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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4장. 인간의 몫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과의 합일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 당신의 주도권(主導權)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성장되고 완성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몫인 대신덕(對神德)의 훈련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대신덕(對神德)은 병행(竝行)·발전(發展)되는 두 가지 일, 즉 정화(淨化)와 기도 안에서 실천되어야만 한다.
1. 정화(淨化)
신덕·망덕·애덕은 하느님을 최고선(最高善)으로, 무한히 매력적이고 무한히 사랑스러운 최고선(最高善)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25] 하느님께 대한 이 전적(全的)인 사랑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격렬히 끌어당기는 감각적(感覺的)인 피조물(被造物)들에 대한 사랑과 대조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만 돌려져야 할 이 사랑의 한 몫을 하느님 아닌 피조물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이 피조물들을 마치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 양 사랑하게 되는 위험을 날마다 겪게 된다. 무질서(無秩序)란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은 모두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직접 피조물들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음으로써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무질서가 있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우리가 앞으로 말하게 되겠지만-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 또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애착을 피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에 대항해야 함은 불가피하다. 바로 여기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우리 사랑의 점진적(漸進的) 이탈(離脫)인 정화(淨化)가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의 정화(淨化)가 이루어지지 않은 그만큼, 다시 말해서, 우리 의지(意志)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무질서한 방법으로 - 즉 하느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만큼, 우리 사랑은 더럽고 불순한 사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께로 향하기에 부적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인의 말씀대로, 새가 노끈으로 지상에 묶여 있는 한, 노끈이 아주 가늘다고 하더라도 그 새는 하늘로 날 수 없다.[26] 마찬가지로, 마음이 피조물들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비록 가늘다고 할지라도 그 노끈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러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끊어버려야 할 노끈은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 즉 하느님 때문이 아닌 피조물 자체 때문에 그것들을 원하는 그런 사랑이다.
따라서, 정화(淨化)에 관심을 가진 영혼이 자기의 것들을, 자기의 합당한 일이나 자기 생활에 유익한 사물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자기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피조물들을 직접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도 더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부부(夫婦)의 사랑을 예(例)로 들어보자.
남편은 아내를 두 가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동기는 바로 아내 자신이고, 아내가 완전할 수 있기를 바라나, 아내는 항상 피조물로서 머물러있게 된다. 이런 사랑은 당연히 자기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매여 있게 되고, 지상적(地上的)인 행복에만 한정될 것이다. - 만일, 이와는 반대로, 남편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아내의 모습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같은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좌우되지도 않고, 순전히 지상적(地上的)인 행복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랑은 아내를 하느님께로 이끌고 하느님과의 영원한 합일(合一)을 지향(指向)하는 그런 사랑이 될 것이다.
이 두 번째 사랑이 첫 번째 사랑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를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합당한 일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상급들이나 고통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또 우리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도 고통도,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병고(病苦)도, 또는 죽음 자체까지도,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침착한 이탈 안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깊은 평화 중에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온갖 다양한 사물들, 가령 집이나 식량이나 돈 따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도, 그것들에 우리 마음을 집착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그런 것들에 우리 행복을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즉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수단들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의지(意志)를 정화(淨化)시키는 것은 사랑하기를 포기(抛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을 최대한으로 증진(增進)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중시키는 탁월한 목표를 가지고, 피조물들에 대한 의지(意志)의 완전한 이탈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神的) 사랑의 완전함과 힘을 가지고 다시 피조물들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2. 기도
의지(意志)의 정화(淨化)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새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땅에 묶어두는 노끈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날개를 움직이고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께로 향한 영혼의 이 '날아오름'이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하느님의 의지(意志)에로 밀착시키는 것,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對話)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인간은 대신덕(對神德)을, 특히 애덕(愛德)을 최대한으로 실천하게 된다.
신덕(信德)으로 기도하는 영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식(認識)과 존경은 점점 커나가고,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에 대한 존경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망덕(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실 만한 탁월한 분이심을 발견하고서 영혼의 모든 욕망을 그분께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애덕(愛德)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영혼을 하느님께 항상 더 완전히 밀착시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는 -즉, 대신덕(對神德)으로 배양된 기도는- 영혼을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상태에로 인도한다. 거기서는 더이상 두 의지(意志)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의지(意志)만이 존재하니, 하느님의 의지가 바로 영혼의 의지가 된다.[27]
정화(淨化)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의지(意志)의 이탈이 하루의 모든 행위들 안에 미치는 동안, 우리는 기도에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기도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복음(福音)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셨다'[28]는 것과 '밤새도록 기도하셨다'[28]는 것을 전해준다.
기도에 바쳐질 시간은, 각자의 고유한 능력들과 필요성들에 따라 각자에 의해 선정(選定)되어야 한다. 일이나 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평신도들도, 하루에 30분이나 15분 정도 조용한 곳에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암시해 주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30]
하느님과의 이 만남에 있어서, 영혼이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행위들이다. 우리는 점점 더 완전한 기도의 형식(形式)을 원하지만, 모든 기도의 본질(本質)은,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이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과의 이 만남에 성실하다면, 그의 의지(意志)와 하느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루의 모든 행위들에 확산되고, 예수의 다음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점점 습관이 될 것이다: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31] 이 말씀은 '삶의 모든 상황들 안에서 항상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원하라'는 뜻이다.
5장. 합일(合一)의 길; 무(無)와 전(全)
십자가의 성 요한은 깔바리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었던 때에 '완덕(完德)의 산(山)'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시 그려졌고,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영혼들을 이끄는 여정(旅程)의 전체 모습을 영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의 지도를 받던 영혼들에게 이 그림을 나누어주었다.
이 귀중한 도움이 독자(讀者)들에게 더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히 성인의 그림을 -그 내용은 충실히 보존하면서- 단순화(單純化)시켜본다.
이 산의 정상(頂上)은 하느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이는 영혼이 갈망하는 목표이고, 영혼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목표인데, 특히 등반이 더 엄한 희생을 요구하는 때에 그러하다.
산의 기슭에서 세 갈래의 길이 시작된다.
- 오른쪽의 길은 지상(地上)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이다: 이 길은 산의 정상(頂上)에 도달하지 못하고, 산을 벗어나 길을 잃게 된다. 여기에 두 가지 말씀이 적혀 있다: 그 첫째는 '내가 그것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들을 더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네가 이 길을 통해서는 그 산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 왼쪽의 길은 천상(天上)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인데, 그들은 산 정상(頂上)에 도달하지 못하고, 넘을 수 없는 어떤 바위로 인해 멈춰버린다. 여기도 역시 두 개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 표지판들은 영혼의 즐거움들을 찾거나 그런 것들로 만족해하는 자는 누구나 순수한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정상(頂上)에 도달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 가운데의 길은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길인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완덕(完德)의 좁은 길이다.[32] 이 길은 순수한 하느님 사랑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무(無)'로 표시되어 있다: 영예도, 휴식도, 맛도, 자유(自由)도, 재능도, 영광도, 안전(安全)도, 기쁨도, 위로도, 지식도…아니고, 이 길은 산의 정상(頂上)에로 영혼을 직접 인도하는데, 거기서 영혼은 자신이 걸어온 전체 여정(旅程) 안에서 체험한 무(無)보다도 더한 무(無)의 심연에 삼켜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하느님으로 부유해지는 것은 분명히 이 무(無) 안에서이다: "내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원함 없이 이 모든 것이 내게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여기서는, 무(無)의 길은 자신의 한계를 잃고 그 산(山)과 혼합된다: "여기에는 더이상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법이 없고, 그 자신이 자신의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영혼은 하느님의 힘에 내맡겨지고,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만 이끌리게 된다.
이 후에는, 모든 것을 행하고, 영혼을 마지막 찌꺼기들로부터 정화(淨化)시키고, 하느님의 고요한 기운들과 하느님의 선물들 덕택으로 영혼의 마지막 한 올까지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대단히 아름다운 영혼을 바라보시고 그 영혼을 마치 당신의 정배처럼 사랑하시면서, 당신 자신 안에서 그를 변모시키심으로써 그 영혼을 영원한 잔치에로, 거룩한 침묵과 거룩한 지혜가 다스리는 영원한 잔치에로 들어가게 하신다.
성인은, 용기를 가지고 무(無)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영혼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산의 밑부분에 다음과 같은 몇 귀절들을 놓고 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라…."[33]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정상(頂上)을 향하는 영혼 안에서, 영혼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더욱 변모된다.
이 길의 출발점(A)에서는, 영혼 안에 '나'는 최고도에 달해 있고, (세례로 인한) 하느님의 실체적(實體的) 현존(現存)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의 실체적 현존은 영혼의 활동 밖으로 밀려나 있다. 대신덕(對神德)을 훈련함으로써 영혼이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애착들로부터 비워진 자리를 확장시킬수록, 하느님께서는 이 빈 자리를 채워주시고(B), 결국 영혼이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무(無)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하느님으로 완전히 채워지고, 하느님 안에서 변모된다(C).
이제 우리는 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무(無)와 전(全)', 'Nada와 Todo'의 박사(博士)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이신 '전(全)'을 소유하는 데에 다다르기를 원하는 영혼에게 있어서, 해야할 과제는 한 가지 뿐이다: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무(無)'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해주신다.
"하느님은 마치 태양과도 같이,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자 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비어있고 정화되어있음을 발견하시면, "하느님은 그 영혼 안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선물들로 그 영혼을 채워주신다."[34]
따라서 합일(合一)의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점진적(漸進的)인 포기(抛棄)를 통해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 편에서 본다면, 영혼에 대한 점진적(漸進的)인 지배(支配)이고 장악(掌握)이다. 이것은 결국, "영혼이 온전히 무(無)에 이르게 될 때에 하느님께서 친히 영혼과 당신 자신과의 영적인 합일(合一)을 이루어주시는 데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이 합일은 사람이 이승의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상태를 만들어준다."[35]
6장. 합일(合一)의 여정(旅程)의 각 단계들
우리는, 우리의 논리전개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불충분하게 보이거나 혹은 사물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험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향한 긴 여정(旅程)을 따라 독자(讀者)들을 안내하고자 하는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그 여정(旅程)에 대해서, 도식(圖式)으로 각 단계들을 묘사하고자 하는데, 번호를 매긴 각 칸을 따라 그림을 분리시켜서 한 칸씩 해설을 덧붙여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 여정(旅程)은, 복음적(福音的)이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각자는 이 안에서 확실한 지침(指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각 영혼 안에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방법과 서로 다른 시기를 통해서 인격적(人格的)으로 성화(聖化)되도록 하시니, 우리의 거룩한 사부(師父)께서 제시하신 도식(圖式)과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부 성 요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한다.: "하느님께서는 각 영혼을 그의 고유한 길을 통해서 이끄신다. 그래서 그 실행방법에 있어서 다른 길과 절반쯤 일치되는 한 길을 찾아내기도 대단히 어렵다."[36]
1. 밤
이 도식(圖式)은 그 전체를 끌어안는 '밤'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지배된다. 실제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도달하기 위한 영혼의 길은 '밤'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첫째로,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맛을 스스로 끊는 그 출발점의 문제인데, 이는 인간의 감각에 있어서 진정한 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영혼이 걸어야만 하는 길의 문제인데, 그 길은 신앙이니, 지성(知性)에 있어서는 밤과 같이 깜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영혼이 인도되는 목표의 문제인데, 그 목표는 하느님이시니, 이 목표 역시 영혼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영혼에게는 깜깜한 밤이기 때문이다."[37]
그런데, 이 '밤'이라는 명칭(名稱)은 실재(實在)와 일치한다. 영혼은 사실 맹인(盲人)처럼 완전히 어두움 속에 빠져서 이 밤의 여행에 유일한 안내자인 신앙(信仰)에 손을 내맡기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해 걸어간다.
2. 능동적(能動的) 밤과 수동적(受動的) 밤
영혼은 항상 신앙(信仰)에 의해 인도되면서, 이 길의 출발점에서부터 정화(淨化)와 기도에 능동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모든 것이 영혼 자신에게 달려있는 듯이 충실성과 항구함을 가지고 이 수업을 계속해야 한다.
의지(意志)가 피조물에 대해서 충분히 이탈되고 비어있게 되면, 하느님은 영혼을 철저히 정화(淨化)시키시고 당신께로 강렬히 끌어당기시면서, 이 비움의 자리를 당신 자신으로 채우러 오신다. 영혼은 오로지 극도의 겸손으로 자신을 수동적으로 내맡기고, 항상 오로지 신덕(信德)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밤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영혼의 활동이 우세(優勢)한 부분인 능동적(能動的)인 밤과 하느님의 활동이 우세(優勢)한 부분인 수동적(受動的)인 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도식(圖式)이 보여주는 것처럼 분리(分離)되어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두 부분은, 하느님께서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능동적인 부분이 밤의 길에서 무엇보다 첫째 부분을 차지하고 수동적인 부분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 우세하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각 단계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7장. 출발점
영성(靈性)의 산(山)을 오르기 위한 출발점은, 이미 소죄(小罪)에서까지도 벗어나 있고 좋은 목표인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에 이르는 위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 의지(意志)이다. 이는 이 영혼이 더이상 죄에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죄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하느님께로 결정적으로 돌아선, 그런 의지(意志)이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 대로, 이 길에서 진보(進步)하기 위한 '영혼의 걸음걸이'는 정화(淨化)와 기도이다. 이 둘은 공통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그 중요한 특징들만을 열거해 보자:
- 정화(淨化)와 기도는 병행적(竝行的)으로 진보하는데, 결과적으로,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지만, 정화(淨化)의 어떤 '단계'는 기도의 어떤 '형태'와 상응한다.
- 정화(淨化)와 기도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 정화(淨化)의 증가나 감소는 기도의 증가나 감소를, 기도의 증가나 감소는 정화(淨化)의 증가나 감소를 반드시 유발(誘發)시킨다.
- 정화(淨化)와 기도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세한 활동이 영혼의 활동일 때는 능동적이고, 영혼이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반면 하느님께로부터 우세한 활동이 나오는 경우는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영혼의 수동성(受動性)'은 '한가함'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순응성(順應性)·온순함'과 같은 말이다. 이 순응성(順應性)은 산의 정상(頂上)을 향한 영적 활동을 요구하는데, 영혼이 오로지 받기만 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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