주시겠는가?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이 헛된 것을 쫓다가 스스로 지치는 것을 허락하신 후
그 영혼을 비추어 스스로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과 하느님만이 건져 주실 수 있는
그러한 위험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
이때 영혼과 육신은 마치 스스로 도살당하려는 짐승처럼, 죽음의 문전에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는다. 공포에 질린 영혼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하느님을
찾으며 이렇게 부르짖는다.
"오, 주님, 적의 함정에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저의 앞을 비추어 주소서!"
- 심리학과 영성 - 중에서
-베네딕트 J. 그뢰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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