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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350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

♡2349회 우리 삶에서 ‘자신’ 을 빼고, ‘십자가’ 를 더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2일(에제키엘 21장~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30분 후에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소한 일이나 바보 같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가다》살아가다 예상치 못한 기쁨이 찾아와 맑은 샘물이 가슴에 용솟음쳐도 그 기쁨에 온 마음 얹혀 놓지 말게 하옵소서! 그 기쁨은 영원이 내 것이 될 수 없으며 내게 주어진 기쁨이 때로는 다른 이의 슬픔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뜻밖의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부딪쳐도 그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그 슬픔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내게 주어진 슬픔이 때로는 다른 이의 기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운명처럼 다가선 고난이 크나큰 장애가 되어 인생 여정에 막막함으로 다가서도 그 고난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 고난은 계속해서 내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며 내게 주어진 고난이 때로는 희망의 불씨로 다시 지펴 올라 더 한 행복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많은 이와 또는 각기 다른종류의 사랑을 하며 사는 동안 실망과 배신으로 인해 깊은 상처가 가슴에 남아도 그 아린 사랑이 증오의 화신으로 탈바꿈하지 않게 하시고 인내를 갖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 사랑은 처음처럼 언제나 달콤한 사랑이 될 수 없으며 내게 주어진 사랑이 때로는 그 아픔의 과정을 통해 더욱 원숙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변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104세, 시인이 되고 싶다. 강연을 마치고 승강기를 기다리는데, 한 노인이 오더니 “선생님, 정말 100세 넘으셨습니까?” 물었다. 할 말이 없어 “어머니께서 알려준 나이니까 맞을 겁니다” 라고 답했다. 노인은 “저는 92세인데요…” 라면서 떠나갔다. 자기 나이와 비교해 내 모습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나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90을 넘긴 건 확실하다. 80대에 아내를 보내곤 집이 비어 있는 것 같더니, 90에 안병욱·김태길 교수와 작별한 후에는 세상이 빈 것처럼 허전했다. 그런데 어느새 100세를 넘겼다는 사실엔 나조차 공감하기 쉽지 않다. 100세가 넘어 제주나 부산으로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난처한 일을 겪었다. 내 주민증으로 예약한 탑승권은 기계가 인식하지 못한다. 02세가 되기도 하고 탑승권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한참 조사해 본 직원은 “세 자리 숫자는 컴퓨터에 나타나지 않는다” 고 설명했다. 몇 년 더 지나면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요사이는 주변에서 ‘외출 금지령’ 을 내렸다. 내가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까 봐 걱정이란다. 연세대 제자들과 모임을 하고 혼자 떠나는데 제자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오면서 나를 살펴주었다. 자기 부친은 길을 못 찾아 파출소까지 가곤 한다고 했다. 좋은 점도 있다. 약간 알려진 식당에 가면 나도 모르는 제자들이나 손님이 식대를 대신 내주기도 한다. 처음 만난 분이 애독자라며 또는 저희를 위해 수고하셨다며 점심 값을 내준다. 집 가까이에 있는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는 오래전부터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조심스럽고, 비싼 식사는 사양하게 된다. 몇 년 전 KBS에 출연하였는데 대담자가 “혼자 오래 사셨는데 여자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 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색해서 “생각은 간절하지만 요사이는 너무 바빠서 안 될 것 같다. 2년쯤 후에는 신문에  ‘여자 친구를 기다린다’ 는 광고를 낼 작정” 이라고 했다. 모두 웃었다. 100세 전까지는 누군지 모르는 할머니들이  정말 “그 신문 광고를 기다리고 있다” 고 했다. 그런데 100세가 한계선이었다. 모든 할머니가 다 떠나 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지난 연말이다. 문학인들이 모이는 남산 ‘문학의 집·서울’ 행사에서 내가 좋아 하는 시를 낭송했다. 윤동주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한 내 인생의 첫 시인이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난 후에 구상 시인이 마지막 시인이 되었다. 죽음을 예견하는 병중에 있을 때 나에게 보낸 시가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시작했는데 ‘죽음의 문 앞에 서니까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죄인이었다’ 라는 시였다. 동주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고 했다. 그러나 그 길을 걷지도 못하고 목숨을 빼앗겼다. ‘그리고’ 대신에 ‘그래도’ 라고 했더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나도 머지않아 삶을 마감하는 문을 열어야 한다. “여러분과 함께 있어 행복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고 할 것 같다. 그날 낭송회에서 나도 모르게 새해 소망을 말했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나도 여러분과 같이 시를 쓰다가 가고 싶다” 고 했다. 오랫동안 나는 사회 속에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해 왔다. 100세를 넘기면서 나 자신을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 예술을 남기는 여생을 갖고 싶었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그제야 알았다. 내 새해 소망은 시인이다. 시다운 시를 쓰지 못하면 산문이라도 남기고 싶다. 100세가 넘으면 1년이 과거의 10년만큼 소중해진다.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복음 16장 24절)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한다면, 우리 삶에서 하나는 빼야(-)하고 하나는 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서 ‘자신’ 을 빼고, ‘십자가’ 를 더해야 합니다. 결국 내 인생에서 나를 덜어내고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의 비결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겠지요.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고,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일 것.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는 대상,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돈이든, 명예이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일 것.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끔씩 집어드는 그릇된 선택, 우리를 죄와 악습, 허망함과 부질없음에로 이끄는 결정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것일 것. 그렇다면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철저하게도 나와 맞지 않는 그를 끌어안는 것이겠다. 때로 생각만 해도 족쇄처럼 부담스런 공동체를 끌어안는 것이겠다.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결코 내가 원치 않았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수 없이 겪게 되는 인생의 산전수전, 우여곡절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이겠다.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던 병고나 노화,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될 죽음까지도 기꺼이 끌어안는 것이겠다. 고통과 십자가에로의 초대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나 열두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우리 모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 우리 그리스도교는 나를 내세우고,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가 중심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두는 종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 인간 각자도 충만하고 거룩하게 되는 종교입니다. 내 계획을 앞세우기보다 주님의 계획을 앞세워야겠다. 제자란 말 마디 그대로 따르는 사람,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추종해야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고방식, 그분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선택해야겠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선택하면 참 애매합니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께도 속하고 사탄에게도 속할 수 없다. 어중간하게 서 있어서는 안되겠다. 주님께서는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 영원하심과 불멸하심에 영원히 참여하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덧없는 대상들과 거듭 결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들에 믿음의 씨를 뿌리면서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길임을 알고, 우리들에게 오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거룩한 마음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 넬슨 만델라 -


♡2350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3일(에제키엘 31장~ )

  세르반테스는 ''하늘은 정직한 사람을 도울 수밖에 없다. 정직한 사람은 신이 만든 것 중에서 최상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심(唯心)》마음을 일으키면 발심(發心) 마음을 잡으면 조심(操心) 마음을 풀어 놓으면 방심(放心)이다. 마음이 끌리면 관심(觀心)이고 마음을 편안케 하면 안심[安心] 마음을 일체 비우면 무심(無心)이다. 처음 먹은 마음은 초심(初心)이고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이 항심(恒心)이며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마음은 단심(丹心)이다. 작은 일에도 챙기면 세심(細心)이고 사사로움이 없으면 공심(公心)이며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본심(本心)이다. 욕망의 탐심(貪心)과 흑심(黑心)을 멀리하고 어지러운 난심(亂心)과 어리석은 치심(癡心)을 버리고, 애태우는 고심(苦心)을 내려 놓으면 하심(下心)이다. 아~ 내 안에 이리도 많은 마음(心)이 있구나 오늘도 좋은하루 만나세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라는 증언이고, “우리는 예수님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시는 분이고, 자연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욥기에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하느님께서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일과 같은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 권능을 목격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도 신앙고백이 되지만, 33절의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설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유령이 다가오는 줄로 생각해서 겁에 질린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인 줄 몰랐고, 또 예수님이 그렇게 다가오실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고,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만 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맞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왜 물 위를 걸으려고 했을까?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28-33) “주님, 주님이시거든” 이라는 말은,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 이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도 주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인데, 앞의 ‘주님이시거든’ 이라는 말과 합해서 생각하면,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셔서 그것을 증명하십시오.” 라는 말이 되고, 이 말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또 주님을 시험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 명령하십시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대단히 독특한 표현입니다. 명령을 요청한다는 말은 일반적인 말투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걷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내면서도 그것을 요청하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명령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제자들(신자들)은 주님께 명령할 수 없다. 요청(간청)만 할 수 있다. 명령은 주님만 하시는 일이고, 제자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것을 의식하고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독특한 말을 한 것 같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려고 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예수님께 가고 싶은 심정에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떻든 그의 요청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그의 요청을 받아 주신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중간에 물에 빠질 것을 알고 계셨을 것. 그렇다면 ‘실패’ 를 통해서 교훈을 얻게 하려는 생각으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받아 주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걸어갔을 것. 그러다가 거센 바람 때문에 큰 파도가 밀려오자 그 파도를 바라보았을 것이고, 파도에 압도당했을 것. 그가 물에 빠진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 파도에 대한 무서움이 더 컸기 때문일 것. 그래도 물에 빠졌을 때 주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를 지른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셨는데, ‘의심’ 이란, 여기서는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갈라졌고, 또 제자에게 물 위를 걷는 능력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과 물 위를 걷는 사람을 물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갈라졌다. 믿음이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고, 예수님만 믿는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믿는 것. 이 이야기에서 베드로 사도의 진짜 문제점은, 믿음이 부족하고 약해서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도 물 위를 걸어가고 싶다고 소망한 일입니다. 그는 왜 그것을 소망했을까?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일까, 아니면 물 위를 걷는 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까, 또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불경스러운 교만일까? 아마도 그런 것들이 모두 합해져 있었을 것. 오늘날에도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불순한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어쩌다가 기적을 일으킨 것 같은 일이 생기면 교만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 욕망과 교만은 모두 죄입니다. ‘기적’ 은 “하느님께서 선을 실현하는 특별한 방법” 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이고, 그래서 그 일은 선의 실현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간 일은 선의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는 말 한 마디로 장애자를 고쳐 주고(사도 3,6-7), 죽은 사람을 살리는(사도 9,40) 기적을 일으키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는데,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일에서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큰 은총으로 하느님 사랑의 빚을 갚고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 존 레논 -


♡2351회 ''3초의 비밀 이야기를 꼭 실천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4일(에제키엘 41장~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삶을 사는 데는 단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방식이다.''
 《삶은 찾아 나서는 것》커다란 강가에 수많은 낚시꾼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 왜 이렇게 고기가 안 물리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홀로 멀리 떨어져 낚시를 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강가 깊숙한 곳에 들어가 낚시를 하던 한 청년이 큰 어항에 대어들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바구니에 고기 한 마리 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까?” 청년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더욱 궁금해진 사람들이 물었다. “도대체 그 신기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청년은 그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뭐, 별 거 아닙니다. 기다리지 말고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법칙이니까요.” -행복비타민 중에서- 3초의 비밀 알고 있습니까?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 입니다. *6개월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들의 집입니다.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입니다. 그런데 *누에는 집을 지을때 자신의 창자에서 실을 뽑아 집을짓고 *제비는 자기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집을 짓고 *까치는 볏 집을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줄 모르고 집을 짓습니다. *날짐승과 곤충들은 이렇게 혼신을 다해 집을 지었어도 시절이 바뀌면 미련없이 집을 버리고 떠나 갑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끝까지 움켜 쥐고 있다가 종내는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사람을 위해 돈(화폐)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비싼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는 신세입니다. *사람이 거주하기 위해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犬)신세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하네요. 자신도 모르게 어느순간 거꾸로 되고 있는 현상을 일컷는 말을 의미 합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 하니까 의미의 노예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신세가 된것입니다. *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것이라 했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것이라고 사전에서 설명합니다. *완전한 소유란, 이세상 어디에도 없음은 이미 두루 알려진 사실입니다. *자연을 완전히 소유하는 생명체는 세상 천지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물체는 이땅에 살아있는 동안, 자연에서 모든것을 잠시 빌려 쓰다가 떠나가는 나그네라고 했다. *우리가 이세상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고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말 합니다. [*''그대의 마음속에서 얻은것이 진정 그대의 귀중한 소유물이다.''] *그런데 많은것들을 곁에 두고서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참으로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미래의 노후대책 세우느라 오늘을 행복하게 살 줄 모르는 희귀병에 걸려 살고있는 現代人. *늘 행복을 자기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헤매며 찾아 다니다 지쳐버린 現代人. *나누면 반드시 행복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알고도 실천 못하는 장애를 가진 現代人.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바보같은 現代人. *결국은 서로가 파멸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연/지구 파괴로의 길을 버젓이 걷는 우매한 現代人. *지난날 벌어 놓은 재산을 그저 쌓아 놓기만 했지 가치있게 써보지도 못하고 자식들 재산 싸움으로 갈라서게 만드는 이상한 부모들이 많이 존재하는 現代人. *시간을 내어 훌쩍 떠나면 그만인데 앉아서 온갖 계산에 머리 싸매가며 끝내는 찾아온 여행 기회도 놓치고는 중병에 시달리는 이상한 現代人. *이러한 전도몽상(顚倒夢想)에서 헤매는 現代人이 오늘날 바로 내 자신일지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이러한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는 아주 작으마한 비밀, 3초의 비밀 이야기를 꼭 실천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울상을 짓고 있을 때 3초만 아무 말없이 웃어주신다면 그 아이는 잘못을 뉘우치며, 내품으로 달려올지도 모릅니다. *화가 잔뜩 나서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 없을 때라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봅시다. 내가 화낼 일이 정말 보잘 것 없는 일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면 어떨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바로 닫기(▷◁) 단추를 누르지 말고 3초만 기다려 보시면 어떨까요? 누군가 응급환자 때문에 달려오는지도 모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열려있는 단추(◁▷)가 있음으로… *파란 출발신호등이 켜졌는데 앞차가 그냥 있어도 빵~빵~울리지 말고 3초만 기다려 주면 어떻겠습니까? 앞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답니다. *내 차 앞으로 갑자기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3초만 기다려 주면 어떻겠습니까? 그 운전수 식구가 정말 위급한 환자 때문인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침 뉴스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불운한 사람들을 보면 잠시 눈을 감고 3초만 기도 하시면.... 당신의 인생에서 끝까지 남게 되는 영원의 시간일수도 있다. *죄 짓고 감옥 가는 사람들을 볼 때 비난하기 전 3초만 생각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 사람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사람을 위해 3초만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내가 화가 나서 잔소리를 해도 3초만 미소 짓고 그냥 경청하시면 어떻겠습니까?. 3초는 아내에게 정말 필요한 보약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고 가슴에 손을 얹고 3초만 감사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오늘 다시 살아 있음에 오늘하루도 행복하리라.” *조금 힘들게 느껴질 때는 3초만 웃어봅시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좋아지기 때문이랍니다. *친구와 헤어질 때 바로 돌아서지 말고 그 뒷모습을 3초동안만 보고 서 있어줍시다. 혹시 그 놈이 가다가 뒤돌아 봤을 때 웃어줄 수 있도록…...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3초만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줍시다. 그 아이가 크서, 분명 내 아이에게도 그리할 것입니다. *전화통화를 끝내고 작별인사 후 3초만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상대방이 갑자기 추가할 내용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고, 그보다 냉정하게 먼저 끊는 나에게 나쁜 인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름답니다. 

   매 순간 우리들을 향한 하느님의 돌보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기도하고, 특히 우리들이 오늘 충실히 살아 성령의 충만한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 마르틴 루터 킹 -




♡2353회 '위협이 있을 때,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가 오히려 기회라는 말이 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6일(다니엘 11장~ )

   성 필립보네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사랑하는 사람을 우러러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할 때나 그 사랑이 나를 외롭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할 때라도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게 하소서! 나의 미련함으로 사랑하는 이가 눈물을 보이지 않게 하시고 나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으로 사랑하는 이가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을 받들어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를 늘 나보다 먼저 사랑하게 하시고 그의 아픔을 내가 대신 아파하게 하시고 그의 기쁨을 몇 배나 더 기뻐해 주는 너그러운 사랑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슨 일일지라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나의 작은 사랑으로도 사랑하는 이가 늘 행복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을 고요히 사랑하게 하소서!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며 자기 이름을 다하는 느티나무처럼 내 사랑하는 이의 행복한 삶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비행기 사고가 자주 있지는 않지만 한 번 사고가 나면 큰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탈 가장 안전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그 시점은 비행기 사고가 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라고 합니다. 모든 항공사가 정비 점검을 더욱더 철저하게 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위협이 있을 때,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가 오히려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이때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성장을 가져올 수가 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한 다음에야 지금 모습이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길 바란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길 원한다면 오히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고통과 시련을 제게 맘껏 주세요.”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을 것. 그보다 제발 좀 치워달라는 것에 맞춰져 있다.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지금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 부분은 심각하게 묵상할 때, 나의 기도 내용이 바뀔 수가 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며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셔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따라서 이 파견은 그들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 자기 육신을 위해 아무런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맨몸으로 보내시면서 오직 수확할 밭의 주인님만 의존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전교 여행은 어떠했나요? 실패였을까요? 아니면 성공이었을까요? 큰 성공을 거둡니다.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힘든 것투성이였지만, 이 없음이 커다란 성공을 이끌어서 그들을 더욱더 영예롭게 한 것.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이를 잠언서의 저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가지를 간청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잠언 30,7-8)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참회록... 주님의 기도 풀이”라는 글 <고백합니다...> 우루과이 한 작은 성당 벽에 적혀 있는 “참회록... 주님의 기도 풀이” 라는 글입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면서  세상에 빠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라고 하면서 나 혼자만을 위해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라고 하면서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해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라고 기도하면서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했던 나였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내 뜻대로 되기를 원했던 삶을 살아 왔음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면서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고 부도덕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라고 기도하면서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악을 보고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살아 왔음을 고백합니다. “아멘...” 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피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사랑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참회록을 읽으면서 “믿음이 무엇일까?” 라는 묵상을 해봅니다. 어느분께서는 일찍 할아버지가 되었다.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기에, 큰형의 큰아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주를 보니, 조카 때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자주 만날 수가 없다. 특히 코로나로 서로 주의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더욱더 만남이 줄었다. 그래서 조카가 종종 아들 사진을 올려 줍니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아이는 나날이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분명히 아기였는데, 어느 순간 어린이가 되어있다.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늘 새로운 오늘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도 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맨날 똑같은 삶이라고 말하며 불평합니다. 지금의 새로운 오늘을 생각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새 물건을 가지게 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새로운 나를 갖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기분이 좋아지는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신 햇살 가득한 사랑과 정성을 느끼며, 밝게 바라보고 귀하게 듣고, 무슨 일을 시켜도 짜증이 없고 불평이 없기를 그래서 우리들에게 먼저 성령의 불이 일어나는 은총 가득한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인내와 경험의 결합이다." - 아인슈타인 -


♡2354회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7일(요엘 1장~ )

  김남주는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재물이 갖는 의미》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면에서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참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돈으로 많은 물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최고, 또는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고 최고의 선이신 하느님보다 돈을 더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것은 큰 불의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불의로 이끌게 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게 형제적 사랑을 표현하게 하고 기쁨과 서로의 일치를 더해 주는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게 하는 것.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쌓으려고만 하고 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것은 결코 제대로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재물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쓰이거나 이웃에게 나누어 줄 때에야 비로소 본연의 참 의미를 지닙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또는 병원에서 일을 하던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는 매일 묵상말씀을 600여분께 2,354회를 전달하면서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 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 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을 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서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은총과 축복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성실한 자는 인생의 모든 것을 얻는다." - 마더 테레사 -

♡2355회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8일(아모서 1장~ )

  이순신은 "성실한 일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가장 낮은 사랑이 더 깊은 사랑입니다.》내 사랑의 크기 만큼 그의 사랑이 같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며, 받아서 채워지는 사랑보다는 주면서 채워지는 사랑 그로 인해 오는 아픔과 슬픔에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랑,  그렇게 낮은 사랑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내 가슴 비워가는 사랑이 가장 절실한 사랑입니다. 그가 보고픈 만큼 그가 그리운 만큼 내 가슴 오려내주는 사랑 그와 같은 눈 높이에 서서 나 자신을 하나하나 비워감에 따라 그 자리에 어느새 그가 하나하나씩 쌓여가는 그런 사랑이 가장 절실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들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분이지만, 또한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권능도 가지신 분이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 후에 즉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이 기적사화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려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절)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된다.(32절) 즉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 이제 그분의 현존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론적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 이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그를 구해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책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다. 이때 제자들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28-33절 참조) 이 대목에 교회론적 관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보려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 그러나 처음보다는 신앙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시다면’ 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있다. 또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센 바람을 보자 그 믿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 베드로는 불과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의심으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체험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우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음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즉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의탁하여야 한다.”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 는 말은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된다. 오늘의 교회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휩쓸려 갈듯 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항상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용기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충족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은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며, 풍랑에 시달리는 배와 같이 교회도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가며 격랑에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담고 있는 이 가르침을 교회론적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한 것.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도우심을 청하여야겠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마태오 복음 14장 24절)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서 높은 파도에 쉼없이 흔들리고 있는 작은 배 한 척!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교회 깊숙히 들어가면 갈수록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미성숙과 부족함, 적나라한 실상과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교회 공동체를 향한 비난의 화살들을 인정사정없이 날립니다. 속수무책으로 화살들을 맞고 있노라면 깊은 슬픔과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워야지, 저렇게 쉼없이 흔들려도 되는 것인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들 잘 익은 밀알처럼 튼실해야지, 쭉정이나 가라지처럼 저렇게 칙칙하고 울적해도 되는 것인가?’ 위기감이 증폭되면 목소리는 더 커집니다. ‘이제 교회는 끝났어! 교회는 밑천을 다 드러냈어! 이제 배에 물이 가득 차서 거의 침몰 직전이라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는 크게 흔들리고 요동치면서도 침몰하지 않고 2천년 세월 동안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 계속해서 불안불안하겠지만 결코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 그 이유? 배 심층부 한 가운데는 심한 파도에도 중심을 잡아주는 안전 장치가 자리하고 있다. 좌우로 크게 흔들릴 때 침몰될까 다들 두려워하지만 복원력의 근원인 안전장치로 인해서 다시금 배는 중심을 잡습니다. 배 상층부 갑판 위로 올라가보면 흔들릴때마다 꼭 붙들라고 안전장치인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배가 기우뚱할때면 만사제쳐놓고 난간을 꼭 붙드는 것이 상책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라는 배 안에도 흔들릴때 마다 꼭 붙들 수 있는 영원한 안전 장치가 있다. 든든한 선장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관계로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우리 교회 공동체가 크게 요동칠 때에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야겠다. 우리 교회 공동체 가장 밑바닥에서 중심을 잡고 계시는 복원력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겠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안전장치를 꼭 붙들어야겠다. 교회란 나를 포함해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로 구성된 공동체이자 주님 품안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근본적으로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느껴지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편입되고 나서 실망과 허탈을 느끼면 그것은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교회란 폭풍을 헤쳐 나가는 조각배와도 같다. 그래서 흔들릴 때 마다 서로의 손을 꼭 잡는 일, 그것처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다. 인간은 왜 두려워합니까?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 버릴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겠다. 때로 주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런 느낌은 순전히 우리 인간 측의 착시현상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폭풍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비 내 어미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만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힘을 쓰고 살아가면서, 오늘도 좋고, 내일은 더 좋아지는 축복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혜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2356회 ''먼저 용서청하고,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 반복할때 어두움은 떠나가고 치유와 은총ㆍ축복 받습니다. 

♡ 설날 주님안에서 치유받고 은총과 축복받는 행복한 삶되세요. 
박재만 세례자요한  
류태숙 마리아막달레나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29일(요나서 1장~ )

 《민수기 6, 22-27》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평생에 걸쳐 매일 매순간 밥먹듯이 되풀이 해야하는 매일의 과제, ‘용서’ 에 대해서 생각하는 삶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우리 모두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누군가 내게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덮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란 개념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잘못한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넘어섭니다.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을 포함한 하느님의 거룩한 구원 활동이 곧 용서입니다. 저의 고향이 주제로 2007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몰고왔던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 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모든 것을 잃고 난후,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신애에게 업친데 덮친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처이던 아들이 유괴 살해된 것. 너무나 큰 충격 앞에 주저앉아 있던 신애는 오로지 신앙에 매달리며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러 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 해주러 간 것. 면회실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태도에 또 한번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백 번 천 번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란 말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것.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은 세상 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이미 제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신선같은 미소를 짓는 것. 밖으로 나온 신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습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 받았데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또 다시 그를 용서하냐구요?” 곰곰히 따지고 보니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용서에는 식별과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원인을 곰곰히 분석해보니 50:50 쌍방과실이라면, 용서하는 게 맞습니다. 50:50까지 아니어도, 상대방이 70, 내가 30 정도 된다 할지라도, 억울하겠지만 큰 마음 먹고 용서하는 게 좋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1:100 같은 경우도 만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필요한 것이 용서 이전에 정당한 과정이요 절차입니다. 때로 징계나 처벌도 필요합니다. 진정성 있는 사과가 뒤따라야겠지요.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용서인 것. 씻을수 없는 깊은 상처와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준 인간 말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사악한 존재들, 피해자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 해맑은 얼굴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것. 섣불리 용서했다가는 나중에 두고두고 홧병을 앓을 가능성이 많다. 한 인생이나 가족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죄자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일제군국주의자들, 친일파들, 자기 한목숨 건지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친중ㆍ친북을 위하여 국가기밀과 대기업의 특허를 넘겨 나라와 대기업을 위기로 몰아 전국민을 고통에 빠뜨린자들, 사익을 위해 선량한 백성들에게 고통을준자들은 그냥 용서하면 안 됩니다. 합당한 처벌과 배상, 진정성 있는 사과가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무조건적 용서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일흔 일곱 번 용서하는 것. 저의 면담과 강의때 주제가 ''먼저 용서청하고,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반복할때 어두움은 떠나가고 치유와 은총ㆍ축복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만 뜨면 용서하는 것. 밥 먹듯이 용서하는 것. 결코 쉽지 않을 것.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인간의 힘으로 안 될 때가 있다. 그때는 무조건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가치에 대하여 아버지가 졸업한 딸에게 말했다. “딸아 졸업을 축하한다. 나는 오래전에 이 날을 위해 차를 사두었단다. 이제 네가 그 차를 갖기를 원한다. 너에게 주기전에 중고차 딜러에게 가져가서 그들이 제안하는 가격을 확인해 보거라.“ 딸은 딜러에게 갔다가 돌아와서 말했다. ”차가 매우 낡아 보인다고 그들은 나에게 1천만원을 주겠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전당포로 가져가보거라.“ 딸은 아버지에게 돌아와 말했다. ”전당포는 매우 낡았고 여기저기 수리가 되어 있어서 1백만원을 준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딸에게 열정이 넘치는 자동차 클럽에 가입하고 그들에게 차를 보여주라고 말했다. 딸은 차에 대한 열정가들이 모여있는 자동차 클럽에 운전하여 도착했다. 몇 시간 후에 딸은 아버지에게 돌아왔고 이렇게 말했다. ”클럽의 몇몇 사람들은 상태가 좋은 희귀한 차라며 나에게 1억원을 제안했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딸아, 나는 네가 지금 이 순간 올바른 장소에 있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만약 네가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화내거나 속상해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아무도 너의 가치를 보지 않는 곳에 가서 머물지 말거라. 너의 가치를 알고 어디에서 가치를 평가받는지 알아야 한다. 다이아몬드는 동굴 바닥에서 절대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지금 이 순간 “내가 먼저” 라는 자비 기도를 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인내심과 자비심으로 이루어진다." - 마더 테레사 -


♡2357회 대나무는 마디가 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30일(미카서 1장~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
 《격려는 기적을 행한다.》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뜻대로 되지 않아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가장 소중한 도움은 깊은 사랑에 우러나오는 누군가의 격려다. 그 격려는 사람의 암울한 정신에 깊은 용기를 던져주고 오랜 세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기둥이 되어준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오랜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창회를 열기로 했다. 많은 팬들은 그의 금의환향을 반가워하며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막상 공연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사회자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왔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객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청중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다리는 가수가 비행기가 연착되어 좀 늦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우리나라에서 촉망받는 신인 가수 한 분이 나와 노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청중들은 매우 실망했다. 고대하던 가수가 어쩌면 아주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내는 아쉬움과 배신감으로 꽁꽁 얼어붙었다. 잠시 후 사회자가 소개한 신인 가수가 무대에 나타났다. 그는 예절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청중들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가 끝난 후에도 박수를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극장의 2층 출입구에서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이 소리를 들은 신인 가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의 눈에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반짝였다. 몇 초가 지났을까? 얼음처럼 차가웠던 청중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오랫동안 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그가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다. 우선순위를 생각 합니다. 네 사람이 물에 빠졌다. 대통령, 의사, 본당신부, 대학생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과연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할까? 정답은… 넷 중에서 가장 ‘수영 못하는 사람’ 이다. 우리 삶에는 ‘우선순위’ 라는 것이 있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으니 가장 소중하고 가장 절박한 것부터 먼저 챙기는 것. 대나무는 마디가 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상처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삶의 마디가 될 수도 있다. 아주 가끔은 어떤 분들이 자신은 십일조를 내는데 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십일조의 목적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 십일조를 내면 대부분 주님께서 충분히 보상해주십니다. 십일조의 진정한 목적은 재물을 더 많이 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사랑을 회복하는 데 있다. 어떤 자매님이 성지순례를 이혼하려는 목적으로 떠났다. 그녀는 엄청난 술주정뱅이에다가 도박,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살았다. 임신했을 때 남편이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며 발로 차서 아기가 검게 죽어서 나왔다. 또 도박하려고 돈을 찾다가 돈이 없다는 아내를 유리창으로 밀어서 피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 더는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있는 돈을 다 털어 메주고리예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혼을 결심하러 간 것. 그런데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올라가던 중 갑자기 자신이 남편에게 더 잘못했다는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불평만 했지 진심으로 따듯한 밥 한 끼 차려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가면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따듯한 밥 한 끼 차려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나와 있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며 술과 도박을 다 끊고 함께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사랑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 십일조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목적을 잃으면 성지순례나 십일조의 의미도 퇴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이 십일조의 목적과 정신은 잊고 그것을 내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목적을 잊고 율법 안에 갇혀버리는 것. 기차만 타면 된다고 생각하고 목적지는 보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십일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십일조를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분명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알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를 얻는 것. 십일조를 하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 번역에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를 “실행해야만 했다” 라고 나와 있는데, 사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로 주님께 받는 대가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내면서 그 대가로 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로움’ 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의로워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바로 가죽옷을 입어야 했다. 가죽옷이 곧 의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곧 의로움인 것.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 ‘자비’ 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자비나 사랑이 들어있을까요? 자비와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 성령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는 것. 자비는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가 탕감받는 일만 탈렌트인 것. ‘신의’ 는 무엇일까요? 신의는 바로 ‘믿음’(pistis)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믿음을 얻게 되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는 당신 살과 피를 말씀하고 계신 것.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십일조를 바치지만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는 조건으로 먹을 수 있었던 나무가 ‘생명 나무’ 입니다. 생명 나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버리며 십일조는 내서 무엇하냐는 것.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봉헌하였다. 멜키체덱은 주님께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미사가 된 것. 가톨릭은 목적은 있는데 과정을 잊어가고 있다. 십일조는 내지 못하며 생명 나무는 먹고 있다. 생명 나무는 선악과를 봉헌한 대가입니다. 십일조와 빵과 포도주, 그리고 성체 성혈로 이어지는 의미가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잘 들어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는 귀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 마더 테레사 -

♡2358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소파를 신발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1월 31일(즈카르야 1장~ )

  아빌라의 성 요한은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여유있고》감사는 계절도 시간도 없다. 감사는 어느 곳에서든 캐낼 수 있는 마음 따뜻한 선물입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되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는 주워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진 해석 입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 입니다. 소유에 비례하는 감사는 소유에 비례한 불평을 낳고, 믿음의 감사는 조건에 메이지 않아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이며, 섭리를 수용하는 자의 사유를 방식합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여유있고 따뜻해 집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 맞추고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고 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제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예수님은 편안함과 안전함, 편리함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소파를 신발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친구들이여, 예수님은 모험의 주님이십니다. 항상 무엇인가 ‘넘어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편안함과 안전함, 편리함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고 소파를 신발로 바꾸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신발은 여러분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꿈꾸지 않았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줄 것. 그 길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수 있고 기쁨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기쁨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비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남기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우리 하느님께 ‘미쳐버린’ 사랑을 따르는 것이고 그 길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아픈, 결국 잘 풀리지 않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피난민들, 이민자들, 홀로된 이웃을 만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활동적인 정치인들,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를 좋게 인도하는 정치인들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보다 더 경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바치는 선물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제가 모자랍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앞으로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약속으로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 헤르만 헤세 -


♡2359회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1일(말라키서 1장~ )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답게 사는 것》세상과 타협하는 일 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한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서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풍요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 하나가 필요할 때는 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지금 이 순간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고 한다. [ 六不合 七不交 육불합 칠불교] 홍콩 갑부 이가성 회장의 어록중 '교우 관계' 에 대한 유명한 말, 홍콩에 '이가성(李嘉?)이라는 부호가 있다.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아시아에선 최고의 부자입니다. 홍콩에서 1달러를 쓰면 5센트는 이가성에게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특히 홍콩 경제, 더 나아가 전 중화권 경제와 아시아 경제에까지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현재 개인 재산이 약 30조원 인데 세탁소 점원으로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는게.. 첫 번째 배울 점이고, 지금도 5만원 이하의 구두와 10만원 이하의 양복을 입고 비행기는 꼭 이코노미석을 타면서 검소하다는게.. 두 번째 배울 점이며, 그 절약한 돈으로 아시아에서 제일 기부를 많이 한다는 게.. 세 번째 배울 점이지요. 그것도 회사 명의가 아닌 본인의 재산을 팔아서 기부한다는 점입니다. 기부금 중엔 장학금으로 매년 3000억원을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가성 회장의 어록중 교우(交友)관계에 관한 유명한 말이 있는데 "六不合 七不交(육불합, 칠불교)" 입니다. 여섯 종류의 사람과 동업하지 말고 일곱 종류의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육불합(六不合)♡
1.개인적 욕심이 너무 강한 사람과 동업하지 마라.
2.사명감이 없는 사람과 동업하지 마라.
3.인간미가 없는 사람과 동업하지 마라.
4.부정적인 사람과 동업하지 마라.
5.인생의 원칙이 없는 사람과 동업하지 마라.
6.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동업하지 마라.

♡칠불교(七不交)♡
1.불효하는 놈과 사귀지 마라.
2.사람에게 각박하게 구는 사람과 사귀지 마라..
3.시시콜콜 따지는 사람과 사귀지 마라.
4.받기만 하고 주지않는 사람과 사귀지 마라.
5.아부를 잘하는 사람과 사귀지 마라.
6.권력자 앞에 원칙없이 구는 자 사귀지 마라.
7.동정심이 없는 사람과 사귀지 마라.
인생에 누구를 만났느냐는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파리의 뒤를 쫒으면 변소 주위만 돌아다닐 것이고, 꿀벌의 뒤를 쫒으면 꽃밭을 함께 노닐게 될 것이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지만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행복은 얼마나 채우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비우느냐에 달려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되새겨보는 토요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 봉헌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우리의 희망이 그치지 않을때에 행복은 우리에게 있다.

  지금 이 순간 밑으로 내려갑시다. 그리고 견딥시다. 예수님과 함께 그래서 우리들 안에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는 영광스러운 믿음의 종이 되시어, 우리들이 바라는 큰 희망을 이루어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공감가는 명언]👌
이길수는 없지만 견딜수는 있는 것 : 세월
피할수는 없지만 맞설수는 있는 것 : 운명
안 먹을 수는 없지만 잘 먹을 수는 있는 것 : 나이
가질수는 없지만 지켜줄 수는 있는 것 : 사랑
잊을 수는 없지만 지울 수는 있는 것 : 슬픔
받을 수는 없지만 보낼 수는 있는 것 : 그리움
잡을 수는 없지만 놓을 수는 있는 것 : 욕심
막을 수는 없지만 닦을 수는 있는 것 : 눈물
나를 위한 시간은 없지만 너를 위한 시간은 있는 것 : 기다림
어둠을 뿌리칠 수는 없지만 등불 하나 켤 수 있는 것 : 희망


♡2360회 아무런 노력 없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운동 선수는 없다.  - 별다른 투자와 노력 없이 1등을 하는 학생도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2월 2일(마태복음 1장~ )

  제프 베조스는 ''18년동안 아마존을 성공으로 이끈 3가지 큰 전략이 있다. 그것은 고객을 우선 생각하고, 발명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하루의 시작》소리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냄새로 알 수도 없다. 소리는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소리는 혀로 맛볼 수도 없다. 소리는 오직 귀로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눈을 감고 들어야 잘 들립니다. 이 아침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전해보시면 어떨른지요. 향기는 코로 맛볼 수 있다. 향기는 만지거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혀로 맛볼 수도 없다. 향기는 촉감 없이 눈을 감고 코로만 느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해맑은 아침 좋아하는 꽃향기에 취해보는 건 어떨른지요.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은 만지거나 코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향기도 멀리하고 감촉도 멀리하고 맛도 멀리하고 오직 눈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꽃은 바라만 볼 때가 아름답다. 메밀꽃은 보기엔 아름다운데 향기는 지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깨끗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꽃의 감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맛으로 알 수도 없다. 꽃의 감촉은 오직 만져봐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감촉은 눈을 감고 향기도 멀리하고 만짐으로써 느껴야 합니다. 꽃은 감상하는 것이 좋다. 꽃은 향기로 말하는 것. 꽃은 아름다움으로 말하는 것. 그래서 꽃은 느끼는 것. 진리도 이와 같다. 진리는 발전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 진리는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꽃의 향기와 같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경험으로 맛보는 것. 볼 것은 보고 들을 것은 듣고 향기로운 것은 향기로 맡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이라는 말이 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 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 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 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 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군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를 원했고, 힘든 일을 경험하게 되면 더 이상의 고통 없이 그저 그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원했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를 바랬고 운동은 하지 않으면서 살이 빠지기를 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고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좋은 결과만을 빠르게 얻길 바라고 있었던 것.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 후 부활의 영광까지 예견하시지만 베드로는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부활의 영광은 잊어버리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우기는 것. 이 장면의 제자들의 모습 속에는, 우리 신앙인들의 흔한 두 가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첫째는,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을 기반으로 영광스러운 예수님,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고통과 죄를 이기신 결과” 입니다. 무언가를 “이겼다” 라는 것은 일종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전제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운동 선수는 없다. 별다른 투자와 노력 없이 1등을 하는 학생도 없다. 이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도 그만한 고통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는, 혹시라도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이를 외면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길 기대합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이러한 기대에만 너무 의지하다보면 실제로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망하게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짊어져 주시길, 그리고 이를 우리가 잘 견디어 내길 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 십자가를 없애주실 주님만을 기대하는 것. 베드로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답을 올바로 쓴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천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고통 역시 잘 알고 계시다는 것. 결국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힘을 모은다면 현세의 어려움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것. 그러므로 우리가 바쳐야할 기도의 모범을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목적은 영광에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십자가가 당연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를 굳세게 만들어줄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다. 이것을 우리가 기꺼이 짊어지고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묵묵히 견디어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하루에 3시간씩 아니 1시간씩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만이라도 십자가 예수님앞에 나와(집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령 충만한 시간으로 매 순간 하느님을 알아보고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축복된 삶을 만들어가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 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 나폴레옹 -


💖성령봉사자 박재만 세례자요한 010 - 3878 - 6634
  (수필가ㆍ전국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말씀추천강사)
💖성령봉사자 류태숙 M.막달레나 010 - 6560 - 7354
  (시인ㆍ수필가ㆍ꽃예술설화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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