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8회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가십시오.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 마십시오. 오직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1일(잠언 1장~)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무엇으로도 마음을 흩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 놀라지도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직도 기다림이 있다면 행복하다.》사랑이 가슴에 넘칠 때 진실 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의 감정을 가슴 가득히 담고 살아갈 때 누구라도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늘 되풀이되는 일과 속에서 정신 없이 맴돌다가도 가끔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런 때 난 이런 소망을 가만히 외어 봅니다. “언제나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라고 나의 이 바람은 큰사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부터 우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는아주 작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마음의 문은 꼭꼭 닫아 두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결코 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지를 뻗치는 게 사랑이라고 감히 난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것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결코 솟아나지 않는 정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솟아나는 정이 아닌 것이지요. 퍼낼수록 다시금 맑고도 그득하게 고여 오는 샘물 당신도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샘물을 자주 그리고 되도록 많이 퍼내지 않으시렵니까? 그곳에 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곧 죽음을 상징했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이었지만, 그의 글에는 언제나 희망과 사랑, 따뜻함이 숨 쉬고 있다. 그곳에서의 처절했던 체험들로 인해 사상이나 가치관이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으로 바뀔 만도 한데,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낙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밝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마치도 달디 단 생명수와도 같다. 100% 죽음이 예견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인생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 에 몰두했던 그는 이런 소중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가십시오.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마십시오. 오직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자신을 넘어서십시오.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십시오. 자신의 부족함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십시오.” “거울 속에 내 모습에서 눈을 떼면 그 밖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이웃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들에게 사랑을 보내십시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십시오.” “긴장과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최선의 삶이 아닙니다. 긴장은 정신의 웰빙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낸 어느 저녁 수용소 안에서 빅터 플랭클이 겪었던 체험입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에 돌아온 수인들은 막사 바닥에 앉아 영양가라곤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멀건 수프 한 그릇씩 받아먹고 있었다. 그때 뒤늦게 막사 안으로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빨리들 먹고 운동장으로 나가보세요. 지금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동료의 말에 다들 먹던 스프그릇을 옆으로 밀쳐두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금씩 소멸되어가는 태양의 장엄함 앞에 다들 큰 감동을 받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 아무리 적대자가 육체를 가두어도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을 그 어떤 열악한 환경 안에서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왕자처럼 누릴 것 다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빅터 플랭클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하느님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몸은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흙덩이처럼 나약하지만 정신이나 영혼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고 언젠가 하느님과 충만하게 합일될 수도 있다는 것. 하느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것,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친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 상’ 잘 차려놓으셨다. 잔치를 손수 준비하신 것. 그리고 길거리로 나가셔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 두려워서, 때로 부끄러워서, 때로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어둡고 깊은 동굴 안으로 꼭꼭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조차 다가오십니다. 애써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얘야, 괜찮다. 빨리 나오거라. 음식 다 식는다.” 어떤 젊은 남자가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천사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다. 남자는 무엇을 포장하는지 궁금해서 천사에게 물었다. "천사님!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포장하고 계세요?" 천사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행복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다가올 새해를 맞아 사람들에게 나눠줄 선물이지요!" 그 남자가 다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선물을 단단하고 튼튼하게 포장하세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면 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튼튼하게 포장해야만 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포장지는 무엇입니까?" "이 포장지는 "고난"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 이란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천사가 떠나려고 하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천사님! 그 "고난"이라는 단단하고 튼튼한 포장을 어떻게 하면 잘 벗길 수가 있을까요?" 천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난이란 포장을 쉽게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 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면 고난의 포장은 스스로 벗겨집니다. 그리고 "참 행복" 이란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천사는 사라졌고 남자는 꿈에서 깨어났다. 행복의 크기, 목표와 가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더 큰 행복을 원한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작은 행복" 들을 찾아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큰 행복" 이 눈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을 것.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세상에 없다. 인내하지 않고 물러가는 고난도 없다. 간절한 노력 끝에 성공이 따르고 고난을 감내해야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음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지난 날의 어렵고 힘든 일들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한 "기초 작업" 이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시 맞이한 진짜 설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메시지는 "다시 일어나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맞이하라." 는 의미가 아닐까요? 오늘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거룩하고 축복된 은총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사라져서 나이가 드는 것입니다.” - 카르멘 델로피체 - |
♡2340회 두려움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만든다. 사랑과 빛을 - 믿는 사람은 오직 사랑과 빛만을 체험한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3일(지혜서 1장~) 토마스 머튼은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당신이 가슴뛰는 삶을 살면》가슴 뛰는 일을 하라.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누구에게나 있다. 두려움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만든다. 사랑과 빛을 믿는 사람은 오직 사랑과 빛만을 체험한다. 당신이 체험하는 물리적 현상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당신을 향하고 있다. 그것을 어떤식으로 쓰는가는 당신의 자유이다. 자신의 삶을 사는 일 충분히 자신의 모든 부분을 살아가는 일 자기 존재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다. 삶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단순하다. 진정으로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 우주는 무의미한 일을 창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슴 뛰는 삶을 살 때 우주는 그 일을 최대한 도와줄 것. 이것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가나안 여자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해설하거나 강론할 때, 그 여자의 ‘믿음’ 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에 그 여자가 처음부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해설하는 일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의 간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반응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야기인데, 여자의 믿음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 또는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 우상을 숭배하던 여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겸손’ 을 강조하는 해설도 많은데, 여자가 원래 겸손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여자의 ‘겸손’ 은 ‘간절함’ 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1-23)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거절’ 을 뜻합니다. 물론 그냥 거절은 아니고, 여자를 ‘믿음의 길’ 로 인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거절처럼 보이는 반응을 보이신 것.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신 것은, 여자가 믿음도 없이 마치 우상에게 비는 것처럼 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 이라는 말과 ‘가나안 부인’ 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때로는 ‘침묵’ 이 예수님의 응답의 한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아무 응답 없이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때 우리는 자신의 기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먼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소문을 전해 준 사람으로부터 예수님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배웠을 것. 여자의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실제로 마귀가 들렸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떤 중병을 앓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시끄러우니까 저 여자를 쫓아버립시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단순하게 거절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15,24-2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두 번째 거절인데, “내가 주는 구원은, 구원받기를 바라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다.” 로 해석됩니다. ‘이스라엘 집안’ 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유대교로 개종하라는 뜻도 아니고, 이스라엘로 귀화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선 먼저 ‘당신의 양’ 이 되라는 권고인데, 이 권고는 사실상 당신을 믿으라는 권고이고, 우상 숭배를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아마도 여자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자의 말에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우상 숭배를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5,26-27)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세 번째 거절인데, “하느님의 자녀들이 받는 은총을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우상 숭배를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권고입니다. ‘강아지들’ 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하는 ‘개들’ 이라는 말을 덜 심한 표현으로 바꾼 것. 산상 설교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교육과 준비 기간 없이 어떤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들은 그 은총을 우상에게 소원을 빌어서 우연히 얻는 복과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하느님을 우상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여기서 여자의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고, 그래서 앞으로는 자녀로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강아지로 살았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자녀로서 살 테니까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하느님은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고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사람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잘 따라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간절함’ 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믿음의 길’ 로 들어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여기서 예수님의 칭찬은,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여자가 잘 따라온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 여자가 원래부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갑자기 큰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여자는 이제 막 ‘믿음의 길’ 로 들어섰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칭찬은 ‘앞으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격려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여자의 딸이 나은 것은, 이 이야기에서는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베풀어 주신 진짜 은총은 우상을 숭배했던 여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일입니다. 모든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도 하느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우리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심령까지도 치유 받은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조급히 굴지 마라. 행운이나 명성도 일순간에 생기고 일순간에 사라진다. 그대 앞에 놓은 장애물을 달게 받아라. 싸워 이겨 나가는 데서 기쁨을 느껴라.'' - 앙드레 모로아 - |
♡2341회 지혜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 두려워하지 않는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4일(집회서 1장~) 성녀 빌리아르는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삶이란 선택의 연속입니다.》한 생애 사는 동안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이 길을 선택하면 과연 옳을지 아니면 저 길을 선택해야 현명할지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하나의 선택을 함으로써 얻는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가늠하여 올바른 선택을하기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택이 항상 올바르고 현명한 선택일 수는 없지만 최선의 선택이 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분명히 옳지 못한 선택임을 알면서도 선택해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경우도 있다. 비록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게 되더라도 그 여정에서 겪는 아픔과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는 많은 지혜와 깨달음을 얻습니다. 선택의 연속인 우리의 삶에 비록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잘못한 선택일지라도 그 잘못을 밑거름으로 삼아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깨닫고 내일의 현명한 선택에 도움을 얻습니다. 선택 앞에 자유로운 우리 삶이지만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며 겸허히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롭고 현명한 마음의 눈을 가지면 좋겠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회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현재 유명한 디지털카메라 회사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이를 발명한 회사는 카메라 필름으로 유명한 ‘코닥’ 입니다. 1회용 카메라를 처음 발표한 회사도 ‘코닥’ 으로, 카메라의 대중화에 최전선에 있었다. 여기에 디지털카메라까지 처음 발명했고, 미 우주항공국 나사에 납품해서 우주에서도 사진을 찍도록 할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2012년 1월 19일, 끝내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필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회사가 파산했던 이유는 끝까지 필름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디지털카메라라는 신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기술이 필름 시장을 잠식할까 봐 기술을 서랍 깊숙이 처박아 둔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리 각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따라갈 수 없어 뒤처진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주님의 말씀은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미래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한순간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 계속해서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것.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과거의 틀에 매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이 기적은 참으로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이 물 위에서도 땅 위처럼 걸으실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지 않으셨다는 것. 이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새롭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 것.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고 말씀만 하실 뿐이었다. 담대한 베드로조차 육신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치며 주님께서 구해주시기를 청하지요. 이 외침이 바로 ‘회개의 신음’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어렵고 힘들 때,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될 때는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할 만큼 해봤다면서 포기하고 좌절 속에 빠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서라.” 는 말씀에 머무르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우리가 될 때,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고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왕 진시황은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어느 날 감무 대신을 불러 무리한 요구를 했다. 불로장생의 명약이라 불리는 수탉이 낳은 알’ 을 가져오너라! 집으로 돌아온 감무는 시름에 빠진 채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어린 손자 감라가 할아버지 곁에 다가왔다. 할아버지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그러자 감무는 손자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수탉이 낳은 알을 가져오라'' 고 하시는구나. 그 말을 들은 손자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사흘 뒤에 저와 함께 궁으로 가주세요. 평소 손자가 재치 있는 말과 영특한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감무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흘 뒤 할아버지와 함께 궁 앞에 도착한 손자 감라는 할아버지에게 혼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진시황 앞으로 간 감라가 말했다. 폐하, 저는 감무 대신의 손자 감라 라고 합니다. 진시황은 어린 감라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혼자 왔느냐? 감라는 진시황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네. 할아버지가 지금 아기를 낳고 있어서 저 혼자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시황은 터무니 없는 대답에 기가 차서 말했다. 뭐라고? 남자가 어떻게 아기를 낳는단 말이냐? 어디 황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하느냐! 그러자 감라가 대답했습니다. 수탉도 알을 낳는데 남자라고 왜 아기를 낳지 못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진시황은 그제야 감무에게 한 명령이 생각이 났다. 진시황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감무를 불러 사과했다. 생명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은 총명한 지혜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트에 가면 ‘1+1’ 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면 괜히 관심이 갑니다. 마트에 가면 늘 ‘1+1’ 상품을 구매했다. 하나 가격으로 또 하나를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이득입니까?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득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유를 말할 수 있지요. 1) 물건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2) 1+1 모두 사용할 정도로 쓰지 않습니다. 3)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약간 비싸더라도 조금씩 사는 것이 훨씬 더 이득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유혹에 계속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싼 게 비지떡 세상의 유혹은 순간의 만족과 이득을 바라보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어떤 시련과 곤경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늘 우리들과 함께 해주셨음을 믿고, 우리들이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 찬미 드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다재다능한 사람이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 - 알베리오네 - |
2342회 지금은 ‘슬픔의 때’ 가 아니라 ‘기쁨의 때’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5일(집회서 25장~)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사랑은 아주 작은 관심입니다.》가령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부름에 여기에 있다고 대답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은 사소하고 그 작은 일을 통하여 내가 그에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니 말입니다. 그 사소함이 무시되거나 받아들여 지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으면 이내 그 사랑은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단히 치부하여 버리는 어리석은 습성이 있다. 사랑은 수용되고 있다는 모습이 서로에게 보여져야 합니다. 그 수용의 모습은 받아들임이나, 이해의 모습으로 결국 표출 되어집니다. 사랑이 수용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서로에게 상처의 모습으로, 그리고 오해의 모습으로변질되어 다가옵니다. 그 누군가에게 오해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려면 아주 사소한 배려를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 사랑은 그런 아주 작고도 사소한 것. 사랑은 아주 작은 관심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고,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날마다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일 수밖에 없다. 만일에 있던 자리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래서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도, 쇄신도 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살겠다고, 또 하던 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다. 반대로, 어떤 기준이나 원칙도 없이 무조건 오래된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려고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정말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보물들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합니다. 또 단순히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풍조와 새로운 사상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다가 ‘이단’ 이나 ‘사이비’ 사상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항상 새로운 진리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마태 24,35)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진리’ 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고, 우리가 날마다 새겨듣고 실천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세속의 물질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속된 이론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완전한 진리이고, 우리를 살리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시간만 생각하고서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3-35)”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는 이미 오셨다. 그래서 그런 단식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제자들은 더욱더 그런 단식을 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는 ‘지금’ 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때가 아니라, 메시아와 함께 잔치 음식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슬픔의 때’ 가 아니라 ‘기쁨의 때’ 입니다. 여기서 ‘지금’ 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지금’ 입니다. ‘지금’ 이라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지금’ 입니다. 예수님은 승천 후에도 계속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기쁨의 종교’ 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단식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또 회개하기 위해서 단식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 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때” 입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단식합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는 예수님을 빼앗길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죄를 지어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은 많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루카 5,36) 구약시대의 낡은 신심 행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 시대의 신앙을 훼손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새 옷’ 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헌 옷’ 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또는 낡은 관습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교리를 보충하는 이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진리입니다. ‘새 옷’ 은 지켜야 하고, ‘헌 옷’ 은 버려야 합니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7-38) 형식적인 율법 실천을 중시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방식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신앙생활, 또 성령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은” 일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그때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할례’ 가 폐지되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이 말씀은, 회개와 쇄신을 거부하면서, 낡은 생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회개’ 도 선포하셨습니다.(마르 1,15) ‘회개’ 는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이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일이고, 영적으로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깨끗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낡은 상태로 방치하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갉아먹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은 “나에게 무엇이 더 좋은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에 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회개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 나라를 포기할 것인가?” 는 ‘영원한 생명’ 과 ‘멸망’ 에 관한 일, 즉 ‘생사’ 가 걸린 일입니다. 지금 내 안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 은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늘 행복해지고, 어떤 처지에든지 감사하며 살아가는 은혜로운 신앙인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는 것이다." - 안토니오 포르투갈 - |
♡2343회 벼랑 끝에 섰을 때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기뻐하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6일(이사야서 1장~)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 《생 텍쥐페리<어린 왕자>에서》벼랑 끝에 설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벼랑 끝은 위험한 곳이다. 잘못하면 추락 할 수도 있다.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벼랑 끝은 실패의 장소다. 벼랑 끝은 음모로 인해 모함을 받는 장소다. 벼랑 끝은 극한 가난 때문에 좌절하는 장소다. 벼랑 끝은 이별의 아픔 때문에 흐느끼는 장소다. 벼랑 끝은 고통스러운 곳이다. 두렵고 떨리는 곳이다. 놀랍고 무서운 곳이다. 불안한 곳이다. 흑암이 깃든 곳이며 아픔과 슬픔이 가중된 곳이다. 벼랑 끝은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인생의 마지막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안목으로 보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벼랑 끝은 하느님이 신비롭게 일하시는 곳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벼랑 끝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시며 즐기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벼랑 끝에 설 수 밖에 없을 때 그곳에서 함께 고통을 받으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이 벼랑 끝에 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앙적인 반응이다. 그때 하느님은 벼랑 끝을 축복의 장소로 바꾸어 주신다. 벼랑 끝을 축복의 장소로 바꾸기 위해서는 벼랑 끝에서 잘 반응해야 한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기뻐하라.(야고1:2) 벼랑 끝에 섰을 때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품도록 하라. 혼인 잔치는 행복한 하늘 나라 잔치입니다. 어떻게 행복한 나라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선은 그 잔치 초대에 응해야 하고, 그다음은 잔치 손님으로 쫓겨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배우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분이 ‘안성기’ 씨를 꼽을 것. 안성기씨는 영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스캔들 없이 꾸준한 연기 생활을 60년 이상 이어왔다. 2017년 데뷔 60주년 간담회 때, 배우로서의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래 가는 거죠.” 60년을 이어와도 꿈이 ‘오래 가는 것’ 이라는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영화가 행복이기에 그 행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 지금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 한국 국민 배우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그는 그 이유를 ‘욕심’ 에서 찾았다.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연기 외에 욕심이 없어야 마음 편히 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동반자이자 큰 행복’ 인 만큼 그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욕심을 버리는 작업을 반복해왔다. “이것 자체가 큰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우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봐요. 일 자체에 대한 욕심은 많아야겠지만 일 외적으로 욕심이 많으면 안 되죠. 그럼 내가 편할 수가 없어요. 대인관계, 인기, 명예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의 폭을 넓혀 놓으면 연기할 때 집중이 안 돼요. 그러니 배우에게 좋은 일이 아니죠.” [출처: ‘58년 연기 비결? 욕심 없어야 한다’, 김미리 기자, 마이 데일리, 15-03-25] 혼인 잔치에 초대받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은 ‘욕심’ 임을 알 수 있다. 욕심이 많은 이들은 혼인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은 세상 행복에 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는 끊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참석했어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례를 받았어도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까요? 주연에 대한 욕심입니다. 연기자로 따지자면 끝까지 주연만 하려는 사람일 것. 안성기씨가 오랜 주연을 해오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에서 조연을 했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만 그는 ‘아,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유재석씨가 오래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공이 아니라 항상 어느 자리에서나 조연을 선택하기 때문일 것. 자신이 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주인공이 되려는 것도 욕심입니다. 할리우드 연기자들이 가장 피하는 배역은 ‘예수’ 입니다. 예수 역할을 하면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 더는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가려면 영광을 받는 역할을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재물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정도도 희생할 수 없다면 교회에 머물 수 없다. 교회에 머무는 것은 마치 혼인 잔치에 머무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혼인 잔치 손님이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혼인 잔치 손님은 자신을 초대한 이와 신랑 신부가 영광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하면 그곳에서 쫓겨난 수밖에 없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오직 하느님과 이웃들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조연을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만큼 행복할 수 있다. 주연상이 아닌 항상 조연상을 노리십시오.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할 ‘밝은 기운’ 을 지닌 예수쟁이들임을 느끼면서 기쁘고 축복되게 살아가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 하면, 상처를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 마더 데레사 - |
♡2344회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7일(이사야서 21장~) '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신부님은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아침을 여는 축복의 기도"》"오늘 하루 제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미소로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저의 언어에 향기가 있게 하시고 저의 행동에 겸손이 있게 하시며 저의 가치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시오. 저의 마음 깊은 곳에 사람을 향한 이해와 따뜻한 동정의 마음을 주셔서 그누구도 미워하거나 노여워 하지 않게 하시고 받으려 하기 보다는 언제나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받은 것을 기억하고 준 것은 곧 잊어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하루 목마른 이에게 샘물 한잔의 위로를 줄 수 있게 하시며 마음이 상한 자를 스쳐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이를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소망 잃은 이에게 소망을 갖게 하시며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게 하소서. 제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 바라보는 눈길로 바로 볼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이 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찬미가 들꽃의 향기처럼 세상으로 가득 퍼져 가게 하시고 오늘 하루 저의 마음으로 행동으로 언어로 그려진 그림들이 잠드는 시간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당신게 들릴 수 있도록 종일토록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일상(日常)의 기적(奇跡) 박완서 덜컥 탈이 났다. 유쾌(愉快)하게 저녁식사(食事)를 마치고 귀가(歸家)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寢臺)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些少)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洗面臺)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洗手)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物件)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病院)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疲困)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不平)을 해댔다. 언제까지나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나의 몸이, 이렇게 기습적(奇襲的)으로 반란(反亂)을 일으킬 줄은 예상(豫想)조차 못했던 터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중이다. 이때 중국(中國) 속담(俗談)이 떠올랐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예전에 싱겁게 웃어 넘겼던 그 말이 다시 생각난 건, 반듯하고 짱짱하게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實感)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 전(前)과 후(後)’ 가 이렇게 명확(明確)하게 갈리는 게 몸의 신비(神秘)가 아니고 무엇이랴! 얼마 전에는 젊은 날에 윗분으로 모셨던 분의 병문안(病問安)을 다녀왔다. 몇년에 걸쳐 점점 건강(健康)이 나빠져 이제 그분이 자기(自己)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정도(程度)에 불과했다. 예민(銳敏)한 감수성(感受性)과 날카로운 직관력(直觀力)으로 명성(名聲)을 날리던 분의 그런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때의 빛나던 재능(才能)도 다 소용(所用) 없구나싶어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면서 지금 저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혼자서 일어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食事)하고, 산책(散策)하는 등 그런 아주 사소(些少)한 일이 아닐까. 다만 그런 소소한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대개는 너무 늦은 뒤라는 점이 안타깝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땅 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當然)한 일인 줄 알고 말이다. 사나흘 동안 노인(老人)네처럼 파스도 붙여 보고 물리치료(物理治療)도 받아 보니 알겠다. 타인(他人)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진단(診斷)이지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감사(感謝)한 일임을 이번에 또 배웠다. 건강(健康)하면 다 가진 것이다. 오늘도 일상(日常)에 감사(感謝)하며 살자! 지금, 감사를 느끼고 계시는지? 우리들이 입으로는 감사를 외치지만 진정(眞情)으로 느끼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안구(眼球) 하나 구입(購入)하려면 1억(億)이라고 하니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腎臟) 바꾸는 데는 3천만(千萬)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肝) 이식(移植)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義手)와 의족(義足)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답니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健康)하게 걸어다니는 사람은 몸에 51억원이 넘는 재산(財産)을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도로(道路) 한 가운데를 질주(疾走)하는 어떤 자동차(自動車)보다 비싼 훌륭한 두발 자가용(自家用)을 가지고 세상(世上)을 활보(闊步)하고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事故)로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산소(酸素)호흡(呼吸器)를 쓰면 한 시간(時間)에 36만원(滿員)을 내야 한다. 니 눈, 코, 입 다 가지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면서 공기(空氣)를 공짜로 마시고 있다면 하루에 860만원씩 버는 샘입니다. 우리들은 51억짜리 몸에 하루에 860만원씩 공짜로 받을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感謝)할 일인가요?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불행(不幸)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건 욕심(慾心) 때문이겠지요. 감사(感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결코 행복(幸福)할 수 없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幸福)을 누릴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이라는 정상(頂上)에 이미 올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잎 클로버는 행복(幸福)! 네잎 클로버는 행운(幸運)? 행복(幸福)하면 되지 행운(幸運)까지 바란다면 그 또한 욕심(慾心)이겠지요. 오늘부터 지금부터 숨 쉴 때마다 감사의 기도(祈禱)를 드려야겠습니다. (옮김. 51억 짜리 몸! 860만원 공짜 받는 날!) 청주교구 수요치유기도시 강의한 내용 ''코이의 법칙''이 나온다. 신부님께서도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저는 나무 막대로 지지대를 만들었는데 신부님은 줄로 지지대를 만들었다. 2층에서 내려온 지지대를 타고 오이가 줄기를 감고 있었다. 지지대의 높이만큼 오이가 자라는 걸 보았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났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c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와 뮈토스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 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 십자가 밖에 답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담고 지금 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견디시기를 그래서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축복된 날을 기다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몸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겨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을 내가 먼저 그에게 베풀어라.'' - 공자 - |
♡2345회 “마음을 비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8일(예레미야서 1장~) 다산은 “속이 비어 있으면 길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변명이라고 일컫는다.” 《어제와는 또 다른 하루를 열며》채워짐이 부족한 마음들 완벽 하고픈 생각의 욕심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만은 완벽한 것처럼 말들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자신들만은 잘못된 것들 전혀 없고 남들의 잘못만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남들의 잘못된 일에는 험담을 일삼고 자신의 잘못은 숨기려 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아픔을 즐거워하며 나의 아픔은 알아주는 이가 없어 서글퍼 하기도 합니다.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며 허물을 탓하고 험담을 입에 담는다면 남들은 돌아서면 자신의 허물과 험담이 더욱 부풀려져 입에 오른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조금 부족한 듯이 마음을 비우고 조금 덜 채워지는 넉넉한 마음으로 조금 물러서는 여유로움으로 조금 무거워지는 입의 흐름으로 간직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표현이 좀 극단적인 것 같아서, ‘더 온화한 표현은 없을까?’ 를 묵상해 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서는 “마음을 비운다.” 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 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낸 영화가 ‘웜 바디스’(2012)입니다. '좀비' 영화이지만 인간을 세 종류로 표현하였다. '좀비' 이지만 아직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이 남아있는 존재들, 그러나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을 잃고 영원히 피만 찾아 돌아다니는 ‘보니’ 가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은 '좀비' 로 태어난 아이들을 '보니' 로 만드는 것 같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남을 이겨야만 살게 만드는 체계로 그 사람의 인생을 모기의 삶, '좀비' 의 삶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교육을 통해 생겨난 대표적 인물이 히틀러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그런 교육을 버렸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많은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아이들을 '좀비' 에서 '보니' 로 만들어갑니다. 아무튼, 이런 세계에 인간들이 연구하기 위해 들어오고, ‘알’(R)이라고 하는 한 '좀비' 가 그녀 남자친구의 뇌를 먹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까지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를 '보니' 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생명을 포기합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며 인간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 들임으로써 입니다. '좀비' 였던 ‘알’ 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김상운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 같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이유는 우리를 품기 위해서 였다. 팔을 벌려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다시 말해 모든 시간과 공간 안의 인간들을 품으십니다. 원하면 누구나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자아를 죽임은 곧 타인을 받아들임과 일치합니다. 어느 영성관 앞에도 작은 야산이 있다. 그 속엔 많은 뱀이 살고 있다. 심지어 영성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거의 뱀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뱀과 그만큼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사는 뱀은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마음이 넓어지면 자아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그 뱀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도 하시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시는 것. 사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한 자매님이 아직 아기인 딸과 어떤 강좌를 듣기 위해 갔다. 그런데 그날 따라 딸이 너무 우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업고 화장실로 갔다. 딸의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런데 혈관에 흐르는 맥박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자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 나온 것.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예뻐 보였다. 아이를 안아 주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었다. 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혀 아이를 받아 들인 것.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희를 위하여 보여주셨던 사랑과 자비로 “저도 그 한 영혼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자비를 베풀고 싶습니다.” 라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느껴진다." - 헬렌 켈러 - |
♡2346회 ˝희망˝ 과 ˝기쁨˝ 은 암세포를 죽이는 명약입니다. -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절망˝ 이라는 악성 종양입니다.♡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19일(예레미야서 21장~ ) 성 요한 비안네는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약》1982년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 뇌 암에 걸린 소년이 누워 있었다. 이름은 숀 버틀러 나이는 일곱 살 숀은 의사로부터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다. 야구광인 숀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런타자 스테플턴의 열렬한 팬이었다. 어느 날 숀의 아버지는 스테플턴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내 아들은 지금 뇌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당신의 열렬한 팬인 숀이 마지막으로 당신을 한번 보기를 원한다˝ 스테플턴은 숀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합니다. ˝숀~, 내가 스테플턴이다. 내일 너를 위해 멋진 홈런을 날려주마, 희망을 버리지 마라˝ 숀은 눈을 번쩍 뜨며 반갑게 야구영웅을 맞았다. 이튿날 스테플턴은 소년과의 약속을 지켜 홈런을 쳤다. 그 소식은 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소년은 병상에서 환호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소년의 병세는 완연한 회복 기미를 보였다. 5개 월 후에는 암세포가 말끔히 사라져 퇴원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이 일어난 것. 미국 언론들은 이 사실을 연일 대서특필 하였다. 기억하십시오, ˝희망˝ 과 ˝기쁨˝ 은 암세포를 죽이는 명약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절망˝ 이라는 악성 종양입니다. 책임(責任)을 뜻하는 영어는 'Responsibility' 와 ‘Accountability' 가 있다. 하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강재구 소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훈련도중 수류탄이 떨어졌다.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다. 강재구 소령은 부하들을 위하여 몸을 던졌다. 육군은 전 장병이 모금을 해서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동상을 만들었다. 동상에는 이런 글이 있다. “자유의 전선 월남 출정을 위한 맹호부대의 수류탄 던지기 연습 중 한 부하의 실수로 많은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 순간 터지는 폭탄을 막아 안고 자기 몸을 희생하다.” 베드로 사도의 ’Quo vadis Domine(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베드로 사도는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다가오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대답합니다. ‘네가 도망쳐 나온 로마로 가는 길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금 로마로 돌아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두려움과 어둠에 직면한 인류에게 진리의 등불을 높이 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Responsibility' 를 다하였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 법적인 의미입니다. 행위가 있었고,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다. 독일은 인류와 역사 앞에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구하였다. 그런가하면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지만 아직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전쟁의 전범이 안치된 곳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이는 인류와 국제사회 앞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회사의 경영이 악화되는 경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기업인이 있다.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는 기업인이 있다. 그런가하면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기업인도 있다.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업인도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2000년 3월 12일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인류 앞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다. 교회의 권위로 과학적인 진리를 가리려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재판에 넘긴 적이 있었다. 교회의 질서를 지킨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적이 있다. 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Accountability'를 통하여 발전하였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고 있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청하였다.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물 위를 걸어오도록 말씀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물위를 걷다가 그만 두려움에 빠졌다. 두려움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 사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두려움의 바다, 상심의 바다, 근심의 바다, 욕망의 바다, 시기의 바다, 분노의 바다에 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빠질 때가 있다. 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그만 바다에 빠질 때가 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음성을 큰 바람 속에서 듣지 못하였다. 지진 속에서 듣지 못하였다. 불길 속에서 듣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음성은 내적인 침묵 속에서 들려왔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때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주님과 떨어져도 좋을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합니다.’ 교회가, 신앙인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면, 주기보다 받으려 하면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지기 쉽다. 우리가 욕망의 바다에, 욕심의 바다에 빠지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하고, 먼저 나누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세상의 등대가 되었다. 그분들은 희생의 빛으로, 사랑이 빛으로, 희망의 빛으로 손을 내밀었고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간절함’과 ‘긍정적인 힘’의 기도로, 지금 주어진 모든 일이나 원하는 일들의 문제 매듭이 하느님의 햇살과 성모님의 도움을 받아 잘 풀릴 수 있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실수에서 배워라." - 워렌 버핏 - |
♡2347회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0일(애가 1장~ ) 제이크 피셔는 "지혜는 오늘을 즐기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은총을 위한 기도》숲 속의 호수처럼 지금 이 시간에는 고요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다. 밖으로 밖으로만 자꾸 흩어지고 있는 마음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당신의 고요함을 나에게 주십시오. 산처럼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다.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고백하고 싶다. 밤새 내리는 흰 눈처럼 당신의 순결한 마음을 나도 지닐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좀 더 넓게 용서하고 좀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십시오. 때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때로 한 단체를 동반하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정말이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한 가지 있다. 사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누구든 인간적 약점과 나약함, 실수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다들 불완전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완해주면서 완전함의 ‘끝’ 이신 하느님께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때로 무한한 인내도 정말 필요합니다. 한없는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려니 하는 큰마음도 필요합니다. 더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다. 진심에서 우러난, 솔직한 ‘형제적 교정’ 입니다.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심각한 약점과 중대한 결핍 앞에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 그와 일대일로 만나 그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많은 경우 그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또 때로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기에, 때로 더 큰 상처와 소란함을 유발하는 일이기에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되는 일이며 다른 무엇에 앞서 많은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이 아니라는 것.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당사자 ‘단둘’ 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 결국 우리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사회 공동체 안에 아무리 막가는 사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손 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것. 한 번 권고해서 안 된다고 해서 단칼에 그를 매장시키려하지 마라는 것. 이 방법을 써보고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을 써보고, 최선을 다한 후에 안 되면 그때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라는 것. 인간관계 안에서 특히 부족한 이웃들 앞에서, 그들의 교정과 성장을 위한 조언의 과정에서, 인내와 겸손, 신중함과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나는 일이 없어야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상처를 못 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그의 곤경을 못 본 척 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 사람이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해 주질 않았다면 그는 파멸의 길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고 하신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속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사기와 거짓 맹세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의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는 것.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하나가 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각의 일치이고 다음은 의지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형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형제적 교정에 대한 권고는, 전에 읽었던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말씀에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형제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은 그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나오는 것. 그가 형제이기에, 그가 잘못한다고 해서 형제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원수가 되어 담을 쌓고 살 수 없기에, 그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음에도 형제라는 관계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에게는 내 형제의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기에 그에게 권고하는 것. 형제의 구원에 책임을 갖는 것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형제가 아닌 이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고 타이를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 가운데 서로 떨어져 있는 섬들처럼 살아가는 것.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다음, 어느 기숙사에서 한 학생이 방에서 죽었는데도 며칠 동안 아무도 모르고 그대로 방치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면서 그날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형제의 잘못에도 그가 바른길을 걷도록 일깨워 주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그가 옆방에서 죽어도 알지 못하는 것. 어느 공동체에서나 형제적 교정은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아무리 잘 알아듣는다고 해도 서로 간에 큰 신뢰가 있지 않으면 그런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형제를 많이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의 처지를 깊이 알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교정이 될 수도 있다. 교정해야 할 때와 아닌 때를 식별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권고를 하고 또 듣는 이가 그것을 진정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들은 서로 형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실은 인간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이다." - 안중근 - |
♡2348회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1일(에제키엘 1장~ ) 성녀 벨라뎃다는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 《인생의 작은 교훈들》좋은 생각이 떠오른 다음에 일하겠다고 생각하지 말이라. 먼저 무엇이든 일하기 시작하라. 그리하면 좋은 생각이 그 뒤를 따르는 법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 한 사람이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좋은 아이디어 자체까지 미워하지 말아라.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네가 바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알고있으려니기대하지 말아라. 네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도록 하여라. 누군가에 대하여 알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가장 만나고 싶은 다섯 사람을 물어 보아라. 그 대답이 그 사람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줄 것. 네가 진정 보고 싶고, 가지고 싶고 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몇 푼의 돈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말아라. 종업원이 특별한 서비스를 하였거든 팁을 넉넉히 주어라. 그리고 "훌륭한 서비스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식사가 참 즐거웠습니다" 라고 칭찬하여라. 손톱 밑에 때가 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는 각별한 존경심으로 대하도록 하여라. 네가 운이 좋아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은 너의 예금구좌뿐 아니라 너의 영혼까지도 충만케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전문적인 충고가 필요할 때는 친구가 아니라 전문가에게 충고를 구하여라. 물건의 가치는 가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필요에 달린 것. 항상 품위 있게 행동하라. 너에 대한 평가가 그로부터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힘쓰라. 너의 재정 문제와 관련된 일에는 무자비하게 현실적이 되어라. 가장 가까운 친구 두 사람에게 네 집 열쇠를 주어라. 스스로 살펴보아 불안하다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도록 하여라.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내가 밖을 내다보는 순간 하느님은 내 안에 계셨다! 그리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니, 인생에는 적어도 몇번의 대전환점, 다시 말해서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삶을 180도 바꿀 수 있는 기회, 인생을 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는데도 온 줄도 모르고, 그 소중한 대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다. 가끔씩 자신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틈나는 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일입니다. 한 번씩 인생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탈탈 털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반전의 시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쳤을 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때가, 곧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경우가 많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대 성인이자 학자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이 바로 그랬다. 젊은 시절 그는 껌 좀 씹는 청년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이 있다보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다. 오로지 세속적인 성공, 명예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더 심각한 일이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발생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 마니교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에 널리 팽창되던 종교였다. 창시자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마니교 가르침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해방시킨다는 것.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마니교는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융성하는데, 그 절정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하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자신의 고백록을 통해 9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강렬한 빛 한줄기와 함께 인생의 대 전환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386년 가을이었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고향 친구 폰시아노가 찾아옵니다. 폰시아노는 최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깊은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도자들, 특히 안토니오의 성스럽고 빛나는 영적생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우구스티노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애를 쓰고 있는데, 공부 꽤나 했다는 우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하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은혜로운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다. 갑작스런 내면의 변화을 주체하지 못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산책하며 기도하던 아우구스티노의 귓전에 한 애띤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 즉시 발길을 돌려 침실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책상 위해 놓여 있는 성경을 들어 펼쳤다. 아우구스티노의 눈에 최초로 들어온 성경 구절은 다음의 말씀이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3~13절)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큰 망치로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성경 구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우구스티노 자신을 위한 맞춤형 선물이었던 것. 죄의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던 순간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물론,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올렸을 것. 우리도 가끔씩 성경책을 들어 펼쳐볼 일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줄 생명수같은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해줄 은혜로운 말씀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용서가 내 몸 안에서 그리고 기도로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충만한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항상 겸손과 배려로부터 나온다." - 라오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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