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야를 향해>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마태 11,11-15)
“여자에게서 태아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투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참 예언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양성했던 제자들에게
‘바로 저분이시다. 저분을 따라가거라!’라며
제자들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은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며
자신을 끝도 없이 낮췄습니다.
연극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더욱 부각되도록
조연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나타나시자 아주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져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례자 요한처럼
깊은 내적 광야를 향한 우리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편리하고 안이한 삶을 버리고
불편한 삶,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그 삶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점점 성장하시고,
그에 반비례해서 나는 점점 작아지기를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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