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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암브로시오 주교의 ‘죽음의 복됨’에서)우리의 육신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몸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결국 그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

암브로시오 주교의 ‘죽음의 복됨’에서 (Cap. 3,9; 4,15: CSEL 32,710. 716-717)
우리의 육신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자기 몸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결국 그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상권에 의한 독서--유다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9,1-22
  • 2022년 11월 05일 토요일
  •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제1독서
마카베오 상권에 의한 독서--- 유다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 데메드리오왕은 니가노르가 전장에서 죽고 그 군대는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키데스와 알키모스를 다시 유다 땅으로 보내어 오른쪽 진영을 담당한 정병을 인솔하게 했다. 2 그래서 그들은 갈릴래아로 통하는 길로 진군하여 아르벨라 지방의 메살롯을 향해 진을 쳤다. 그리고 그 지방을 점령한 후, 많은 사람을 살육하였다. 3 셀류싯 왕조 백오십이년 정월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진을 쳤다가 4 보병 이만과 기병 이천을 거느리고 그 곳을 출발하여 베레아로 향하였다. 5 그때 벌써 유다는 정예 병력 삼천을 데리고 엘라사에 진을 치고 있었다. 6 그들은 적군의 수효가 많은 것을 보고 몹시 무서워하여 많은 자들이 진영을 탈출, 남은 병력은 불과 팔백 명뿐이었다. 7 싸움이 임박한 마당에 많은 병사들이 탈출한 것을 안 유다는 병력을 다시 모을 만한 시간이 없었으므로 기가 죽었다. 8 유다는 몹시 낙담되었으나 “용기를 내어라. 혹시 우리가 그들과 맞서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적을 향해 돌진하자.” 하고 남은 자들을 격려하였다. 9 그러나 부하들은 유다의 생각을 돌이키려고,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아껴두었다가 동포들과 다시 와서 싸우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는 수효가 너무나 적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도 유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적군을 보고 도망가다니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죽어야 할 때가 왔다면 우리 동포를 위해서 용감하게 죽자. 우리의 명예를 더럽힐 만한 일은 조금도 남기지 말자.”

11 그때에 적군은 진지를 떠나 유다의 군대와 맞서 싸우려고 진격해 왔다. 그들의 기병대는 두 부대로 나뉘었고 투석 부대와 활 쏘는 부대와 특전대들이 모두 다투어 선봉에 섰다. 12 바키데스는 군대 오른쪽에 서 있었고 주력 부대는 나팔을 불면서 군대 양 측면에서 진격해 나왔다. 유다가 인솔하는 군대도 나팔을 불었다. 13 양쪽에서 터진 고함 소리로 온 땅이 진동하였고 전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14 유다는 바키데스와 그 군대의 주력이 진영 오른쪽에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주위에 몰려든 용감한 군사들과 함께 15 적군의 오른쪽을 분쇄하여 아조토 산까지 그들을 추격해 갔다. 16 왼쪽 진영에 있던 적군은 자기 진영의 오른쪽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공격 방향을 바꾸어 유다와 그 군대의 배후를 찔렀다. 17 전투는 격렬하게 되어 양군이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18 이 전투에서 유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부하들은 도망쳤다.

19 유다의 형제 요나단과 시몬은 유다의 시체를 거두어 모데인에 있는 선조들의 묘지에 묻었다. 20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몹시 울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통곡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21 “이스라엘을 구출한 영웅이 죽다니 웬일인가.” 하고 울부짖었다. 22 유다의 행적과 그가 치른 전쟁과 그의 빛나는 공적과 위대한 명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제2독서
(암브로시오 주교의 ‘죽음의 복됨’에서)우리의 육신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몸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결국 그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그런데 현세의 삶에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또 그것은 복된 죽음임을 보여 주기 위해 사도는 우리의 육신 안에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자기 몸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결국 그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도 우리 안에서 작용하려 한다면 그 안에서 죽음이 이미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 그리고 육의 법이 영의 법을 대항하는 그 힘이 사라지게 하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투쟁이 모두 없어지며, 그 대신 승리가 자리잡게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죽음은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속에는 죽음이 작용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이 나날이 새로워지게 하며” “지상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열리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휘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현세의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사도는 권고합니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슬을 깨뜨리는 사람은 죽음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온갖 불의의 사슬을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

주께서 죽음이 우리 세계에 들어감을 허락하신 것은 죄가 끝장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죽음을 통해서 죄가 없어지고 부활을 통해 인간 생명이 영구토록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부패에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 상태에서 평온에로의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음이라는 말을 듣고 슬퍼하기보다 그 복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 발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목숨이 올바른 사람처럼 끝났으면 한다.” 이 말은 올바른 사람들과 함께 묻히고 자신의 악을 떨어 버리며 그 육신과 영혼에 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그 의인들의 은총을 옷 입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뜻입니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여, 신자들이 당신을 정성되이 섬기며 어여삐 여기심을 받는 것도 당신의 은덕이오니, 우리로 하여금 언약하신 행복에 거침없이 다다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