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10장. 능동적 관상의 기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묵상을 실천하고 묵상을 통한 모든 노력의 결과인 이 '예수께로 향하는 사랑의 눈길'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묵상에 있어서 즉 책을 읽고 특정한 주제(主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뜻밖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총괄적이고 사랑에 가득찬 이 눈길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영적(靈的)인 맛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눈길' 때문이다. "처음에 영혼은 특별한 인식(認識)에 대한 묵상에서 피곤을 느끼면서 이 사랑의 눈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사랑의 눈길은 그 영혼 안에서 습관이 된다." 그래서 "영혼이 하느님 앞에 있게 되자마자, 그 영혼은 즉시 아스라하고 사랑스럽고 평화로우면서도 조용한 이 인식(認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지혜와 사랑과 그윽한 맛을 음미하게 된다."[52]
전에는 이 영적인 물을 조금 길어내기 위해서 묵상을 하면서 피곤을 느껴야 했는데, 이제부터는 손쉽게 물을 길어내게 된다.[53]
전에는 그 열매의 알맹이를 얻어내기 위해서 묵상을 통해 그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닦아야 했었는데, 이제부터는 먹을 수 있게 이미 다 준비된 것을 얻어내게 된다.[54]
그 때문에, 성인(聖人)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내적(內的)인 체험에 다다른 영혼은 특별한 주제들에 대해 읽거나 깊이 생각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되고, 실행 -즉 그 물과 열매의 알맹이를 얻기 위해서 그 때까지는 그렇게 필요했던 행동방식-을 전적(全的)으로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곧장 사랑으로 가득찬 침묵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이 침묵은 온갖 추리나 부질없는 이야기들보다 더 그를 예수님께로 일치시키게 된다.
이 기도는, 추리적 묵상과 수동적 관상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능동적(能動的) 관상(觀想)'이라고 불린다.모든 영혼들은, 진정으로 성실하게 항구히 묵상을 한다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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