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피리를 부시는 하느님>
12월 11일 자비의해 선포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 11,16-19)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
<자비의 해 시작!!>
드디어 하느님 크신 은총의 선물인 ‘자비의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전 세계 모든 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비의 성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교황님,
그 어떤 성인(聖人)들보다도 더 자비로 똘똘 뭉쳐진
자비의 사도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교황님께서는 발길 닿은 곳 마다
외치시는 강론의 요지는 ‘심판보다 자비’입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축복된 자비의 해를 맞이해서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나
고민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비의 대명사이신 복음서 안 예수님을 묵상하시면 됩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자비가 무엇인지 온 몸과 마음으로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계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거수일투족만 유심히 바라보시면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발길 닿은 곳이면
어디든지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존재에게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분의 눈길은 언제나 한 방향입니다.
지금 이 순간 누가 가장 고통 받고 있는가?
오늘 이 시대 누가 가장 뜨거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하셨던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저 말없이 그를 안아주십니다.
조용히 그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아직도 독버섯처럼 우리 주변에 버젓이 자리 잡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로 강조하는 하느님 상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공포와 경악의 대상인 하느님입니다.
그들이 틈만 나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종말의 대홍수요 지진, 전쟁과 싹쓸이입니다.
이렇게 잔뜩 공포분위기를 연출해놓고서는
자기 종교를 믿기만 하면
백퍼센트 구원이요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완벽한 평화를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노력 안 해도 구원 얻는다고 말합니다.
합격, 만수무강, 무병장수를 외칩니다.
가족이고 직장이고 뭐고 소용없다.
지금 남아있는 잔고를 다 챙겨서 자기 교회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백퍼센트 사이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통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결핍 투성이의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서 겪는 갖은 고통과 실패,
우여곡절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고통에 반드시 의미가 있으니,
그 고통 잘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성덕의 길로 나아가자고 가르칩니다.
죄인이어도 괜찮다.
우리 죄가 아무리 진홍빛 같이 붉다하여도 괜찮다.
하느님 자비는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하시니
안심하라고 격려합니다.
고통뿐인 지상생활이지만 이 세상 지나가면 또 다른 세상,
풍요와 은총으로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기도하면서 잘 견뎌내자고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간 존재를 사랑하시는지
이 자비의 해에 꼭 깨달아야겠습니다.
죄인인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연민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반드시 체험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속적으로 베푸시는 자비를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를 인식해야겠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자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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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의무적’으로 강의를 들어야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인생강좌’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치 민방위 훈련 강사가 된 느낌이었지요.
차라리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었습니다.
아무리 ‘생쑈’를 해도 심드렁한 표정, 관심 없다는 얼굴,
소 닭 바라보는 것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렇게 앉아들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냉담함이요 무관심입니다.
차라리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세상 다 산 듯한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처럼 난감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을 위한 ‘생쑈’를 하신 것입니다.
그냥 하느님으로 계셔도 좋을 텐데,
자신을 대폭 바꾸시고 낮추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피리를 부셨고
춤까지 추셨고 곡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시려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
은총과 사랑의 표현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고 있나요?
오늘 나의 행복을 위해 피리를 부시는 하느님,
오늘 내 기쁨을 위해 춤까지 추시는 하느님,
오늘 내 회개를 위해 우시는 하느님.
그분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많은 걸 바라시진 않을 것 같네요.
그저 감사하는 일,
그분과 함께 기뻐하는 일이 아닐까요?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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