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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8장. 감각의 능동적 정화(淨化)
이 단계에서 영혼이 성취해야 할 목표는 '감각적인 모든 맛과 모든 자기만족에 대한 거절'이다. 사실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이 세상의 사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그 맛이다."[38]
영혼은 피조물들로부터 물리적으로 이탈하지 못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맛으로부터 그 의지(意志)가 이탈하지 못한 경우에도, 자신을 정화(淨化)시킬 수 없다.
1. 첫 단계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사물들의 맛으로부터 쉽게 이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聖人)은 우선 우리의 취미와 감각을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한다: "그처럼 영혼들은, 거룩한 일들 안에서 자신이 찾아낸 맛의 덕분으로, 다른 모든 맛들을 쉽게 포기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하는 짓과 비슷한데, 우리가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면, 그 어린이들이 빈 손으로 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쥐어준다."[39]
그 때문에, 아직도 잘 먹고 편안하게 살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술집이나 TV 앞에서, 혹은 더 나쁘게는 감각적(感覺的)인 쾌락 안에서 당장에 자신의 맛을 낙으로 삼고 추종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보다 영적(靈的)이고 고상한 수준에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의무 수행이나 애덕(愛德)의 실천이나 기도의 실천, 묵상, 영적 독서, 또 관대함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킬 만한 고행(苦行)의 실천에 전념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즐기던 것보다 더 고상한 감각적(感覺的)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지상적인 만족을 찾느라고 보낸 시간들이 그에게는 낭비된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의 감성은 "영적(靈的) 보화들의 맛으로 풍부해지게 되고, 물질적인 보화들로부터 이탈하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데에도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40]
2. 진정하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화(淨化)
불완전한 영혼들에게 있어서는 이 첫 단계의 결과가 이미 큰 성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첫 단계는 곧장 두번째 단계로서 보다 결정적(決定的)인 진보(進步)에로 넘어가야 한다. 즉, 모든 분야에 있어서 감각적인 맛에 대한 전적(全的)인 고행(苦行, mortification; 즉, 절제, 금욕, 혹은 죽음)에로 넘어가야 하고, 이는 영적(靈的)인 분야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감각(感覺)의 능동적(能動的) 정화(淨化)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대단히 많은 영혼들이, 심지어는 수도자들까지도, 자신들을 정화(淨化)시키는 이 훈련에 과감히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로서 자신의 생애를 끝마치게는 되지만, 하느님과의 일치 합일(合一)이라는 거룩한 모험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은 없이, 기다림 속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에, 관대한 영혼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감각(感覺)들은 무척 조잡하고 물질적인 능력들이어서 순수한 영(靈)이신 하느님께 내가 도달하도록 할 수 없다. 내 감각들은 기껏해야 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조금 쉽게 할 수 있을 뿐, 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없다 . 그러니, 나는 그것들을 이용하지만, 그것들에 의지하지는 않겠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을 원함이 없이 그냥 이용하겠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이미 자기가 지나온 다리(橋梁)를 뒤에 남겨두고 걸어가듯이, 그것들을 담담하게 넘어서서, 이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무한한 사랑이신 분께로만 내 마음을 향하겠다."
3. 정화(淨化)의 구체적인 규범들
이 관대한 영혼들에게 성인(聖人)은 다음과 같은 정화(淨化)의 규범들을 제시한다: "고귀한 마음으로 관대하게 정화(淨化)를 실천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그 영혼은 감각의 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1]
우리는 이를 네 가지 점에서 요약한다:
- 예수께 대한 모방
- 감각(感覺)들에 대한 정화(淨化)
- 욕(慾)들에 대한 정화(淨化)
- 자애심(自愛心)에 대한 정화(淨化)
이것들을 하나씩 설명해 보자.
●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함
"우선 영혼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항구한 원의를 가질 것이고 , 모든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기 위해서 그분의 생애를 묵상할 것이다."[42]
성인의 이 말씀은 근본적(根本的)인 것이다. 사실, 예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닮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영혼 안에 없다면, 앞으로 보게 될 여러 점들 안에서 언급되는 모든 규범들은 참아견딜 수 없는 짐들이 될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불이 타고 있다면, 가장 무겁게 느껴지던 희생도 가벼워질 것이고, 본성(本性)으로는 가장 괴롭던 포기도 감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4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성인(聖人)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욕망이 한결같아야 하고, 그 영혼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들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루의 봉헌'이나 단순한 '습관적인 지향(志向)'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포기를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다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새로와지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 감각(感覺)들에 대한 정화(淨化)
예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의지(意志)를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에 대한 포기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둘째는, 하느님의 영예와 하느님의 영광에서 기인하지 않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영혼이 포기하는 일인데, 이는 지상 생애 동안 성부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즐거움도 갖지 않으셨고 갖기를 원하지도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44] 그리고 여기서 성인은 현명하고도 실천적인 두 가지 권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a) "무엇을 듣거나, 보거나, 혹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중요하지 않은, 또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봉사하지 않는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이 있거든, 가능한 한 그것들을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소유하거나 행하지도 말고, 피하라."[45] b)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네가 피할 수 없는 그것들의 맛을 즐기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46]
그렇게 처신하면서 영혼은 "단시일 내에 덕(德)에 있어서 크게 진보할 것이다."[47]
● 욕(慾)들에 대한 정화(淨化)
감각의 정화(淨化)에 있어서, 영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성(本性)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향해서 자신의 의지(意志)를 정향(定向)시킴으로써 욕(慾)들에 대한 정화(淨化)를 실천해야 한다.
사실 욕(慾)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감각에 즐거운 것에 집착하도록 한다. 이 욕(慾)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慾)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성적인 욕(慾)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慾)들에 대한 반격을 행함에까지 이르러야만 한다.
우리 사부 성 요한도 분명히 말한다:
"욕(慾)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
영혼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에로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 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48]
● 자애심(自愛心)으로부터의 정화(淨化)
성인은 마침내 자애심(自愛心)을 끊어버릴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이 교활한 자기만족, 영혼의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묘한 친절마저도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자애심(自愛心)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 성인은 세 가지 규범을 제시한다:
"첫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없이 보도록, 남이 모두 자기를 업신여기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도록, 남이 모두 낮추어 말해 주기를 바랄 것.
셋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고, 남이 모두 낮추어 생각해 주기를 바랄 것."[49]
감각(感覺)의 정화(淨化)의 마지막에서, 영혼은, 놀라운 일이자 그 자신의 보다 큰 기쁨으로서, 모든 지상적인 맛들과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설사 전에는 감각적인 집착들이 마치 땅에 깔린 송진처럼 발에 붙어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 애착들이 끊어져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님과의 합일(合一)을 즐기기 위한 진정한 자유에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50]
9장. 묵상기도
모든 기도는 대화(對話)이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의지(意志)를 하느님의 의지(意志)에 일치(一致)시키기 위해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對話)이다.
1. 기도의 세 가지 방법
첫째 방법은, 영혼이 '주의 기도'나 혹은 다른 말로써, 자신이 그분을 믿는다고, 자신이 그분을 사랑한다고, 또 자신이 그분의 모든 것을 희망한다고 표현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구송기도'인데, 이 기도 안에서 영혼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하느님께서도 그 기도를 들으시게 된다.
둘째 방법은, 영혼이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 -예를 들면,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의로우심, 그분의 편재(偏在)하심 등- 이나, 혹은 예수님의 생애의 신비 -예를 들면, 그분의 매 맞으심- 이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 -예를 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지킨다' 하신 말씀- 을 주의깊게 생각하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을 불태우기 위해서 상상력(想像力)까지 이용해서 그 주제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묵상(默想)'이라고 불리는 기도인데, 바로 이 묵상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이 장에서 논할 것이다.
셋째 방법이자 기도의 더욱 완전한 단계는,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선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 때 영혼은 드디어 유일하고도 총괄적인, 사랑에 가득찬 시선으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분의 거룩한 빛을 받고 엄청난 평화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이 '관상(觀想)'의 기도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앞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2. 묵상의 방법
감각의 정화(淨化)는,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영혼이 예수께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을 모방하기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상태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정화(淨化)는 묵상(默想)을 동반해야 한다. 묵상의 목적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대로, 바로 '그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식(認識)을 조금이나마 얻어내기 위한 것'[51]이고, 감각의 정화(淨化)를 위한 끈질긴 싸움 안에서 그것을 지탱해주는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묵상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실천된다.
- 우선, 성당이나 자신의 방 같은, 외부의 번잡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조심스레 머르무는 것이 좋다.
- 거기서 맨 먼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現存), 혹은 우리가 성당 안에 있다면,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現存)에 대한 신덕(信德)의 행위들을 실천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現存)과 그분께서 우리를 지배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분과 친밀하게 사귄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 여기서 영혼은, 어떤 신비(神秘), 즉 하느님의 어떤 특성이나 하느님의 어떤 말씀에다 주의를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이 묵상하고자 하는 어떤 신비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등- 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어떤 책을 읽음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영혼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그러면, 영혼은 그 사랑에 사랑을 통해서 응답하고, 예수님과의 대화 안으로 몰입하게 된다. 결국, 영혼은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그분께 말씀드리게 된다.: "예수님, 왜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제 일생을 망치게 되었습니까? 왜 저는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도대체 왜 저는 제 죄들로써 당신께 상처를 드리고 있습니까?" 영혼은 이어서, 전에는 한 번도 청해 본 적이 없는 것을 청하게 된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과 함께 고통 받게 해 주십시요!"
- 그 후에는, 대화는 중단되고, 그리스도를 향한 어떤 사랑의 눈길 안에서 영혼은 변모된다. 이 사랑의 눈길에는 종종 사랑의 감명과 눈물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 태도는 여전히 더 영적(靈的)인 것이 되어야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위해서 고통 받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단호하면서도 평온한 의지(意志) 안에서 스스로 더 변모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 영혼 안에 주입시키기를 원하는 '인식(認識)과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다.
10장. 능동적 관상의 기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묵상을 실천하고 묵상을 통한 모든 노력의 결과인 이 '예수께로 향하는 사랑의 눈길'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묵상에 있어서 즉 책을 읽고 특정한 주제(主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뜻밖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총괄적이고 사랑에 가득찬 이 눈길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영적(靈的)인 맛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눈길' 때문이다. "처음에 영혼은 특별한 인식(認識)에 대한 묵상에서 피곤을 느끼면서 이 사랑의 눈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사랑의 눈길은 그 영혼 안에서 습관이 된다." 그래서 "영혼이 하느님 앞에 있게 되자마자, 그 영혼은 즉시 아스라하고 사랑스럽고 평화로우면서도 조용한 이 인식(認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지혜와 사랑과 그윽한 맛을 음미하게 된다."[52]
전에는 이 영적인 물을 조금 길어내기 위해서 묵상을 하면서 피곤을 느껴야 했는데, 이제부터는 손쉽게 물을 길어내게 된다.[53]
전에는 그 열매의 알맹이를 얻어내기 위해서 묵상을 통해 그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닦아야 했었는데, 이제부터는 먹을 수 있게 이미 다 준비된 것을 얻어내게 된다.[54]
그 때문에, 성인(聖人)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내적(內的)인 체험에 다다른 영혼은 특별한 주제들에 대해 읽거나 깊이 생각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되고, 실행 -즉 그 물과 열매의 알맹이를 얻기 위해서 그 때까지는 그렇게 필요했던 행동방식-을 전적(全的)으로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곧장 사랑으로 가득찬 침묵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이 침묵은 온갖 추리나 부질없는 이야기들보다 더 그를 예수님께로 일치시키게 된다.
이 기도는, 추리적 묵상과 수동적 관상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능동적(能動的) 관상(觀想)'이라고 불린다.모든 영혼들은, 진정으로 성실하게 항구히 묵상을 한다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만 한다.
11장. 영의 능동적 정화
묵상 안에서 축적되어왔고 또한 관상의 출발점이기도 한 '예수께 대한 사랑'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길에서 새로운 한 걸음을 재빨리 내딛게 한다. 감각의 정화(淨化)가 영혼 안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정적(情的)인 면에서의 이탈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기는, 더 적극적인 노력 -즉 영적(靈的)으로 하느님께 집착하고자 하는 노력- 에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靈)의 능동적 정화(淨化)' 혹은 '영(靈)의 능동적 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지성(知性)과 기억(記憶)과 의지(意志)이다. 영혼의 정화(淨化)는 이 세 가지 능력들로 하여금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즉:
- 지성(知性)으로 하여금 신덕(信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인식(認識)하게 하고,
- 기억(記憶)으로 하여금 망덕(望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원하게 하며,
- 또한 의지(意志)로 하여금 애덕(愛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데에 있다.
좀더 분명히 설명해 보자:
우리의 영적(靈的)인 능력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듯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다. 사실 우리의 영적(靈的) 능력들은 피조물 안에서 그 고유한 대상(對象)을 찾기 때문에, 감각적인 실재(實在) 안에서 그 대상을 찾아낸다. (부록 I 참조).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태초로부터 계시는 분,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향에 존재하시고 피조물들보다 무한히 높이 존재하시며 피조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지성(知性)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천상적 존재이든 지상적 존재이든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피조물들과 창조주 하느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55]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지성(知性)이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과 비슷한 그 무엇을 알 수는 없다. 의지(意志)도 하느님 안에서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그런 맛이나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또한 기억(記憶) 역시 하느님을 나타내는 어떤 지식이나 어떤 영상을 자신의 상상 안에서 만들어낼 수는 없다." [56]
성인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창조된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과의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자취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물들의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57]
비유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모래 위에서 사람의 발자국을 본다면,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고 추론(推論)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이상, 우리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지성(知性)은 감각(感覺)의 덕택으로 만물에 대해서 열려 있고, 거기서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세상 안에서, 또 하느님의 속성들 (아름다움, 선함, 슬기로움 등)을 가진 어떤 것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우리 지성(知性)은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 지성(知性)은 '그분'을 만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모래 위의 발자국을 아무리 찾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만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신덕(對神德) 즉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만이 인간적(人間的)인 덕(德)이 아닌 신적(神的)인 덕(德)으로서,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고 우리를 실제적으로, 다른 중개 없이 성삼위(聖三位) 하느님께 결합시킴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하느님 안에서의 자신의 변모를 원하는 영혼은, "이 세 가지 능력 -지성, 기억, 의지- 을 대신덕(對神德) -신덕, 망덕, 애덕- 에로 이끌어야만 한다. 이는 세 가지 능력들을 대신덕(對神德)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벗기고 어둠 속에 둠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능동적'이라고 부른 영(靈)의 '밤' -혹은 정화(淨化)- 이다. 왜냐하면, 이 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혼 편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58]
우리가 짐작하건대, 하느님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연이 영혼에게 준 모든 방법들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즉 영혼이 자신을 정화(淨化)시키면서, 영혼은 오로지 대신덕(對神德)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제 이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의 하나하나에 해당되는 행위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훈련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보도록 하자.
● '지성(知性)의 밤'은 신덕(信德)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 지성(知性)의 밤은 피조물들에 대한 인식(認識)에 있어서 발전되는 것 만큼 하느님께 대한 인식(認識)에 있어서도 발전되어야 한다.
a) 하느님을 또 신적(神的)인 어떤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은 지성(知性)을 통해서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信德)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신덕(信德)만이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다면 믿음은 그분을 무한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三位一體)시라면, 믿음은 삼위일체이신 그대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등등.[59]
신덕(信德)만이 완전하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제시한다. 사실, "성부께서는 당신의 유일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또 단 한번에 말씀하셨고, 따라서 다시 더 말씀하실 것을 지니고 계시지 않는다."[60]
신덕(信德)만이 확실한 방법으로 또 모든 이들이 얻기 쉬운 방법으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의 신비(神秘)들과 하느님의 진리(眞理)들을 누구나 단순성(單純性)과 교회가 그것들을 제시하듯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것들을 알아듣고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61]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영혼의 논리적(論理的)인 인식(認識) 전체를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게 반드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마련이긴 하지만- 밤의 휘장으로 덮고, 오로지 신덕(信德)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느님께 대한 참되고 확실한 인식(認識)만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신덕(信德)의 발전은 기도 중에, 특히 묵상(默想)과 관상(觀想)의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데, 기도는 이제부터 대단히 순수한 믿음과 사랑의 행위가 되어야만 한다.
b) 게다가, 영혼은 창조된 모든 실재(實在)들을 신앙(信仰)의 빛으로 해석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천지만물의 아름다움 안에서,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現存)과 그분의 사랑을 알아본다: 들에 핀 꽃들은 '님의 손으로 심어진' 것들인데,[62] 이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선물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 아름다움과는 관계없이 영혼에게 무한히 소중한 것들이다.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님이시여, 그대는 우뚝한 산들,
쓸쓸하고 그늘진 골짜기들,
묘하디 묘한 섬들,
소리내며 흐르는 강들,
사랑을 싣고 오는 바람소리."[63]
신덕(信德)은 영혼으로 하여금 새로운 빛으로 천지만물을 관상(觀想)하게 하는데, 이 새로운 빛은 사물들의 겉모양에 마음을 두지 않고 가장 참된 감각(感覺)의 내면(內面)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 창조주를 계시하도록 마련된 가장 정확한 성질을 알아보게 한다.
"오오, 수정 같은 샘이여,
은빛 나는 네 얼굴에서
내 그리워하던 그 눈들을,
내 안에 그려 지닌 그 눈들을
재빨리 마련했더라면!"[64]
하느님을 찾음은 항상 신앙(信仰)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고, 이로써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로 드러난 피조물들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된다:
"하늘들도 나의 것, 땅도 나의 것, 사람들도 나의 것,
의인들도 나의 것, 죄인들도 나의 것,
천사들도 나의 것, 하느님의 모친도 나의 것,
만물이 다 나의 것이요,
하느님도 나의 것, 오로지 나를 위해 계신 분이시니,
그리스도 나의 것, 오로지 나를 위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로다!"[65]
신앙(信仰)의 빛 안에서, 인생의 온갖 고통들도 죽음의 고통도 온갖 환난도 유혹도 병고(病苦)도 온갖 수고도, 마치 성부(聖父)께서 원하신 것으로, 따라서 포기(抛棄)와 자녀적 신뢰심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높은 완덕(完德)에로 들어올리고자 하시는 영혼들에게 하느님은 그런 고통들을 주신다."[66]
● '기억(記憶)의 밤'은 망덕(望德)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식(認識)에 대한 기억(記憶)을 비우고, 무한히 사랑스럽고도 행복한 하느님께 대한 기억(記憶)으로 우리 영혼을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a) 기억(記憶)의 비움은 완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듣기를 바란다. 우리의 의무들·책임들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한 영혼이 -가령 기도하는 동안과 같이- 하느님을 대면할 각오가 되어있을 때, 영혼은 그가 듣고 보고 느끼고 맛보고 만져본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간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즉시 잊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정들에 있어서는 자연적인 것들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장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67]
b) 이 침묵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이 '밤' 안에서, 거룩한 망덕(望德)이 발전되는데, 이 망덕(望德)은 결국 하느님께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기도를 하는 동안, 기억(記憶)이 침묵하도록 하고 벙어리가 되게 만드는 대신에, 오로지 마음의 귀만을 침묵 속에 열어주어, 예언자 사무엘과 더불어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68] 하고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면 닫힌 문을 통해서 당신 제자들 가운데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협력도 없이 영혼 안에 영적(靈的)으로 들어오실 것이고…그 영혼을 평화로 가득 채우실 것이며…, 영혼이 두려워하거나 줄곧 두려워해온 무엇이 자신에게 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온갖 근심들을 그에게서 다 없애실 것이다.[69]
● '의지(意志)의 밤'은 애덕(愛德)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의지(意志)의 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한다. 즉:
-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또 우리 형제들 안에 살아계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이나 행복 때문에가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시고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서 가능한 모든 사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며,
- 천지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意志)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이 사랑의 훈련 안에서, 영혼은 다음 두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첫째로, 영혼은 자신의 사랑을 피조물들에게 매어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피조물들은 요정(妖精)들처럼, 그 매력들로써,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쳐져야 할 이 사랑을 전부 혹은 일부라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사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4장 참조). 다시 말해서, 피조물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도에 따라 우리에게서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둘째로, 영혼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모든 사랑의 행위들에 수반되어야 하는 너그러움과 열성과 정열을 억압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의 이끌림을 받은 영혼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 안에서 -자신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가 되고- 오로지 하느님의 기쁨과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게 되고, 영적인 밤의 어두움 안에서, 또 피조물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품고 있던 헛된 사랑 안에서, 점점 자신이 사라져버림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그 영혼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님'과의 최초의 진정한 만남을 체험하게 된다.
"오,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보다 한결 좋은, 오,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를,
님께로 변모된 사랑받는 이를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게 하는, 오, 밤이여!"[70]
이렇게 해서 영혼은,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들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대신덕(對神德)의 삶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이우러 주기를 원하시는 훨씬 더 능력있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힘을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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