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덕이란
완덕이란 인간이 내외적으로
항상 평화 중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으리라"
(요한 16,33)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고난투성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하지 못했을 때
작은 고통들은 그분의 현존을
맛들이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
나는 고통이 없는 영혼만이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고통이나 어려움이나 슬픔이 닥쳐 왔을 때,
하느님을 맛들이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고통은 나를
하느님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한 수단이 되었다.
나는 고통이나 슬픔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친다.
예수님께도 바로 그렇게 하셨다.
영원한 말씀과 결합하셨던
예수님의 인간성은 자신을 낮추고,
가난과 아픔 등을 자신의 천주성에
끊임없이 희생으로 바치셨다.
하지만 그분의 천주성은
인성이 고통 중에 계실 동안
당신이 누리고 있는
천상적 감미로움을 인성에도 전달하고 계셨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영혼들에게도 드러내신다.
그분은 영혼의 한 부분은
당신의 현존 체험으로
깊은 평화 중에 머물게 하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영혼의 다른 부분은
불안과 고통으로 망가뜨리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언제나
이러한 모습으로만 드러내시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오성과는 관계없이
단순한 믿음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결합할 수 있는
고요에 드러내시기도 하고
때로는 영혼이 현존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비추임을 받기도 한다.
이 빛 가운데 영혼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게 된다.
그리고 곧 그 영혼은 확신을 가지고
자기 안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인식하게 된다.
경외심과 사랑 속에서 영혼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하느님의 영혼을 노래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영혼은
무한한 평화를 누리고
천상적인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어떤 위로보다도 십자가와 고통이
우리를 훨씬 더 온전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이끌어 준다.(2고린 7,4).
정화의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가장 높은 완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피조물에 대한 완전한 이탈과 죽음을 통해서만
완덕의 길에 흔들림 없이 꿋꿋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에서의 합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