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12장. 감각의 수동적 밤
영혼이 피조물들에로 향하는 모든 애착을 스스로 정화(淨化)시키고 오로지 신덕(信德)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했음을 하느님께서 보시면, 당신께서는 영혼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신 친히 영혼을 정화(淨化)시키러 오신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중요시하시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가장 깊고 무미건조한 심연 속으로 영혼을 던지시고, 영혼으로부터 모든 위로를 거두신다.
이 무미건조함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 전에는 영혼이 열성적으로, 그러면서도 쉽게 기도를 했으나, 이 때는 오히려 영혼은 단 한 가지의 생각도, 또 하느님을 향하는 단 한 가지의 애정도 만들 수 없게 된다.
-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비참하고 죄스러운 존재이며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만 보이게 된다.
- 또, 전에는 자신의 의무나 애덕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이 이룰 수 있었던 선행(善行)들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쓸모없고 비겁한 인간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런 내적(內的)인 변화는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앞서 말한 그 무미건조함에 의해 직접적으로 일어나거나, 혹은 질병(疾病)과 같은 고통스런 사건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어떤 실패나 혹은 또다른 불행한 사건들 때문에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영혼은 심하게 또 고통스럽게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애착으로부터 억지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 영혼은 실재(實在)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시각(視覺) 새로운 비젼(vision)을 자신에게 요구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하느님만이 문제가 된다.
처음에는 이 체험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또 여기에 도달할 때 영혼은 정말 대단히 놀라게 된다. 피조물들 안에서 얻고 있던 위안을, 여러 해 동안 끊어버리려고 애써온 그 위안들을, 영혼 자신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돌아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확실히 이 체험은 영혼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수동적인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체험은 조금씩 조금씩 영혼이 전에는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내적(內的)인 위로와 빛의 근원이 된다.
성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사랑깊은 어머니가 사랑스런 어린 아이에게 하듯이 그렇게 영혼에게 행동하신다. 처음에 어머니는 어린 아이를 팔에 안아주고 쓰다듬어준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서, 아이로서의 결점들을 버림으로써 그로 하여금 더 위대한 일들 더 본질적인 일들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제 발로 걷게 만든다."[71]
이 시련을 겪어낸 영혼도 마치 그 아이처럼 모든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 영혼은 어머니 팔의 도움이 없이, 즉 전에 자신이 즐기던 하느님의 위로들 없이, 또 아직 연약하고 걸을 능력이 없는 자신의 두 다리의 도움도 없이, 자신 안에서 모든 감성적(感性的) 위로를 고갈시키는 혼란스럽고 괴로운 상태 안에 있게 된다.
"이러한 밤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는 심각한 감각(感覺)의 유혹과, 영혼의 모든 개념(槪念)과 명항(暝想)들을 꿰뚫는 불경스러운 영(靈)의 유혹을 -그런 것들을 발설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힘과 함께- 동반하거나, 또 어떤 때에는 영혼이 세심증(細心症)과 의심 따위, 이 밤의 공포를 더 심하게 하는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지기도 한다."[72]
'순교자들의 엘리세오 신부' (Padre Eliseo de los Mártires)에 의해 수집된 '영적 권고들'에서, 성인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들을 실천함으로써 이 유혹들에 대항할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육욕(肉慾)이나 분노나 조바심이나 복수심 따위의 무슨 악심(惡心)의 첫 충동 혹은 첫째 공격을 받으면, 그와 반대되는 덕행(德行)으로 저항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느끼자마자 우리 마음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들어높이면서 사랑의 움직임과 행위로 그것을 대면해야 한다. 사실, 영혼은 그런 위험한 상태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 앞에 서게 되기 때문에, 이 영혼의 '들어높임' 덕분으로 영혼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루게 되고, 유혹은 잠잠해지고 원수는 낙담한 채로 다시는 공격할 상대를 얻지못하게 된다."[73]
이 정화(淨化)시키는 무미건조함은 주로 기도 중에 나타난다. 전에는 영혼이 거룩한 일들을 생각하면서 기쁨 중에 묵상을 잘 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결과인 감동(感動)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영혼이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영적(靈的)인 명상(暝想)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이시련 앞에서 영혼은,
- 피조물들이 그에게 제공하는 위로들에로 되돌아가기를 거절하고,
-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를 갈망하게 되며, (영혼이 그 안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처럼 그 일을 실행하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에),
- 계속 규칙적으로 또 열심히 기도에 열중하게 된다. 그런데도 무미건조함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그것은 그 시련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증거이고, 따라서 그것은 새롭고 더욱 완전한 하느님과의 관계에로 영혼을 인도하는, 축복받은 무미건조함,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수동적(受動的) 관상(觀想)의 무미건조함이라는 증거가 된다.[74]
13장. 수동적 관상
위험스런 오해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서 무미건조함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시는 그 '수동적(受動的) 관상(觀想)' -혹은 '감각의 수동적 밤'- 은 우리가 이미 10장에서 말한 그 '능동적(能動的) 관상(觀想)'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능동적 관상'은 묵상(默想)의 완성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 각자의 합당한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무미건조함이 앞서거나 동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수동적 관상은 묵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부터 일어난다. 이는 영혼이 이런 상태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수동적 관상은 특히 가장 심각한 무미건조함 안에서 일어나고 발전되는데, 말하자면 모든 감각적 위로의 '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경험에 있어서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동시에 확인되어야만 하는 세 가지 징표들을 열거한다:
- 첫째로, 영혼은 자신이 이제 더이상 묵상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이제 더이상 상상이나 추리를 통해서 어떤 것에서 다른 어떤 것에로 분주하게 돌아다닐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영혼이 상상이나 추리의 과정으로부터 열매를 얻어낼 수 있는 동안에는, 묵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 둘째로, 묵상을 할 수 없게 된 영혼들은, 다른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거나 그런 것들로부터 어떤 맛을 느끼려는 욕구마저도 갖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따끔 자기 탓 없이 고통스럽게 상상력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님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의 맛을 즐기던 상태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얻던 온갖 재미들을 느끼지 않게 된다.
- 셋째 징표이자 가장 확실한 징표로서는, 영혼이 특별히 어떤 것을 심사숙고함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돌아다님도 없이, 사랑스럽고 보편적인 조심성과 내적(內的)인 평화, 그리고 고요함과 안식 안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맛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75]
이 '즐거움'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각은 하느님에 의해 가장 극심한 무미건조함 안에 놓이게 된다- 성인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바와 같이 영적(靈的)인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하도록 하자:
"이런 상태가 시작되는 처음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인식(認識)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 이런 안식의 상태 - 즉, 온갖 추리의 정지상태-에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스럽고 보편적인 이 인식(認識)이 영혼 자신 안에서 더욱 성장되고, 이 안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사물들 안에서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아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認識)이 그에게 평화와 안식과 위로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76]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수동적 관상'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가끔, 아무 것도 행함이 없이, 즉 특별한 어떤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함이 없이, 오로지 받아들이는 일에만 사로잡혀서, 자신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이 눈길에 빠져 있게 된다. 반대로 또 어떤 경우에는, 이런 조심성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영혼이 추리작용의 힘을 빌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런 일은 감미롭고 온화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때에는, 다른 어떤 것을 느끼려고 하거나 보려고 함이 없이, 오로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77] 그렇지 않으면, 화가(畵家) 앞에서 자세를 취하면서도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임으로써 오히려 그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혼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작용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78]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에게 하느님은,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의 열린 눈에 빛이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 들어가신다…. 영혼은 오로지 다른 인식(認識)과 추리작용을 개입시키지 않는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온전한 헐벗음과 영(靈)의 가난 안에 머무르면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단순하고 순수한 지혜 안에 스스로 변모될 것이다."[79]
성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영혼은 -비록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지성(知性)을 잠잠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눈길 안에 머무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휩싸인 거룩한 안식과 평화는 하느님의 오묘하고 숭고한 인식(認識)과 함께 조금씩 그러나 신속하게 주입될 것이다."[80]
14장. 전이(轉移)의 단계
영혼이 '감각의 밤'을 벗어나면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은 영혼을 훨씬 더 끔찍한 정화(淨化)인 '영(靈)의 밤' 안에 두시기 전에, 영혼에게 대단히 긴 안식과 위로의 단계를 허락하신다.
이 전이(轉移)의 단계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될 수 있고…, 그동안 영혼은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지치는 일도 없이 아주 쉽게 고요하고 사랑 가득한 관상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내적(內的)인 즐거움은 영혼이 이 단계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영(靈) 안에서 맛보게 되는데, 이 내적(內的)인 즐거움은 감각들에까지 미치게 되고, 이 감각들은 전보다 더욱 정화(淨化)되면서 내적(內的)인 맛들을 더 쉽게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아직 정화(淨化)가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영(靈)의 정화(淨化)가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에-, 영혼은 여러 가지 시련들과 무미건조함, 유혹들과 어두움들, 그리고 때로는 전에 당했던 것보다도 더 심한 괴로움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은 겨우 몇 시간 혹은 몇 일 동안 계속되면서, 앞으로 닥쳐올 '영(靈)의 밤'을 예고해줄 뿐이다.[81]
이 시기 동안 영혼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길에서 자신을 엄청나게 후퇴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잘못 -즉, 이제는 자기가 성인(聖人)이라고 착각하는 환상-에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들과 그때까지의 일상적인 은혜들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있어서 사랑의 순수함 안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냉혹하리만큼 강하게 영혼을 현실에로 되부르는 이유이다. 영혼의 온갖 노력들과 영혼이 받은 갖가지 은혜들은, 가장 큰 장애물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소극적인 방식으로 영혼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준비시킬 뿐이다. 실제로, '감각의 수동적 밤' 안에서 감각적인 집착들은 겉으로만 정화(淨化)되었을 뿐, 영혼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집착의 깊은 뿌리들은 아직 남겨두고 있다. 피조물들에서 연유한 즐거움에 대한 온갖 집착의 가지들을 갑자기 다시 움트게 할 수 있는 이 뿌리들은, 이제 곧 이어질 대단히 끔찍스러운 '영(靈)의 수동적 밤'에 의해서만 완전히 뽑힐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 동안에 많은 영혼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聖人)들의 시현(示現,vision)이나 그분들과의 통교(通交,communication)에 지배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때로는 사실일 수도 있으나, 더 많은 경우에 이런 체험은 악마로부터 혹은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이다.[82]
이렇게 해서, 이제는 성인(聖人)이라는 환상은 영혼들 안에서 더 강해지고, 인간미(人間美)나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영혼들을 끌고간다. 그런데 사실상 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敬畏心)이야말로 '모든 덕(德)들의 열쇠이자 보호자'이다.[83]
이러한 현상들 앞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방법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멜의 산길' 2권에서 싫증이 날 정도로 되풀이하는 바로 그 방법이고, 요약하자면 고해신부들에게 의지하는 방법이다.
"고해사제들은 이 영혼들을 조심스럽게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즉 그런 시현(示現,vision)들로부터 돌아서게 가르침으로써, 또 그런 일들의 경우 완덕(完德)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욕(慾)과 영(靈)을 발가벗김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신앙에로 들어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고해사제들은 영혼들에게, 사랑으로 실천되는 의지(意志)의 어떤 활동이나 행위가 그런 모든 시현(示現)들이나 천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통교(通交,communication)들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과, 이런 특별한 은혜를 누리지 않는 많은 영혼들이 이런 은혜를 넉넉히 누린 영혼들보다도 영적(靈的) 성장에 있어서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84]
성인은 '가르멜의 산길' 3권에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영혼은 모든 시현(示現)이나 말씀(locution)이나 계시(啓示)들 자체를 중요시하지 말고, 그것들이 영혼 자신 안에 불러일으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중요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혼은 그런 맛이나 감미로움이나 모양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사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85]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바로 Nada와 Todo, '무(無)와 전(全)'이라는 교의(敎義)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적나라한,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의 훈련 한가운데에 와 있다. 하느님 앞에서는 다른 것들은 모두 가치가 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영혼을 그가 '영(靈)의 밤'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이 지점에 다다르도록 이끌어주시고, 여기서 하느님은 유일한 안내자(案內者)인 -영혼에게는 어둡게 보이지만 사실상 너무나 확실한- 신앙(信仰)의 등불을 영혼에게 남겨주신다.
15장. 영의 수동적 밤
'감각(感覺)의 수동적(受動的) 밤'을 거치는 동안에 영혼은, 감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미건조함 안에 있었지만, 영(靈) 안에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자기 편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깊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영혼을 '영(靈)의 수동적 밤'에 두기로 결정하시는 때에는, 그 영혼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위로까지 떼어내시고 정화(淨化)시키시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마저도 그 영혼에게서 빼앗아버리신다. 하느님은 이렇게 해서 그 영혼에게 지극히 순수한 사랑, 당신과의 합일(合一)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사랑을 갖출 수 있게 하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의 밤이 감각에게 있어서 쓰라리고 무서운 것이었다면, 영(靈)의 밤은 거기에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는 이 밤이 영(靈)에게 있어서 정말 끔찍하고 지독한 것이기 때문이다."[86]
그런데, 이 두번째 밤은, 첫번째 밤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나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첫번째 밤 이후에도 감각적(感覺的)인 집착의 뿌리들이 남아있다- 하느님과의 전적(全的)인 합일(合一)에 있어서 큰 장애물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기로 하자. 하느님은 영혼 안에 당신께 대한 '깜깜한 관상(觀想)'을 부어주시는데,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자신이 행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또 이런 상태가 자신에게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完全性)을 대면(對面)하게 된다.[87]
이 '깜깜한 관상(觀想)' 혹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가득한 지혜' 안에서 -천상(天上)의 성인(聖人)들을 비추고 있는 바로 이 지혜안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추함·더러움·무가치함을 발견한다.
이는 영혼에게 충격을 주고 영혼을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넣는다. 무한한 빛이 영혼을 눈멀게 하기 때문에, 또 영혼 자신이 얼마나 불순하고 가련한지를, 하느님께서 영혼 자신과는 얼마나 다르시고 영혼 자신은 얼마나 하느님과 어긋나고 있는지를 영혼이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여기서 영혼은 암흑과 절망 속에 던져넣어진다.
영혼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당연히 하느님께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 내쫓김을 당해 영원히 그분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88] 이 체험은, 마치 지옥의 고통과도 같은 엄청난 아픔이다.
게다가, 영혼은 마치 자신이 지옥에 들어선 것처럼 자신이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당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89]
이 밤 안에서 영혼을 우울하게 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아픔은, 기도할 수 없는 자신의 상태이다. "비록 가끔 영혼이 기도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기진맥진한 채로 아무 맛도 없는 상태로,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느끼면서 기도를 하게 되고, 도대체 기도를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90]
때때로 영혼은 자신의 일들에조차 몰두할 수 없게 되고, 정신적인 면에서의 무감각 상태나 기억상실에 깊이 빠져서,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자기가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오랜 시간을 흘려버릴 정도의 그런 상태에 있게 된다.[9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깜깜한 관상(觀想)'은 특별히 좋아할 만한 선물이고, 하느님께서는 이 선물을 통해서 마치 불이 녹을 태워 없애듯이 영혼을 태워버리고 영혼을 비우고 온갖 집착과 평생 간직해온 불완전한 버릇들로부터 영혼을 정화(淨化)시키신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저승에서 참아받아야만 하는 연옥의 고통을 지금 겪게 하시는 것이다.[92]
그리고, 이 집착들은 영혼의 중심에 아직 남아있고 영혼과 뒤섞여있기 때문에, 마치 용광로 속에 있는 금처럼 영혼 자신이 타없어지고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다.[93]
이와 같은 고통들로써, 하느님은 영혼을 대단히 겸손해지게 하시는데, 이는 오로지 영혼을 더 높이 들어올리시기 위함이다.[94]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더 높이 들어올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만큼 그 영혼을 더 겸손해지게 하신다.[95]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제기된다: 이 끔찍한 '영(靈)의 밤'은 일반적으로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성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자신이 지도해온 많은 영혼들의 체험에 입각해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 밤의 정화(淨化)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밤이 진정으로 깊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해를 끌게 될 것이다.[96]
다행히도 이 '하느님께 대한 깜깜한 관상(觀想)'은 위로의 순간들에 의해서 중단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혼은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위로의 순간들조차도 영혼에게는 양심(良心) -그 역시 제 안에 더러움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양심- 때문에, 또 '밤'이 재빨리 되돌아와서 영혼이 고통을 받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역시 괴로운 것이다. "실제로 영혼은 이 길에 얼마나 많은 산꼭대기와 골짜기들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이 누린 성공 다음에 뜻밖의 혼란 상태와 괴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에 도달하기까지의 일반적인 양상(樣相)과 그 훈련과정이니, 이 관상의 상태는 한 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그 전부인 것이다."[97]
그래서 영혼은 대담한 용기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순결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순결함은 피조물들에 대한 헐벗음과 뼈아픈 절제(mortification)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98]
'하느님께 대한 깜깜한 관상(觀想)'이 영혼 안에서 모든 자존심(自尊心)을 말끔히 걷어내고 모든 이기적(利己的)인 만족으로부터 영혼을 깨끗이 비움에 따라, 당연히 하느님은 더욱 친밀하게 영혼 안에 깊이 들어오시고 영혼을 당신 안에서 변모시키신다.
영혼은 자신의 새로운 상태를 자각하게 되고, 그것을 마음으로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감각(感覺)을 통해서도 지성(知性)을 통해서도 인지(認知)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다만 열매들을 느낄 수 있을 뿐이고,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이 만족한다는 것, 평온하다는 것, 충족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느낀다는 것, 모든 것이 좋다고 느낀다는 것 등, 일반적인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99]
사실, 오직 인격적(人格的)인 체험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완전성(完全性)을 인식(認識)하게 하고 맛볼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완전성(完全性)은 그 자체 그대로 인식(認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봄으로써 혹은 체험함으로써만 알아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100]
영혼 편에서는 과거에 해온 대로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이 '하느님께 대한 깜깜하고 사랑에 찬 관상(觀想)' 안에서는, 이 덕(德)들이 영혼의 유일한 발판이 되고, 영혼의 유일한 내적(內的) 활동이 된다.
그리고, 이 덕(德)들은 영혼이 세 원수들 - 하느님께서 가끔씩, 그러나 영혼을 즉시 들어 높이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마귀·세속·육신- 에게 더이상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영혼이 하느님의 눈에 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한다. 하느님은 마귀가 혼란하고 불안한 감각(感覺)들을 통해서 영혼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 때문에 영혼은 안전하게 두려움 없이 그 정배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해서 떠나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비밀스럽고 실체적(實體的)인 방식으로 그 안에 머무르시는 영혼과의 바로 그 친교(親交) 안에서, 이제 당신 신부(新婦)인 영혼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해주신다. 이 입맞춤 안에서, 또는 '하느님과 영혼과의 거룩한 합일(合一)의 실체적(實體的)인 접촉' 안에서, 영혼은 다른 모든 재물을 넘어서는 보물을 받게 되고, 기도의 최고의 단계에로 들어서게 된다.[101]
"이 실체적(實體的)인 접촉들 덕분으로, 영혼은 조금씩 조금씩 정화(淨化)되고, 강인해지고, 하느님의 아드님과의 신비적(神秘的)인 약혼(約婚)으로써 사랑하는 님과의 합일(合一)을 항구히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102]
|
|
| ||
|
Llama de amor viva
'십자가의 성요한 > 십자가의 성요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 결 론 :부록1-4 서평(書評) (0) | 2012.02.09 |
---|---|
[스크랩]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16장 - 19장 (0) | 2012.02.09 |
[스크랩]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8장-11장 (0) | 2012.02.09 |
[스크랩] 11장. 영의 능동적 정화 (0) | 2012.02.09 |
[스크랩] 10장. 능동적 관상의 기도 (0) | 2012.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