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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주님 부활 대축일>(2023.4.9)


<주님 부활 대축일>(4.9)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28,6)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갑니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무덤에 앞에 있는 여자들에게 엄청난 소식을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28,5)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도 부활하고, 배둔공동체가 부활하고,
모두가 함께 부활하라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조건 없이 함께 부활합시다! 

'주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 신앙의 바탕이며 본질'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이며, 신앙의 전부'입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사건'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용서)을 가능케 하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 부활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2코린15,17)

"평안하냐?"(마태28,9)

이는 천사의 명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주님 부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여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 인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갈릴래아!'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삶의 자리'입니다.
갈릴래아는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갈릴래아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는 '우리가 부활해야 하는 곳'입니다.

(~ 2열왕1,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4.10)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부활의 증인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8,8-1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면서 감추려고 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 안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첫 믿음'입니다. 이 첫 믿음이 있어야, 이 첫 믿음 안에 머물러 있어야, 우리가 해야하는 모든 '믿음의 행위들'이 가능합니다. 곧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내가 먼저 죽고 용서하는 믿음의 행위들이 가능합니다. 이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는 모습'입니다.

오늘 독서(사도2,14.22-33)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2,23-24)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2,32)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죽이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인 갈릴래아에서 부활하라는, 다시 살아나라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큰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우리도 삶의 자리인 갈릴래아에서 부활합시다! '말과 행동으로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 2열왕1,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457
4월11일[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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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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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uzIpS5-UYY (박희전 루케치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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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른 새벽,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여인,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모습이요, 결코 통상적이지 않은 모습임이 분명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한둘도 아니고 일곱이나 되는 마귀에 들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크게 감동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남은 생을 오로지 예수님께 바치고자 결심합니다. 자신이 지닌 재물이며, 시간이며, 삶 전체를 남김없이 그분께 봉헌합니다. 눈을 떠도 예수님, 눈을 감아도 예수님, 그녀의 생애에서 예수님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예수님의 죽음, 그분의 부재, 그리고 그분 시신의, 부재가 너무나 큰 충격이요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스승님께서 그리도 끔찍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한 것만 해도 억장 무너지는 일이었는데, 미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안타까웠던 그분의 시신마저 사라져버리니, 그녀의 상실감과 허탈함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도통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사 앞에서도,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앞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꺼이꺼이 울면서 외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복음 20장 13절)

보십시오. 그냥 주님, 우리 주님이 아닙니다. 저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열렬한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와는 동떨어져 계신 분,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분,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분, 감히 범접하지 못할 분은 아닙니까?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십시오.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계셔도 그만 아니 계셔도 그만인 분이 아니라 잠시라도 아니 계시면 절대 안 되는 내 삶의 전부요 최종적인 의미였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큰 사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십니다. 세상 다정한 음성으로 두려움과 슬픔에 잠겨있는 그녀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십니다. “마리아야!” 그녀를 당신 부활의 최초 목격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 당당한 여사도로 임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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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 세 명이라도> 
 
지난 사순절 몇 군데 특강을 다니면서 든 생각입니다. 우선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무릅써야만 했습니다.  
 
‘별 영양가도 없는 내 강의,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드는 나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신자들께서 별 것도 없는 내 이야기를 듣고 비웃지나 않을까?’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께서는 한 자리에서 삼천 명이나 회심시키셨다는데, 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삼천 명은 어림도 없고, 삼백 명? 아니 삼십 명?’ 
 
그러면서 이런 기도를 꼭 바쳤습니다.
“주님, 많이도 말고, 단 세 명이라도...”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있었던 베드로 사도의 설교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완고하고 콧대 높기로 소문난 이스라엘의 본산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설교를 펼칩니다. 설교 장소인 예루살렘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당시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총독은 물론 왕, 고위층 관료들이 대거 몰려있는 수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예수님께서 처형되신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도들에게 있어 기억조차 하기 싫은 장소, 끔찍한 장소, 피하고 싶은 장소, 두려운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께서는 바로 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어쩌면 목숨을 걸고 시작한 설교였습니다.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엄청 불편하게 하는 일종의 도전과도 같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마치도 쌍날칼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꿰찔리듯 아팠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던지는 사자후와 같은 설교였기에 마치 유언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을 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패가 아니냐’는 물음에 세 번씩이나 거듭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였는데, 지금은 아주 담대하게, 너무도 당당히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약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겁내지도 않습니다. 자랑스럽게, 용기 백배 해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 사도의 변화, 그 배경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요? 예수님 부활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개별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베드로 사도의 내면에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건너가는 강렬한 파스카 체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 사도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제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헤로데도, 빌라도도, 최고의회도, 사악한 바리사이들도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관심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서처럼 우리 삶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나날을 보다 쇄신시키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상승하길 바랍니다. 
 
그 결과 우리도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는 외침은 아마도 이런 신앙고백을 내포하고 있겠지요. “그분은 구하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찾아가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선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 평화와 참 위로를 건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결국 우리가 사천년 동안이나 기다려왔던 참 메시아이십니다. 이제 우리, 그 오랜 방황을 매듭지읍시다. 서둘러 그분께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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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x35wWinR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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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랑하려는 이에게만 나타나시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도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타락의 소굴에서 건져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다 보면 믿어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사랑을 떠받치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원하고 믿는 일은 사랑을 높이기 위한 목적입니다. 물론 믿어지면 더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하려는 자에게 믿음을 가장 먼저 주십니다. 
 
영화 ‘라이언’은 어린 시절, 기차에서 잠들어버린 다섯 살 인도 소년 꼬마 라이언이 호주에 입양되었다가 다시 어머니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다섯 살 꼬마 라이언은 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석탄을 훔쳐 엄마에게 우유를 사다 드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형이 나갈 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졸랐지만, 잠이 너무 쏟아져 형은 동생을 업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잠깐 자라고 하고 절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라이언은 잠을 자다 일어났고 형을 찾아 어떤 기차에 올랐는데 거기서 또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며칠을 그렇게 간 끝에 더는 집을 찾을 수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아원에 있다가 그는 사랑이 많은 한 호주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의 양부모는 다른 형도 한 명 입양하였는데 그 형은 좀 망나니였습니다. 엄마도 사랑스러웠지만, 엄마를 사랑할수록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친엄마가 자신을 잃고 슬퍼할 것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괜히 데려 나와 잃어버린 죄책감에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인과의 관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삶이 엉망이 됩니다. 

25년이 지난 뒤 라이언은 엄마를 다시 찾기로 합니다. 이때 구글 지도가 인터넷에 올라왔고 그는 구글 지도를 통해 자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주위를 뒤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의 기억에 있는 동네와 똑같은 곳을 발견합니다. 25년 만에 엄마를 만나 처음으로 한 말은 죄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다른 동네로 가지 않고 그 동네에서만 살았습니다. 불행히도 형은 25년 전 그날 동생을 찾다가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친어머니에게 소개해줍니다. 이제 진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워준 부모님이나 그 부모님이 입양한 망나니 형까지.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낳아주시고 존재하게 하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만나기를 필요로 합니까? 어쩌면 마리아 막달레나만큼 예수님을 만나기를 희망한 사람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유튜브에서 보면 새끼 때 자기를 구조한 사람을 엄마로 믿는 새나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물들은 어미를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조금만 사랑을 준 대상이라도 부모로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많은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창조자로 여기고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한 유일한 분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벌면 되지!’, ‘성공하면 되지!’, ‘자녀를 잘 키우면 되지!’ 등으로 각자가 삶의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그 공허함 속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끝까지 창조자가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를 보여 주신 유일한 분을 사랑하기를 거부합니다.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자신을 시궁창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채 그녀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찾으면 결국엔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그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형제도 존재하게 하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이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 뜻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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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미국에서 처음으로 혼배 주례를 부탁받았습니다. 저는 이번 혼배 주례를 부탁받으면서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작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였습니다.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하면서 형제님은 시카고를 거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옆 좌석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서 내려 뉴욕으로 갈 때 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옆의 책 읽던 여성이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짐을 다시 찾아서 부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성과 5분 정도 짧은 대화를 했지만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 메일을 주고받고 가끔 연락했는데 그 여성도 친절하게 답을 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한다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음악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된 아들과 여성은 음악회를 같이 갔고,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약혼식을 하고, 뉴욕에서 혼배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선택이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책을 가까이하고, 낯선 이웃에게 친절함을 보여 준 여성의 따뜻함입니다. 그 여성의 따뜻함을 알아보았던 아버지의 안목입니다.

그럼 저와는 어떻게 연결이 되었을까요? 저는 지난 사순시기에 오타와, 토론토, 뉴욕, 뉴저지에서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오타와는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사순특강을 듣기 위해서 저를 기다리는 오타와의 교우들의 눈망울이 선합니다. 규모가 크지 않아서 사순특강을 들을 기회가 적었다고 합니다. 30여 명이 사순특강을 들었고, 고맙게도 신문 구독도 해주었습니다. 과묵하지만 속이 깊은 토론토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서재에 있는 책을 선뜻 빌려주었습니다. 뉴욕의 퀸즈성당은 특강 전에 십자가의 길,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특강은 미사 중에 하였습니다. 덕분에 매주 금요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저지에서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강의를 듣던 형제님은 제게 아들의 혼배미사 주례를 부탁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혼배 주례를 하면 아이들에게 더 큰 축복이 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신랑과 신부를 위해 혼배 주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사순특강을 들었던 형제님은 처를 처음 보았는데도 아들과 며느리를 위한 혼배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5월 6일 하느님 앞에서 부부가 되려는 요한과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설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고,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위를 걷다가 빠졌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고 꾸지람을 듣던 베드로입니다. 절망 중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베드로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갈릴래아에서 낚시를 하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무엇이 베드로의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그런데도 베드로를 품어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시카고를 경유하는 뉴욕행 비행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타고 내리는 것이 비행기입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니 우연은 필연이 되어서 젊은이들이 부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비록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 중이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교만과 욕망 중이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시카고 경유 비행기가 아닌 빈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의 간절함이 있다면,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자캐오의 간절함이 있다면 봄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는 꽃을 보듯이, 우리는 주님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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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1-18: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삶들도 있게 해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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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4-16)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난 신앙인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첫 번째로 사람들에게 알린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 부활을 첫 번째로 믿은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8절에 있는 “보고 믿었다.”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 부활을 첫 번째로 믿은 사람은 요한 사도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요한 사도는 자기 혼자서만 생각한 것이었고, 그 ‘생각’을 ‘믿음’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고백하고 증언하고 실천할 때에만 믿음입니다. 혼자만의 생각은 ‘죽은 믿음’입니다.

요한 사도가 정말로 예수님 부활을 믿었다면, 바로 옆에 있는 베드로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것을 말했어야 했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데도 내버려둔 채 그냥 가버렸습니다.

집으로 간 뒤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울지 마라.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는가? 아니면 말하기 싫었나? 따라서 요한 사도를 예수님 부활을 첫 번째로 믿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마리아가 사도들보다 앞선 점이(뛰어난 점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모두 달아나버렸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고, 안식일이 지난 뒤에 가장 먼저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는 시신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모습들은 전부 다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물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사람들 쪽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분명히 사도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고, 그래서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선택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 처지에서는 예수님의 선택에 대해서 시기 질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고, 그랬다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인데, 그 일은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요한 10,3)

마리아의 변화 과정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변화된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변화는 ‘불신’에서 ‘신앙’으로 바뀐 일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즉 미성숙한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성장한 과정입니다.

<‘불신’(不信)이라는 말은, 알려 주고 가르쳐 주어도 안 믿거나 믿기를 거부할 때 쓰는 말입니다. 또는 누구나 다 믿을 수 있고, 믿는 일인데도 안 믿으려고 할 때 ‘불신’이라는 말을 씁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기 전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 신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상태였을 뿐이고, 믿기를 거부하거나 안 믿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경우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르 16,11.14.) 사도들의 그런 모습이 바로 ‘불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7-1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뜻에 따라서 다시 정리하면, “나를 붙들지 마라. 너는 곧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내가 곧 올라간다고 전하여라.”입니다.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는 “내가 지금 당장 떠나지는(승천하지는) 않을 테니”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처음부터 직접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마리아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사도들이 ‘믿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사도들은 유령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루카 24,37),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인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요한 20,25)>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곧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했는데, 사도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마르 16,11) 예나 지금이나 ‘부활 신앙’에 도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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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복음(20,1-9 참조) 다음 대목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계속 등장하고 장소의 변화도 없다는 점에서 두 복음의 연속성이 확증됩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고, 마리아는 무덤에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떠나 보낸 상실감에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20,8 참조), 마리아는 아직 빈 무덤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데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불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극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응답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마리아의 ‘뒤늦은 인식’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어둠 가운데 머물러 있던 마리아에게 믿음의 빛을 선물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 신앙을 증언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믿음의 여정을 보여 줍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천사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였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마리아는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간 마리아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부활 신앙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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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복음 20장 15절)

빈 무덤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지만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녀가 경험한 바로는, 예수님이 사흘 전에 처참히 죽임을 당하셨고, 바로 이 곳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니 시신은 반드시 여기에 남아 있어야 했지요.

"모셔 가겠습니다.“
때로는 사랑이 사람을 대책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냘픈 여인이 성인 남성의 시신을 모셔가겠다니요. 적당한 무덤자리라도 봐 두었단 말일까요? 게다가 예수님은 사형수의 신분이니 로마의 행정 절차로 보나 종교 기득권층의 적대감으로 보나 그리 쉬운 일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어처구니 없는 마리아의 말에서 참으로 진한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 시신마저 잃은 공허함이 얼마나 애틋하고 절절하면 저리 말할까 싶지요. 성토요일까지의 우리 마음도 그랬으니까요.

"마리아야!"(요한 복음 20장 16절)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살아 생전에 그녀를 부르시던 그 톤과 온도였을 테지요. 아마도, 아니 분명히,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듣는 이에게 저마다의 울림이 있었을 겁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요한 복음 10장 3절) 동행하니까요.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 안에서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육을 지니신 인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 인격을 흠모하던 마리아가 지금 그분 육신의 흔적을 찾는 건 너무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새로운 영혼의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익숙했던 이름을 새로이 불러 주심으로써!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복음 20장 17절)

마리아의 사랑은 육에서 영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지금 그분을 붙잡는 건, 반가움과 기쁨, 안도감 등 사랑의 다른 표현이 되겠지만 영의 사랑은 그 차원을 뛰어 넘어야 하니까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복음 20장 18절)

마리아는 실제로, 결과적으로, 진실한 바람대로 예수님을 "모셔 갔습니다!" 시신을 모셔 가겠다고 결심한 그녀가 예수님의 현존과 뜻을 모셔 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니 그렇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부르신 순간 마리아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건너갑니다. 육의 공허와 아쉬움, 슬픔과 절망에서 영의 충만함과 기쁨, 희망에로 들어갔지요.

그녀는 더 이상 스승의 핏기 없는 육신을 붙들고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으로 예수님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모셔가 전하는 진정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가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행전 2장 36절)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성경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선포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처단한 사실에 당황하고 마음 아파하며 어찌 해야 할지 묻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장 38절)

회개와 세례, 죄의 용서로써 하느님 백성은 성령을 받을 준비를 갖춥니다. 성자 예수님은 떠나가셨지만 이제 성령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며 성부의 사랑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영의 존재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족보와 율법에 의거한 육의 삶에서 회개와 세례를 통한 영의 삶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빈 무덤가에서 찾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지요. 육의 프레임 안에 그분을 가두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분이 부르실 때 흔쾌히 응답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야!"
"요셉아!"
"바오로야!"

혹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벗님의 이름을 부르며 느닷없이 나타나시더라도 그분을 영의 사랑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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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분의 죽음 앞에서 너무나 황망하여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사랑하는 분의 곁을 지키고자 아직도 어두운 새벽에 무덤으로 향합니다. 마리아는 당황스러워하며 더 큰 상실감에 빠집니다. 무덤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무덤 안의 두 천사를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어둠을 직면하여 슬픔과 고통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할 때 ‘왜 우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그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였듯이 우리도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께 횡설수설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할 때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발견하지만, 아직도 그 슬픔이, 그 집착이 커 여전히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고도 정원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그분을 찾으려 애썼으면서도 정작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눈앞에 나타나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슬픔에 짓눌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마리아야!”
이제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스승님!” 하고 예수님을 알아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쏟아 낼 때, 그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 마음 안에는 그분을 향한 사랑, 기쁨이 피어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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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의 고통을 느끼면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베드로 사도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와 세례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리아는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눈물은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녀가 정원지기로 생각했던 분이 실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마자 곧 주님을 알아봅니다. 사랑에 힘입어 눈물을 통하여 너무나 사랑했던 주님을 알아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그녀의 눈과 삶을 밝혀 주셨습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을 보고 믿으며 스승을 깨닫게 해 주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였습니다.

사랑에 눈뜬 믿음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형제들 안에서, 곧 둘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어디서 주님을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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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우리는 너무도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예수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더욱 이른 아침 무덤에 달려올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큰 사랑을 지닌 마리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 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주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그 아들,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그 주님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사랑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계가 그럴까?
나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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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학부모가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철수가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지 않고 책만 봐요. 계속 저러면 나중에 왕따 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아이에게 잘 말해서 친구들과 놀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2) 왜 혼자 책을 읽냐면서 아이를 나무랍니다. 
3) 이런 전화를 왜 하냐면서 선생님께 화를 냅니다. 
 
아마 1번을 선택하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번은 분명히 정답이 아닙니다. 왕따 당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따돌리는 것이 잘못일까요? 친구와 놀지 않고 책만 보면 왕따 당할 수 있다면서 마치 아이의 책 읽음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돌리는 아이의 잘못이 아닌, 왕따 당하는 아이의 평소 행동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1번으로 늘 유도합니다. 
 
사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면서 그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약자인 피해자 중심에 서야 분명히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피해자 중심이 아닌 가해자 중심의 세계였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인 병자와 창녀 그리고 과부 등의 사람은 죄가 커서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당시에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 편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주님 말씀을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까지 받습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편에 서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칠 때,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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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과 우리>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그때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과 우리>

앞서도
앞서지 않고

뒤서도
뒤서지 않으며

높아도
높지 않고

낮아도
낮지 않으며

오롯이 나란히
늘 나란히

곁에서
더불어함께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우리는

형제자매요
벗이라네

앞선 주님 따라
뒤선 우리는 서로

형제자매요
벗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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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의 회개>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조한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기들이 버린 예수님께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머릿돌로 쓰실 돌을 버린 집 짓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렇게 귀한 돌인 줄 모르고 버린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구원자요 주님인 줄 모르고 버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 그리고 그분께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을 찾아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그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회개인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형제들에게로 가는 것이 부활한 주님을 이미 만난 자의 회개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그러나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놀랍게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마리아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의 형제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처럼 파견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오늘 복음인 것 같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부터 당분간, 아마도 이번 달 말까지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번 달에 수녀원 연피정 동반을 해야 하는데 강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지금 <온라인 영성학교> 강의도 준비해야 합니다. 전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강의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전 강론 중 하나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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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여정>
- 사랑, 회개, 만남, 선포 -
 
한주간 내내 복음 환호송이 똑 같습니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24)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 부활 축일이자 우리의 부활 축일이라는 것이요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도들의 사도’라 칭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활하신 주님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구원의 여정이 참 깊고 풍부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첫 서술부터 인상적이요 감동적입니다.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동한 천사의 출현이요 이어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주님’이란 표현에서 마리아의 지극한 주님 사랑을 엿볼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동한 부활하신 주님의 출현입니다. 앞의 천사에 이어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가 펼쳐집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서 죽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집요하게 결코 포기함 없이 한결같이 사랑했던 주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항구한 갈망의 사랑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하여 수도자의 기본적 자세 둘을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요 둘째는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끊임없이 찾는 목마름이 있어야 되고, 매사 겸손히 배우는데 지칠줄 모르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아니라도 참으로 믿는 이들이 지녀야 할 기본덕목임을 깨닫습니다. 이런면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수도자는 물론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마리아의 갈망의 사랑에 천사들이 은총처럼 나타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사랑의 갈망이 있을 때 주님과의 만남임을 은연중 계시되고 있습니다. 다음 대목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극적인 만남이요 은총의 만남입니다. 아무리 마리아가 주님을 찾았어도 주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생전 음성으로 “마리아야!”불렀고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돌아서서 라뿌니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이렇게 다정히 불러줄 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내 이름을 불러줄 다정한 이들은 있습니까? 만약 사랑하는 이들 있으면 살아 있을 때 많이 다정하게 이름들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돌아서서”라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바로 회개를 뜻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돌아서서 주님을 만나니 그대로 회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과의 참만남이 이뤄집니다. 회개의 은총이며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과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함께 갑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만나니 말그대로 늘 새로운 시작에 늘 주님 파스카의 꽃같은 인생이 펼쳐집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문답도 중요합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우리의 신원이 확연히 계시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것이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의 형제들이자 서로 역시 형제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혈연공동체를 완전히 보완하고 완성시키는 하느님의 가정 교회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우리 수도공동체 형제들처럼 수십년간 평생 함께 기도하고 먹으며 일하며 살아가는 가정공동체는 세상에 없을 것이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은총도 없을 것입니다. 이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과의 만남을 고백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여정은 고백을 통해 선포될 때 완성됩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구원의 여정은 사랑-회개-만남-선포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요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이 은총의 회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의 감동적 설교에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는 이들은 베드로에게 물으니 그대로 회개의 은총입니다. 마치 우리의 물음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묻던 
“누구를 찾느냐?”
두 물음은 평생 화두같은 물음으로 간직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 대한 답은 단 하나 “회개하십시오!”일 것입니다. 끊임없은 회개의 여정을 통해 용서받고 성령을 받아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 물음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 만날 때 비로소 참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만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감동한 이들이 세례를 받아 삼천명이 되었다니 말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충고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세례는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뜻합니다. 평생 주님과의 만남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만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무지의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시편33,18.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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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회개의 세례!>

오늘 복음(요한20,11-1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의 모습을 보고 슬피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세 번에 걸쳐 예고된 사건이었는데도,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라는 것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a)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20,15b)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하는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러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스승님!)" 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사도2,36-41)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개종한 첫 사람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면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2,38-39.40)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가량'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회개의 세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어야 할 최고 정점(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주어지는 은총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세례인 다시 태어남(나의 부활)'입니다. 

다시 태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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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d_ejAbe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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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이름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이름을 만남으로
되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운 이름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저마다의 소중한
이름입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이름을
사랑으로
불러주십니다.

이름에는
심장이 있고
함께 한
시간이 
흐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장 연약한 
이름이
가장 사랑하는
이름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이렇듯 부활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름에
부활의 글을
쓰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
부활의 길입니다.

부활의 길은
끊임없이 새로운
현재의 길입니다.

같은 시각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더 깊어지게 하는
부활의 이름은
반가움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람이 반가운
소중한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

반가운 소식
반가운 
이름입니다.

소중한 이름을
소중하게 부르는
너무나 반가운
부활 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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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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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독서 : 사도행전 3, 1-10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해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치유하여 걸어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 예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한 치유 능력은 세상의 온갖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는 참 신앙을 드러냅니다.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묵상) 사도들은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는 대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풉니다.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야말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진 절대적 가치입니다.


* 화답송 시편 105(104), 1-2. 3-4. 6-7. 8-9(◎ 3ㄴ)
◎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 복음 환호송 시편 118(117), 24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 복음 : 루카 24, 13-35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해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엠마오의 제자들도 동행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실 때 그녀의 눈이 열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엠마오의 제자들의 눈이 열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찬의 전례 안에 늘 현존하여 계십니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묵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한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감지할 수 있고, 성찬의 전례 안에서 성체를 받아 모실 때는 그 현존을 더욱더 깊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 영성체 후 묵상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져 있는 그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은 눈이 열려 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도 성경 말씀과 성찬의 전례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023년 04월 12일 수요일
▢서울대교구 조창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010-8889-5425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4.12)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24,30) 

'성체의 기적!'

오늘 복음(루카24,13-3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1스타디온 185mx60=약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도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기들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곧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의 기적'입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 받느냐?"(루카24,17) 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라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몇몇 여자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망하여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24,2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지 못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매일 우리에게로 내려오십니다. 이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부활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해 매일 겸손한 모습으로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도 부활합시다!

(~ 2열왕3,27)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4.13)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오늘 복음(루카24,35-4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엠마오로 떠났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만 갇혀 있어서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직접 당신의 손과 발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들 앞에서 식사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6-47) 

오늘 독서(사도3,11-26)는 '베드로 사도가 솔로몬 주랑에서 한 설교'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3,6) 

베드로 사도의 이 말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 였던 사람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3,15.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발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 2열왕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