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6장. 합일(合一)의 여정(旅程)의 각 단계들
우리는, 우리의 논리전개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불충분하게 보이거나 혹은 사물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험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향한 긴 여정(旅程)을 따라 독자(讀者)들을 안내하고자 하는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그 여정(旅程)에 대해서, 도식(圖式)으로 각 단계들을 묘사하고자 하는데, 번호를 매긴 각 칸을 따라 그림을 분리시켜서 한 칸씩 해설을 덧붙여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 여정(旅程)은, 복음적(福音的)이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각자는 이 안에서 확실한 지침(指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각 영혼 안에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방법과 서로 다른 시기를 통해서 인격적(人格的)으로 성화(聖化)되도록 하시니, 우리의 거룩한 사부(師父)께서 제시하신 도식(圖式)과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부 성 요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한다.: "하느님께서는 각 영혼을 그의 고유한 길을 통해서 이끄신다. 그래서 그 실행방법에 있어서 다른 길과 절반쯤 일치되는 한 길을 찾아내기도 대단히 어렵다."[36]
1. 밤
이 도식(圖式)은 그 전체를 끌어안는 '밤'이라는 단어에 의해서 지배된다. 실제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도달하기 위한 영혼의 길은 '밤'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첫째로,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맛을 스스로 끊는 그 출발점의 문제인데, 이는 인간의 감각에 있어서 진정한 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영혼이 걸어야만 하는 길의 문제인데, 그 길은 신앙이니, 지성(知性)에 있어서는 밤과 같이 깜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영혼이 인도되는 목표의 문제인데, 그 목표는 하느님이시니, 이 목표 역시 영혼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영혼에게는 깜깜한 밤이기 때문이다."[37]
그런데, 이 '밤'이라는 명칭(名稱)은 실재(實在)와 일치한다. 영혼은 사실 맹인(盲人)처럼 완전히 어두움 속에 빠져서 이 밤의 여행에 유일한 안내자인 신앙(信仰)에 손을 내맡기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해 걸어간다.
2. 능동적(能動的) 밤과 수동적(受動的) 밤
영혼은 항상 신앙(信仰)에 의해 인도되면서, 이 길의 출발점에서부터 정화(淨化)와 기도에 능동적으로 헌신해야 하고, 모든 것이 영혼 자신에게 달려있는 듯이 충실성과 항구함을 가지고 이 수업을 계속해야 한다.
의지(意志)가 피조물에 대해서 충분히 이탈되고 비어있게 되면, 하느님은 영혼을 철저히 정화(淨化)시키시고 당신께로 강렬히 끌어당기시면서, 이 비움의 자리를 당신 자신으로 채우러 오신다. 영혼은 오로지 극도의 겸손으로 자신을 수동적으로 내맡기고, 항상 오로지 신덕(信德)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밤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영혼의 활동이 우세(優勢)한 부분인 능동적(能動的)인 밤과 하느님의 활동이 우세(優勢)한 부분인 수동적(受動的)인 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도식(圖式)이 보여주는 것처럼 분리(分離)되어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두 부분은, 하느님께서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능동적인 부분이 밤의 길에서 무엇보다 첫째 부분을 차지하고 수동적인 부분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 우세하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각 단계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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