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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침묵

[스크랩] 수도승의 사다리 - 귀고2세 수사

 

 

 

 

 

수도승의 사다리 - 귀고2세 수사

 

1. 머리말

 

사랑하는 제르바스 수사에게 귀고 수사가: 주님 안에서 기뻐합시다. 형제여, 형제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1요한 4,10 참조), 저는 형제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답장을 달라고 하셨기에, 제 생각을 써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 수련에 대하여 이론적인 저보다 경험으로 더 잘 알게 된 형제께서 저의 생각을 판단해 주시고(히브 4,12 참조)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우리가 함께 한 작업의 첫 결과를 다른 누구보다 형제에게 먼저 보여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면 형제께서는 어린 나무의 첫 열매들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시편 144,12 참조). 이 나무는 형제께서 고맙게도 파라오의 속박으로부터 몰래 빼낸 것입니다(출애 13,14 참조). 거기에서 이 나무는 홀로 있어야 했으나, 형제께서 훌륭한 나무지기처럼 야생 올리브 나무로부터(로마 11,17; 24 참조) 그 가지를 기술적으로 잘라내어 줄기에 접목시킨 후에는 줄지어 선 나무들 가운데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아가 6,3; 9 참조).


2. 사다리의 네 다리

 

어느 날 분주히 손노동을 하면서 우리의 영적 작업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었는데, 한꺼번에 영적 수련의 네 단계, 곧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이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가 수도승들을 땅으로부터 하늘로 들여 높이는, 수도승들을 위한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다리는 불과 몇 개의 다리밖에 없으나, 그 길이는 막대하고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그 밑은 땅에 놓여 있지만 그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집회 35,21, 창세 28,112 참조) 천상 비밀들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다리의 다리들, 곧 단계들이 각기 다른 이름과 숫자를 가지고 있듯이, 그 단계들은 순서와 질에서도 각기 다릅니다. 누구라도 그 성질과 기능,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 그들 사이의 차이점, 그리고 그들 순서의 중요성 등을 조심스레 묻게 된다면, 문제와 관심이 무엇이건, 그는 이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이것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낼 것이며, 그가 얻은 도움과 위로를 쉽게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읽기란 온 힘을 기울여 조심스레 성서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이성(理性)의 도움을 받아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알고자 노력하는, 마음의 분주한 전념입니다. 기도는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의 열정입니다. 관상은 마음이 위로 드높여진, 어떤 면에서 하느님께 드높여진 상태로, 영원한 기쁨의 단맛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네 단계를 설명했으니, 이들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3. 각 단계의 기능들

 

읽기는 복된 생활의 단맛을 찾고, 묵상은 복된 생활을 이해하며, 기도는 복된 생활을 청하고, 관상은 복된 생활을 맛봅니다. 말하자면, 읽기는 한 입 가득 음식을 넣는 것이고(1고린 3,2; 히브 5,12 참조), 묵상은 그 음식을 씹는 것이며, 기도는 그 맛을 뽑아내고, 관상은 즐거움과 활기를 주는 음식의 단맛 그 자체입니다. 읽기는 외부에서 작용하고, 묵상은 핵심에서 작용하며(시편 80,16; 147,14 참조), 기도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청하고, 관상은 우리가 찾은 단맛 안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이것을 선명히 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도록 하겠습니다.

 

4. 읽기의 기능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마태 5,8 참조). 저는 이 성서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짧지만, 입안으로 던져진 영혼을 살찌울 많은 감각으로 가득 찬 포도처럼, 위대한 단맛에 관한 말씀입니다. 영혼은 이 말씀을 조심스레 살펴보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겠지.” 저는 마음으로 돌아가(루가 15,18 참조) 이 ‘마음의 깨끗함’을 이해하고 찾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순결은 참으로 고귀하고 열망할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차지한 자들은 복되다 일컬어지고, 그 상급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뵈옵는 것이라고 거룩한 성서의 여러 곳에서 칭송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이 마음의 순결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마치도 포도주 틀에 포도를 넣듯, 이 포도를 깨물어 씹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영혼은 이성의 힘을 자극하여 이 고귀한 순결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5. 묵상의 기능

 

묵상이 서둘러 읽기에 응하면 영혼은 밖에 머물지 않고, 중요치 않은 일들에 매이지 않아 보다 높이 오르며, 대상의 핵심으로 들어가 각 요점을 철저히 탐색합니다. 묵상은 성서가 언급하지 않은 것에도 자세히 주목합니다. 성서는 “육체가 순결한 사람은 행복하다.”가 아니라 “마음이 순결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불결한 생각에서 씻겨지지 않는 한, 악한 행실로부터 손을 깨끗이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창세 37,22 참조). 이에 대하여 예언자가 권위있게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시편 24,3-4)이라고 하였습니다. 묵상은 이 예언자가 마음의 순결을 얼마나 열렬히 추구하였는지를 같은 예언자가 한 기도에서 알아냅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소서”(시편 51,10). 또 다른 곳에서는 “나 만일 나쁜 뜻을 품었더라면 주께서는 아니 들어 주셨으리라.”(시편 66,18) 하고 고백합니다. 묵상은 거룩한 사람 욥이 이 마음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였는지 생각합니다. 욥이 말합니다. “젊은 여인에게 눈이 팔려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나는 스스로 약속하였네”(욥 31,1). 이 거룩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지켰는지 보십시오. 헛된 것에 눈을 돌리지 않도록(시편 119,37 참조), 또 그렇게 다짐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결국 욕구하게 될 것들을 혹시라도 보게 되지 않도록, 그는 눈을 내리떴던 것입니다.

 

묵상이 마음의 순결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고 나면, 그 상급에 대하여, 곧 “세상에 짝 없이 멋지신 임금님”(시편 45,3), 더 이상 등을 돌리지도 않고 비참하지도 않으신(이사 53,2 참조), 어머니가 입혀준 지상의 아름다움으로가 아니라 그의 부활과 영광의 날, “주님께서 갚아주신 날”(시편 18,24)에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불멸의 옷을 입으시고 머리에 띠를 띠신(이사 53,2 참조), 그렇게도 그리던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시편 27,8 참조)이 얼마나 영광되고 기쁜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이 상급의 장면은 예언자가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시편 17,15)라고 말하는 그 충만을 어떻게 가져올 지 생각합니다.

 

작은 포도송이로부터 얼마나 많은 포도즙이 나왔는지, 하나의 불씨가 숯불을 얼마나 활활 타오르게 했는지(집회 11,34) 보입니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는 이 작은 금속 한 조각이 묵상이라는 모루에 맞아 어떻게 새로운 측면들을 얻게 되었는지 보입니까? 진짜 전문가의 손이라면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무식한 초보자이기에 “우물이 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이 몇 방울 길어 올리는(요한 4,11) 것도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영혼이 이러한 불붙임으로 밝혀지면, 그리고 이러한 열망으로 그 불꽃이 부채질되면, 영혼은 첫 단맛의 암시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맛을 보지는 못하고, 단지 옥합이 깨어졌을 때(마르 14,3 참조) 후각을 통해서 암시를 받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암시로부터 영혼은, 묵상이 그다지도 가득한 기쁨으로 보여 준 마음의 순결이 실제로 얼마나 달콤할 지(시편 34,9 참조)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찌 해야 합니까? 영혼은 갈망 때문에 지치나 아직 그것이 갈망하는 바를 소유하기 위한 아무런 수단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영혼은 더욱 더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묵상이 긴 그만큼 고통도 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묵상은 보여줄 뿐, 마음의 순결에 속하는 그 단맛을 줄 수는 없으므로 영혼이 그 단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권한을 받지 않는 한”(요한 19,11), 읽기나 묵상 동안에는 이러한 단맛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읽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 철학자들조차도 이성을 사용하여 지고하고 진실한 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기지 않았으며”(로마 1,21), 스스로의 힘을 믿고 말하였습니다. “혀는 우리의 자랑, 제 혀로 말하는데 누가 막으랴”(시편 12,4). 인간은 자신들의 능력이 무엇을 보기 위한 것인지 깨닫는 은총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생각이 허황해져서”(로마 1,21) “그들의 모든 재주가 쓸모 없이 되었습니다”(시편 107,27). 이런 지식으로 그들을 이끈 것은 인간의 배움이지, 홀로 참된 지혜, 말할 수 없는 감미로 영혼 안에 머무시며 영혼을 기뻐 용약하게 하시고, 생기 북돋는 달디단 지식을 주시는 지혜의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지혜에 대하여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지혜는 간악한 마음속에 들지 않는다”(지혜 1,4). 이러한 지혜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하셨지만, 죄사함이라는 세례의 진정한 능력과 권한만큼은 당신 자신에게 남겨두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그가 바로 세례를 베푸실 분”(요한 1,33)이라는 직함으로 부르며 이 사실을 명확히 하였듯이, 우리 역시 그분에 대하여 “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주십니다.”(1고린 12,11)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6. 기도의 기능

 

그래서 영혼은 자신이 갈망하는 지식과 감각의 단맛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과 “마음이 자신을 낮추면”(시편 64,7) 낮출 수록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신다.”(시편 64,8)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기도로 이끕니다; 주님, 오직 마음의 순결로만 당신을 뵈올 수 있나이다. 저는 읽기와 묵상으로 참된 마음의 순결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지를 찾으며, 그 도움으로 당신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습니다. 주님, 제 마음이 당신 얼굴 뵈옵기를 바라며(시편 27,8) 얼마나 더 오래 묵상해야 하나이까?(시편 77,17 참조) 제가 바라는 것은, 주님, 당신을 뵈옵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내내 갈망의 불길, 당신을 좀더 완전히 알고자 하는 열망이 커집니다. 당신께서 제게 거룩한 성서의 빵을 쪼개어 주실 때(루가 24,30-31 참조), 그 빵의 나눔에서 당신을 보여주셨나이다(루가 24,35 참조). 하오나 당신을 뵈오면 뵈올 수록 더욱 더 당신을 뵈옵기 원이옵고, 더 이상 그 외의 것, 글자 표면의 것을 원치 않나니, 그 글자 뒤에 숨겨진 의미를 원하나이다. 또 저 자신의 공로를 위하여는 더 이상 이러한 것을 청하지도 않나니, 주여, 오직 당신의 공로 때문에만 청하나이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지 않습니까?”(마태 15,27)라고 한 여인처럼, 저 역시 저의 무가치함과 함께 제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가 상속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어떤 보증을 주소서. 제 목마름을 적셔줄 하늘의 비를 한 방울만이라도 내려주소서. 제가 사랑의 불길에 타고 있기 때문이옵니다(루가 16,24; 아가 2,5 참조).

 

7. 관상의 효과

 

이렇게 영혼이 타는 말씀으로 자신의 갈망을 불태우고 그러한 상태를 알게 되면, 그 매력에 의해 영혼은 자기의 신랑을 불러 찾습니다. 그러나 의인을 돌아보시고, 부르짖는 소리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이의 바로 그 원의까지도 들으시는 주님께서는(시편 34,16; 1베드 3,12 참조) 갈망하는 영혼이 이 모든 말을 다하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시며, 영혼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의 한가운데를 쪼개어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십니다. 하늘스런 달콤한 이슬을 뿌리시며, 가장 고귀한 향수로 기름을 바르시고 달려오시어 지친 영혼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시고, 그 목마름을 만족시켜주시며,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영혼이 지상의 모든 것을 잊도록 해 주십니다. 영혼이 그 자신에 대하여 죽게 하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영혼에게 새 생명을 주시며, 취하게 하시어 참된 감각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욕망에 정복당한 나머지 이성의 사용을 모두 잊고 완전히 육체만 남게되는 육체의 기능들처럼, 드높여진 관상에서는 반대로 모든 육체적인 동기들이 온전히 뽑혀지고 영혼에게 정복되어 육체가 영을 거스를 수 없으며, 사람은 말하자면 완전히 영적으로 됩니다.

 

8. 은총이 내리는 표시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때를 저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당신이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마태 24,3 참조) 한숨과 눈물이 이 위로와 기쁨의 사자(使者)와 증거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위로라는 말은 보통의 의미와는 반대인,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볼 때 위로와 한숨이 무슨 관계가 있으며, 기쁨과 눈물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정말로 이들을 내적 정화를 표시하는 외적 정화, 하늘로부터 쏟아져 흘러 넘치는 풍성한 영적 이슬이 아니라 눈물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세례에서 외적인 씻김으로 내적 정화가 보여지고 표시되는 것과 똑같이, 여기서는 거꾸로 내적 정화로부터 외적 씻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의 눈물이며, 이 눈물로 우리의 내적 오점들이 정화되고, 이 눈물로 우리 죄의 불길이 꺼지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5). 네가 그다지도 눈물이 날 때, 내 영혼아, 네가 그토록 찾던 신랑을 알아보고 그를 껴안아라. 이 엄청난 기쁨의 홍수로 취하고(시편 36,8 참조), 그 젖에서 위로의 젖과 꿀을 빨아라(이사 66,11 참조). 네 신랑이 네게 가져다 줄 놀라운 상급과 위로는 흐느낌과 눈물이로다. 이 눈물은 그분이 네게 마시라고 주는 부드러운 생수이다(시편 80,5). 이 눈물이 밤낮으로 너의 빵이 되게 하여라(시편 42,4 참조). 이 빵은 사람의 마음에 생기를 돋우며(시편 104,15 참조), 꿀보다도 송이꿀보다도 더 달도다(시편 19,10 참조). 오 주 예수님, 당신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에서 오는 이 눈물이 이렇게도 달다면, 우리가 당신의 얼굴을 마주 뵈올 때, 그 기쁨은 얼마나 더 달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다지도 달다면, 당신 안에서 기뻐 용약하는 것은 얼마나 더 달겠습니까? 은밀하게 말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왜 공공연히 말하는 것입니까?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을 왜 통속적인 언어로 표현하려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또한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몸소 가르치시는(1요한 2,27 참조) 경험의 책을 통해서만 이것들은 보다 분명히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상의 책에서 찾으려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 감춰진 내적 감각을 열 수 있는 주해서가 없는 한, 문학적 연구만으로는 이 단맛을 전혀 느낄 수 없나이다.

 

9. 은총이 감추어져 있는 방법

 

오 내 영혼아,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 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머문 것은 잘한 일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신랑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잠시 머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여기에 두 개, 세 개의 장막이 아니라(마태 17,4 참조) 우리 모두가 들어가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장막을 짓는 것이 그분의 뜻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신랑께서 말씀하신다. “동이 밝아 오니 이제 그만 놓아라”(창세 32,26). 너는 이제 네가 바라던 은총의 빛과 방문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환도뼈의 힘줄을 상하게 하시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신(창세 32,25-32 참조) 다음, 당신의 축복을 주시며 잠시 물러가신다.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랑이 그렇게도 빨리 가신다. 방문이 끝났으므로 그분은 가신다. 그분이 가심과 함께 관상의 단맛도 간다. 그러나 아직 머무르신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며, 우리를 당신과 하나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10. 언제, 어떻게 은총이 감춰지나­은총은 잠시동안 우리 안에서 선을 위하여 일한다

 

그러나 아주 잠시동안 그분이 네게서 얼굴을 돌리신다고 두려워 말라, 신랑의 신부여. 절망하지 말고, 쓸모 없는 존재라 생각지 말라. 이런 일은 너의 선익을 위하여 모두 함께 작용하나니(로마 8,28 참조), 너는 그분의 오심과 물러가심에서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분은 네게로 오시고, 그런 다음 또 떠나가신다. 그분은 네게 위로를 주러 오시고, 너를 네 자신에게 맡기려 물러가신다. 너무 많은 위로가 너를 들뜨게 할까 두려워하시기 때문이며(2고린 12,7 참조), 신랑과 언제나 함께 있음으로 너의 형제들을 멸시하고, 또 이 위로가 그분의 은총이 아니라 자연인인 너의 능력으로 생각할까 두려워하시기 때문이다. 신랑께서는 이 은총을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신다. 이 은총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친숙함은 불명예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물러서시어, 너무 친밀하다는 조롱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부재하심으로 더욱 갈망되시고, 갈망 받으심으로 그분께서는 더욱 열절히 찾음 받으신다. 찾음을 받으심으로 그분께서는 마침내 더 큰 감사로 찾아지신다.

 

그리고 또 우리가 이 위로의 결핍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이 위로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로마 8,18) 미천한 그림자와 파편 조각에 불과함에도(2고린 13,12), 이 땅 위에 영원한 고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영원한 생명을 덜 찾게 될 것이다(히브 13,14 참조). 그러므로 현재의 이 유배를 우리의 진정한 고향으로, 이 표시를 우리가 받을 상급의 전체로 간주하지 않도록, 신랑은 오시고 또 물러가신다. 지금은 위로를 가져오시고, 이제는 또 이 모든 것을 약함으로 바꾸신다(시편 41,4 참조). 잠시 동안 당신이 얼마나 달으신 지 맛보게 하시고(시편 34,9 참조), 우리의 입맛이 만족하기 전에 떠나가신다.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펴시어 우리 위를 날으시면서, 우리도 날 수 있도록 부추기시며(신명 32,11 참조) 말씀하신다; 자, 보라. 너는 내가 얼마나 달으며 즐거운지 조금 맛보았다(1베드 2,3 참조). 그러나 만일 네가 이 단맛으로 배를 채우고자 한다면, 향내나는 내 달콤한 향수로 목욕을 하고(아가 1,3) 급히 나를 따르라. 성부 오른편, 내가 있는 곳으로 네 마음을 들어높이라(사도 7,55 참조). 거기서 너는 나를 보게 되리라(요한 16,19). 거울에 비추어보듯 희미하게가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고 볼 것이다(1고린 13,12). 그러면 “네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11. 은총의 방문을 받은 다음 영혼은 자신을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가?

 

그러나 조심하라, 신랑의 신부여. 그분이 떠나실 때, 멀리 가지 않으시리라. 네가 그분을 보지 못하더라도, 너는 언제나 그분의 눈길 아래 있나니. 그의 눈은 사방에 있다(에제 1,18 참조). 어디에서든 그분으로부터 숨지 못하리라. 그분은 당신의 사자(使者)들로 너를 둘러싸시기 때문이다. 이 영들은 그분께서 안 계실 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고 빠르게 보고할 것이며, 만일 네 안에서 부정함과 고약함의 어떤 표시라도 발견하면 그분께 너를 고발할 것이다. 그분은 질투하는 신랑이시다(출애 34,14). 만일 네가 그분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기쁘게 하면서 그와 더불어 그분을 조롱한다면, 그분은 당장에 너를 떠나실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실 것이다. 이 신랑은 까다로우신 분, 그분은 고귀한 출신이시며, 부요하시고, “세상에 짝 없이 멋지신 임금”(시편 45,2)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정숙치 않은 신부를 황공하옵게도 맞아들이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네 안에서 어떠한 티나 주름이라도 발견하신다면(에페 5,27 참조), 그분은 당장에 너로부터 떠나시리라(이사 1,15 참조). 그분에게는 어떤 종류의 부정함도 가당치 않나니, 그러므로 네 신랑의 방문을 종종 즐기고자 한다면, 순결하라. 참으로 정숙하고 유순하라.

 

이것에 대하여 형제에게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걱정됩니다. 하지만 풍부하고 달은 제 묵상이 저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고의적으로 그것을 끌어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의 달콤함이 제 의지를 거슬러 저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였습니다.

 

12. 요점의 반복

 

이제 종합하는 뜻으로 이제까지 우리가 길게 이야기 해 온 바를 한 데 모아 보도록 합시다. 이것을 한꺼번에 봄으로써 좀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가며 이제까지 함께 보아온 것으로부터 형제께서는 각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과관계 안에서도 하나가 다른 것에 앞서 이루어집니다. 읽기가 제일 먼저 오고, 말하자면 기초가 됩니다. 읽기는 묵상에 사용할 주제를 제공합니다. 묵상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게 합니다. 묵상은 보물을 찾아 열어보기(마태 13,44 참조) 위하여 땅을 팝니다(시편 2,4). 그러나 보물을 얻는 것은 묵상의 힘으로가 아니기 때문에, 묵상은 우리가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온 힘을 다해 그 자체를 들어올리고, 기도가 열망하는 보물, 곧 관상의 단맛을 구걸합니다. 위의 세 노력의 상급으로 주어지는 관상은 천상의 단 이슬로 목마른 영혼을 취하게 합니다. 읽기는 외적 감각에서의 수련이고, 묵상은 내적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도는 갈망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상은 모든 기능을 초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초보자에게 합당하고, 두 번째 단계는 숙련된 사람들에게 합당하며, 세 번째 단계는 열성적인 사람들에게, 네 번째 단계는 축복 받은 자에게 합당합니다.

 


 

13. 이러한 단계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러한 단계들은 동시에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각 단계는 다른 단계를 위하여 작용합니다. 마지막 단계가 없다면 첫 번째 단계는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반면 첫 번째 단계 없이 마지막 단계에는 거의,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씹고 소화하여 영양분을 추출해 내고 그 힘을 가장 깊은 심장으로 옮길 수 없다면, 거룩한 사람의 삶과 말씀의 책장들을 계속하여 넘기며 읽는 것에 시간을 보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로지 그렇게도 열심히 읽은 삶을 우리 자신의 행동에 반영하고, 그들의 모범으로부터 우리 영혼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서가 아닙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읽고 들은 것을 통해 먼저 이러한 것들로 인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당히 생각할 수 있으며, 잘못되고 한가한 주제에 대한 묵상을 피하고, 우리의 거룩한 선조들이 놓은 기초를 넘지 않을(잠언 22,28 참조) 수 있겠습니까? 듣기는 일종의 읽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읽거나 우리가 남에게 읽어 준 책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읽어준 책들도 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만일 그가 묵상 안에서 도달해야 할 것을 보았다고 한들 하느님의 은총과 기도가 그것을 성취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야고 1,17)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일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일꾼들”(1고린 3,9)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당신께 기도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의 은총이 내려와 우리 문을 두드릴 때(묵시 3,20), 기꺼이 그분께 마음을 열어 응답하라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요한 4,16)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 이 여인에게 요구하신 것이 바로 이 응답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도 “나는 너를 은총으로 채우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기도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요한 4,10). 이 말씀을 들으면, 마치도 주님께서 그 말씀을 여인에게 읽어주셨고, 여인은 이 물을 얻으면 유용하고 좋을 것이라고 속으로 이 말씀을 묵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인은 이 물에 대한 갈망에 타서 기도의 소재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요한 4,15). 당신은 여인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런 다음 그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에 기도로 옮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여인이 자신의 소원을 간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먼저 묵상으로 불타 올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만일 뒤이은 기도로 그녀가 갈망하도록 보여준 것을 청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묵상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 열매를 맺으려면 열심한 기도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관상의 단맛은 기도의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 이제껏 말한 것으로부터의 몇 가지 결론들

 

이것으로 우리는 묵상이 없는 읽기는 아무짝에 쓸데없으며, 읽기 없는 묵상은 자칫 잘못될 수 있고,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뜨거운 기도는 관상을 쟁취하지만 기도 없이 관상에 도달한다는 것은 기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끝이 없으며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그분의 다른 모든 업적을 능가합니다. 그분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의 소유자들과 마지못해 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따르도록 밀어붙이실 때, 그분은 간혹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마태 3,9 참조). 또 초대받지 않은 곳에 들어가시거나 당신을 찾지 않는 영혼에 머무실 때, 그분께서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행동하시어, 비유에서처럼 송아지를 잡아주십니다. 이런 일이 이따금씩, 예를 들어 성 바오로와 같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일어났다고 들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가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을 유혹하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합니다. 하느님의 법에 대하여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약함을 도와 주십사(로마 8,26 참조), 우리의 허약함을 친절히 보아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마태 7,7)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해야할 바를 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왔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 하기”(마태 11,12)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의로부터 형제께서는 각 단계의 다양한 자질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자질들이 우리 안에서 어떤 효과들을 자아내는지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 이 사다리에서 결코 발을 떼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토록 갈망하는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밭을 산 것입니다(마태 13,44 참조).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주님께서 얼마나 달으신 분이신지 보기를 원합니다(시편 34,9; 45,11 참조). 첫 번째 단계에서 작업을 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 잘 묵상하였으며, 세 번째 단계에서 열정을 알게 되었고, 네 번째 단계에서 자기 자신 위로 들여 높여진 사람은 마침내 시온산에서 만군의 하느님을 뵈올 수 있을 때까지(시편 84,7) 자기의 마음을 모두 쏟은 이 오름을 온 힘 다해 따라갈 것입니다. 아주 잠시 동안이라 할지라도 이 최고의 단계에 머물도록 허락 받은 이는 복되도다. 진실로 그는 말할 수 있으리라; “이제 나는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노라. 이제 나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산 위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노라. 이제 나는 야곱과 함께 사랑스런 라헬의 품안에서 기뻐하노라.”

 

하늘까지 들여 높여진 이런 관상을 체험한 뒤 깊은 심연으로 거칠게 던져지지 않도록, 그다지도 커다란 은총을 체험한 다음 세상의 죄스런 쾌락과 육체의 즐거움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은총을 체험한 사람을 경계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눈이 참된 빛의 광채를 오래 견딜 수 없으므로, 이제 올라갔던 것을 도구 삼아 세 단계의 어떤 순서에 따라 부드럽게 영혼이 내려오게 합시다. 시간과 장소의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하여 한 단계 안에서, 아니면 또 다른 단계 안에서 쉬게 합시다. 영혼이 첫 번째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올라온 하느님 성부와 아무리 친밀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바로 인간 본성의 연약함이요, 비참함이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복된 생활의 완전함이 이 네 가지 단계에 담겨 있으며, 영적인 사람은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성서의 증언과 이성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가 그를 칭송하리라”(집회 31,9). 이러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이루는 사람은 적습니다(로마 7,18 참조). 그 적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끼어 있습니까?


15. 이 단계들의 네 가지 장애

 

이 세 단계에는 보통으로 네 가지 장애가 있는데, “불가피한 필요, 활동생활을 위한 착한 일들, 인간적 약함, 세속적인 어리석음”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는 용서될 수 있고, 두 번째는 참을 수 있으며, 세 번째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나, 네 번째는 비난받습니다. 정말 비난합시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표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알면서도 발길을 돌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은총을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낫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요한 15,22 참조)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정의롭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이사 5,4) 네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 너를 창조하였고, 네가 죄를 지어 악마의 노예가 되었을 때 너를 구해 주었으며, 세상의 사악한 자들과 어울릴 때(시편 10,9) 멀리서 너를 불러내었다(이사 43,7-11). 내 눈에 네가 사랑스러웠고, 너와 함께 살기를 원했는데(요한 14,23 참조), 너는 내게 모욕밖에 주지 않는구나. 네가 거부한 것은 내 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며, 네 자신의 욕망에 넘어가 나에게서 오히려 멀어져 갔다(시편 50,17; 집회 18,30).”

 

그러나 오 나의 하느님, 너무도 착하시고 너무도 부드러우시며 친절하신 분, 다정한 친구, 현명한 변호사, 막강한 지지자시여. 그 마음으로부터 당신을 거부하는 자, 이다지도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손님을 쫓아버리는 자는 얼마나 무정하며 얼마나 지각이 없나이까! 성령의 내적 궁방을 열기가 무섭게 그다지도 빨리 자기 창조주를 악하고 해로운 생각에 팔아 넘기다니, 얼마나 비참하고 파멸을 초래하는 거래입니까? 방금 마음의 비밀스런 장소는 천상 기쁨으로 메아리치지 않았습니까? 부정한 생각에 이 궁방을 돼지우리로 만들다니!(마태 7,6) 간통의 욕망은 신랑의 발자국이 아직 선명히 보이는 마음에 압박을 가합니다.

 

그렇게도 방금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면서도(2고린 12,4 참조) 그렇게도 빨리 한가하고 꾸며낸 이야기에 빠져든 귀(2디모 4,4 참조)는 얼마나 병들었으며 얼마나 보기 흉합니까? 그렇게도 방금 거룩한 눈물로 정화되었건만 그렇게도 빨리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시선을 돌린 눈은 얼마나 병들었으며 얼마나 보기 흉합니까? 신랑의 오심을 환영하는 달콤한 노래가 아직 채 끝나기도 전에, 타는 듯이 호소하는 웅변으로 신랑과 신부를 평화로이 하기도 전에, 연회석에서 그녀에게 인사했던(아가 2,4 참조) 그 입이 거짓스런 이야기에, 상스러움에, 비방과 중상모략에 넘어가다니!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인간의 약함 때문에 떨어져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결코 그 때문에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올리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끌어 내리시리이다(시편 113,17). 죄인의 죽음을 결코 원치 않으시는 분께서(에제 33,11 참조) 다시 또 다시 우리를 고쳐주시고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호세 6,2).

 

편지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를 짓눌러 관상 안에서 그분을 바라 뵙지 못하게 하는 짐을 가볍게 해 주시도록, 어느 날엔가 그 짐을 모두 치워주시도록 함께 주님께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만군의 하느님을 시온산에서 뵙게 될 때까지(시편 84,8 참조), 이러한 단계들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기도합시다. 거기에서 당신의 선택된 자들은 신적 관상의 단맛을, 단지 몇 방울만이 아니라, 가끔이 아니라,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요한 16,22 참조)의 그침 없는 흐름으로, 변함 없는 평화, 하느님의 평화(시편 4,8)를 즐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제르바스여, 당신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사다리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오르는 행복을 얻게될 때, 저를 기억해 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하느님 사이의 성막(출애 26)이 치워질 때, 저도 역시 그분을 뵈옵고,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게 하십시오”(묵시 22,17).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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