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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부활 제2주일>(4.16)-하느님의 자비 주일-

 

고모님 자비주일에 세례성사 
(3명 한명도 낙오없이) 가 있습니다 .  주님께 감사드리고 성령으로 가득찼으면 하고 빕니다
울고모님 보고 시포용 ♡


                                               파우스티나 수녀 

오! 주님!
제게 좋은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주님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작고 비천하기에
주님의 끝없는 자비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 -    아멘♡

아녜스!!!
축하드려요. 
주님을 영접하도록이끌어주신 아녜스안에 계신 성령님께  찬미와영광드려요.---네 아멘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레루야 알렐루야 알레루야 !

<부활 제2주일>(4.16)
-하느님의 자비 주일-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하느님의 자비가 되자!'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대희년 때,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 출신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시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당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체, 곧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먼저 '자비이신 하느님께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너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되려고 겸손한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 행위는 '공염불(空念佛) 곧 빈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9주기'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유는 불쌍하게 희생된 영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려지게 하기 위함이고, 이러한 참사(비극)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태원10.29 참사에서 보듯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이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나고, 이 자비의 힘으로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해 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 2열왕 6,23)



<부활 제2주간 월요일>(4.17)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물과 성령으로!'

오늘 복음(요한3,1-8)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입니다. 바리사이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도 동료 유다인들이 두려워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3,2) 

니코데모의 이 말 안에서 '표징을 보고 믿게 된 그의 믿음'을 봅니다. 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표징이나 기적들을 보고서야 믿는 믿음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니코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3.5) 

어제 복음인 부활 제2주일의 복음에서 만난 토마스의 믿음과 그런 그의 믿음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20, 25)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눈에 보이는 어떤 표징이나 기적에 의지하는 믿음이 되지 말고, 물(세례와 회개의 세례)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표징(기적)을 보고서야 믿는 믿음은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믿음입니다. 기분에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 2열왕 6,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2주간 화요일>(4.18)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7) 

'역설의 삶을 살아 내자!' 

오늘 복음(요한3,1-8)도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신원과 우리의 영원한 생명(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3-15)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위로부터의 태어남'은 곧 '십자 나무를 통해 들어 올려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라는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세상과 나라와 공동체가 시끄러운 이유!'

'왜, 그럴까???'

역설이신 하느님,
역설이신 예수님,
역설이신 성령님의 부재(不在)가 그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루카 사도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충만함의 모습'이며, '자기희생이라는 하느님의 역설이 가져다 준 은총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어제 근처 통영을 다녀왔습니다. 미륵산에서 '한산도 제승당'을 바라보면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정신', 곧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정신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세상과 나라와 공동체가 시끄러운 이유는 바로 이런 '이순신 장군의 역설이 부재(不在)'한 까닭이지 않을까요? 

(~ 2열왕 6,23)
나-'세상과 나라와 공동체가 시끄러운 이유!'

'왜, 그럴까???'

역설이신 하느님,
역설이신 예수님,
역설이신 성령님의 부재(不在)가 그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멘 ! 어서 오소서 성령님 !!! 

수녀님 고모---우리아녜스!
최고야
역설적인 삶을살아내는아녜스화이팅!

저는오늘부터토요일까지진안에사는지인이저를휴가초대하여차로데리러오셔요.처음가는곳이라 설레네요.
전북진안입니다.

나--오 주님  성령님  늘 저희를 주님게로 이끌어 주소서  오 울 고모님 잘 다녀오셔요 암요 우리 고모님 기쁨이 가득찬곳으로 설레며 엠마오 잘 다녀 오셔요 하트쁑쁑 
 

<부활 제2주간 수요일>(4.19)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요한3,16-21)은 '니코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 대답의 결론'입니다. 곧 "위로 태어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에 니코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 대답의 핵심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이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영원한 생명)하시려고, 우리를 다시 부활하게 하시려고, 세상 안으로 당신 자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3,18)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심판은 '빛이신 당신을 따르지 않고, 어둠과 악을 더 사랑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과 그 반대의 나라인 지옥은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지옥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비구원',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선택권'은 '오로지 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의 본질적인 결과는 너로부터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인 예수님을 선택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 2열왕 7,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2주간 목요일>(4.20)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3,35)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인 순종!'

오늘 복음(요한3,31-36)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믿음의 구체적인 대상이 예수님'이고,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순종'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 뜻은 바로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 곧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순종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땅의 현실인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절대적 장애물들인 세상 가치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물을 치워야 한다는 예언자들의 말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뜻)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예언자들의 간절한 외침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또 하나의 사도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사도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 2열왕 7,2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2주간 금요일>(4.21)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6,35) 

'메시아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6,1-15)은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징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본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그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 

예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라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십니다. 그러자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토욜
예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이', 곧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과 갈증을 풀어주시는 '영적인 구원자'이십니다. 

오늘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 2열왕 8,6)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제2주간 토요일>(4.22)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오늘 복음(요한6,16-21)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떠납니다. 때는 밤이었고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십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밤과 큰 바람 그리고 예수님!'

어두운 밤과 호수 위에서 만난 큰 바람은 악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큰 바람이 일고 있는 물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7년에 개봉된 '오두막'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 막내 딸 미시가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오두막에서 살해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맥은 큰 슬픔과 증오에 빠지게 되고, 죽음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영화의 결정적 장면은 그런 맥이 어둠과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하는 모습입니다. 그 부활의 중심에 임마누엘이신 주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시며, 맥의 손을 잡고 함께 물 위를 뛰어가시는 모습이 큰 인상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생의 험한 여정에서 예수님과 분리되면, 곧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멀어지게 되면 영적인 어둠과 죽음 속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 어둠과 죽음에서 해방되는 길은 다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해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친 호수 위에서 만난 어둠과 죽음의 공포는 예수님을 만나고 받아들임으로써 끝이 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손을 꼭 잡고 힘차게 걸어갑시다! 

(~ 2열왕 8,2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