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7회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31일(토빗기 1장~) 서산대사는 “눈 덮인 길을 걸어가거든,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지금 너의 발걸음이 뒷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참된 겸손》책을 읽다가 '겸손은 땅이다.' 라는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맺게 한다는 것.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다. 내 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밟히고 눌리고 다져지고 아픈 것이 겸손이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맺는 것이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평화를 빌어 주어라.” 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평화’ 를 전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른, ‘영원하고 참된 평화’ 입니다.(요한 14,27)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 를 전해 주려면 나 자신이 그 평화를 이미 받아서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평화를 받아서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2.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은(9절-10절)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믿음만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3. 선교활동의 결과에 대한 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 일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은 “예수님의 평화를 얻기를 희망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이라면”입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더라도, 누군가가 와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 또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선교활동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인도하는 활동입니다.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에는 주님의 종 또는 성령의 봉사자가 빌어 주는 ‘예수님의 평화’ 가 내리고” 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신앙여정이 시작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마땅하지 않으면” “복음을 거부하면” 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부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신앙 전교활동의 현실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의 책임은 거부한 사람 자신의 책임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과에 집착할 때가 많다. 신앙 전교활동은 활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활동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4-15)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심판 때에 먼지가 털려 나가듯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이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 는 아니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소’ 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 만 있다. 그래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에는 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기뻐하고, 사람들이 거부할 때에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신 것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강조하신 것.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8-11)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업’ 이 아니라, ‘사랑 실천’ 입니다. 사랑을 줄 때에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냥 주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신앙 전교활동이란,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것’ 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 을 사람들과 나누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즉 ‘빈손’ 으로 가라는 말씀은, 신앙 전교활동이란 ‘돈의 힘’ 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믿음의 힘’ 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돈의 힘으로 한다면,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사도 8,20) “그래도 활동비와 생활비는 필요하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활동비와 생활비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걱정하다가는 그런 것만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그냥’ 믿어야 합니다. 자꾸만 토를 달고, 비유니 상징이니 하면서 복잡하게 해석하고, 그래서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하면, 그것은 정말로 믿음 없는 태도가 됩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 믿음과 걱정은 반대쪽에 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누군가가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거든 감사히 받아들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맞아 줄 사람을 찾아내라는 뜻도 아니고,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미 주님의 권한으로 보호를 받고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누군가를 기억하면서 묵주 알 한올 한올에 새기며, 그들도 주님의 자비로 보호를 받는 은총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인간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 독일의 문호 괴테 - |
♡2329회 "지금(只今) 살고있는 이 순간(瞬間), 이곳에 충실(忠實)하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일(유딧기 1장~)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지금(只今)이란? 말하는 바로이때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가면 기둥에 연(連)이어 걸어놓은 글판(版)에 이런 좋은 글이 있다. “원각도량하처 (圓覺度量何處)”라는 글이다. “깨달음의 도량(度量) 즉(卽) 행복(幸福)한 세상(世上)은 어디인가?” 라는 뜻이다. 그 질문(質問)에 대(對)한 답(答)은 맞은 편(便) 기둥에 새겨져 있다. “현금생사즉시 (現今生死卽時)” “당신(當身)의 생사(生死)가 있고 당신(當身)이 발 딛고 있는 지금(只今) 이곳이다.” "지금(只今) 살고있는 이 순간(瞬間), 이곳에 충실(忠實)하라." 는 뜻이다. 삶의 모든 순간(瞬間)은 첫 순간(瞬間)이면서 마지막 순간(瞬間)이고 유일(唯一)한 순간(瞬間)이다. 지금(只今) 이 순간(瞬間)은 영원(永遠)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瞬間)이다. 평생(平生) 일만 하고 사는 바보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지금(只今, now, present) 이다. 매(每) 순간(瞬間)을 생애(生涯)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과거(過去)에 연연(戀戀)하지 말고 내일(來日) 일을 오늘 걱정하지 마라 .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來日)의 비를 위(爲)해 오늘의 우산(雨傘)을 펴지 마라." 오늘 지금(只今)에 그리고 내가 있는 이 곳에서 충실(忠實)하고 최선(最善)을 다하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重要)합니다. 인생(人生)에서 무엇보다 중요(重要)한 것은 '지금(只今,now)' 과 '여기(here)' 입니다. 오늘을 응원합니다.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소리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냄새로 알 수도 없다. 소리는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소리는 혀로 맛볼 수도 없다. 소리는 오직 귀로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눈을 감고 들어야 잘 들립니다. 이 아침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전해보시면 어떨른지요 향기는 코로 맛볼 수 있다. 향기는 만지거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혀로 맛볼 수도 없다. 향기는 촉감 없이 눈을 감고 코로만 느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해맑은 아침 좋아하는 꽃향기에 취해보는 건 어떨른지요?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은 만지거나 코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향기도 멀리하고 감촉도 멀리하고 맛도 멀리하고 오직 눈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꽃은 바라만 볼 때가 아름답다. 메밀꽃은 보기엔 아름다운데 향기는 지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깨끗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꽃의 감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맛으로 알 수도 없다. 꽃의 감촉은 오직 만져봐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감촉은 눈을 감고 향기도 멀리하고 만짐으로써 느껴야 합니다. 꽃은 감상하는 것이 좋다. 꽃은 향기로 말하는 것. 꽃은 아름다움으로 말하는 것. 그래서 꽃은 느끼는 것. 진리도 이와 같다. 진리는 발전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 진리는 직접 체험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꽃의 향기와 같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경험으로 맛보는 것. 볼 것은 보고 들을 것은 듣고 향기로운 것은 향기로 맡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느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살짝’ 우리에게 맛보여주고 계십니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아직 가본 적이 없는지라 확신 갖고 이야기 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하느님 나라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풍요로움’ 이 아닐까요? 한없는 관대함과 자비로움이 아닐까요? 엄청난 ‘확장성’ 이 아닐까요? “여러분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두 가지가 있을 것. 첫 번째는 하느님 나라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상상했지만 막상 직면했을 때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 천배 몇 만 배 아름다운 곳이어서 깜짝 놀랄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천국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놀랄 일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천배 몇 만 배 더 자비롭고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어서 깜짝 놀랄 것.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 다가올 미래, 하느님 나라, 하느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절대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큰 기대와 설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날을 기다리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우리의 모든 상처, 고통, 어두움, 부끄러움, 수치심, 죄, 미움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그분 사랑에 완전히 용해되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분의 한없는 자비 그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말끔히 씻어지는 곳, 우리가 태초의 깨끗한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너무나 자상하고 사랑 많으신 하느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우리의 아주 작은 선행 하나, 이웃을 향한 아주 미세한 희생 하나,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실천한 티끌만한 사랑의 봉사 하나가 백배, 천배 확장되어 하느님으로부터의 아낌없는 칭찬과 보상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겨자씨 비유 앞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무 하나를 생각해봅니다. 나를 ‘나’ 라는 작은 틀에서 해방시켜 더 큰 사람으로 더 사랑 많은 사람으로 성장시켜야 하겠다. 나를 ‘쫌생이’ ‘찌질이’ ‘짠돌이’ ‘좁쌀영감’ 으로 살게 하지 말며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 세상을 초탈한 순례자로 변화시켜야겠습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예수님께로 가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오늘도 이미 주님께 보호받고 은총으로 행복한 자비를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라.'' - 탈무드 - |
♡2330회 밀알은 죽는 고통을 겪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3일(에스테르기 1장~)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긍정의 안경과 부정의 안경》부정의 안경을 쓰고 보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체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착한 사람은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고 얌전한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활력 있는 사람은 까부는 사람으로 보이고 잘 웃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예의바른 사람은 얄미운 사람으로 보이고 듬직한 사람은 미련하게 보이나 긍정의 안경을 쓰고 보면 잘난 체 하는 사람도 참 똑똑해 보이고 어수룩한 사람도 참 착해 보이고 소극적인 사람도 참 얌전해 보이고 까부는 사람도 참 활기 있어 보이고 실없는 사람도 참 밝아 보이고 얄미운 사람도 참 싹싹해 보이고 미련한 사람도참 든든하게 보인답니다. “경찰관이나 선생님, 의사가 젊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화제에 대해 잘 모른다. 허리를 숙이면 소리가 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전자기기들의 작동 방법을 잘 모르게 된다. 몸이 뻣뻣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오후에 낮잠을 자야 한다. 몸을 굽힐 때 신음소리가 나온다. 최신 음악 그룹의 이름을 모른다. 관절염이나 병에 대해 많이 얘기한다. 시끄러운 술집을 싫어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중년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40세에 세상의 일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60세에 마음이 유순해져서 무엇을 듣더라도 거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생각하는 중년이라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일에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기보다는 나의 욕심과 욕망을 따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감언이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무엇을 더 채우려는 생각에서는 중년이지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면에서는 중년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몸의 중년을 맞이할 것. 생각의 중년, 마음의 중년은 끊임없는 성찰과 수련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다. 신앙의 ‘중년’ 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간다고 합니다.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와 분별이 충만하여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 진리의 영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 두려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 ‘복약 안내서’ 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성령봉사자의 강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인이 변해야 남에게 전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표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머리에 좋은 약을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의 위선을 책망하셨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 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마음을 갖는 것.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이며 나침판, 네비게이션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늦게 잠이 드는 분들이 있다. 주로 생방송을 보지 않고 하이라이트를 보는 편입니다. 주로 골을 넣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늦은 시간이라도 생방송으로 볼 것.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랬다. 처음부터 공부하기보다는 요점정리가 된 것들을 보곤 했다. 시간이 절약되기도 하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볼 것. 그래야만 전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인 예수님을 제단에 모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의 예수님을 제단에 모실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적대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은 요점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는 고통을 겪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가는 길에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때로 박해와 죽음도 있을 것이다. 가족과 헤어질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결혼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도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이제 배우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직장을 구해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진도 해야 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주어지는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은 계속해서 급여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는 가정의 희망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에 이르는지 말해 주고 있다. “당신은 가슴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몰래 저에게 지혜를 주시나이다. 우슬초로 정화수를 뿌리소서. 제가 깨끗하여 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다.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지금 우리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다짐으로, 주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우리들의 봉헌과 기도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시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 십자가의 성 요한 - |
♡2331회 인상을 쓰고 화를 내는데 상대방이 웃기를 바란다는 것은 거울 스스로 웃는 것과 - 똑같습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4일(에스테르기 1장~) 암브로시오의 영은 “주님을 위해 금은을 보관하여 두는 것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 더 좋다. 금 없이 사도를 파견하셨던 분은 금 없이 교회를 모으신다. 교회는 금을 쌓아 두는 곳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금 그릇을 보존하는 일보다 살아 있는 그릇들을 보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길 위에서의 기도》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가파르고 힘든 골목길을 헤매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나의 삶이 외롭고 고통 중에 있더라도 당신을 생각하기만 하면 어느새 굴뚝 같이 힘이 솟아오릅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서라도 감히 맛볼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당신을 통하여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 나는 나홀로 어둠의 강물을 흘러갈 수 없음을 이 순간 고백하고 싶다. 나를 더 낮추어서 겸손하게 사는 것도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나를 찾아 오시는 당신 앞에서 아기처럼 나는 깨끗해집니다. 빛으로 오시는 당신 안에 있을 때 나의 죄와 고통은 어느새 허물어지고 있다. 당신과 내가 하나로 일치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하는 것. 겨울의 꽁꽁 얼어있는 얼음 밑에서도 쉬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처럼 나도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영적으로 살아야 숨을 쉴 수 있다. 작고 초라한 나의 기도방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남몰래 별을 부르듯이 보름달을 바라보듯이 한 세상 살다가 눈물이 날 때는 오로지 당신에게 갑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집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당신 앞에 무릎을 꿇으면 어느새 눈물로 회개하게 됩니다. 성당의 아름다운 색유리처럼 당신의 기쁜 마음을 나도 이제는 닮아가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내 삶이 비록 아무리 고통스럽고 외롭더라도 당신을 기다리겠다. 당신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면서 당신의 뜻대로 살고 싶다. 차마 드러내기 싫은 내 모습도 당신 안에 있을 때 나의 눈물로 무너집니다. 오직 사랑이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눈 속에 묻힌 꽁보리처럼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기쁨이신 당신이여, 어서 나에게 오소서!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여 주시옵소서! 불평하는 내 마음에 기쁨을 주시옵소서. 낡아가는 시계바늘처럼 내 몸은 날마다 늙어가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는 시간도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기도하는 시간도 참으로 부족합니다. 당신의 숲길을 고요하게 산책하고 있다. 이제는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침묵 속에 말씀하시는 당신의 뜻을 가슴에 그대로 담아 새기면서 당신의 길을 떠나고 싶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지도 않게 조화롭고 평화스럽게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겠습니다.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면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지금 나에게 당신의 말씀을 조용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세상에 사는 동안 먼저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나도 당신의 은총을 기다리며 당신처럼 기뻐하면서 살겠습니다. 슬픔에 지쳐 울고 있을 때는 맨 먼저 당신을 묵상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당신의 방 안에서 기다리는 저에게 어서 와 주시옵소서! 당신의 산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어느 절의 스님께서 옛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고 헤어지면서 복권 한 장씩을 사서 나눠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님이 가지고 있었던 복권이 1등에 당첨된 것. 갑자기 찾아온 난데없는 행운이었다. 착실하게 수행을 하던 이 스님은 먼저 은사 스님에게 자동차 한 대를 사드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기도 차를 사는 등 세속적인 물건들을 하나둘 사기 시작했다. 점점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종교에 관한 생각도 달라지는 것. 결국, 동네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까지 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현재, 택시 기사를 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소유가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소유한 것은 지키면 지킬수록 집착도 커져서 행복이 멀어져 가는 것. 사실 소유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떠올려야 할 것. 사람들은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년 인사로 “부자 되세요.” 를 최고의 덕담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무소유를 강조했던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가 되기 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 사십시오. 부자 부럽지 않게 잘 사십시오.” 맞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잘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하게 사는 것? 그렇다면 행복하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세속적인 기준을 따져서는 도저히 그 정답을 찾을 수가 없다. 돈 많이 버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행복한 것 같지만 오히려 불행의 이유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높은 지위를 얻는 것 역시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라오기 때문에 무조건 잘 사는 것이라 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알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고 하시지요. 가족과 담을 쌓은 것일까요? 세상의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관계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것. 세상의 법칙보다 주님의 법칙이 더 우선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잘 사는 법이고,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므로, 세상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머무르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갈 때 분명히 세상의 것을 뛰어넘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 거울이 스스로 웃을 수 있을까? 큰 거울이 있는 거실로 아들을 부른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네 얼굴을 잔뜩 찡그린 후 거울을 보렴. 어떤 기분이 들지?” “글쎄요. 제 얼굴이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데요?” “그럼 거울에 비친 모습을 웃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웃으면 되지요.”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거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렴. 거울이 스스로 웃을 수 없듯이 상대방도 그냥 웃는 법이 없다. 아들아! 상대방을 웃게 하려면 먼저 미소를 지어야 한다. 어떤 불친절한 사람에게도 미소 지을 수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웃음, 미소는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게도 그 웃음과 미소가 돌아옵니다. 인상을 쓰고 화를 내는데 상대방이 웃기를 바란다는 것은 거울 스스로 웃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느님만 의지하는 예수님의 처연한 마음을 기억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의 축복을 받으시고,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감사와 축복을 빌어주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에게는 줄을 타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인생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기다림일 뿐입니다.” - 세계적인 외줄 타기 곡예사 칼 왈렌다 - |
♡2332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보낼 시간은 단 한순간도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5일(마카베오상 1장~)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예행 연습이 없는 인생》똑같이 변함없이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이지만 1초가 모여서 1분이 되고 1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됩니다. 이렇게 하루를 살고 한 달을, 그리고 한 해라는 시간의 단위를 살면서 세상만물은 변화를 거듭합니다. 이처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화되면서 일생을 마칩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고 또 과학이 발달한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생명과 시간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존재입니다. 특히 우리가 매순간 기억하면서 살아야할 것은, 인생은 예행연습이 없다는 것. 일초를 소중히 여기고 일 분을 아끼고 하루를 또 매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또는 다음에” 라고 미루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아갈 시간이 없다. 전도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상만물에는 다 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녀로서, 부모로서, 신앙인으로서 이웃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역할을 실행에 옮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보낼 시간은 단 한순간도 없다. 우리가 매순간을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아마 없을 것.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느님과 같은 거룩한 품성으로 만드시려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느낀다면 허락하신 시간을 단 한 순간도 거짓과 허영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는 말씀처럼 주님의 허락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학생이 나이가 지긋이 드신, 신앙심이 깊은 교수님을 찾아가 내세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잠시 숙고한 후에 교수님은 몇 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에게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에 동의하였다. 잠시 후 학생이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교수님은 갑자기 학생에게 그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를 아는지 물었다. 모른다는 학생의 대답에 교수님은 조용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내가 언제 죽는지를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이전의 며칠을 회개와 보속의 시간으로 비워두고, 나머지 시간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도 좋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순간순간을 죽음을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란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멀리 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의 삶을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꾸려나가는 것에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해서 종말을 대비하는 삶이란 종말에 대한 고려를 할 필요 없이 오늘을 주님의 뜻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의 주님의 태도는 도무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매 순간을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것 자체 만해도 우리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세상에는 복음에서 밀로 비유되고 있는 착한 사람과 가라지로 비유되는 그다지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더욱이나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이익과 현세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부유하고 잘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실은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합니다. 이런 마당에 단지 세상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는 말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밀로 비유되는 착한 사람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이신 주인은 악인을 지칭하는 가라지를 당장에 뽑아 버리라고 명을 내리거나 스스로 나서서 가라지를 뽑아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라지를 제거하겠다는 종을 만류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눈앞에 두고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을 것이 아니라 종말인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인의 말과 행동은 언뜻 듣기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수긍할 수 없지만 또 묵상 중에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대로 이해되어져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차피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 고유의 몫이니 우리가 나설 수도, 나서서도 안 되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손수 가라지를 다 뽑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고, 또 주인의 말대로 가라지를 서둘러 제거하려다 밀까지 상하게 할 위험도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렇다. 사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의 눈으로 밀과 가라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실제로 적대적인 계급이나 종족을 근절하여 순수하게 좋은 민족을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말하는 ‘인종 청소’ 라는 방법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보다 반인륜적인 범죄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 동안 밀과 가라지가 섞여있게 두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가 가라지를 서둘러 제거하려다 생기는 위험보다도 적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당장 가라지를 뽑지 않고 주인의 말처럼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 일순간에 좋지 않게 변할 수 있듯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은총으로 불릴 수 있는 어떤 계기를 통하여 좋게 변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늘 좋은 것을 행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서 항상 좋게 변할 수 있으며 그 좋은 상태를 지속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주변의 나쁜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과거에도 돌보아주셨음을 또한, 현재와 미래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듬뿍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는 좀처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 쇼펜하우어 - |
♡2333회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6일(마카베오하 1장~) 볼테르는 ''당신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미움을 지우개로 지우며》상대방의 욕심이 당신을 화나게 할 땐 너그러운 웃음으로 되갚아 주세요. 상대방의 거친 말투가 당신을 화나게 할 땐 부드러운 말씨로 되갚아 주세요. 상대방의 오만 불손함이 당신을 화나게 할 땐 예의 바른 공손함으로 되갚아 주세요. 당신을 화나게 한 상대방은 하나 더 미움을 얻고 가련함이 더 해지고 당신은 하나 더 미움을 지우고 사랑이 더해집니다. 미움은 단지 순간의 실수일 뿐 지니고 있어야 할 의미는 없다. 용서 함으로써 우리들은 성숙 해져 갑니다. 미움은 늘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다. 미움에 지배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용서가 만든 지우개가 필요 합니다. 용서 함으로써 지우개를 만드신 당신, 당신 가슴 속에 채워진 것들 중 만약 미움을 지운다면 그 만큼 당신은 무엇을 채우시렵니까? 당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수록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가능성은 더욱 커집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감각하고 냉정한 마음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텅 비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은 사랑과 자비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내면의 수행이 뒤따르지 않는 한,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편안한 환경 속에서 지내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바라는 기쁨과 행복을 절대로 느낄 수 없다. 팔레스티나 지방 농법과 우리의 농법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우리는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이랑을 잘 만듭니다. 씨앗이 묻힐 골도 적당히 파줍니다. 그리고 나서 씨앗을 심고 흙을 덮어줍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들은 파종 때가 오면 큰 씨앗통을 들고 무작위로 여기저기 흩뿌립니다. 재수가 좋으면 좋은 땅에 떨어져 살고,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무척이나 성의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농법입니다. 눈높이 교육의 전문가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삶의 배경들을 놓치지 않고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총 4부류의 사람들로 분류하셨다. ① 길에 뿌려진 씨 : 말씀을 들을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시선, 세속의 논리로만 말씀을 대하니 도무지 먹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선포해봐야 목만 아플 뿐입니다. 마치 길에 뿌려진 씨 같다. 씨를 뿌리자 마자 득달같이 새들이 날아와 먹어치우니 괜한 헛고생입니다. 말씀을 향한 마음이 굳게 닫혀 있으니 그 어떤 명 설교도 허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② 돌밭에 뿌려진 씨 : 선포되는 말씀을 우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지를 못합니다. 씨앗이 돌밭에 뿌려지다보니, 말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 즉시 좌절하거나 실망합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 잡목들을 제거하다보면 정말 괴로운 것이 가시덤불입니다. 뾰쪽뾰쪽한 가시들을 피해가면서 일하려니 얼마나 성가신지 모릅니다. 신앙 안에서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쓸데 없는 걱정이나 근심입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입니다. 시선이 온통 그리로 가 있으니 말씀이 제대로 뿌리 내릴 수가 없다. 풍성한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 :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얼마 간의 수분과 바람과 햇빛에 힘을 얻어 무럭무럭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무한 노력을 다합니다. 작은 씨앗 하나, 작은 모종 하나 심었을 뿐인데, 몇달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결실을 맺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결실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도 흐뭇할 것.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다. 우리네 인생도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옥하고 탐스러운 토양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우선 인생과 신앙의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가시 덤불들(불신과 의혹, 미움과 상처)을 걷어내야죠. 작물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돌들(게으름과 나태함, 분노와 악감정)을 말끔히 골라내야 합니다. 양질의 퇴비를 흩뿌린 다음,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보다 자주 우리 인생의 밭을 뒤집어야겠다.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겠다. 기존의 고착화되고 편협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과감히 뒤집어야겠다. 그것만이 좋은 삶의 토양을 마련하고, 백배의 열매를 위한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예전에 이런 격언을 배웠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이루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능성’ 을 주셨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다. 텃밭을 가꾸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다. 여린 모종이 잎을 내고, 줄기를 세우며 꽃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꽃이 지는 자리에는 방울토마토, 고추, 오이, 호박이 열렸다.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거름을 주면 텃밭은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텃밭의 호박을 보았다. 꽃이 피더니 드디어 호박이 열렸다. 2개가 옆집 울타리를 넘어갔다. 참 사람 마음이 요상합니다. 우리 울타리에도 넉넉하게 호박이 열려있었는데 옆집으로 넘어간 호박이 아깝게 여겨집니다. 호박은 굳이 울타리를 가리지 않고 생긴 대로 열리는데 나는 왜 울타리를 가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소유가 있고, 권리가 있는 세상입니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세상입니다. 커다란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우지만 부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거스를 수 없다면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자캐오를 예수님께서는 축복하셨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바늘귀처럼 작게 보일 뿐입니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8차선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일 것.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우리 울타리의 호박은 내가, 옆집으로 간 호박은 옆집에게 나눠주어야 하겠습니다. “도와줄 테니 따라만 와라.” 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또한 주님의 손을 잡고 “걸어, 걸어, 뛰어, 뛰어” 가는 행복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불이 붙은 우정이다. 그것은 조용한 이해, 상호 신뢰, 나눔, 용서이다. 그것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충성이다." - 앤 랜더스 - |
♡2334회 우리가 서로 거울이다. 웃으며 살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7일(욥기 1장~) 헨리 포드는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믿든, 할 수 없다고 믿든,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동과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을 믿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성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아내의 세번째 얼굴》인간은 대체로 평생 세개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간다. 첫번째 얼굴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얼굴이다. 부모로부터 유전자(DNA)를 물려받아서 생긴 얼굴이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을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얼굴에 부모·자식이라고 쓰여 있다. 보통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얼굴이다. 두번째 얼굴은 친구나 가까운 지인이 만들어준 사회적 얼굴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는 표정이 서로 닮는다. 잘 웃는 사람과 어울리면 덩달아 웃게 되고 늘 표정이 심각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심각한 표정이 된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거울효과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의 표정을 따라 하는 심리가 있다. 세번째 얼굴은 배우자가 만들어주는 얼굴이다. 결혼하고 나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 배우자다. 배우자가 웃는 얼굴이면 함께 따라 웃고, 찡그린 얼굴을 하면 따라서 찡그린 표정을 짓기 마련이다. 부부는 밤낮으로 수십년을 마주 보며 살아가니까 서로 닮을 수밖에 없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 얼마 전 대학 후배가 늦깎이 결혼을 하면서 축사를 부탁해왔다.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라 주례사에 준하는 축사에 나서게 됐다. 동창회 모임에 열심히 나오고 봉사활동도 진심인 후배라 기꺼이 수락했다. 무슨 말을 할까 심사숙고하다가 이렇게 정리했다. “신랑·신부는 오늘부터 서로 배우자의 얼굴을 책임져야 합니다. 아내의 얼굴은 남편이 만들고 남편의 얼굴은 아내가 만든다는 것을 명심하고 매일매일 노력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얼굴이 더 매력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배우 숀 코너리는 젊은 시절 영화 ‘007 시리즈’ 로 큰 인기를 얻었다. 수려한 용모로 본드걸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역할이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기의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숀 코너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매력적으로 변해갔다. 그가 노후에 출연한 영화 ‘더 록’ 이나 ‘장미의 이름으로’ ‘엔트랩먼트’ 를 보면 그야말로 ‘표정이 예술’ 이라 말할 정도로 매력이 넘친다. 우리 주위에도 젊었을 때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모의 매력이 배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의 공통점을 보면 덕성 좋은 사람과 교류하고 밝은 표정의 배우자가 있다. 부모가 물려준 얼굴이 제아무리 좋아도 두번째, 세번째 얼굴이 좋아야 성공한 인생이다. 좋은 친구와 선후배를 만나고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는 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요즘 우리나라는 성형 천국이 됐다. 코를 높이거나 쌍꺼풀을 만들고 주름을 없애기도 한다. 성형을 하면 더 젊게 보이고 더 깔끔해 보인다. 왠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이 사라진 사람도 있다. 심지어 같은 성형외과를 다니는 사람끼리는 얼굴이 닮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형제자매보다 같은 성형외과에 다니는 사람끼리 더 닮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성형도 의술이고 과학이니 효과가 있어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다. 즐겁고 행복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만들어진 환한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얼굴일 것. 오늘 부부 동반 모임이 있는데 아내는 거울을 보며 열심히 화장한다. 이제는 눈가에 주름이 생겨서 화장으로 가릴 수가 없는데 함께 병원에 가서 보톡스라도 맞을까 하고 묻는다. 결혼 후 수십년이 흘렀다. 나는 아내의 세번째 얼굴을 위해 얼마나 도움을 주며 살아왔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활짝 웃었다. 웃는 남편을 본 아내도 덩달아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그래, 우리가 서로 거울이다. 웃으며 살자! 사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다. 나 혼자 이런 시련을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잠시 뒤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참 많은 시련을 잘 이겨내어 왔다. 처음 우리가 세상을 볼 때를 기억하나요? 아마 아무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큰 고통을 이기고 세상에 힘차게 나왔다. 한번 다시 생각해 보세요.얼마나 많은 시련을 지금까지 잘 견뎌 왔는지요.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 시간이 지나면 웃으며 그때는 그랬지 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가슴에 저마다 담아둔 많은 사연과 아픔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얼굴이 굳어진 채로 지낸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달라진다면 그렇게 하겠다. 지금 당장 술을 다 마셔 지금 상황이 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시겠다. 지금 당장 어딘가에 화를 내고 누구와 싸워서 지금 상황이 달라진다면 백만 대군과도 싸움을 하겠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가진 시련이 달라지거나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상태일수록 그런 아픈 마음이 많을수록 하늘을 보고 웃어보세요. 그렇게 웃으며 차근히 하나씩 그 매듭을 풀어보세요. 너무나도 엉켜있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뿐이지 절대로 그 매듭을 못 푸는 것은 아닙니다. 수없이 엉킨 매듭이 지금 당신의 앞에 있다면 그 매듭 앞에 앉아 보세요. 마음은 많이 답답해질 겁니다. 언제 그 많은 매듭을 다 풀지 라고 생각을 한다면 더 답답할 것. 생각을 너무 앞질러 하지 마세요. 다만 앉은 채로 하나씩 풀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문제와 당당히 마주 앉아 풀어보면 언젠가는 신기하게도 그 매듭이 다 풀려져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찡그리거나 그 앞에 했던 고민들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시련이라는 단어를 붙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것. 당장 찡그리거나 가슴 아파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힘차게 웃으며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지난 후 풀벌레 소리와 시원한 큰 나무 밑에서 편안하게 쉬며 웃고 있을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 당신은 잘 할 수 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모두 돌볼 수가 없어서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하는 천사를 보내 주셨는데 그 천사가 어머니라고 합니다. ‘사랑’ 은 추상명사입니다. 무게를 잴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다. 그 사랑은 표시가 될 때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으면 우리는 사랑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면 되지, 굳이 말을 해야 됩니까?’ 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낼 수 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짐을 들고 가는 이웃의 짐을 함께 들어드리는 모습, 지친 이웃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 내가 지닌 능력, 재물, 시간을 나누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이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가족을 각별하게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집을 찾아가셨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였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마르타의 오빠 나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대화를 나누신 후 죽었던 나자로를 다시 살려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소생이라고 하지,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생과 사’ 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고,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주는 물은 곧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 것이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모두 영원히 살 것.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에 “아멘” 이라고 뜨겁게 외치는 믿음으로 우리와 우리들이 기억하는 모든 이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연을 배우고 사랑하며 그 곁에 있도록 하라. 자연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
♡2335회 사랑은 우리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진실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8일(시편 1편~) 헬렌 켈러는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십시오.'' 이 말씀은 어떤 어려움이나 역경에 부딪혀도 굴복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도전하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똑바로 응시하고 맞서 싸우면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라》이웃이 잘되어 좋아할 때까지, 사랑의 참된 기쁨은 주는 것일까, 받는 것일까? 사랑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상처받지 않는 사랑의 기술을배울 수 있을까? 사랑은 강요할 수 없다. 당신 안에는 이미 사랑이 숨쉬고 있다. 사랑이 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당신을 신에게 데려가고, 다시 사람들에게 향하는 문을 열어 준다. 당신의 삶을 살게 하고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역시 사랑이다.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소생할 수 있다. 사랑의 온기는 경직되고 마비되어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준다. 매달리고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집착은 사랑을 질식하게 만든다. 사랑이 살아 숨 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보살펴주면서 때로는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경계가 있어야 두 사람의 관계도 분명해지고 자유가 생겨난다. 사랑은 우리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진실이다. 사랑의 천사는 당신의 삶이 새롭게 변하기를 원한다. 숭고한 사랑은 결코 마르지않는 샘물처럼 언제나 당신의 마음속에 흐른다. 굳이 사랑을 창조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샘물은 당신 안에서 항상 넘쳐흐르고 있다. 언제든 퍼 올려 마시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진실이다.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되 사랑의 바닥까지 내려가라! 당신은 사랑의 샘물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의 ‘바티칸 산책’ 이 있다. 즐겨 읽는 지면입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오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케미’라는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흙수저 출신이고, 바오로는 금수저 출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고, 함께 지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몰랐고, 교회를 박해하였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조합같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와 바오로를 교회의 두 기둥으로 세우셨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칼로 당대 최고의 국가인 로마에 십자가와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베드로는 교회의 몸통이고, 바오로는 교회의 두뇌였다. 베드로는 교회의 몸통으로서 지휘권(수위권)을 행사했고, 바오로는 교회의 두뇌로서 역할을 하였다. 몸통 없이 두뇌가 존재할 수 없고, 두뇌 없이 몸통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상하 관계가 없는 투톱 시스템 같지만, 조직 운용에서는 상하 관계가 있었고, 상하 관계가 있는 투톱 시스템 같지만, 역할 분담에서는 상하 관계가 전혀 없었다. 공동체에 어려움이 있다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케미를 배우면 좋겠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제의 부모가 된다는 것, 사제가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부모님이 되어야 할 기준, 사제가 되어야 할 기준,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할 기준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서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립니다.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을 위한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 신발을 새로 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신발을 신으면서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왼쪽 발은 편하고 약간 헐거운 느낌이고, 오른쪽 발은 조금 불편하고, 꽉 끼는 느낌이었다. 특히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신발을 신으면 더욱 그랬다. 오른 쪽 발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똑같은 신발이기 때문입니다. 오른발이 아침이면 붓는 것이라 생각했다. 은근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다. 헐거운 왼쪽 신발을 벗으려고 하면 바닥의 깔창이 벗겨지려고 했다. 신발을 산 곳에서 수리를 맡기려고 부탁을 했다. 신발을 수리하는 직원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손님은 오른쪽 신발에 깔창이 2개 있습니다.’ 깔창을 하나씩 나누어서 놓으니, 착용감도 좋았고, 발도 불편하지 않았다. 원인을 알고 나니, 해결책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조정래 선생님의 ‘풀꽃도 꽃이다.’ 라는 작품을 읽고 있다. 우리의 교육 현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다.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처럼, 공교육이 들러리가 되고, 사교육이 중심이 되는 형편입니다. 학교는 인격을 수양하는 못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올바른 교육정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합니다. 성적 위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학교의 책임도 크다고 합니다.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의 책임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그런 모습을 ‘치맛바람’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여러분은 좋은 성적으로, 성공하는 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배운 지식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주는, 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배운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성공과 출세가 아니라고 하셨다. 교육의 목적은 진리를 배워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는 것이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힘들어도, 오늘 비록 가난해지더라도, 거룩한 ‘마카리오스 복’ 으로 희망의 그물을 던지며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를 모을 수 없다.'' - 핀페이 - |
♡2336회 사랑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포기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9일(시편 51편~)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 마음속을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용기와 뜨거운 가슴입니다.》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남의 이야기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한 소리 또하고 또하고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일을 보람으로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의무로 아는 사람은 불행하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투덜대는 사람은 불행하다.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쾌해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 말로 보여주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사람은 행복하고 불평으로 먹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많이 불행하다.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신이 만물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잘 된 이유를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하다.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 사람은 행복하고 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 사람은 불행하다. 목소리가 힘차고 생기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의 잘못을 잘 용납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의 잘못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무서워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차 탈 수 있는데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걸을 수가 있는데 차타는 사람은 불행 한 사람이다.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혹은 어디에서, 언제 그가 고요함을 찾을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자신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깐이라도 감실 앞에서 모든 걱정을 다시 한 번 펼쳐 보이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 또 어쩌면 신체적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자기 방에서 쉬는 것. 그리고 외부로부터 최소한의 고요함을 얻을 수 없을 때에, 들어가서 피난할 방이 없을 때에, 또 어쩔 수 없는 의무 때문에 단 한시간도 침묵할 수 없을 때에는 순식간에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곁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거기에 계시고,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주님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은 분명히 아버지와 홀로 대화하던 침묵의 밤의 시간들이었다.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그 분으로서의 그 분을 아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 분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사랑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포기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을 위해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기도는 인간의 영靈이 담당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과업입니다. 기도는 야곱의 계단이며 이 계단 위로 인간의 영은 하느님께로 올라가고 이 계단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에게로 내려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 속에서 하나가 되어 머무르는 것과 어느날 영원한 빛 안에서 서로 다시 만나는 것. 우리는 매일 매시간마다 영원 속에서 내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법을 점점 더 많이 배워야하고 이것을 위해서 기도 속에서 서로서로 도와야합니다. 에디트 슈타인 저희가 나약할 때마다, 연약할 때마다, 그리고 부족할 때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저희를 선택하신 주님께서 우리들 한 분 한분을 영원까지 붙잡아주시고 보호해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명성을 쌓는 것에는 20년이란 세월이 걸리며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에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걸 명심한다면 당신의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 워렌버핏 - |
♡2337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0일(시편 101편~)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람들이 그 뿌리의 감각을 잃으면, 그의 정체성을 잃는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에게 참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속한 전통을 잘 돌보는 것이다. 그래야 열매도 좋다.” 《하나인듯 둘이고 둘인듯 하나인 삶》부부라고 해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어떤 시인은 '부부란 결코 하나가 되서는 안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쪽이 완전히 굴복하여 하나가 된다거나 자기 존재를 전혀 찾을 수 없는 삶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뿌리는 하나지만 머리는 둘인 콩나물처럼 상대방의 정신세계를 인정하면서 한 곳을 향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몸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두사람의 존재가 각각 살아 있는 삶이 진정한 부부의 삶인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을 비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있어야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상대방을 내것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분재처럼 만들어가려는 욕심 상대방에게만 모든것을 의지하려는 집착. 모두 버리고 그가 살아 움직이는 그 모습 그대로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결혼 생활의 고통은 소유욕과 집착과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지나친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손의 따듯함이 전해져오거든 이 따듯함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그렇게 따듯하게 살아 있기에 내 손도 함께 따뜻할 수 있다 . [인생 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을 꼭 맞추어 주랴 마땅찮은 일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다정했던 사람 멀어져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 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잘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사는 것이 좋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 예수님도 사람을 피하신 적도 있으셨다.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마음쓰고 아파하지 말자. 세상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 부족한데도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다고 너무 안타까워 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인생은 결국 가는 것. 무엇이 영원한 것이 있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컴컴한 겨울 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보여 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그래, 우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 혜민스님 -] 길어지는 장마로 인하여 피해자가 속출했다. 1987년이 지금까지 장마가 가장 늦게 끝난 해라고 했는데, 몇년 전 8월 10일, 이미 기록적인 장마가 진행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이나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많은 피해자가 생겼다. 사람을 구하다가 함께 희생된 분들, 뜻밖의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파옵니다.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이와 같은 사고들을 접하게 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만약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참으로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상기하게 되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눈앞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야말로 우리는 언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재난들 가운데서 희생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 한 가지 질문이 파생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지 않으시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셔야 합니다. 사랑이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라면 특히 우리 신앙인들을 더욱 잘 지켜 주셔야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긴 기간 발생한 장마로 인한 피해자들 중에는 분명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있을 것.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 지은 형제를 다루는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일단 이 예는 죄를 지은 형제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첫 번째 단계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합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세 번째 단계로 교회에 알려야 하고 그래도 소용없으면 마지막으로 아예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굳건한 믿음과 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왜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의아합니다. 아예 형제가 죄를 짓지 않도록 그 가능성을 하느님께서 차단해 주실 수 있고, 단번에 타이르고 설득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실 수도 있는데 인간적인 노력이 지나치게 소모되는 것 같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놀라운 뜻이 이 안에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첫 번째로, 하느님께서는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 죄가 파생되고 그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일단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힘을 합쳐 이를 해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고자 하시고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으며 이를 통해 더욱 성숙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지속적인 단계별 노력을 바라십니다. 어린 아이가 두 발 자전거를 탈 때, 한 번 넘어졌다고 자전거를 빼앗아버린다면 그 아이는 평생 두발 자전거를 탈 줄 모를 것. 본인이 왜 넘어졌는지를 이해하고 몸에 균형을 잡아 나갈 때 자전거는 점점 타기 쉬워집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수동적인 인간의 모습보다는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세 번째로,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계시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인간적인 최선을 다 한 뒤,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어려움 앞에서 이러한 말들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일들을 극복할 수 있는 커다란 위로와 힘을 매번 새롭게 제공하신다는 주님의 권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권능은 결국 현세의 생명,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영원한 생명, 끝없는 행복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다시금 돌이켜 보아야 하겠다. 나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바라는 것이 일시적인 행복 혹은 현세의 삶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까? 또한 이러한 어려움들 앞에서 주님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방식이 아닌 당신만의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지속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멘 “손을 뻗어라.” 오늘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우리들 안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는 말씀의 능력이 있음을 믿고, 메마르고 오그라든 곳이 깨끗하고 성하게 회복되는 기쁨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는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성실하게 사랑하며 살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 마더 데레사 수녀 - |
성령기도회 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