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예수님, 여자 그리고 가족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여호 43, 16-21 2독서: 필리 3, 8-14 복음: 요한 8, 1-11 사순절 다섯째 주일 복음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뻔 한 것을 예수님께서 구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간음은 죄가 아니고 사소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소 섬세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여자에게 하시는 말씀,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는 말씀을 통하여 간음을 규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행동을 용인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항상 다른 사람의 죄를 폭로하고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태도를 비난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일반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확인하 바 있습니다. 이제 여느 때와 같이 이 장면을 시작으로 복음 전반에 걸친 결혼과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시야를 넓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기이한 주장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두고 제자들이 모두 형제로서 공동체에 속한다는 명목 아래 친족과 부모님과의 유대를 부인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분께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시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같이 이스라엘의 규범에서 벗어난 삶을 제안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나오는 가족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언뜻 보기에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혹하게 느껴지는 말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미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빨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예수님께서는 부모나 자녀를 미워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지는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혼란을 야기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고 대답하셨습니다. 아이고 하느님! 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이는 추악한 부탁이요,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신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요, 명백한 도덕적 위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평가들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은 그분께서 어떤 경우 예외적일지라도 단순한 사람으로만 간주해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받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무덤에 가는 것조차 포기해야 한다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와 같은 믿음의 관점에서 그 사람의 아버지에게 더 유익한 것은 그 당시에 그의 아들이 그의 시신을 장사하기 위해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혼이 함께 있어야 할 하느님의 메시아를 따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 설명하기가 훨씬 더 간단할 것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내가 가서 아버지를 돌보게 해주십시오. 그가 죽으면 내가 그를 묻고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답하는 것을 연기하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 사제, 수녀들은 이와 같은 선택을 해야만 했고,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의 이러한 순종에 가장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요청으로 야기된 혼란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요청한 것과 오늘날과 같이 전적으로 하늘나라에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소수에게 요청한 것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합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예수님의 다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있는 어려움이 예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5).” 이런 분열의 원인은 그분이 아니고, 이러한 분열을 결정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태도압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가정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모든 의심은 관련된 말씀과 전체 복음을 고려해 본다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결혼의 지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엄격하시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강조하시고, 종교적 구실로 그들을 도와야 할 의무를 피하는 행위를 규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모(야이로,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나안의 여자, 나인의 과부), 그리고 친척(나자로의 여동생)의 고통을 보시고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친족 관계를 존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친척들과 함께 울며 그 고통을 나누기까지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가족의 유대와 가치를 약화시키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통하여 이에 맞서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한 것 들 중에 하나로, 복음을 들으며 새로운 발견을 할 때 충격받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원래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키시러, 즉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러 오셨습니다. |
<사순 제5주일>(4.3) "너희 기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워 놓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요한8,4-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시다가,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시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마침내는 모두가 떠나가고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다가 무엇을 쓰셨을까? 아마도 사람들의 죄목을 쓰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죄가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지 않았을까? 내가 너를 판단하거나 심판할 수 없는 절대적 이유는 나에게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이기 때문에, 둘째는 완전한 하느님의 모상이신 예수님 앞에서 죄가 너무 많고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께로 돌아오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불의와 교만 앞에서는' 대단히 분노하셨습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시작하련다."(이사43,18) 그러니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고 있는 것처럼,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도록 합시다!'(필리3,8-14 참조)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웅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먼 곳에 가보고 싶어, 서장이라는 곳에 꼭 가보고 싶어.” 중국의 서장 즉 티벳이란 곳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높은 곳입니다. 비행기를 탈 돈도 없고 자동차도 없는 아들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칠순의 아들은 세 발 자전거에 수레를 매달고 어머니가 편히 앉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사방에 창문을 냈습니다.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해 온 어머니를 위해서 아들은 힘껏 페달을 밟았습니다. 길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중간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하고, 노숙을 하기도 여러 날이었습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한 900일 간의 소풍,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원하던 서장까지 가지는 못 했습니다. 102번째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는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세상 구경하는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남겨진 아들은 서장에 가고 싶었다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골을 수레에 싣고 7개월간 더 자전거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해를 서장에 뿌렸습니다. 어머니가 뿌연 바람이 되어 늙은 아들의 볼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조용히 달아나는 바람을 향하여 아들은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저도 이생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어머니께 돌아가면 말하렵니다. 어머니와 마주보며 웃었던 그 순간들이 제 생에 가장 빛나던 날들이었다고요.” 평생 산골에서 일하느라 허리가 굽고 치아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99세의 노모를 위하여 손수레를 만들어 900일 동안 여행한 74세 아들에게 이런 제목을 붙이고 싶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웅’이라고요. ♧ 건강한 휴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너무 아름다웁습니다****** |
<사순 제5주간 월요일>(4.4) "나는 세상에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요한8,12) '증언의 삶!'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당신 자신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시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어 생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증언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을 두고 증언의 법적 유효성을 따지면서 예수님의 증언이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분이시면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예수님께서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닫힌 마음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혀 있게 되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돈과 재물의 틀, 권력과 명예의 틀, 알고 있다는 지식의 틀, 혈연과 지연의 틀! 이러한 틀들이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너와 하나가 되는 일치의 장애물이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언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틀들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진실되게 믿고, 말과 행동으로 빛이신 이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런 증언의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제7처 :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이 또 넘어지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또 보며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짊어지겠다고 결심하지만 이내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베드로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
<사순 제5주간 화요일>(4.5)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 '당신은 누구요?'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보니,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로부터 점점 더 센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겁니다.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누구요?"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8,28)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십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를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다시 살아납시다! 제8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 길에서 부인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십자가의 길에도 많은 구경꾼들이 있는데, 그들도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를 보고 위로받게 됩니다. 십자가 자체는 순간순간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내가 짊어진 십자가는 세상에 위로를 줍니다. 아름다운 감동을 줍니다. |
안톤 룰릭이라는 알바니아 예수회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1996년은 안톤 룰릭 신부님께서 사제서품을 받으신지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여려분도 잘 알고 있는 바오로 2세께서도, 바로 그 해에 사제서품 금경축을 맞으셨지요.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사제서품 50주년을 맞이하는 신부들 가운데 오실 수 있는 분들을 교황님과 함께 경축할 수 있도록 바티칸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구 중, 두 사제가 50년간의 사제로서의 삶을 나눌 수 있도록 제비뽑기로 선정되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하시게 된 사제는 학자 신부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지난 50년 간 자신이 관련되었던 교단과 여려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 하셨고, 모두를 그 이야기를 정중하게 인내하며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선정된 안톤 룰릭 신부님 차례가 되어 말씀을시작하지 좀 전의 학자 신부님 말씀은 고스란히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바로 안톤 신부님 자신의 아야기입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즉각 시행되었고 저의 동요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임의 재판을 거처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모두 믿음의 순교자로 기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빵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리듯이 말입니다. 1945년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미사를 온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팔을 벌리고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하는 희생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산채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저의 사제적 희생제사는 사제로서의 전 삶을 조롱과, 배척과, 고문과, 감옥살이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롤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아주 추운 외딴 산골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름 화잘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여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듯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받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는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마음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 제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함께 금경축을 맞이하는 여러분들과 많이 다르겠지만 반드시 특이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50년 동안 수천 명의 사제들이 오직 사제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해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들의경험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성품 성사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제는 모엇보다 사랑하는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의 삶을 바치고 예수님과 사람들을 위해 그의 생명을 내어줍니다. |
<사순 제5주간 수요일>(4.6)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나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 고통 앞에서 낱낱이 드러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십자가 고통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통 앞에서 넘어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곧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고통 앞에서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고통의 의미를 찾습니다. 나는 어떤 신앙인인가? 오늘 독서는 다니엘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인데, 죽음의 고통 앞에서 드러나는 세 젊은이의 큰 믿음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게 패망하여 바빌론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가 통치할 때, 이스라엘에서 끌려온 젊은 세 사람, 곧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는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고 바빌론 신을 섬기라는 임금의 말, 그렇지 않으면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라는 임금의 말을 단 칼에 거절합니다. "임금님,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다니3,18) 그러자 여느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어진 불가마 속에 던져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해 내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제9처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예수님이 세 번 넘어지신 것을 묵상하지만, 실제로 몇 번 넘어지셨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 번 넘어지면 백 번 다시 일어나고, 천 번 넘어지면 천 번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설 때마다 천사들이 박수를 칩니다. 부러움의 박수입니다. |
<사순 제5주간 목요일>(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참으로 고마우신 예수님!' 나를 살리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많은 죄인들과 병자들을 위해 땀 흘리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예수님이십니다. 만약 진실된 마음으로 언제나 이 고마움을 간직 할 수만 있다면, 내 안에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3월14일부터 성경필사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경부터 쓰고 있는데, 지금 마태오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엄마의 노트에 마지막 남겨진 글자가 '아멘'인데, 이 아멘에 이어서 성경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이유는, 내가 살기 위해서이고, 내가 지켜야 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확인하면서 마음에 새기기 위함입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창세17,5.9)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살리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과 우리와 맺은 새 계약'입니다. **********그 '계약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 안에 있고,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날마다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물러 봅시다! 제10처 :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악당들이 예수님의 옷을 다 벗겼을 때, 주님의 알몸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입고 있던 가면의 옷을 다 벗기기에 우리의 알몸이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십자가도 아름답게 짊어집니다. |
? ♂️<삶의 예찬>? ♀️ 안병욱 "봄"은 처녀, 여름은 어머니, 가을은 미망인, 겨울은 계모..." 일년 사계절을 여인에 비유한 폴란드의 격언입니다. "봄"은 처녀처럼 부드럽고,"여름"은 어머니처럼 풍성하고, "가을"은 미망인처럼 쓸쓸하며,"겨울은" 계모처럼 차갑다. 봄처녀가 불룩한 생명의 젖가슴을 갖고 부드러운 "희열(喜悅)"의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 "봄은 세가지의 덕(德)"을 지닌다. 첫째는 "생명(生明)"이요. 둘째는 "희망(希望)"이며, 세째는 "환희(歡喜)"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땅에 씨앗을 뿌리면 푸른 새싹이 나고, 나뭇가지마다 신생의 잎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 "봄의 여신은 생명의 여신"이다. 세상에 생명이 자라는 것처럼 아름답고 신비롭고 놀라운 일은 없다. 밀레와 고흐는 "씨뿌리는 젊은이"를 그렸다. 네 마음의 밭에 낭만의 씨를 뿌려라. 네 인격의 밭에 성실의 씨를 뿌려라. 네 정신의 밭에 노력의 씨를 뿌려라!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옛사람들은 봄 바람을 "혜풍(惠風)"이라 했고,여름 바람은 "훈풍(薰風)"이라 했고, 가을 바람은 "금풍(金風)"이라 했고,겨울 바람은 "삭풍(朔風)"이라고 했다. "봄은 환희의 계절"이다. 우울의 날이여 가거라,비애의 날이여 사라져라, 절망의 날이여 없어져라! 고목처럼 메말랐던 가지에 생명의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얼어 붙었던 땅에서 녹색의 새 생명이 자란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창 밖에 나비가 찾아오고, 하늘에 종달새가 지저귀고, 벌판에 시냇물이 흐르고, 숲속에 꽃이 핀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안병욱 <사순 제5주간 금요일>(4.8)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요한10,39) '예언자의 길!'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이들을 옳은 길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잘 따르다가도 이내 벗어나 또 다른 예언자들이 파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파견된 예언자가 바로 하느님과 같으신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처럼, 그리고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은 참으로 '무거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며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예언자는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달콤한 소리를 원했지만,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소리인 쓴소리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쓴소리를 거부했습니다. 더러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하느님의 소리인 쓴소리를 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언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예언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유다인들처럼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10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십자가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가 내 삶의 아름다운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벌 받은 사람처럼 불행하게 됩니다. 소프라노 김인혜 https://youtu.be/Q4pqJlBDbYs |
<사순 제5주간 토요일>(4.9)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11,53) '한 사람의 희생제물!'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표징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한 유다 지도자들이 마침내 최고 의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요한11,47) 예수님께서 처형되시던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는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50)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돌아가시는 것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으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대사제 가야파의 예언은 '하느님의 뜻을 전한 예언'입니다. 가야파의 예언처럼 우리의 부활, 곧 공동체의 부활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 안에 '우리의 부활'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제12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오히려 십자가의 저주를 은총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자존심을 죽이면 십자가의 짐이 은총으로 바뀌어 십자가가 나를 짊어지고 갑니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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