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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요한

[스크랩]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1장-3장

 

 

 

 

  

   

          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Angelo Albani, Massimo Astrua 원저

이 종욱 안셀모 신부 역

 

 

              1장. 실재(實在)를 발견하게 하는 신앙(信仰)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의 성 요한을 특징짓는 것은, 그의 구체적(具體的)인 현실감각(現實感覺)이다.

신비가(神秘家)를 마치 사람들의 구체적인 문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사상이다.

모든 진정한 신비가(神秘家)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공상(空想) 안에서가 아니라 현실(現實) 안에서 살았다. 건전한 판단력(判斷力)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는 실재(實在)를 인식(認識)하기 위해서, 겉모양도 철학자(哲學者)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믿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의 신앙(信仰)이라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빛에 의존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인은 신앙의 빛 안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실재(實在)들을 보았다;

- 절대적이고 영원한, 다른 모든 실재들의 근원인 실재, 즉 하느님.

-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그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는 실재들, 즉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

   

           2장. 인간의 운명; 하느님과의 일치(一致)의 삶.

     

               1. 그리스도교적인 삶

                   하느님과 인간, 이 두 실재(實在)는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 두 실재(實在)는 분리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啓示)해주는 것은 역시 신앙(信仰)이다.

이 합일(合一)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은, 인성(人性)을 취하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받으셨던 하느님의 아들의 인격(人格) 안에서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 모두의 원형(元型)이시다. 성부(聖父)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성자(聖子)를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고, 우리는 당신 성자(聖子)의 모습을 닮게 하셨다.[12]

인간에 대한 모든 신학(神學)의 핵심은 바로 이 '예정(豫定)' 안에 있는데,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인간은 오로지 예수의 '살아있는 모상(模像)' (copie vivante)으로 간주되고 있다.

 

               2. 자녀적인 삶

                  예수 안에서 우리의 변모를 이루어 주시는 분은 성령(聖靈)이시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께로부터 파견되신 성령(聖靈)께서는, 우리를 예수 안에 변모(變貌)시키시고 우리가 성자(聖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면서, 예수의 생명[13]으로 우리 영혼을 비추러 오신다.[14]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15]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16]

     

               3.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인 삶

                  성령(聖靈)의 위격적(位格的)인 현존(現存)은, 성령의 신적(神的) 본성(本性)이 지닌 본질적인 단일성(單一性)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느님의 다른 두 위격(位格), 즉 성부(聖父)와 성자(聖子)를 모셔들여, 예수의 다음 말씀 그대로 성삼위(聖三位) 전체를 우리 영혼 안에 현존(現存)하시게 한다: "우리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17]

따라서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께서는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양식으로 생활하시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변모(變貌)되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체험하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우리의 '삼위일체 안에서의 변모'[18]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졌고, 바로 그것을 자신의 모든 영성적(靈性的) 교의(敎義)의 바탕으로써 표제로 내어놓았다. 영혼은 영혼 자신 밖에서가 아니라 영혼 자신 안에서 하느님과 자신과의 독특한 합일(合一)을 실현시킬 것이고, 이 합일은 영혼 안에 단순히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의 생명에 완전히 참여함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인은 우리에게 말한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聖三位) 안에서 분명하고 명백한 방법으로 영혼이 변모되지 않는 한, 하느님 안에서의 진실하고 완전한 변모란 있을 수 없다."[19]

성인은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그렇게 고귀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신화(神化, deiforme)되어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聖三位) 안에 일치되어 있게 하시니, 그 안에서 영혼이 '참여'로써 하느님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聖靈)을 숨쉬며 살아계신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본성적 활동 자체에 영혼이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삼위일체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왜 믿어지지 않는가?"[20]

"비록 그것이 저 세상에서 만큼 완전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영혼이 완덕(完德)의 상태에 도달할 때에, 영혼은 그 상태를 미리 맛볼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얻게 된다."[21]

성인은 다음과 같이 탄식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오, 이 위대함들을 위해서 창조된 영혼들, 이 위대함들에 초대된 영혼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무슨 일로 소일(消日)하고 있는가? 그대들의 소망은 비열하고 그대들이 소유한 것들은 비참한 것들이구나. 이토록 밝은 빛 앞에서 그대들은 어찌 눈이 멀었으며, 이토록 우렁찬 소리 앞에서 그대들은 어찌 귀가 먹었는가?"[22]

우리로서는, 이 값비싼 진주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진정 모두 팔도록 결심하게 하기 위해서, 신앙(信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고귀한 진리(眞理)들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이 값비싼 진주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23]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함을 말하는 것이다.

     

          3장. 우리 안에서의 하느님 생명의 성장

                 하느님의 내적(內的)인 생명에 대한 인간의 참여는 천상 영광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지만, 그 참여는 -많게 혹은 적게 진보한 성장의 상태에 있기는 하나- 이 지상에서 이미 실재(實在)하고 있다.

    

                1. 생명과 생명력(生命力)

                   어린 아이는, 태어나는 때부터 인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들만을 한다. 배가 고프면 울고, 만족하면 웃는다. 어린 아이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훈련을 통해서 더 적절하게 인간적 활동을 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성장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마찬가지다. 세례를 받는 때부터 그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긴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적합한 활동을 완전히 하는 데에, 또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을 실천하는 은총에 도달하는 것은 오직 조금씩 조금씩만 이루어진다.

실제로, 거룩해진 인간 안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세례 때에 활동하기 시작하신 성령(聖靈)께서 영혼 안에 현존(現存)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의 친밀함 안에 인간이 들어간다는 것과,

- 인간의 모든 행위들에 이 생명이 통교(通交)된다는 것인데, 이는 대신덕(對神德, 向主德)에 의해이루어지고,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계속 증진된다.

       

                2. 세 가지 대신덕(對神德)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은, 인간의 행위들을 하느님의 생명에 밀접히 결합시키고, 그리스도 그분의 행위들의 완전함에로 인간의 행위들을 들어높임으로써, 인간의 행위들을 거룩하게 한다. 이 때문에 신덕·망덕·애덕을 '대신덕(對神德)' 혹은 '향주덕(向主德)'이라고 부른다.

신덕(信德)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실재(實在)를 인식(認識)하고 판단하시는 것처럼 실재를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한다. 망덕(望德)은 우리의 모든 욕구를, 예수께서 성부(聖父)의 영광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곳에로 방향지워 준다. 애덕(愛德)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듯이 사랑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신덕(信德)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생각하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고, 망덕(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바라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고, 애덕(愛德)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대신덕(對神德)의 수업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이 덕(德)들의 성장이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와의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나, 보다 외적(外的)이고 보다 가시적(可視的)인 표시들에 있어서나, 신적(神的) 생명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3. 성령(聖靈)의 선물들

                    대신덕(對神德)의 훈련은 성령(聖靈)의 선물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 성령의 선물들은, 덕(德)들에 대한 훈련을 이처럼 쉽게 하는 하느님의 도움에 대해서, 우리가 민감하게 또 순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영혼이 특히 대신덕(對神德)의 수업에 열중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덕(德)들이 실천되면 실천될수록 성령의 선물들이 영혼에게 더욱 많이 전달되기 때문이다.[24]

 

 

 

 

 

 

Llama de amor viva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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