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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295회 지금 이 순간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애착심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 탐욕이 되고, 탐욕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

♡2295회 지금 이 순간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애착심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 탐욕이 되고, 탐욕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29일(코린토1서 1장~ )

  아빌라 데레사는 “기름진 땅이라도 아니 가꾸면 가시와 엉겅퀴가 날 따름이니 사람의 정신도 이와 같으니라. 영성적인 일들을 항상 좋게 말할지니 이를 테면, 사제, 봉사자니라.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매양 말을 적게 하라. 하는 일, 대하는 일마다 조심성을 가져라. 언제나, 특히 하찮은 일에 마구 우기지 마라누구에게나 알맞은 기쁨으로써 말하라. 어떤 일에든지 조롱을 하지 말라. 신중과 겸손과 스스로 부끄럼 없이 남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서 기꺼워하는 이와 기꺼워하고 슬퍼하는 이와 슬퍼할지니 결국 모든 이를 얻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변명을 하지 마라.”
《그리스도여, 함께 해 주소서》그리스도여, 제 오른편에 오소서. 그리스도여, 제 왼편에 오소서. 당신은 저의 힘, 당신은 저의 평화 자리에 누울 때도, 앉거나 서 있을 때도 그리스도여, 함께 해주소서. 깊은 곳에서도, 높은 곳에서도 넓은 곳에서도 그리스도여, 함께 해주소서. 저를 기억하는 이의 마음속에 제 말을 하는 이의 입술에, 저를 바라보는 이의 눈에 제 말을 듣는 이의 귀에 그리스도여, 함께 해주소서. 당신은 주님 저의 구세주이십니다. 아멘! - 성 파트리치오, 5세기 중에서-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이가 ‘영원한 생명’ 을 얻고 싶다는 희망과 재물에 대한 애착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모습은, 이 젊은이만의 모습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 를 판단하는 문제이고, “얼마나 간절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하는가?” 에 관한 문제입니다. 나중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지금 많은 재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다면 재물을 선택할 것. 그러나 재물보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다면, 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쉽게 버릴 것. 말로는 쉬운데 실제로는 계속 갈등을 겪거나, 마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재물의 허무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사람은 끝끝내 깨닫지 못하고 생을 마칩니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깨닫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신 것은, 어떤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살면 된다는 뜻으로 대답하신 것. 무슨 대단한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엄청난 희생을 실천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기본적인 것을 충실하게 실천해서 성인품에 오른 분들도 많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10,21) 아마도 그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일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을 것. 그러나 그의 실천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느끼는 ‘부족함’ 이 자기 안에 있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 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십계명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십계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라는 뜻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성덕에 도달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그 애착심을 버린 다음에 할 일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이기도 하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렸음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렸다면, 재물은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는가?” 또는, “재물은 그냥 가지고 있으면서 애착심만 버리면 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재물을 그냥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위선’ 입니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재물과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일은 결코 손해 보는 일도 아니고, 헛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일입니다. 허무한 것을 버려서 영원한 것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린 다음에 두 번째로 할 일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요한 14,6) 그래서 “나를 따라라.” “나를 믿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십계명 실천이 완성됩니다. 그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나간 것은, 영원한 생명과 많은 재물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 가지 다 포기할 수 없었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음을 슬퍼했다. 만일에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만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예수님 말씀을 들었을 때 ‘기뻐하면서’ 돌아갔을 것. 예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나서, 기뻐하면서 돌아왔을 것.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런데 “수도자가 아닌 사람이 지금 당장 재산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반박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신앙인도 세속에서 살면서 세속 생활을 해야 하고, 그래서 재산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세속을 완전히 떠날 때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마음의 준비’ 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언젠가 ‘결정적인 때’ 가 되면 성령께서 알려 주실 것.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 곧바로 응답할 수 있다. 어떻든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하나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목표만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고, 그 생명만을 얻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일은, 그리고 재물을 버리는(포기하는) 일은 평소에도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애착심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탐욕이 되고, 탐욕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오늘 하루는 주변에 계신 은인들, 멀리에 계신 은인들, 그리고 죄송스럽게도 잊고 살았던 은인들을 다시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 봉헌하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 - 명심보감 -


♡2296회 ‘하느님의 뜻’ 은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구원’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1월 30일(에페 1장~ )

  안토니오 성인은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종말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2)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 3)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4)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서 오신다. 5) 심판 때에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지금’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종말과 재림의 날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실감 나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 막연하게 언젠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라고, 지금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바로 그런 생각이 방심과 자만심이 되고, 그런 생각 때문에 회개를 미루게 되고, ‘깨어 있지 않은’(전혀 준비되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오지 않은 종말이 정말로 올까?” 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있는데, 지나간 시간이 많을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아집니다. 인류 전체의 종말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각 개인의 인생의 종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은 채로,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하느님의 뜻’ 은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구원’ 입니다. 그 구원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종말과 재림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과 처벌의 날이 될 것.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 2) 그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갑자기 올 것이다. 3) 그러니 ‘항상(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어라.” 는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고 있어라.” 입니다. 어떤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됩니다.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벌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준비를 하는 것. “어느 날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 아니라,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점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온다는 점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 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을 도둑이 오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 자체는 특별한 뜻이 없고, 그날이 갑자기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오는 도둑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심판도 처벌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심판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 24,45-47)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각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잘 살면 주님께서 큰 상을 주실 것. 구원받는 것 자체가 큰 상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4,48-51)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교회를 망친 죄에 대해서 벌을 받게 될 것.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 이라는 말은, 앞의 23장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 에서 거듭 반복되었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불성실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고되었던 불행을 겪게 될 것. 이 ‘불행’ 은 심판, 처벌, 멸망을 뜻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말씀을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하면, 이 말씀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인생을 막 산 사람은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라는 말씀은, ‘갑자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라는 뜻인데,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예상할 수도 없고 미리 계산할 수도 없다는 뜻도 들어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첫날인 것처럼 여기고, 동시에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면서, 죽으나 사나 주님의 은총을 받는 축복된 삶이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 성 아우구스띠노 -


♡2297회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일(에페 1장~ )

  토마스 풀러는 ''작은 실수가 오랜 공을 무너뜨린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헛된 신앙입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합시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헛된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눈을 돌릴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언제나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신앙은 듣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 입니다. 1)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 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그 잔치에 참석하라고 ‘나’ 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 을 위한 일입니다. 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잔칫상에 차려 놓으신 음식을 우리가 먹는 것.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음식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3)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과 처벌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내리시기 전에 이미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 ‘잔칫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밖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 ‘안’ 에는 구원과 생명이 있지만, ‘밖’ 에는 죽음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4) ‘혼인 잔치의 비유’ 에 들어 있는 ‘혼인 예복의 비유’ 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어떤 대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 혼인 예복을 입는 것은 응답에 속한 일, 즉 응답의 일부입니다. 예복을 안 입은 채로 참석한 것은 사실상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것. 그것은 잔치에 참석하려는 마음 없이 그냥 잔치를 구경만 하려고 한 것. 예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서, 또는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밖에’ 남아 있게 된 것.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 22,2-5) 여기서 ‘초대받은 이들’ 은 유대인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복음을 들어도 응답하지 않는 오늘날의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이 응답하지 않은 이유는 임금의 잔치보다 자신들의 밭일과 장사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4,18-19) 이것은 하느님 나라, 영혼의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 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부르심’ 에 응답하는 신앙인들입니다.(요한 3,29) 하느님의 부르심은 손님들을 부르는 일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공들을 부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초대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잔치에, 또 자기 자신을 위한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6-10) 사람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인 일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하는 죄입니다.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새로 초대하는 것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잔치는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나의 자리는 없어집니다. 여기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원래 ‘모든 사람’ 을 구원하기 위한 기쁜 소식이고, ‘모든 사람’ 에게 선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 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을 초대한 것처럼, 또는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을 초대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그렇게 된 일이 아니고, 순서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루카 24,47).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길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갔는데 혼인 예복을 안 입었다고 꾸짖는 것은 너무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종들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려온 일은(10절),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온 일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하라고 초대한 일이고, 길거리에서 초대를 받았더라도 초대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고 잔치에 참석했을 것. 혼인 예복을 입는 것도 응답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 은 너무 하지 않나?” 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반대쪽에 있는 ‘멸망’ 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묘사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부르심이 곧 구원은 아니다. 응답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는다.”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직접 실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험담하는 것이 훨씬 쉽고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은 주님의 초대에 응답했지만 합당한 예복을 갖추지 않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바깥의 어두움으로 떨어질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하느님의 초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지 주위를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오늘도 우리 앞에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초대장이 도착할 것.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가장 좋은 예복을 갖춰 입으십시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우리에게 손짓하고 계십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그러자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아멘. 임금이 요구하는 혼인 예복은 마음의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 곧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새 인간의 옷으로,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으라는(에페 4,23-24 참조) 권고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고 따라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거나 내일 해도 좋은 일을 지금 서둘러서 한다면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다.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다. 싹이 돋고 잎이 패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법이지,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딸 수는 없다. 그러나 사리사욕에 눈에 먼 사람들은 차례와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열매를 따겠다고 덤빕니다. 순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일 뿐 아니라 인생을 헛살게 됩니다. 하늘나라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잔치이자 축제입니다. 누구나 그 축제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그 축제를 즐기게 됩니다. 하늘의 소리보다 사욕(私慾)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 하늘의 뜻을 따르기보다 욕망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잔치를 누릴 자격이 없다. 하늘나라의 잔치는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누릴 수 있다. 사욕에 사로잡혀 ‘지금, 여기’ 의 하늘나라를 놓치는 사람은 미래의 하늘나라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좀 더 베풀고 좀 더 참으며 주님 안에서 참 행복으로 살고, 주님의 종으로 우리들이 할 일을 주저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한계까지 가보면 분명해진다.'' - 니콜라스 펀 -


♡2298회 "승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이기지 못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2일(테살1서 1장~ )

  레이첼 카슨는 ''자연의 반복되는 후렴구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밤이 지나면 동이 트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안정감 같은 것.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돌리지 말라.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나 불행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궁지에서 벗어나 마음 편해지기 위해 즉각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물론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직면해야 하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면 책임을 떠넘기는 건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습관으로 굳어지게 된다. 진심만을 말하라. 상대의 환심을 사면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상대는 늘 기분 좋게 느끼고 당신에 대해서 좋은 감정으로 갖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은 아부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또한 상대를 마음대로 하려는 얄팍한 술책이거나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아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칭찬과 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칭찬은 진심이 뒷받침 된 것이다. 따라서 칭찬을 할 때 칭찬 그 자체 외에 다른 뜻이 없는 진실한 마음은 눈빛으로도 알 수 있다. 똑똑한 척하지 말라. 똑똑한 척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도 운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우선 똑똑한 척 행동하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그를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똑똑하면 이로울 게 없는 것이다.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선 감사하라. 당신 스스로 행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지금껏 당신이 이룬 것들을 열심히 생각해 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건강 가정 가족의 사랑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 고마워한다면 불행에 괴로워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분명한 유형을 알게 되고 더 많은 행운을 만드는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단정하게 차려 입어라. 단정하고 화려하게 차려 입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유행을 잘 따르는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다. 색상이나 잘 어울리는 옷차림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당신이 단정하게 매력적으로 차려 입으면 보는 사람들의 감각이 적극적으로 자극을 받아 당신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다. 인내심을 가져라. 운 좋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마감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 어느 순간에 페달을 밟지 앓고 미끄러져 내려가야 할 지도 잘 알고 있다. 질투심을 반드시 버려라.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감정은 질투심이다. 질투를 하면 스스로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적극적인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운과 기회를 망치게 된다. 질투심이 많아 보이면 당신은 결코 운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운 나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행운에 배 아파하고 인색하게 구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가져라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삶이 뜻한 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는 어쩌다 힘든 날일뿐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오늘 너무 너무 힘들다면  내일은 더 밝은 날이 기다릴 것이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한숨 자고 나서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쉽게 풀리기도 한다. 다이아몬드 채집꾼 라파엘 솔라노는 육체적으로 녹초가 되어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는 마른 강바닥 위에 있는 둥근 돌에 걸터앉아 동료 두 명에게 말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계속해도 소용이 없어. 이 조약돌을 봐! 내가 집은999,999개째야. 그런데도 지금까지 다이아몬드는 하나도 없었어. 만약 내가 다시 하나를 집으면 100만 개가 될 거야.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그만 단념하겠어." 세 사람은 베네수엘라의 강줄기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데 여러 달을 보냈다. 그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조약돌을 하나하나 집어보면서 다이아몬드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옷은 남루했고 모자는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솔라노가 외쳤다. "나는 이제 그만 포기하겠어!" 이때 그들 중 한 친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른 하나 더 집어. 그러면 100만 개가 되는 거야." "좋아!" 솔라노는 허리를 굽혀 한 조약돌에 손을 내밀어  집어 들었다. 그것은 달걀 크기만 했다. "됐어! 마지막인 거야." 그런데 그 조약돌은 무거웠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야!"  1942년 남아메리카 북부 베네수엘라에서 있었던 '해방자' 라고 불린 다이아몬드에 관한 실화입니다. 그 다이아몬드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크고  순수한 다이아몬드 였으며 뉴욕의 보석상에게 20억달러(약 2조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잘못 시작한 데 있지 않고  잘못 그만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장애물이 있는 것은 포기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승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이기지 못한다" 고 전설적인 미식축구 감독 "빈스롬바르디"는 말했습니다. 한번 뜻을 세웠으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말고 끈기 있게 도전해야 합니다. 달콤한 성공이라는 열매는 끈기의 댓가입니다. '내 서재에는 책이 있다‘ 중에서.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날, 아니 조만간 우리가 직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한평생 그려왔던 곳, 그리워했던 곳, 갈망했던 하느님 나라이기에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제 알량한 교리와 성경지식, 제 보잘 것 없는 신앙 체험이지만 총동원해서 결론을 내려 본다면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유한했던 이 지상에서와는 달리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결핍이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원 없이 채워지는 곳 그래서 우리 죄인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안에 온전히 치유되고 바로 서게 되는 은혜로운 장소. 언젠가 한 특별한 수도공동체를 방문하고 제 나름대로 큰 충격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잠시나마 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흔적, 예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서로 섬기고 헌신하니 거기서 무슨 명령이나 순명, 회헌회칙이나 특별한 요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정 공동체, 성령 공동체, 본당 공동체, 보편 교회 공동체에 간절히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 각 구성원의 끝도 없는 자기 비움, 자기 낮춤, 헌신과 내어놓음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을 많게 하는 기적, 그 배경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물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이 우선일 것. 그러나 아주 작은 모퉁이에 군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작은 내어놓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아주 작은 선행과 봉사, 내어놓음을 기뻐하십니다. 그 작은 우리들의 내어놓음을 기반으로 엄청난 당신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은 그렇게 기다리던 주 예수님을 만나는 기쁜 날로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늘 주님 앞에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복된 충실한 친구가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모든 재물은 똥 오줌과 같이 그것이 쌓여 있을 때에는 냄새를 피우고 뿌려졌을 때에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 - 톨스토이 -


♡2299회 “이 세상에 너밖에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3일(티모1서 1장~ )

  성 프란치스코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천상의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며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것. '사람의 아들' 은 땅에 근원을 두지 않고 하늘에 근원을 둔 새로운 사람이다. 제 8 째의 날은 ''사라지지 않는 날' 이다.' 이 날은 '이미 그리고 아직' 의 날이다 현재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언제나 '오늘' 이라는 하느님의 날이다.' 구원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죽음 저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다. 등에 기름을 갖추지 못하면 지금 '있는 상태' 그대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 '등' 은 그리스도의 몸이시다. '기름' 은 그분의 성령이시다. '성령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곧, '영적인 몸' 이 아니면 하늘에 근원을 둔 하느님에게서 다시 난 새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등' 의 지체이며 그리스도와 결합된 몸의 지체는 성령의 힘으로 다시 나게 되는 것.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성령의 힘에 의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사람의 몸을 취하셨듯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 당신이 되심은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 진다. 사람의 새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다시 새롭게 태어 나는 것도 성령에 의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 진다. 하느님 안에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만나' 새 생명의 씨앗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된 지체 성령과 함께 하늘 근원의 생명을 새로 얻지 못하면 '등' 과 '기름' 을 준비하지 못한 것과 다를바 없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과 사람의 합일되는 이 은총을 지니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며 성령의 성전이다. 하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서로 사랑하는 (새계명)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근원을 둔 새 사람 안에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성전이 그 안에 있는 것.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과 합일하여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벌써 들어 간 것. 이미 들어가 있지 못하고 하느님과 사람이 분리된 영혼은 자기 시간의 마지막 죽음의 어둠 속에서 주님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주셨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알게 해 주셨지만 자기를 비워 '말씀 그대로' 받아 들이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댓가를 마땅히 치르게 되는 것.

 그리스도의 몸이신 '등' 을 가지고 하느님의 성령이신 '기름' 으로 '아버지 말씀의 빛이 되지 못한 사람은 온 몸에서 '생명의 빛' 이 나올 수 없다. 그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아 하느님의 힘이 그에게서 은총으로 드러나지 않은 탓이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었으면 하느님과 합일하여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아버지의 달란트로 사람들을 섬겨서야 했었다. ' 세상에서 자기를 비우지 않으며 욕심으로 기름지게 자기 육신만을 돌보다 새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잃고 성령께서도 머무르시지 못하는 썩은 성전이 되었다면 거룩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 불순종하는 자식들은 '가진 것' 이 없다. 하느님께서 그 안에 사시지 않기 때문에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다. 천상의 것을 가진 사람은 지상에서도 천상의 모습을 심고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와 같이 빛나는 것. 영화나 드라마나 종종 접할 수 있는 대사들입니다. “이 세상에 너밖에 없다.” “내게 있어 그대처럼 소중한 존재는 없다.” “너는 내게 금쪽같은 존재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그대와는 바꿀 수 없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너만 잘된다면, 너만 낫는다면 난 널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다.” 가나안 부인의 딸을 향한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녀가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는 과정에서 겪은 인간적 수모는 꽤나 충격적이고 참혹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소문을 통해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메시아이심을, 그분이 얼마나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분이시라는 것을, 그분이 지니신 사랑은 남녀노소, 국적이나 국경을 초월한 크고 보편적인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신앙을 더 큰 신앙, 더 확고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약간의 작업’ 을 하시는 데, 그 강도가 ‘쪼끔’ 지나친 바가 없지 않았다. 마귀 들린 딸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가나안 여인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예수님께 소리 소리를 지릅니다

.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이 분을 놓치면 우리 딸은 끝장이다, 이번 기회 날려버리면 우리 딸은 죽음임을 잘 알고 있었던 여인의 외침은 얼마나 절박했던지 귀가 다 따가울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계속 시끄럽게 졸라대는 여인 때문에 괴로웠던 제자들이 “스승님,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렇게 소리 소리를 지르겠습니까? 이제 그만 뜸을 뜨시고 그녀의 딸을 치유시켜 주시지요.” 라고 권했지만 예수님의 툭툭 던지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냉정할 정도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가나안 여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 정말 자존심 팍팍 긁는 예수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꽤나 자존심 강하고 욱하는 성격의 우리가 가나안 여인이었다면,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군, 치사하다 치사해, 그래 안 된다는 데 어떡해!” 하며 돌아섰을 것. 그러나 딸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으며, 그래서 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던 가나안 여인이었기에, 그 쓰라린 시험, 혹독한 시험을 넘어서기 위해 또 다시 자기를 낮춥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며, 딸을 향한 가나안 여인의 정말 ‘바보 같은’ 사랑, ‘거지같은’ 사랑, 끔찍한 사랑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나안 여인 안에 긷든 예수님의 자비하신 얼굴을 느꼈다.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시는 ‘바보 같은’ 사랑, ‘거지 같은’ 사랑의 소유자가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기도했나요? 맘에 분노가 가득할 때 기도했나요? 어려운 시련 닥칠 때 기도했나요?’ 오늘 주님과 함께하시는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을 기도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 성 베르나르도 -


♡2300회 "사람이 왜 사는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랑할 -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4일(야고보서 1장~ )

  모파상은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가장 강한 사람》가장 강한 사람은 스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밝고 생각이 깨끗하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에 어떤 유혹도 다가오지 못합니다. 어떤 슬픔도, 미움도, 시기도 그를 당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행복으로 남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의 편입니다. 따라서 외롭지 않고, 외롭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고 흔들림도 없다. 그는 사랑을 낳고 기쁨을 만들며 감사를 나누며 희망을 전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진정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비록 율법교사의 의도가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나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과연 내 삶에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슨 계명인가? 계명이란 "함께 보내다." 라는 뜻이다. 즉 무엇을 향해서 내 자신을 내 던지는 것. 내가 지켜야할 계명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이 그 계명을 위해 던져지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릴 때부터 이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였다. "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부모로부터 귀가 달도록 들어온 말이었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고 한 분뿐이시고,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는 계명은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지켜야할 계명이었다. 전 국가적으로 이런 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대-한민국" 이라는 한 마디의 환호성이 좌절과 실의와 분열로 심체되어있던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일치감을 맛보게 했고 대- 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하였던 큰 에너지를 우리는 몇 년 전에 경험한 바 있다. 온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어떤 구호나 교훈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구한 역사를 내려오면서 한결같이 그네들만이 하나로 뭉치고 통일된 정신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위대한 힘은 바로 이 첫째 가는 계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면서 과연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줄 수 있는 어떤 위대한 가르침이 있었는가? 대-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고 대-한민국인으로서 흩으러지지 않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바쳐주고 이끌어 주는 어떤 계명이 있는가? 오늘날은 물론 과거에도 좁은 땅 덩어리에서 끊임없이 갈라지고 서로 싸우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는 어떤 위대한 계명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민족 전체가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가치도 목표도 없다. 나라가 그러하고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갓 태어난 자식에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전해줄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 때나 괴로울 때 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 내 인생의 지침이 되고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떤 가르침이나 계명같은 것을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기억이 없다. 나뿐인가? 부모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이 얼마나 될는지 의문이다. 우리네 부모들의 입에서 그냥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고 돈이나 많이 벌고 출세하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들어 본적이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왜 믿어야 하는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전달되는 것도 없고 또 전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너는 너로서 너의 생활을 하고, 나는 나의 생활을 하고 그저 오늘 하루 큰 사고 없이 생활했으면 되고 각자 먹고 각자 생활하고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간섭을 하지 않고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좋게 좋게 지내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마음 속에 담는다." 는 뜻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모상인 하느님을 우리 마음 속에 담을 때만이 가능하다. 인간은 본래부터 혼자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반드시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거들 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줄 거둘 짝을 찾고 있고 그리워 한다. 그리고 거둘 짝을 만났을 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있으면 자기의 부족함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 부족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 속에 담는 것이다. 이태리 나폴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왜 사는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그냥 행복한 거다. 세월이 가든 말든, 차가 밀리든 말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눈이 내리면 눈이 내려서 더욱 좋다. 차가 밀려 늦게 도착하면 늦게 도착해서 좋고, 빨리 도착하면 빨리 도착해서 좋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있으면 늘 행복하다. 왜 사는 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런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만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하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우리 마음을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첫째 가는 계명이다. 하느님을 내 마음에 담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면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고 좋은 법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우리가 자식들에게 또 하느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를 불평 없이 그냥 껴안고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받는 은혜로운 날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들랑 그 돌 끌어안고 일어서라. 나는 넘어짐으로 행복하였고 일어섬으로 더욱 행복하였노라.” - 일어섬에 대하여, 손희락 -


♡2301회 차별과 편견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고 그 교만은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 열등감에서 옵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5일(요한묵시록 1장~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아름다운 기도문》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늘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의 통로를 만들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건강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미국에서 요즘 인종차별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흑인 남성의 체포 과정 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조지 플로이드가 질식사하였고, 며칠 전에는 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이 쏜 총 7발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블레이크는 비무장 상태였고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많이 받았다. 특히 중국 사람이라고 하면서 차별을 할 때는 기분이 더 나빴다. 그러며 ‘나도 중국 사람을 차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했다. 독일에 갔을 때는 어떤 사람이 어깨로 일부러 치면서 하이! 히틀러!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한국 사람들도 인종차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끼리 흑인을 지칭할 때는 ‘검둥이’, 혹은 ‘연탄’ 이라고 했다. 반면 백인들을 대할 때는 자세가 아주 달랐다. 이런 인종차별은 어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어떤 필리핀 사람이 부자 동네 벽에다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는 글을 쓰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 부부가 이렇게 묻습니다. “여기가 당신 집인가요?” 필리핀 남성은 그건 왜 묻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건 사유 재산이거든요.” 부부는 화장품 회사의 경영자였다. 그리고 낙서를 하는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 퍼시픽 하이츠였다. 한 필리핀 남성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동네 벽에다 그런 낙서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낙서하든 뭘 하든 당신 맘인데 여기에 이렇게 하는 건 안 돼요.”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만약 내가 여기에 살거나, 이것이 나의 사유 재산이라면 문제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내가 여기 살거나 여기가 내 사유 재산인지 당신은 모르고요.  당신들이 여기에 살고 있군요, 그렇죠?” 여자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렇진 않지만, 여기에 누가 사는지 알기 때문이에요.” 상당히 부잣집이었던 것 같다.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그럼, 여기 사는 사람한테 전화하든가 경찰한테 신고하세요. 당신이 나를 범죄자 취급하니까요.” 그러자 여자는 진짜로 경찰에 신고하였다. 하지만 경찰이 왔다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갑니다.  벽에 글씨를 쓰고 있던 남자는 그 집에서 18년째 살고 있던 필리핀 출신 제임스 후아닐로 씨였다. 인종차별 반대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집 담벼락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글을 쓴 것. 백인 부자 동네에 아시아계 황인종이 살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 때문에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던 것. 라페이스라는 소규모 화장품 회사 CEO였던 리사 알렉산더는 ‘인종차별’ 이라는 거센 비난에 회사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도 닫아야 했다. 차별의 원인은 ‘선입견’ 입니다. 그런데 그 선입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교만함’ 에서 옵니다. 자신이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한국에 태어난 것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 박해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30년 동안 보아오던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선입견은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나왔다. 그들에겐 이 교만을 꺾을 수 있는 믿음이 없었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서 나오기에 믿음만이 치료약입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광해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광대를 왕으로 앉힙니다. 광해는 그동안 사람들을 깔보는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양귀비에 중독되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천민인 하선은 오랜 시간 왕 노릇을 해야 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왕처럼 느껴졌다. 왕이 된 천민 출신 하선은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이나 빚에 팔려서 무수리가 된 사람들에게 다정히 대해줍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 같은 사람도 왕이 될 수 있다면, 당신들도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어서 그렇게 된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사람도 귀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 차별과 편견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고 그 교만은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열등감에서 옵니다. 열등감이 자존심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교만입니다. 참다운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보고 존중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 라고 말하는 한 노숙자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우리도 믿기만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세상 누구도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왕이 되었다면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누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심을, 주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심을, 주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심을 늘 잊지 않게 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장 훌륭한 예언은 상식, 즉 우리의 원래의 지혜이다.'' - 에우리피데스 -


♡2302회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6일(요한묵시록 16장~ )

  마빈 토케이어는 ''평생토록 배워도 부족하다.  방대한 지식보다 배우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단순한 지식보다 지혜를 더 중히 여겨라.   질문은 해답과 마찬가지 힘을 가지고 있다. 배움에 있어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말라. 일상 생활의 타성에서 벗어나라. 남보다 뛰어나기에 앞서 자신을 뛰어 넘어라.  배우는 일에는 때와 장소가 없다.''

《행복은 마음속에서 크는 것》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 생각해 보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 세상은 하나이다. 그러기에 행복은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요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행복도 하나의 기술이라 말할 수 있을 것. 높은 학력을 가졌으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은 부자이면서도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기에 만족이나 행복은 반드시 소유에 비례하지 않으며 지성이 그것을 보장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시인 백낙찬은 "인생을 부귀로서 낙을 삼는다면 좀처럼 낙을 누리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만족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는 뜻일 것.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느끼느냐 행복하게 느끼느냐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인 것.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조건 속에서도 만족함을 발견해 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건 속에서도 눈물 흘린다. 행복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함에 감사하다. 그래서 옛 성인은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 그리고 때때로 진리를 듣는 것은 최상의 행복이다" 라고 하셨다.

존경할 스승이 있고, 섬겨야할 어른이 있으며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나 이웃이 있으니 얼마나좋은 일일 것인가. 남들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길지라도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갖는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따분한 인생을 산다. 할 일이 없어 누워있는 사람보다는 거리에 나가 남이 버린 휴지라도 줍는 일을 하는 사람이 몇배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기쁨은 반드시 커다란 일에서만 오는것은 아니다 남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보람을 찾으면 된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거짓 없이 진실로 대할 때 행복한 것이지 아무리 큰일이라도 위선과 거짓이 들어 있으면 오히려 불안을 안겨주고 불행을 불러오게 된다. 그래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명성보다는 진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잠 못 이루지 말고 잊을 것은 빨리 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한 성자에게 "당신은 가진 것이라곤 없는데 어찌 그렇게도 밝게 살 수 있느냐" 고 여쭈었다. 그때 그 성자는 대답하셨다.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당장 일에만 전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지고 근심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 슬퍼한다." 그렇다 공연한 일에 매달려 근심 걱정하지 않고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어버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행복의 길이다. 슬펐던 일을 자꾸 떠올려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히지 말고 화나게 했던 일, 기분 나빴던 일을 회상하여 분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못된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 항상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환희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밝게 만들어 준다.

이렇듯 행복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욱 견고하게 그 뿌리를 내리는 것. 우리가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교회의 반석, 초대 교황, 위대한 사도, 천국의 관리자...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더욱 존경스럽고, 더욱 정감이 가고,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인생사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흑역사들로 즐비했다는 것.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향한 오랜 신앙여정에서 수시로 흔들렸고, 나약했고, 갈등했고, 번민했다는 것. 그 같은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마태오 복음 14장 22~33절에 잘 그려지고 있다. 이른바 ‘수제자 갈릴래아 호수 퐁당 사건’ 입니다. 사도단 일행이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질러 가려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맞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파도가 얼마나 거세던지,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도 배는 항상 그 자리였다. 기진맥진 탈진해져 제정신이 아닌 제자들 앞으로 예수님께서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셨다. 그 모습에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스승이요 주님, 구원자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 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스승님을 보고 사색이 되어 유령이라고 외쳤던 사도들, 그러나 막상 확인해보니 스승님이셨다. 무척이나 ‘뻘쭘’ 한 상황이요 어색한 순간, 가만히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베드로 사도가 또 나섰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그가 용기백배해서 물위를 몇 걸음 걸어 예수님을 향해 걸어갔다. 스스로도 놀랐다. “아싸! 이제 나도 된다. 나도 스승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다른 제자들 앞에 우쭐해졌을 것. 그러면서 좀 뻐겼을 것. “자네들 나 봤냐? 나야 나! 나라구! 수제자!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야.” 그러나 팽배했던 베드로 사도의 자만심도 촌각이었다.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잔뜩 기고만장 해있는 그에게 한방 제대로 먹이십니다. 순식간에 거센 바람을 일으켜 베드로 사도 앞으로 보내십니다. 갑자기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는 여지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그 자신감, 당당함을 순식간에 사라지고 큰 두려움에 체면불구하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마치도 개그 프로그램 한 코너를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수제자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입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주님 부재시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 때 인간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탄 배 위로 승선하실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게 물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선을 내려 깊은 물 속을 바라볼 때, 갑작스레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 역시 주님만 바라볼 때 강건해집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오늘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를 불평 없이 그냥 껴안고 갈 힘과 용기를 받는 은혜로운 삶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


♡2303회 영적인 삶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수직상승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7일(창세기 1장~ )

   헨렌 켈러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집착을 벗어놓고...》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처럼 여기며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아 소유하며 삽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 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잠시 온 것을 '내 것' 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 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 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 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다. '나' '내것' 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 나' 가 드러나게 될 것. 놓음... 잡은 것은 놓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으십시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 에만 집착하여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 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 자아를 의미하는 것.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 나의 자리에 돌려 놓으라는 것. 아멘. 영적인 삶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수직상승이 없다. 기도 생활 역시 힘 하나 안들이고 에스켈레이터 타고 올라가듯이 편안하게 올라갈 수가 없다. 오직 한 발 한발 오르막 계단을 이용해 밟고 올라가는 길밖에 없다.

오랫동안 지속된 깊은 영혼의 밤, 끔찍한 하느님 부재 체험,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이 데레사의 신앙 여정 안에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데레사는 영혼의 무미건조함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아주 소중한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 “최고 단계의 완전성은 내적 위로나 고상한 황홀감이나 현시, 예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합일시키고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동일시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이성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城)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문입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데레사는 오늘도 영혼의 깊은 밤 속에 하느님 부재 체험을 겪으면서 지루한 영적 투쟁을 해나가는 우리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계십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며 무엇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하느님만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 하느님 부재 체험, 버림받은 느낌이 다가 올 때 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캄캄해도 희망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밝은 대낮이 다가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앞길이 막막해도 우선 내 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를 떠받히고 계심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한없이 자비하시고 끝없이 인내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시지만 마냥 좋으신 분, 속없이 마음 좋으신 분만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사랑의 경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들, 그 좋은 산상수훈을 듣고도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은 무척이나 준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낸 대표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다.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러 부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엘리트 집단의 사람들이었으며 나름 하느님과 신앙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당대 유다 백성들 가운데 잘 나가던 주류층 사람들,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의외였다. 그리스도 심판의 번갯불은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집 위에 떨어졌다. 하느님 그리고 율법과 가장 가까이 있던 것처럼 보이던 그들은 하느님, 그리고 구원으로부터 가장 멀리 내쫓기게 되었다.

반대로 가장 멀리 있던 사람들이 가장 하느님과 구원에 가까이 부름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분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수용할지 말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각자가 선택한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신 동시에 심판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복음은 평화롭고 고요하지만은 않습니다. 수용과 응답에 대한 강한 요구와 함께 우리에게 던져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하늘 문을 가로막고 있다. 영혼의 의사여야 하는데 영혼들을 악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반대로 그분의 훼방꾼이 되고 있다. 우리 역시 삶이 생각을 받쳐주지 못할 때, 강론이 생활을 뒷받침하지 못할 때, 말과 행동이 유리될 때 준엄한 예수님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지금 이 순간 나를 돌아봅니다. 신심 없는 신앙,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 구체성 없는 결심, 본질과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아둔함, 공연한 선민의식... 나 자신에게 요청되는 의무나 요구들에는 불성실하면서 이웃들의 어깨에 무거운 십자가를 올려놓은 위선과 이중성, 허례허식...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품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성모님을 부르며 예수님의 길인 ‘하느님께는 불가능 없는 성탄’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 괴테 -


♡2305회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9일(탈출기 1장~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친구들이여, 예수님은 모험의 주님이십니다. 항상 무엇인가 ‘넘어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편안함과 안전함, 편리함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소파를 신발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신발은 여러분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꿈꾸지 않았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줄 것. 그 길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수 있고 기쁨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기쁨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비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남기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우리 하느님께 ‘미쳐버린’ 사랑을 따르는 것이고 그 길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아픈, 결국 잘 풀리지 않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피난민들, 이민자들, 홀로된 이웃을 만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활동적인 정치인들,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를 좋게 인도하는 정치인들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보다 더 경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바치는 선물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침묵 속의 사랑》나는 과거에 자신을 믿었고 자신에게 희망을 두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제 나는 오직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게 희망을 두고자 합니다. 이렇듯 단순하고 실증적인 진리의 총체적 적용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침묵하는 것. 하느님께서 더 잘 들으시는 말은 침묵 속의 '사랑' 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뭔가 뚜렸한 것을 체험하거나 느끼려는 원의를 갖지 말고 사랑이 충만한 시선으로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하느님께 집중 사랑의 시선을 통해 영적 고요를 간직하십시오.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평화로운 고요 그 자체를 통해 말하십시오 (십자가의 성 요한)  영적 고요 속에서 하느님께 사랑의 시선을 집중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러면 차츰차츰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하느님의 평화와 안식이 거룩한 사랑에 감싸여 잇는 하느님께 대한 놀라운 최상의 인식과 더불어 당신의 영혼 안에 쏟아져 내릴 것. 당신이 독서를 통해 노력한다면 묵상을 통해 은총을 얻게 될 것이고 기도에 의탁한다면 관상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 그러나 결국 당신은 사랑의 시험대에 올려질 것.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터득하십시오. 나머지 일은 내맡기십시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은밀히 이루어지는 일은 그것이 하찮은 일일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루어지는 수천가지의 일보다 하느님께 더 기쁨을 드립니다. 사랑 때문에 여정에 오르는 동안 영혼은 피로하지도 않고, 남을 피로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까를르 까레또의 매일 묵상 중에서- 어느 수도원에 밥을 하루에 한 그릇만 먹는 수도자가 있었다. 한편 그와 달리 늘 두 그릇을 먹는 수도자도 있었지요. 이 수도원에서는 절제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기에, ‘두 그릇 수도자’ 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비난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두 그릇 수도자’ 가 먼저 주님 곁으로 갔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한 그릇 수도자’ 도 하늘 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한 그릇 수도자’ 가 보니 ‘두 그릇 수도자’ 가 하늘 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는 것. 그에 반해 자신에게는 별다른 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하느님께 따져 물었다. “하느님! 저 수도자는 세상에 살 때 절제하지 못해서 밥을 늘 두 그릇씩 먹었는데, 왜 한 그릇만 먹은 저보다 더 큰 상을 받습니까? 불공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저 수도자는 본래 밥 세 그릇이 정량이었다. 그런데도 두 그릇만 먹느라고 무척이나 참고 절제했다. 하지만 너는 너의 정량인 한 그릇을 빠지지 않고 먹지 않았느냐?” 누가 더 절제의 생활을 했을까요? 이처럼 나의 기준이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함부로 판단했다가는 오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하는 것.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분노할 시간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딴 생각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 주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돈을 갚을 방법을 지시합니다. 이는 종이 얼마나 큰 빚을 탕감받은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그도 동료 종들에게 더 자비롭게 행동할 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큰 용서를 받고서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은 그 종은 자기 동료 종의 멱살을 잡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함부로 판단하는 오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용서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남에 대한 자기의 용서는 합당할 때에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조건 용서부터 하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간절하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하느님은 약점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려고 또 그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나약해지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은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 수녀님의 ‘어떤 결심’ 이라는 시입니다. 하루씩, 한 순간씩만 남 탓 안 하고 산다는 결심. 이 결심이 지켜질 때 분명히 행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영적일기를 보시는 우리들께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꽃인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정성이 가득 담긴 행복한 기다림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자보다 더 행복하다. 행복은 쾌활함의 정도에 비례해서 커지고 쾌활함은 육체와 정신적인 건강에 좌우된다.  - 쇼펜하우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