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11장. 영의 능동적 정화
묵상 안에서 축적되어왔고 또한 관상의 출발점이기도 한 '예수께 대한 사랑'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길에서 새로운 한 걸음을 재빨리 내딛게 한다. 감각의 정화(淨化)가 영혼 안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정적(情的)인 면에서의 이탈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기는, 더 적극적인 노력 -즉 영적(靈的)으로 하느님께 집착하고자 하는 노력- 에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靈)의 능동적 정화(淨化)' 혹은 '영(靈)의 능동적 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지성(知性)과 기억(記憶)과 의지(意志)이다. 영혼의 정화(淨化)는 이 세 가지 능력들로 하여금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즉:
- 지성(知性)으로 하여금 신덕(信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인식(認識)하게 하고,
- 기억(記憶)으로 하여금 망덕(望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원하게 하며,
- 또한 의지(意志)로 하여금 애덕(愛德)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데에 있다.
좀더 분명히 설명해 보자:
우리의 영적(靈的)인 능력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듯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다. 사실 우리의 영적(靈的) 능력들은 피조물 안에서 그 고유한 대상(對象)을 찾기 때문에, 감각적인 실재(實在) 안에서 그 대상을 찾아낸다. (부록 I 참조).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태초로부터 계시는 분,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향에 존재하시고 피조물들보다 무한히 높이 존재하시며 피조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지성(知性)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천상적 존재이든 지상적 존재이든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피조물들과 창조주 하느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55]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지성(知性)이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과 비슷한 그 무엇을 알 수는 없다. 의지(意志)도 하느님 안에서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그런 맛이나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또한 기억(記憶) 역시 하느님을 나타내는 어떤 지식이나 어떤 영상을 자신의 상상 안에서 만들어낼 수는 없다." [56]
성인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창조된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과의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자취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물들의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57]
비유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모래 위에서 사람의 발자국을 본다면,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고 추론(推論)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이상, 우리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지성(知性)은 감각(感覺)의 덕택으로 만물에 대해서 열려 있고, 거기서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세상 안에서, 또 하느님의 속성들 (아름다움, 선함, 슬기로움 등)을 가진 어떤 것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우리 지성(知性)은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 지성(知性)은 '그분'을 만나지는 못한다! 우리가 모래 위의 발자국을 아무리 찾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만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신덕(對神德) 즉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만이 인간적(人間的)인 덕(德)이 아닌 신적(神的)인 덕(德)으로서,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고 우리를 실제적으로, 다른 중개 없이 성삼위(聖三位) 하느님께 결합시킴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하느님 안에서의 자신의 변모를 원하는 영혼은, "이 세 가지 능력 -지성, 기억, 의지- 을 대신덕(對神德) -신덕, 망덕, 애덕- 에로 이끌어야만 한다. 이는 세 가지 능력들을 대신덕(對神德)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벗기고 어둠 속에 둠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능동적'이라고 부른 영(靈)의 '밤' -혹은 정화(淨化)- 이다. 왜냐하면, 이 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혼 편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58]
우리가 짐작하건대, 하느님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연이 영혼에게 준 모든 방법들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즉 영혼이 자신을 정화(淨化)시키면서, 영혼은 오로지 대신덕(對神德)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제 이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의 하나하나에 해당되는 행위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훈련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보도록 하자.
● '지성(知性)의 밤'은 신덕(信德)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이 지성(知性)의 밤은 피조물들에 대한 인식(認識)에 있어서 발전되는 것 만큼 하느님께 대한 인식(認識)에 있어서도 발전되어야 한다.
a) 하느님을 또 신적(神的)인 어떤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은 지성(知性)을 통해서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信德)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신덕(信德)만이 존재하시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다면 믿음은 그분을 무한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三位一體)시라면, 믿음은 삼위일체이신 그대로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등등.[59]
신덕(信德)만이 완전하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을 제시한다. 사실, "성부께서는 당신의 유일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또 단 한번에 말씀하셨고, 따라서 다시 더 말씀하실 것을 지니고 계시지 않는다."[60]
신덕(信德)만이 확실한 방법으로 또 모든 이들이 얻기 쉬운 방법으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의 신비(神秘)들과 하느님의 진리(眞理)들을 누구나 단순성(單純性)과 교회가 그것들을 제시하듯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것들을 알아듣고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61]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영혼의 논리적(論理的)인 인식(認識) 전체를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게 반드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마련이긴 하지만- 밤의 휘장으로 덮고, 오로지 신덕(信德)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느님께 대한 참되고 확실한 인식(認識)만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신덕(信德)의 발전은 기도 중에, 특히 묵상(默想)과 관상(觀想)의 기도 중에 이루어지는데, 기도는 이제부터 대단히 순수한 믿음과 사랑의 행위가 되어야만 한다.
b) 게다가, 영혼은 창조된 모든 실재(實在)들을 신앙(信仰)의 빛으로 해석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천지만물의 아름다움 안에서,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現存)과 그분의 사랑을 알아본다: 들에 핀 꽃들은 '님의 손으로 심어진' 것들인데,[62] 이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선물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 아름다움과는 관계없이 영혼에게 무한히 소중한 것들이다.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님이시여, 그대는 우뚝한 산들,
쓸쓸하고 그늘진 골짜기들,
묘하디 묘한 섬들,
소리내며 흐르는 강들,
사랑을 싣고 오는 바람소리."[63]
신덕(信德)은 영혼으로 하여금 새로운 빛으로 천지만물을 관상(觀想)하게 하는데, 이 새로운 빛은 사물들의 겉모양에 마음을 두지 않고 가장 참된 감각(感覺)의 내면(內面)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 창조주를 계시하도록 마련된 가장 정확한 성질을 알아보게 한다.
"오오, 수정 같은 샘이여,
은빛 나는 네 얼굴에서
내 그리워하던 그 눈들을,
내 안에 그려 지닌 그 눈들을
재빨리 마련했더라면!"[64]
하느님을 찾음은 항상 신앙(信仰)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고, 이로써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로 드러난 피조물들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된다:
"하늘들도 나의 것, 땅도 나의 것, 사람들도 나의 것,
의인들도 나의 것, 죄인들도 나의 것,
천사들도 나의 것, 하느님의 모친도 나의 것,
만물이 다 나의 것이요,
하느님도 나의 것, 오로지 나를 위해 계신 분이시니,
그리스도 나의 것, 오로지 나를 위해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로다!"[65]
신앙(信仰)의 빛 안에서, 인생의 온갖 고통들도 죽음의 고통도 온갖 환난도 유혹도 병고(病苦)도 온갖 수고도, 마치 성부(聖父)께서 원하신 것으로, 따라서 포기(抛棄)와 자녀적 신뢰심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높은 완덕(完德)에로 들어올리고자 하시는 영혼들에게 하느님은 그런 고통들을 주신다."[66]
● '기억(記憶)의 밤'은 망덕(望德)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식(認識)에 대한 기억(記憶)을 비우고, 무한히 사랑스럽고도 행복한 하느님께 대한 기억(記憶)으로 우리 영혼을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a) 기억(記憶)의 비움은 완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듣기를 바란다. 우리의 의무들·책임들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한 영혼이 -가령 기도하는 동안과 같이- 하느님을 대면할 각오가 되어있을 때, 영혼은 그가 듣고 보고 느끼고 맛보고 만져본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간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즉시 잊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정들에 있어서는 자연적인 것들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장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67]
b) 이 침묵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이 '밤' 안에서, 거룩한 망덕(望德)이 발전되는데, 이 망덕(望德)은 결국 하느님께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성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기도를 하는 동안, 기억(記憶)이 침묵하도록 하고 벙어리가 되게 만드는 대신에, 오로지 마음의 귀만을 침묵 속에 열어주어, 예언자 사무엘과 더불어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68] 하고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면 닫힌 문을 통해서 당신 제자들 가운데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협력도 없이 영혼 안에 영적(靈的)으로 들어오실 것이고…그 영혼을 평화로 가득 채우실 것이며…, 영혼이 두려워하거나 줄곧 두려워해온 무엇이 자신에게 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온갖 근심들을 그에게서 다 없애실 것이다.[69]
● '의지(意志)의 밤'은 애덕(愛德)의 훈련을 통해서 영혼 안에 자리잡게 된다. 의지(意志)의 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를 가능하게 한다. 즉:
-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또 우리 형제들 안에 살아계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이나 행복 때문에가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시고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서 가능한 모든 사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며,
- 천지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意志)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이 사랑의 훈련 안에서, 영혼은 다음 두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첫째로, 영혼은 자신의 사랑을 피조물들에게 매어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피조물들은 요정(妖精)들처럼, 그 매력들로써,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쳐져야 할 이 사랑을 전부 혹은 일부라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사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4장 참조). 다시 말해서, 피조물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도에 따라 우리에게서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둘째로, 영혼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모든 사랑의 행위들에 수반되어야 하는 너그러움과 열성과 정열을 억압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의 이끌림을 받은 영혼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 안에서 -자신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가 되고- 오로지 하느님의 기쁨과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게 되고, 영적인 밤의 어두움 안에서, 또 피조물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품고 있던 헛된 사랑 안에서, 점점 자신이 사라져버림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그 영혼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님'과의 최초의 진정한 만남을 체험하게 된다.
"오,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보다 한결 좋은, 오,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를,
님께로 변모된 사랑받는 이를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게 하는, 오, 밤이여!"[70]
이렇게 해서 영혼은,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들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대신덕(對神德)의 삶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이우러 주기를 원하시는 훨씬 더 능력있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힘을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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