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5장. 합일(合一)의 길; 무(無)와 전(全)
십자가의 성 요한은 깔바리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었던 때에 '완덕(完德)의 산(山)'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시 그려졌고,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로 영혼들을 이끄는 여정(旅程)의 전체 모습을 영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의 지도를 받던 영혼들에게 이 그림을 나누어주었다.
이 귀중한 도움이 독자(讀者)들에게 더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히 성인의 그림을 -그 내용은 충실히 보존하면서- 단순화(單純化)시켜본다.
이 산의 정상(頂上)은 하느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이는 영혼이 갈망하는 목표이고, 영혼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목표인데, 특히 등반이 더 엄한 희생을 요구하는 때에 그러하다.
산의 기슭에서 세 갈래의 길이 시작된다.
- 오른쪽의 길은 지상(地上)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이다: 이 길은 산의 정상(頂上)에 도달하지 못하고, 산을 벗어나 길을 잃게 된다. 여기에 두 가지 말씀이 적혀 있다: 그 첫째는 '내가 그것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들을 더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네가 이 길을 통해서는 그 산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 왼쪽의 길은 천상(天上)의 보화를 사랑하는 자들의 길인데, 그들은 산 정상(頂上)에 도달하지 못하고, 넘을 수 없는 어떤 바위로 인해 멈춰버린다. 여기도 역시 두 개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 표지판들은 영혼의 즐거움들을 찾거나 그런 것들로 만족해하는 자는 누구나 순수한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정상(頂上)에 도달할 수 없음을 경고한다.
- 가운데의 길은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길인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완덕(完德)의 좁은 길이다.[32] 이 길은 순수한 하느님 사랑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무(無)'로 표시되어 있다: 영예도, 휴식도, 맛도, 자유(自由)도, 재능도, 영광도, 안전(安全)도, 기쁨도, 위로도, 지식도…아니고, 이 길은 산의 정상(頂上)에로 영혼을 직접 인도하는데, 거기서 영혼은 자신이 걸어온 전체 여정(旅程) 안에서 체험한 무(無)보다도 더한 무(無)의 심연에 삼켜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하느님으로 부유해지는 것은 분명히 이 무(無) 안에서이다: "내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원함 없이 이 모든 것이 내게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여기서는, 무(無)의 길은 자신의 한계를 잃고 그 산(山)과 혼합된다: "여기에는 더이상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법이 없고, 그 자신이 자신의 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영혼은 하느님의 힘에 내맡겨지고,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만 이끌리게 된다.
이 후에는, 모든 것을 행하고, 영혼을 마지막 찌꺼기들로부터 정화(淨化)시키고, 하느님의 고요한 기운들과 하느님의 선물들 덕택으로 영혼의 마지막 한 올까지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대단히 아름다운 영혼을 바라보시고 그 영혼을 마치 당신의 정배처럼 사랑하시면서, 당신 자신 안에서 그를 변모시키심으로써 그 영혼을 영원한 잔치에로, 거룩한 침묵과 거룩한 지혜가 다스리는 영원한 잔치에로 들어가게 하신다.
성인은, 용기를 가지고 무(無)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영혼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산의 밑부분에 다음과 같은 몇 귀절들을 놓고 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라…."[33]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의 정상(頂上)을 향하는 영혼 안에서, 영혼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더욱 변모된다.
이 길의 출발점(A)에서는, 영혼 안에 '나'는 최고도에 달해 있고, (세례로 인한) 하느님의 실체적(實體的) 현존(現存)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의 실체적 현존은 영혼의 활동 밖으로 밀려나 있다. 대신덕(對神德)을 훈련함으로써 영혼이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애착들로부터 비워진 자리를 확장시킬수록, 하느님께서는 이 빈 자리를 채워주시고(B), 결국 영혼이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무(無)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하느님으로 완전히 채워지고, 하느님 안에서 변모된다(C).
이제 우리는 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무(無)와 전(全)', 'Nada와 Todo'의 박사(博士)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이신 '전(全)'을 소유하는 데에 다다르기를 원하는 영혼에게 있어서, 해야할 과제는 한 가지 뿐이다: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무(無)'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해주신다.
"하느님은 마치 태양과도 같이,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자 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비어있고 정화되어있음을 발견하시면, "하느님은 그 영혼 안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선물들로 그 영혼을 채워주신다."[34]
따라서 합일(合一)의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점진적(漸進的)인 포기(抛棄)를 통해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 편에서 본다면, 영혼에 대한 점진적(漸進的)인 지배(支配)이고 장악(掌握)이다. 이것은 결국, "영혼이 온전히 무(無)에 이르게 될 때에 하느님께서 친히 영혼과 당신 자신과의 영적인 합일(合一)을 이루어주시는 데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이 합일은 사람이 이승의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상태를 만들어준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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