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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306회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영혼의 거울은 성경입니다♡

♡2306회 영혼의 거울은 성경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9일(탈출기 21장~ )

   루소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많은 사람과 사귈 줄 알아야 한다.''
  《말은 마음의 그림》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이 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잔잔하면 말도 잔잔하고, 마음이 거칠면 말도 거칩니다. 마음이 부드러우면 말도 부드럽고, 마음이 차가우면 말도 차갑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그사람 앞에 내 마음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이 부드러워질 것. 좋은 말을 하기 위하여 좋은 마음을 품게 될 것. 좋은 마음이 좋은 말을 하고 좋은 말이 좋은 그림을 그립니다. - '사랑의 인사' 중에서 -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사랑자체 이시기에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당신 자녀로 불러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으로 잃어버리는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며 끊임없이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시간 고해성사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회개에로 인도해 주시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20장22절 이하 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 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이 성사를 고백성사라 하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 ‘고백’ 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주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을 불러 특별한 소명을 줍니다. “나는 다윗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22,22-23)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 사실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셨다.

 용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용서한다.’ 는 것을 단순히 말해 주는 것보다 그 용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사제의 음성을 통해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독대하고 싶어 하며 답답해했지만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 네 속을 내 앞에 털어 놓아라.”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주신다는 것.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는 선물을 주신다는 것. 고해성사는 우리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디도 2,14) 이사야서1장18절에는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적고 있다. 바로 고해성사는 세례은총을 지속시켜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해 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 집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을 유지함으로써 늘 은총의 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분의 귀한 도구가 됩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또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어진 그릇이 될 것입니다.(2티모 2,21) 고해성사는 교회공동체를 살아나게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도 살려 주지만 용서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를 통해 마음이 거룩해 지는데 그 공동체가, 그 가정이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 했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는 데 거기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움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1) 성찰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살펴야지요. 어떻게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 ….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합니다. 자주 범하는 잘못은 그 원인을 잘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세심해서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거울은 성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십시오.” 라는 말씀으로 살펴본다면 남을 흉보거나 험담한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 또한 침묵한 것도 잘못입니다. 남을 위해 이로운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이웃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 기쁨을 주는 일을 찾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특별히 입을 조심하지 못한 사항을 찾아보는 것.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운다는 것.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긴 일은 없는지? 남이 잘 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샘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살피는 것.

 2)통회(뉘우침);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 주는 가엾은 모습을 그냥 보지 못하시고 좀처럼 노여워하지도 않으신다. 사랑이 그지없으시어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신다.”(요엘 2,13) 

3)정개 (결심); 다시는 이탈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갖는 것. 그러나 독일 속담에는 “정개의 징검다리를 건너 지옥 문 앞에까지 간다.” 라는 말이 있다.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기만 하고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까 어느새 지옥 문 앞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고, 남의 탓만 한답니다. 사실 성찰과 통회, 정개는 하나입니다. 성찰을 잘하면 통회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통회는 마땅히 결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 

4)고백; 알아낸 잘못을 말로 시인하는 것. 부끄러워 감추는 것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행해지는 성사인 만큼 두려워 말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 죄의 횟수, 상황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해야 합니다. 혹 “몇몇을 고의로 숨기는 사람들은 사제를 통하여 용서해 주실 선한 하느님께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만일 환자가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감춘다면 치료받을 수 없는 것.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남의 죄를 고백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남에게 탓을 돌리며 변명합니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 자기 죄만 고백하십시오. 고해의 비밀은 2천년 교회의 역사가 보증합니다.

 5)보속; 보속은 일종의 영적인 형벌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꼭 이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래의 죄에 대해서 보호해 주고 나머지 죄를 치료해 주는 것. 기도와 선행, 충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를 완성합니다. 보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기”(로마 8,17) 때문에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 줍니다. 물질의 손해를 끼쳤으면 보상해야하고요,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명예를 회복시켜 주도록 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잘못에 비해서, 보속이 너무 작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에도 그분의 사랑이 있고 그분의 넘치는 자비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믿는 것. 우리는 잘못에 대한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자비와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를 얽어매고 하느님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또한 죄책감으로 움추러 들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유를 줍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를 믿고, 우리들이 매 순간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고, 감사하면서 감사할 일이 생기는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네 스스로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해서는 안 된다.'' - 공자 -


♡2307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1일(레위기 1장~)

  ✦남녀관계에서 결국 중요한 건✦ 남자가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야 한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아야 한다고, 그리워하는 거, 생각하는 거 보고 싶은 거, 사랑하는 거, 여자가 말했다. 다 알고 있어도 듣고 싶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어도 듣고 싶다고, 그립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남녀관계에서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서로에게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는 가이다. 미칠 듯이 끌리고 죽도록 사랑해도 서로에게 적절한 시기가 아니고 기가 막힌 타이밍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서로에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서로의 인생에 자연스레 등장해 주는 것 그래서 서로의 누군가가 되어 버리는 것. 그게 "운명" 이자 "인연" 이다. -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중 -

《행복을 얻기 위한 기다림》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 목소리가 좋은 사람 얼굴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 마음이 너무나 예쁜 사람 애교가 많은 사람 곰같은 사람 다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 주는 행복도 모두 다르다. 만나면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 만나면 애처로와 보이는 사람 만나면 시간이 빨리가는 느낌의 사람. 만나면 마냥 행복한 사람 시간이 가는게 너무나 안타깝게 만드는 사람 이렇게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주는 공통점은 기다림이 있다는 것. 언제 누굴 어떻게 만나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그 기다림이 절대 싫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음에 그 기다림이 행복인 것. 하루가 될지 한달이 될지 일년이 될지 아니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라도 기다림이 있기에 하루 하루가 행복인 것. 기다림이 있는 동안은 그 누구보다 행복인것. 평생을 기다리는 행복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지도 나에게 기다림이 있어 행복한 하루다 사랑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고 그 기다림이 있기에 행복인 것을 오늘도 나는 행복을 얻기위해 기다림을 시작한다. 농원에서 고추를 키우면서 느낀 것. 처음에 나온 잎을 따 주었다.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고추는 줄기를 더 튼튼하게 세웠다. 꽃이 피면서 고추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온 잎을 따주지 않았다면 고추는 줄기를 튼튼하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꽃이 필지라도 먹음직한 고추는 열리지 않았을 겁니다. 고추가 줄기를 곧게 세우기 위해서는 처음에 나온 잎을 따주어야 했다. 크게 자란 나무를 보면 중간 중간 가지가 잘려나간 걸 봅니다. 나무는 그렇게 아픔을 간직하면서 큰 나무가 됩니다. 감나무도 대추나무도 바람이 불면 설익은 감과 대추를 떨어뜨리는 걸 봅니다. 그래야 가을이면 알찬 열매가 맺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근심이라는 잎, 걱정이라는 잎, 시기와 질투라는 잎을 따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의 줄기가 곧게 서고, 사랑의 꽃이 피며, 믿음의 열매가 열리는 겁니다. 처음 나온 고추의 잎을 따주듯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듯이, 설익은 감과 대추를 떨어뜨리듯이 우리에게 아직도 원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삶에서 영적인 삶에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 앞에 작은 텃밭을 가꾸기도 합니다. 명상을 하거나 글을 쓰기도 합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만 채워지는 줄 알았는데 모래시계처럼 가만있어도 채워지는 것이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라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다. 굶주림도 있었고, 목마름도 있었다. 의심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다. 참고 견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모두 타는 목마름으로 여름을 견뎠습니다. 여름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 다리 골절 수술을 한 사람은 한동안 목발에 의지해야 합니다. 뼈가 붙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리의 힘을 되찾아야만 비로소 목발을 놓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고난과 시련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또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음악적 재능이나 뛰어난 추진력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재산이나, 업적을 원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 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나눔’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끝까지 믿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여인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 자신의 것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던 자캐오처럼 우리들이 소유하기 보다는 나눌 수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실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행복해 하실 일들을 해야 하겠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눈을 뜨게 하소서. 귀를 열게 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반드시 우리들의 믿음대로 됩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큰 믿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을 위해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과 축복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공의 커다란 비결은 결코 지치지 않는 인간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 -


♡2308회 "네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 네가 울면 너는 혼자다. 크게 한번 웃어보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2일(레위기 13장~)

  이만교는 ''독서의 핵심은 읽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울림을 주는 문장을 찾은 후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데 있다.''
  《내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어느 병원 앞의 게시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갈에 물렸던 분이 여기서 치료를 받았다. 그 분은 하루만에 나아서 퇴원 하였다. 또 다른 게시판이 있었다. 어떤 분이 뱀에 물렸다. 그 분은 치료를 받고 3일만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 했다. 셋째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사람이 미친개에게 물려 현재 10일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곧 나아서 퇴원 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게시판도 있었다. 어떤 분이 인간에게 물렸다. 그 후 여러 주일이 지났지만 그 분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회복할 가망도 별로 없다.

 과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 부부싸움을 악에 받혀 하게 되면 입김이 나오는데 과학자들이 그 입김을 모아 독극물 실험을 했더니 놀랍게도 코브라 독 보다 강한 맹독성 물질이 나왔다. 또 한 사람을 데려다가 타액검사를 해본 결과 평소엔 이상이 없었는데, 칸막이 속에 가두어 둔 채 약을 올려 신경질을 부리게 한 뒤 타액검사를 했더니 황소 수 십 마리를 즉사 시킬만큼의 독극물이 검출 되었답니다. 그러나 즐겁게 웃고 난 사람의 뇌를 조사 해 보니 놀랍게도 독성을 중화시키고 웬만한 암세포라도 죽일 수 있는 호르몬을 다량 분비 시켰다고 발표했다. 

인간의 내부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독이 들어 있을까? 모든 억제, 불안, 미움, 공포, 스트레스 등이 뭉쳐서 눌려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양의 독으로 뿜어져 나올 것. 그 독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웃음. 전체적인 웃음만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주변 사람의 기분마저 바꿔 놓습니다. 내가 웃으면 전 세계의 에너지가 나에게 흘러옵니다. 전 세계가 나에게 웃음을 보냅니다. 어느 나라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 네가 울면 너는 혼자다. 크게 한번 웃어보자. 억지로라도 웃어보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휴식이 되는 이야기 중에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기에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상대가 듣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큰 의미가 없다. 하물며 별로 유익하지 않은 말을 기꺼이 시간을 내서 듣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저 역시도 상대방의 마음과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했던 적이 있었다. 사육사는 호랑이에게 살아있는 동물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어 죽이는 버릇이 더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주더라도 조금씩 잘라서 준다고 합니다. 잡아 찢는 버릇이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재주와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면 로마가 왜 망했느냐고 묻기 보다는 로마가 어떻게 천 년 동안이나 계속될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조선이 망했느냐고 묻기보다는 당론이 있어서 조선이 600년을 존속했느냐고 묻습니다. 염색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젊어 보인다고 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누수로 지붕 공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비용이 적게 나왔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넘어져 다친 사람에게 잘 보고 다니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말하면 좋겠다. 말은 하지 않으면 한번 후회하지만 말은 잘못하면 수천 번 후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출직인 정치인들에게 한 번의 말실수는 본인은 물론 소속된 당에게도 큰 피해를 주곤 합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도 항상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애정이 애증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돌아온 동생을 보고 형은 잔치를 벌인다고 불평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이 없는 말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용기를 주는 말, 위로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로 더위를 식히면 좋겠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왜 하와를 만들어 주었느냐고 불평했다. 카인은 동생을 죽인 후에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불평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셨음에도 이방의 신을 섬겼다. 아합은 이미 가진 포도밭도 많은데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밭을 빼앗고 죽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뉘우치기만 한다면 진홍같이 붉은 죄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다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회개하고 뉘우치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학자들은 부부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도 헤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부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 때문에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사랑은 기적입니다. 큰 파도가 닥쳐와도 피신처가 있으니 행복합니다. 돌아갈 아버지 집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튼튼한 자물쇠를 감사라는 마음의 열쇠로 열어 행복을 선물 받는 기도의 사람으로 불리우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그 사람 자신에 대해 말해주면 그는 몇 시간이고 즐겁게 귀를 기울인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 -


♡2309회 거짓말은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이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3일(민수기 1장~)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 영의 살아 있는 불길이다. 하느님의 뜻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그렇다고 비밀스런 체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 속에 살아 있는 구체적 실체이며, 우리 영혼은 그 불길 안에서 타오르도록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뜻’ 이란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움직임이다.”

 《참된 겸손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솔직함 입니다.》겸손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솔직함입니다. 자신에게 바탕을 둔 솔직함은 교만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진리에 바탕을 둔 솔직함은 겸손입니다. 오류 앞에 겸손한 척 하는것은 위선이고 아첨이며 교활한 것. 또한,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잘못된 겸손의 포장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성모님의 겸손이 진리에 바탕을 둔 솔직함에서 나왔음을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성부하느님께 잔을 거두어 주실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겸손히 아버지의 뜻에 맡깁니다. 성모님 또한 창조의 진리에 어긋난 가브리엘 대천사의 말씀에 대하여 물어봅니다. 그리고 겸손히 순명합니다. 성모님이 본인이 알고 있는 진리에 반한 천사의 말씀을 듣고 완고한 사고로 웃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교만일 것.

 그러나 성모님은 먼저 본인이 알고 있는 진리에 반한 말씀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깨닫게 되어 겸손히 순명하였던 것. 우리는 무식한 겸손이 아니라, 주님께 물어보는 겸손함에 맛들여야합니다. 겸손은 완고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입니다. 겸손은 지나친 굽신거림이 아닙니다. 겸손은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입니다. 겸손은 진리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높이는 것. 겸손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솔직함입니다. 겸손은 진리에 대한 물음입니다. 겸손은 진리를 나누는 것(가르쳐주는 나눔)입니다. 겸손은 오류, 사이비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형제, 자매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나누는 것. 겸손은 모든 사람의 행실에 겸손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에 대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행위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살리고 남을 살립니다. 겸손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하느님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겸손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솔직함입니다. 겸손은 사랑입니다. 아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솔직함’ 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없어야만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더욱더 거짓말이 활개를 칩니다. 거짓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신이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수준까지 올라온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하는 거짓말을 본인들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죄가 없어질까요? 그들 때문에 온 나라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거짓말에 대한 의식을 새로 해야 합니다. 

나라가 거짓말 천국이 되어가는 이유는 ‘착한 거짓말’ 을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자녀들도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선의의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거짓말일까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 바늘도둑도 도둑인 것처럼, 작은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안 좋은 것이라면 뿌리부터 잘라야 합니다. 음식 대접을 받고 맛이 없을 땐 그저 “먹을 만하네요!” 라고 말해줍니다. 먹을 만하니까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맛이 없는데 굳이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상대를 기쁘게 해 주는 말이기는 하나, 그러면서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나를 믿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합을 펼칠 때, 대부분 갤럽조사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압승으로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빅데이터 통계 전문가들이었다. 구글 검색창에 트럼프와 힐러리를 검색한 숫자를 세어보니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람들은 말로는 힐러리를 응원하면서 속으로는 트럼프를 뽑고 싶었던 것. 사람들 앞에서 트럼프를 뽑았다고 하면 정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갤럽 조사에서는 거짓말을 한 것. 우리나라도 대통령을 마친 사람들이 감옥에 갔을 때 “누가 저 사람 뽑았어?” 라고 물어보면 뽑아준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당선이 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합니다. 거짓말은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 이것이 거짓말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나무입니다. 거짓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왜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고 했을까요? 자신들이 죄를 지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십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을 심판하고 또 자신들의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고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죄인으로 심판하는 분도, 나를 선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하느님 대신 나 자신이 심판자이고 구원자가 되려고 하느님처럼 높아지려는 방법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작고 적은 일에 충실한 영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영혼, 그래서 성령님이 항상 머물러 있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복된 우리들로 살아가시고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신에 대해 믿음을 절대 잃지 마세요.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저를 도와준 가족,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 박토리아 -


♡2311 인생에는 연장전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5일(신명기 1장~)

  미하이칙센트미하이는 ''진정으로 창조적인 사람은 본능과 세속적 가치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줄 삶의 길을 그려낸 이들이다.''
《멋진 사람이 되는 10가지》1. 힘차게 일어나라.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다. 육상선수는 심판의 총소리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다. 0.001초라도 빠르게 출발하기 위해서다. 올해 365번의 출발 기회가 있다.  빠르냐 늦느냐가 자신의 운명을 다르게 연출한다. 시작은 빨라야 한다. 아침에는 희망과 의욕으로 힘차게 일어나라. 2. 당당하게 걸어라. 인생이란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행진이다. 목표를 향하여 당당하게 걸어라. 당당하게 걷는 사람의 미래는 밝게 비쳐지지만, 비실거리며 걷는 사람의 앞날은  암담하기 마련이다. 값진 삶을 살려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라. 3.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내라. 성공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미루는 습관에서 벗어나라. 우리가 살고있는 것은 오늘 하루뿐이다. 내일은 내일 해가 뜬다해도 그것은 내일의 해다. 내일은 내일의 문제가 우리를 기다린다. 미루지 말라.  미루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4. 시간을 정해 놓고 책을 읽어라. 책 속에 길이 있다. 길이 없다고 헤매는 사람의 공통점은 책을 읽지 않는데 있다. 지혜가 가득한 책을 소화 시켜라. 하루에 30분씩 독서 시간을 만들어 보라. 바쁜 사람이라 해도 30분 시간을 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하루에 30분씩 독서 시간을 만들어 보라.  학교에서는 점수를 더 받기 위해 공부하지만, 사회에서는 살아 남기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5. 웃는 훈련을 반복하라.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다. 그렇다면 웃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지름길도 웃음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웃다보면 즐거워지고 즐거워지면 일이 술술 풀린다.  사람은 웃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긍정적으로 바뀐다. 웃고 웃자. 그러면 웃을 일이 생겨난다. 6. 말하는 법을 배워라. 말이란 의사소통을 위해 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말을 할 수 있고, 절대자인 신과도 대화할 수 있다. 해야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분간하는 방법을 깨우치자. 나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것은 공해다. 상대방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말 힘이 생기도록 하는  말을 연습해보자. 그것이 말 잘하는 법이다. 7. 하루 한가지씩 좋은 일을 하라. 인생에는 연장전이 없다. 그러나 살아온 발자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하루에 크건 작건 좋은 일을 하자. 그것이 자신의 삶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좋은 일 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게 빛난다. 마음에 행복이 가득차기 때문이다. 
8. 자신을 해방시켜라. 어떤 어려움이라도 마음을 열고 밀고 나가면 해결된다. 어렵다,안된다,힘든다고 하지말라. 굳게 닫혀진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보자. 마음을 열면 행복이 들어온다.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으면 너와 내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어 기쁨 가득한 세상을 만들게 된다. 마음을 밝혀라. 그리고 자신을 해방시켜라. 9. 사랑을 업그레이드 시켜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나 사랑을 한다. 말이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 뜨거웠던 사랑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퇴색된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뜨거운 용광로처럼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의 사랑을 불살라 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사랑으로 신장개업하라. 10. 매일 매일 점검하라. 생각하는 민족만이 살아 남는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일 뿐이다. 이제 자신을 점검해 보자. 인생의 흑자와 적자를 보살피지 않으면 내일을 기약 수가 없다. 저녁에 그냥 잠자리에 들지 말라. 자신의 하루를 점검한 다음 눈을 감아라. 나날이 향상하고 발전한다. -좋은글 중에서-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을 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오후 다섯 시에 일을 시작하지만 그들이 밭는 품삯은 모두 똑같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사람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을 한 시간과 양이 그만큼 차이가 나는데 동일한 값을 받는 다는 것은 불공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애초에 계약을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였으니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늦게 온 이들에게 그와 같은 값을 쳐 주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이며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늦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예화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지방에서 포도를 따는 때는 9월 말경이었는데, 10월이 되어 날씨가 선선해지기 전에 포도를 서둘러 따지 못하면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짧은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늦게 일을 하게 된 이들이 게으른 이들은 아니었다. 지방 장터는 노동자들의 대기소와 같은 곳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노동자들은 연장을 들고 장터에 나와 자신을 써줄 고용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고용이 되어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는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이를 생각해보면, 일을 하고 싶지만 고용되지 않아 초조하게 앉아있는 일꾼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야말로 날품팔이 노동자들,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하층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이들. 차라리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노예나 종들이라면 적어도 굶을 염려는 없었겠지만 이들은 일을 못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 이러한 이들에게 누군가가 나타나 늦은 시간이지만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은총이었을 것이며 아주 감사한 일이었을 것. 

결국 오늘의 말씀은, 때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리 부름을 받은 그 누구도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을 멸시하곤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먼저 선택받았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도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하며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이야기는 늦게라도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뒤늦게나마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온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이른 시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있고 조금은 뒤늦게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 우리는 그 누가 더 낫다고도 부족하다고도 할 수 없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기에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며 각자의 역할은 하느님께 커다란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은총을 받을 것 조금 천천히 일하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스스로를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은 날”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하느님의 균등한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께 기쁨이 되고자 채워나갈 것을 약속 드려야 하겠다.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하느님, 누구에게나 같은 사랑과 은총을 보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자애로운 고용주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생명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랑”을 실천한 백인 대장의 “이런 믿음, 이만한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들 안에도 겸손과 살아있는 ‘이만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벽에 부딪히거든, 그것이 절실함을 나에게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랜디 포시 -

♡2312회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6일(신명기 21장~)

  에디슨은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다면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 깜짝 놀랄 것이다.''

《주님이 의논하지 않고 쓰시도록 하라.》우리가 영광중에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그리스도가 그대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애오라지의 사랑을 갖고 순명의 완전한 포기 안에서 청빈의 자유를 통한 정결과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성을 다하는 봉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이것이 말씀의 보편적 형제 회 회원들의 생활 규칙입니다. 예수께서 그대와 의논하지 않고 그대를 쓰시도록 해드리세요. 그러면 그대는 거룩하게 될 것. 왜냐하면 그대는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복녀 마더 데레사- 현대는 창의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창의적인 발상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데 그 창의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창의력이 생길까요? ‘기분’ 이 창의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버 색스’ 의『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한 조증 환자의 사례가 나옵니다. 올리버 색스는 영국의 신경과 의사입니다. 그에게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겔이란 청년이 찾아왔다. 올리버 색스는 그에게 동그라미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고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맞춰보라고 했다. 그는 늠름하게 “이건 뚜껑이 열린 상자인데요, 그 속에 사과가 하나 들어있네요” 라고 대답했다. 엄청난 상상력이었다. 다음번에는 더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시 동그라미 속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아, 이거요. 어떤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네요.” 라고 하였다. 며칠 후 그가 다시 왔다. 그런데 그는 매우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가 조증이 온 것은 신경을 훼손하는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올리버 색스는 역시 똑같은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말했다. “이건 동그라미 속에 들어있는 엑스 표네요.” 정확히 맞추었다. 그에게 창의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 창의력은 무엇일까요?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일까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발명했다고는 하지만, 스마트폰은 그저 당시에 있던 전화기와 아이팟의 화면을 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창의력은 이미 존재하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 아니,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직 베드로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창의력입니다. 남들은 볼 수 없지만, 베드로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창의력은 자신의 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아버지께서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알려주신 것일까요? 성령을 부어주신 것.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좋은 기분입니다. 베드로의 창의력, 즉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기쁘고 평화롭고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된 것.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신 다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고 당부하십니다. 분명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네가 깨달은 방식대로 깨닫게 하여라” 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본 것이 성령님 때문이지 누구에게 설명을 들어서가 아닌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어야지 설명으로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이러한 사례도 나옵니다. 성악가 출신 P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올리버 색스를 방문할 당시는 음악 교사로 재직할 무렵이었다. 완벽한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던 P 선생, 그런데 그 일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 학생들이 보이지만, 누가 누구인지 인식 불가하였고 결국 목소리로만 학생을 구분해야만 했다. 가끔은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길을 가던 중학교 학생들이 발견한 P 선생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 “너희 뭐 하니? 왜 그러니? 여기서 뭐 하니?” 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주차 정산기랑 소화전 앞에서 뭐 하세요?” 라고 물으니 선생님은 연기 연습하는 것이라고 하며 농담으로 간신히 넘어갑니다. P 선생은 당뇨병으로 눈이 잘 안 보이는 게 원인인 줄 알고 안과를 찾아갔다. 그런데 안과에서는 눈의 질환이 아닌 것 같다고 신경 전문의에게 가볼 것을 권유했다. P 선생의 반사 반응 검사를 한 올리버 색스가 이제 신발을 신으라고 했을 때, P 선생은 자신의 발을 신발로 착각하고 있었다.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P 선생은 모자를 찾기 시작했고 함께 온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멈추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고 그때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이지만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된 것.

 올리버 색스가 이런 처방을 내렸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 전부라고 생각하고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질병의 점진적인 악화에도 불구하고 P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다. 물론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가끔 일어나는 익살스러운 실수를 빼고는. 행복하면 보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행복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 교회를 세우시며 왜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란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먼저 성령을 주려고 해야지 지식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일 것. 교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만드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될 것.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대더라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그분은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성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학교를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신부님은 성당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옳다. 아이들을 먼저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 보이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종교들이 세상에 해악을 입히고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성당은 크게 지으면서 성당 옆에 있는 가난한 이들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면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교회는 세상에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입는 축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공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 알랭 -


♡2313회 쓰레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7일(여호수아기 1장~)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밝은 마음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또 다른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에게 이식된다. 마음 바탕이 밝은 사람과 어울리면 그 밝은 마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옮겨진다. 그래서 마음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마음이 밝은 사람이 만나는 나무나 바위, 바다, 강물, 또 꽃이거나 한줌 흙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밝은 빛을 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현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했다. "본다는 것은 보는 사람 속에 있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 속에 있으며, 생명은 정신 속에 있으므로 행복 역시 정신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것도 어떤 종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속에서도 밝은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보라. 그러면 그대가 나아가는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음을 한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며 그대가 만들어 낸 빛이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 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전부 다 버린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버리지 않아도, 죽으면 모두 잃게 될 것. 죽을 때까지 욕심 부리고 집착하면서 움켜쥐고 있다가 마치 빼앗기는 것처럼 잃는 사람은 그 탐욕과 집착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버린 사람은 홀가분하게 그 나라로 들어갈 것. 어차피 마지막에는 누구나 빈손이 된다는 점은 같은데, 그 빈손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다. 실제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 그 나라의 시민이 되면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것.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 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원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현세에서의 무병장수를 원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 구원과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여러 메시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예수님의 뒤만 따르는 일” 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과 사고방식과 판단과 사상 등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한다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원래는 죽음도 각오하라는 뜻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들과 시련들을 기꺼이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시니,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은 결코 쉽고 편한 생활이 아닙니다. 재미도 없고, 어렵기만 하고, 힘든 생활입니다. 영적인 기준으로 보면, 믿음, 희망, 사랑이 가득한 생활이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하는 생활이고, 행복하니까 하는 생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이 말씀의 뜻은,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면서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예수님께 물었던 어떤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해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그는 재물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일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슬펐던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가 버린 것들을 ‘쓰레기’ 라고 표현했습니다.(필리 3,8) ‘슬퍼하며’ 떠나간 그 부자의 경우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재물’ 도 쓰레기이고, 그 재물에 대한 애착심도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은, 그 나라의 기준으로는 전부 다 쓰레기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온 세상을 얻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만 얻은 것과 같다. 요즘에는 쓰레기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창세기의 표현으로 바꾸면 ‘먼지’ 입니다.(창세 3,19)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세속의 권력, 명예, 재물을 엄청나게 모아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먼지’ 만 잔뜩 모아서 먼지 속에서 살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인생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행실대로’ 갚는다는 말씀은, 심판 때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를 보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행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마태 7,21)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자기 혼자서 주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의 행실은 나중의 심판에 그대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는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 탓을 할 수도 없고, 주님께 항의할 수도 없고, 환경이나 여건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2코린 9,6)

  주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지금 우리들의 어두운 영혼이 치유 받고, 병든 육신이 낫게 되고, 그리고 삶의 자리에 하느님의 은총이 임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 이현주 -


♡2314회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8일(판관기 1장~)

  아빌라 데레사는 “주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다른 것들도 말해 보렵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터라 두서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두서없는 편이 나을 성도 싶은 것은 애당초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줍잖은 까닭입니다. 그저 바라옵기는 주님께서 내가 하려는 일 전체에 당신 손을 펴 주시어 거룩하신 그 뜻에 맞게 해주십사 할 따름입니다. 비록 일이야 나 자신처럼 하찮은 것이지마는 언제나 주님의 뜻을 좇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인 것입니다.”

《걱정을 버리는 6가지 방법》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  문제를 두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 아니라, 나쁜 습관에 불과하다. 걱정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내게 생긴 문제들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점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힘을 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자. 기분 좋은 잠, 상쾌한 아침을! 매일 잠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날의 걱정거리들을 되뇌이는 것은 내일까지 걱정하는 하루로 만들어 버린다. 잠자리에 들 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자.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어제의 문제들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오늘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쌓인 일과 문제들을 헤아려 보느라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라. 긍정적인 말을 하라 생각을 말로 하지만, 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난 못해", "큰일이야!",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부정적인 말들을 모두 버리자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들로 생활을 채우라. 말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도움을 주는 글귀들을 외우자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말들을 외워 두자마음에 와 닿는 구절, 명언, 책에서 읽은 아름다운 말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런 말들이 무의식중에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뀌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라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고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 모습을 반성해 보고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약한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성경공부 모임이나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다. 기도는 이론과 방법을 설명해서는 그 깊이와 힘을 알 수 없다. 기도는 체험을 통해서 그 깊이와 맛을 느낄 수 있다. 호수가의 새끼 오리들이 제법 깊이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걸 봅니다. 가르쳐주지 않고, 배우지 않았어도 새끼 오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알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입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엘리야 예언자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느낀 것과 같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알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믿으면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 있다.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숙련된 제련사는 용광로 위에 있는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고 합니다. 은이 얇은 막이 되어서 제련사의 얼굴이 비출 정도가 되면 은은 불순물이 다 빠지고 온전한 은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불을 끄고 은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용광로의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용서’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까요? 숙련된 제련사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 원망, 불신, 미움,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빠지면 마음은 호수처럼 맑아질 것. 호수처럼 맑아진 마음은 굳이 용서를 말하지 않아도 용서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게 되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주게 되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주게 되고, 어둠에 빛을 주게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용서(Forgive)는 '위하여 준다.’ 는 의미가 있다. 무엇을 위하여 주는 것일까요?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 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 이 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 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온 누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날을 기다리며, 세례자 요한과 함께 주님의 빛이 우리들 안에 들어와 말씀과 함께 소망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축복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중에 인생을 돌아볼 때 '젠장 해보기라도 할 걸' 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세상에 내가 그런 짓도 했다니' 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 루실 볼 -


♡2315회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19일(판관기 1장~)

  개신교 신학자 본 회퍼는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새벽을 찬란하게 만드는 것은》기쁨이 웃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이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슬픔이 눈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이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행복이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명예가 정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가 우리를 명예롭게 만듭니다. 재물이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듭니다. 지위가 덕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덕망이 우리를 높아지게 만듭니다. 평화가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듭니다. 새벽이 태양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새벽을 찬란하게 만듭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앙 여정을 시작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 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그 나라에서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차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때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와 그 박해로 목숨을 잃었던 스테파노 순교자가 똑같은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함께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스테파노 순교자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맨 먼저 온 사람들’ 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들이 더 받는 것’ 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맨 나중에 온 이들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것. 여기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 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고, ‘품삯’ 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1) ‘맨 먼저 온 사람들’ 은 자신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 했으니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 시간이 많으니 품삯도 많아야 한다는 그들의 말은, 비유의 내용 안에서는 ‘일리 있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온종일 고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은총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총을 충만히 받았음을 깨닫는다면, 불평하거나 항의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감사드릴 것. 만일에 실제로 신앙생활을 중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기쁨도 사랑도 없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의 그런 생활은 사실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노동인가? 은총을 누리는 생활인가?”

 2) 사실 남들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 듣고,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감사드릴 일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왜 부모님 마음대로 나의 ‘종교의 자유’ 를 침해하는가? 종교와 신앙은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 부모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을 물려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게 한 것이고,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그 사랑을 안다면 부모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는 자녀의 ‘종교의 자유’ 를 침해하는 일이 아닙니다. 

첫 영성체를 하고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자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3-16) ‘한 데나리온’ 이라는 품삯은 신앙 여정을 충실하게 마친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는 하느님 나라, 또 그 나라에서 받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밭 임자는 일꾼들과 맺은 ‘계약’ 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비유의 내용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 라고 대답하게 될 것. 더 좋은 나라도 없고, 덜 좋은 나라도 없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더 크고, 더 많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일도 없고, ‘덜 좋은 구원’ 과 ‘덜 좋은 영원한 생명’ 을 받는 일도 없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합리하다, 불공평하다, 부당하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다. 영원한 생명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보다 더 긴 시간이 있을 수 없고, 영원보다 짧은 시간은 영원이 아닙니다. ‘구원’ 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궁극의 목표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가치를 지닌, ‘완전한 삶’ 입니다. 만일에 덜 좋은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비유의 내용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포도밭에 늦게 온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놀다가 늦게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터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7절) 이것은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한 것과 신앙생활 기간이 짧은 것을 탓할 수가 없다. 어떻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하나뿐이고, 그 자격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서 누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똑같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재의 자격만 보시고 과거를 따지지 않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 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고, 마침내 그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과거의 삶’이 계속 발목을 붙잡는다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회개’를 강조하신 일과 안 맞게 됩니다. 하느님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과거는 보지 않으시고 회개한 현재 상태만 보시는 분입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사람의 판단 기준과 다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축복과 은총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의 기도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여기가 끝이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예술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 발레리나 강수진 -


♡2316회 우리는 믿음과 행실에서 일관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20일(롯기 1장~)

  헨레 켈러는 ''감사한 하루가 되기를 더 가지지 못함에 욕심내지 않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음에 감사하며  더 잘하지 못함에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고  그동안의 노력들에 대한 수고를 인정해 주며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보낼 수 있기를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통함에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에  마음 쏟으며 시간 보내며 살지 않기를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행복은....》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질책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찾으며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맹이 없는 삶이며 쭉정이 같은 겉치레를 낳습니다. 바리사이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겼습니다. 사도는 율법의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2코린 3,6 참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려고 선행과 기도를 한다면, 바리사이 처럼 ‘회칠한 무덤’ 이 됩니다. 우리가 모든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신한다면, ‘율법 학자의 교만’ 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윗자리를 좋아하고 존경받기를 바란다면, 그들의 허영을 배우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의 겸손과 고난을 따라야 합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죄 많은 여러 욕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로마 7,5)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갑니다. 율법의 행위로 완성되지 못한 구원이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사로잡혀 말로만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로움은 외적인 행위로 하느님을 완전히 섬길 수 있다는 자만을 낳습니다. 은총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덕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성령에 따라 살며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를 누립시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공격과 고발은 매우 중대한 두 가지 비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첫째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그들의 이중생활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면서도 자신들은 행동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넓은 부위는 자기 자신에게, 좁은 부위는 다른 이들에게 들이대는 그들은 깔때기와 같은 위선을 보입니다. 둘째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 이고 칭찬받기 위한 그들의 과시와 허영입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행실과 태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전시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백성 앞에서 그들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과 대조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의 행실에 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우리 모두 형제이고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이므로 스승이나 아버지라고 불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역설적인 두 문장으로 끝맺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행실에서 일관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요? 

  “입은 닫고 지갑을 열자.”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때를 기다리며 곱게 익어가는 하느님의 복된 은총 안에서, 우리들이 희망하는 기도가 하느님의 뜻대로 선하고 기쁘게 잘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우리 대부분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 내면에 있는 살지 않은 삶. 이 둘 사이에는 저항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 스티브 프레스필드 -


♡2317회 삶에 있어 소중히 지켜야 할 것들은 믿음, 약속, 인관 관계 그리고 상대의 - 마음이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4년 12월 21일(사무엘상 15장~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에 자주 다니고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도 모두가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완벽하게 알지라도, 전례적인 것을 모두 알지라도, 신학을 다 알지라도 사랑하는 법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려면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똑똑함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다른 것도 있어야 합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지만 무시했습니다. 그를 살펴봤지만 돌보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면,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합니다.” 

《삶에 적용되는 멋진 생각들》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책임이다. 당신이 하루종일 아무런 문제에 부닥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 성공을 위한 3가지 필수 조건 
ㄱ.남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 
ㄴ.남보다 더 열심히 일할 것 
ㄷ.남보다 큰 기대를 갖지 말 것 
승리하는 자는 설명이 필요없다. 그리고 패배하는 자는 변명 전에 스스로 사라져야 한다. 당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을 모욕하는 것. 당신이 보이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1등이 꼭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보다 더 잘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 나는 1000번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실패할 수 있는 1000가지 방법을 알아낸 것. 모두들 세상을 바꾸려 들지만 스스로를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무나 믿는 것은 위험한 짓이지만  아무도 못 믿는 것은 더욱 위험한 짓이다. 인생에 있어 실패를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다. 삶에 있어 소중히 지켜야 할 것들은 믿음, 약속, 인관 관계 그리고 상대의 마음이다. 이 네 가지는 깨질 때 소리는 나지 않지만 큰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운 알프스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 소년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놀고 있었다. 어느 날 맑은 시냇물에서 하루를 보내던 그 소년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 속에서 예쁜 돌멩이를 줍고 있던 그 소년은 "여기 물 속에 있던 돌멩이의 속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속이 말라 있을까? 아니면 젖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 그래서 그 소년은 궁금증을 확인하기로 하고서는, 물 속에 있는 돌멩이 중 주먹만한 돌멩이를 건져내었다. 그리고는 큰 돌에 던져 반을 쪼개버렸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어땠을까요? 그 돌멩이는 완전히 말라있었던 겁니다. 근데, 이 돌맹이가 물속에 있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10년, 20년 아니면 100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돌멩이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지만 그 물을 한 방울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랑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면 그 사랑을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겠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푹 잠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종종 깨닫지 못할 때가 더러 많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는 연극 배우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위선자로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율법과 규율을 내세워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들의 생각과 실천이 전적으로 옳고, 또한 그렇게 모든 유대인들이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지탄과 책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수천 가지나 되는 규칙이나 규례를 준수하는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모르는, 그래서 마치 눈먼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온갖 율법의 조문들과 규칙들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제자로 만드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제도화해서 만들어 놓은, 특히 상급자가 자기 편의대로 부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강요하고 괴롭히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

 우리는 삶의 모든 기준과 잣대를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할 것. 그러므로 불필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어떠한 미사여구의 규칙이나 관례도 하느님 앞에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생각하고 고쳐 나가야 할 것.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할 것.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질 것.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 규칙과 규정에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겠다. 사람은 참으로 귀한 존재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님의 삶이 더 기쁘게,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하게 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만 영광을 올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 링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