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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성 대 바실리오 주교의 ‘성령론’)세상을 위한 죽음이 하나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도 하나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 주교의 ‘성령론’에서 (Cap. 15,35: PG 32,127-130)
세상을 위한 죽음이 하나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도 하나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독서 12,1-13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싸우러 달려갑시다
제1독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독서----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싸우러 달려갑시다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 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3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 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까지 피를 흘린 일은 없습니다. 5 하느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하신 말씀을 잊었습니까?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에 낙심하지도 말아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7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 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8 자녀는 누구나 다 아버지의 견책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견책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서자이지 참 아들이 아닙니다. 9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0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 판단대로 우리를 견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며 우리를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11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힘없이 늘어진 손을 쳐들고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13 그리고 바른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절름거리는 다리도 뒤틀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될 것입니다.
 
제2독서
(성 대 바실리오 주교의 ‘성령론’)세상을 위한 죽음이 하나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도 하나입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계획은 인간을 타락으로부터 다시 불러 불순종으로 인해 생긴 소외 상태에서 하느님과의 밀접한 친교에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어 복음서가 묘사하는 삶의 길을 보여 주시고,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구원된 사람들이 본래 누리던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다시 되찾을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완전한 생활을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생애에서 보여주신 온유와 겸손과 인내의 모범을 본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방자인 바오로가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 자체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처럼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묻힘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 본받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는 과거의 생활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 말 자체가 분명하게 밝혀 주듯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이전의 생활을 끝맺어야 합니다. 경기장에서 한 번 달리고 나서 두번째로 달리기 전에 잠깐 휴식 시간을 갖는 것처럼, 삶의 변화에 있어서도 죽음은 두 가지 삶 사이에 개입하여 과거의 상태를 끝내고 앞으로의 새 삶을 시작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의 명부에 내려가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묻히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례 받는 이의 몸은 어떤 면에서 물 속에 묻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육정이 빚어내는 일을 끊어 버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육체를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형식이 아닌 진정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습니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라.”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세례는 어떻게 보면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쌓여 온 오염을 영혼으로부터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입니다. 세상을 위한 죽음이 하나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도 하나입니다. 세례는 이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우리로 하여금 주의 수난을 기념하는 이 신비를 합당하게 지냄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