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활의 라우렌시오수사의 생애 안에 드러난 하느님 현존을 수련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의 삶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현존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수련을 통해 라우렌시오 수사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차용借用해서 나의 삶의 자리에 하느님 현존의 체험을 통해 우리 가르멜 영성의 이상理想이며 목표인 하느님 사랑의 합일의 길,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위한 수련방법을 터득하고 그 삶을 지금 이곳에서부터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면 오늘의 과제에 대한 수련하는 의미에 대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러면 넘 짧지요. 그러나 우리가 소중한 이 시간에 이렇듯 열공을 하는 것은 가르멜의 성인성녀의 삶을 학습하고 수련해서 그들의 삶을 우리들의 삶에 차용하여 현재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현존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우리의 정체성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라우렌시오수사의 생애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라우렌시오수사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의를 수강하는데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어 우리 뇌세포 메모리얼박스에 남는기억이 하루가 지날수록 50%- 10%감소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강의록을 받고 보니 표준은 되는 듯합니다. 아니였으면 0point 인데 강의록이 있기에 강의록만은 남습니다.
프랑스 로렝지방 출신군인으로 파리에와서 가르멜 수도회의 평수사가 되어 요리사로, 그후에는 신발 수선공으로 일했던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강렬하게 체험하며 살았다. 끝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고 다른 이에게도 하느님 현존을 "수련" 할 것을 권했다. 그러한 수련은 단순하고 엄격하고 행복한 방법 , 평수사의 일거리를 가지고서 "냄비들 한 복판에서 " 살았던 한 가르멜 수사의 삶을 충만케 했던 방법이었습니다.
"하느님 현존이란, 제가 보기에는 영적인 삶 전체가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제대로 훈련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온전히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현존 가운데서도 여러 해 동안 신앙의 어려운 밤을 지나야 했고 생애의 말년에는 낡아져가는 육신으로 온갖 불편을 겪었지만, 하느님 현존 안에서 자신의 중심과 안식처를 발견하는 것은 내적 평화의 그윽한 기쁨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하느님과 이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수 없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시지요. 그것은 하는님께 나아가는 단순하고 겸허한 길이며 모든 시대의 인간들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생전에 영적 조언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라우렌시오 수사는 그 체험의 깊이와 실제적 감각, 친절한 권고를 통해 하느님을 추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벗이 되었으니 오늘날 새롭고 폭 넓은 관심의 대상이 될만합니다.
콩라드 메스테르 신부는 "라우렌시오 수사의 가장 심오한 증언은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삶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는 그 처럼 충만하고 행복하고 풍요로워 질 수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라고 말합니다.
라우렌시오수사의 단순함과의 조화의 힘은 말없는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 현존에서 오는 것입니다. 라우렌시오 수사가 죽은 직후에 수집된 그의 단순한 어록은 수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남 긴 저작은 그리 많지는 않으나 일상생활에서 하느님 현존을 수련하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 가는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년기 1614년 프랑스 로렌지방의 뤼네빌 근처 작은 마을인 에리메닐에서 탄생. 아버지 도미니코와 어머니 루이즈에게서 그리스도교적 기본교육을 받았으며 니콜라스 에르망이라불렀습니다. 전기작가에 의하면 부모들은 훌륭한 분들이었으나 이 찬사는 물질적 자산가치보다는 인간적이고 종교적인가치의 것으로 보입니다. 니콜라스 에르망은 건강한 지성을 지녔지만 학업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년기 1632년 18세에 위대한 하느님의 현존에 사로잡히는 체험을 하였는데 이것은 첫 번째 회심으로 신적 신비로 이끄는 무언의 초대였습니다. 그런데도 니콜라스는 수도생활로 향하는 것보다 군복무를 선택하였다.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인 30년 전쟁의 와중이었는데 한때는 독일군에포로가 되어 죽음의 위협을 받었으나 무죄함을 입증받아 로렌부대로 다시 복귀하였고 부상으로 로렌지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군인으로서 어떻든 30년 전쟁의 특징이라 할수있는 잔학하고 참혹한 약탈에 가담했으리라 짐작해 보며 그는 "청년기의 무질서"와 "과거의 죄"를 쓰라리게 후회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잡기로 결심했다. 은수생활을 시도해보기까지 그가 치러야 했던 내적 투쟁을 상상해 볼수도 있다. 아직 은수생활을 하기에는 성숙해 있지 않아 포기하였으며 하인으로 파리에 체류하게 됩니다.
신앙의 시기: 내적 삶의 분기점 공동체의 삶은 모래알 같이 밀려다니는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헌신에 기초한 것이 아닌 견고한 반석이 되신 예수그리스도께 기초를 두는 것이고 공동체의 지체들은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해 주면서 수시로 변하는 개인적인 변덕들로부터도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1640년 6월 26세에 니콜라스는 평수사로 파리의 Vaugirard가에 있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8월 중순 니콜라스는 가르멜의 갈색 수도복을 착복하고 라우렌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었는데 부활이란 현의를 택한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눈앞에서 경탄할 만하게 이 신비를 살아내었습니다.
수련기 초기에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는 고통스러우리라 예상했던 수도생활에서 맛보게 된 행복에 실망하여 주님을 나무라듯 "당신은 저를 속이셨군요?" 라고 투덜대기까지 하였다 입회 때 그는 서투르고 결점 많은 자신을 동료수사들이 생생하게 느낄 것을 두려워 했는데 자신과 형제 모든게 "오직 만족스럽기만"하였던 것입니다.
라우렌시오 수사가 하느님을 향하여 보여준 신실한 태도는 다른 형제들에게 모범적이었다.
라우렌시오 수사가 더욱 거룩한 삶으로 깊이 있게 나아가려하자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들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년간 지속될 어둔밤으로 들어갔으며 마지막 4년간은 혹독하였다 "나는 스스로를 비난하였으며 나에게 구원이란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라고 말하듯 그는 자신의 멸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친밀하게 체험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갈망이 고민의 근원이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하느님에게 나 자신을 바치지 못했다는 두려움과 언제나 내 눈앞에 있는 나의 죄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베푸신 크나큰 은혜 이런 것이 내 고뇌의 절정이며 실체라고 고백합니다.
개인적인 편지에나오는 이상적인 증언에서 보면 "제 생애를 이런 근심 걱정으로 마치게 될지도 모른 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자 순식간에 완전히 변해버린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때까지 늘 혼란 스럽던 제 영혼은 마치자신의 중심과 쉴자리를 발견한 듯 깊은 내적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하느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들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가 하는것을 몰랐다. 자신이 이미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의 영혼은 어느때보다 하느님은 라우렌시오 수사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거룩하게 계시해 주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받아 들였다. 그 위엄이 그 영혼을 밝게 해주고 모든 두려움을 흩어버렸으며 내적 갈등과 고뇌에 종지부를 찍게 하셨다. 그 때부터 하느님의 성품과 자비를 묵상하는 것으로 자신의 성품을 빚어가게 되었습니다. 라우렌시오수사는 얼마나 자주 거기에 머물렀던가 하느님의 현존으로 돌아가 그 그윽한 사랑을 맛보는 것이 라우렌시오 수사의 모든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1642년 2년 의 수련기를 마치고 종신 서원을 했다. 서원 후 라우렌시오수사는 백명이 넘는 수사들이 있기도 했던 파리수도공동체의 주방 소임으로 15년을 일했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좌골 통풍이 심해져 다리를 절게되어 신체장애가 있는 사이 너무나도 힘든 소임이어서 앉아서 할수있는 구두 수선공의 소임을 맡겼습니다. 평수사들은 온갖 조류의 심부름을 하기위하여 외출을 해야 했고 때로는 공동체의 생활비를 청하러 다녀야 할 때도 있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구너고와 묵묵한 증거를 통해 이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었습니다.
라우수사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수련하면서 보냈다. 자신도 그것을 하느님과 고요하고도 친밀한 대화의 삶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라우렌시도 수사는 마음속에 하느님의 깊은 현존을 가꾸어감으로서 그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하느님현존이란 지식이나 말보다는 마음과 사랑으로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꼭 큰일만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그 일도 다 끝나 더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날 때면 나는 어느 왕보다도 더 만족감을 느낍니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알고자 합니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참으로 수많은 방법들로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씁니다. 숱한 방법을 동원하여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으려 해보지만 오히려 마음에 고통만 더하게 됩니다.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자신이 현재 처한 위치에서 모든 수고를 다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의 사랑을 모아 드리며, 늘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사귐을 지속하게 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현존을 계속 지켜 가는 것, 그것보다 더 쉽고 직접적 방법이 있을까요?
하느님의 현존 안에 거하는 것에는 무슨 특별한 기교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늘 똑같은 마음으로 단순하게 연습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수사한사람이 끈질기게 하느님 현존수련의 비결을 물어 왔다. 라우렌시오수사는 늘 그렇듯이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수도원에 처음 들어 올 때부터 나는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감정의 시작과 끝에 있어서 하느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도시간이 되면 어려운 영적독서나 묵상에 시간을 보내기보다 는 하느님의 성품과 진리를 묵상하면서 보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빛에 의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묵상하면 할수록 나는 사랑스런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갔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하리라고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일하기 전과 다 끝낸후에도 늘 기도시간을 갖습니다. 시작할때는 확신을가지고 "나으 하느님 저와함께 계십니다. 저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외적인 일을 해야만 합니다. 제게 은혜를 내리시어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주님의 현존 안에 있게 하옵소서! 저와 함께 일해주옵소서. 그러면 저의 일은 최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저의 이일과 지금의 모든 감정들은 하느님을 향한 제 사랑의 제물로 받아주소서.
"일을 하는 동안 주님과 쉬지 안호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분이 내 곁에 서 계신것 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심에 감사드리며 일이 끝나면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잘 되었으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혹 흠이 발견되면 용서를 구합니다. 그 분안에 있기에 기가 죽지않는 다고 말합니다. 그분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매일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를 계속하고 살아오는 동안 신발수리하는 수사의 영향력은 커져서 1666념 부터는 정기적으로 수사를 방문했던 전기작가에 말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은 많은 수도자 성직자들이 탐복하였고 " 하느님 안에 머무는 이 겸손한 수사와 대화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전합니다.
전기작는 라우렌시오 수사의 덕행을 이렇게 전하였는데" 라우렌시오 수사는 덕은 높았지만 엄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 허물없이 대했고 신뢰감을 주었으며 무엇이든 터 놓을수 있어서 친구를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은 늘 단순하면서도 적절했고 이치에 맞았습니다. 외적인 투박함을 넘어서서 보통 평수사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수준의 지혜와 자유로움이 있었고 기대를 뛰어 넘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마음씨로만 이루어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라우렌시오수사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 식당에서는 완덕의 길이 낭독되었다. 사모인 성녀가 "주님께서는 냄비 한 복판에도 계신다"고 하신 말씀을 이 주방수사는 기뻐했을 것입니다.
라우렌시오수사의 삶은 너무 단순화되고 하느님의 현존에만 집중하여 하느님만 무한히 흠숭하고 충실하게 추구하고 감미롭게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라우렌시오수사는 거의 침묵하였으며 평수사들은 가르멜수도회가 요구하는 침묵 속에서도 한층 더 그늘에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법적으로도 공동체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은 아주 드문 경우가 아니면 가대 성무일도에 참여하지 않고 주님의 기도를 정해진 숫자만큼 읊었다 그들은 거의 모든 날을 자신의 의무 때문에 아침과 저녁 마음기도를 할 수 없었는데 장상의 지시에 따라 다른 시간에 대부분 밤중에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라우렌시오 수사는 하느님 현존안에 끈임없이 사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에 모든 상황에서 잠시도 그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지혜로운 권고의 원천인 관상을 깊이 살았던 라우렌시오 수사는 50년간을 사랑의 마음으로 수도원 형제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청년시절부터 하느님 사랑가운데 있지 못했던 시절을 후회하면서 후배수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그토록 오래 전부터 계셨으면서도 어쩌면 늘 이렇게 새로운지 나는 그분을 너무 늦게 사랑했습니다. " 수사님들은 나처럼 하지 마십시오, 수사님들은 젊습니다. 나의 이 진실한 고백을 듣고 곡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젊었을 때 하느님 앞에 헌신하는 일을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수사님들은 젊은 시절을 통채로 사랑으로 드리십시오. 나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분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드려지지 않는 시간은 모두 잃어버린 시간으로 간주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는 수련을 하는 습관이 잘되어 있다면, 육신의 불편함이 훨씬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종 우리 영혼을 정화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 머물도록 강권하시기 위해 육신의 질병을 겪게끔 하십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이와 같이 명확하게 말하면서 하느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당신 자녀에게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게 하시는가 하는 귀중한 통찰을 나눈다. 아픔과 고통은 우리를 정화시키고 정련할 수 있다. 근육이 계속 운동해야 쇠약해지지 않듯이 고통과 아픔은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머물도록 하기위해”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점이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해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십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아픔과 고통이라는 방법, 심지어 십자가의 길도 선물이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지요?
라우렌시오 수사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만년에 그는 아주 세심한 의료적인 치료가 필요한 두 가지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병을 이겨낸 후 라우렌시오 수사는 의사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온화하고 유머러스한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에게 잘해주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는 의사를 존중했고, 하느님께서 종종 그들을 통해서 치유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한 젊은 수사가 어떻게 나았는지를 물었을 때, 하느님 현존 수련의 체험과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둘 필요성에 대하여 잠시 동안 나누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편지에서 이러한 생각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분 외에 다른 의사를 구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해하는 한, 하느님께서는 홀로 당신을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신뢰를 그분께 두십시오. 그러면 곧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보다 세상 치료법을 더 신뢰한 나머지 치유를 지연시키곤 합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치료법들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한에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고통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오로지 그분만이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종종 영혼의 병을 고치시기 위해, 우리가 육신의 병에 걸리도록 내버려두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영혼과 육신을 모두 고치시는 의사이신 분과 더불어 위로를 얻으십시오.”(편지 11). “나는 항상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순수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적어도 죽기까지 그분을 사랑하려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이러한 선을 지킬 것입니다.”
25년 동안을 지니고 살아온 지병으로 마지막까지도 말은 정신을 지니고 1691년 2월 12일 77세로 파리의 맨발 가르멜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았습니다.
가르멜 수련기간을 마치고 단순양성과정에 이른 나는 울 회원들의 영적독서를 요약하고 그 뜻을 헤아리는데 넘 놀랍니다. 신앙생활의 경륜과 연륜이 첨가된 훌륭한 영적보고서에 난 늘 긴장합니다. 그러나 가르멜의 영성은 살아내야하는 큰 숙제가 있는 겨코 쉽자 않은 길임을 이해합니다.
종신을 한 지금도 넘 쉽게 가르쳐주신 사모의 마음기도의 정의를 넘 어렵게 이해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하느님의 현존의 현자는 나타날 "현"이 아닌 지금이라는 현재의 의미를 지니 "현"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사모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마음기도의 정의로서 하느님 현존의 시간을 말씀해 주시고 그 것을 살아내기를 권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단 둘이 자주 만나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다'
진정한 사랑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과 자주 이야기를 하며 나누는 사랑을 지닌 마음밭을 지닌 자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가 없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인성으로 우리에게 오신 까닭을 이해하여야 하며 그래야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종신을 했다는 이유가 가르멜 영성을 잘 살고 있다는 삶의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가르멜의 삶은 성소라고 말합니다. 감히 하느님 자녀로 더 기도하는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여 찾은 가르멜산 기도정원에 구석 구석의 모든 숨은 꽃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함께 우리 사모의 마음기도를 하는 가르멜인들이여! 세상을 향한 가톨릭을 사랑하는 이들을 향하여 가슴을 열고 사랑합시다. 그 길이 오늘 우리가 열공하는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의 삶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마음기도의 삶의 자리, 하느님 현존늬 삶의 자리를 살아가는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행복해 지려면 우리 마음속에 고요를 찾아내야 합니다. 침묵해야합니다. 나의 삶의 자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 괴롭다고 느끼는 순간, 화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 순간 순간 마다 우리는 고요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고요속에서 하느님 현존을 만나면 아무리 절박했던 사람들도 마음이 평정되고 밝은 미소를 찾게 됩니다. 하느님현존의 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깊은 경계에 들어가면 오늘이란 선물을 감사드리는 행복을 노래하는 우리 라우렌시오수사님의 평수사로서의 무소유의 삶을 살고 가신 삶의 자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저의 오늘의 하느님현존의 삶의 자리는 어떠할까요? 오늘이란 pres·ent 단어는 지금이란 의미와 선물이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우리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놀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체험, 그랬기에 너무나 큰 그분의 사랑에 머무를 수 있었던 병상에서의 평화의 시간에 감사드리며, 아직은 멀기만 한 가르멜산 등반길을 한걸음 한걸음 오르고 있습니다. 요 며칠 여중생에게 성폭행을 하고 살인까지 한 김길태를 검거가 대단한 뉴스거리입니다. 길에서 태어난 아이를 주워 길렀기에 길태라는 이름으로 성장하였던 그가 그 생명의 소중함과 사랑을 체험하며 성장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지금도 길없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헤메고 있을 또 다른 제2의 제3의 길태를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구보다 나는 하느님의 정의의 잣대가 나의 삶의 자리였는데, 오늘 넘 부족한 것이 많은 나는 가르멜산 길 겨울비속에 만난 나의 모든 이웃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매일의 삶을 산다면서도 당신을 삶을 닮지못한 삶의 자리임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끝자리와 시작이란 시간의 어둔밤을 헤메던 글로 마무리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목자의 휘파람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은 겨울나무 가지 끝 붙어있는 시린 바람
빈 가슴 채우던 사랑의 편린片鱗
최상의 것 최선을 허락 하셨음에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에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없었기에
상심傷心한 별은 나의 가슴에 부숴져 내려 늘 아팠습니다.
무명無明속에 헤메던 자아 가슴 졸이며 인내 해 주신
님의 휘파람
님의 사랑에 깊어지는 감사의 정情.
글 : c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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