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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사순시기

사순 제4주간 Conversion Is a Sinner’s Smile… And God’s Own회개는 죄인의 미소이고, 하느님의 것(기쁨)입니다.

사순 제4주일

Conversion Is a Sinner’s SmileAnd God’s Own
회개는 죄인의 미소이고, 하느님의 것(기쁨)입니다.
- 칸탈라메사 추기경 -

1독서: 여호 5:9.10-12
2독서: 2코린 5:17-21
복음: 루카 15:1-3.11-32


사순절 넷째 주일 복음은 루카 복음을 비롯하여 4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페이지 중 하나인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모든 것이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그려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 비유 하나가 그전의 모든 설교자들의 강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정신, 마음, 상상력과 기억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정말 다양한 코드, 즉 후회, 수치심, 향수를 건드릴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순절 복음에서 우리가 계획한 목적에 따라, 즉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전체 복음을 다루면서도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환영하셨고, 율법 옹호자들에 반대하였으며, 그들은 그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고 비판하셨습니다. 가장 잘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그분에게 환영받고 심판받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죄인들은 열성적인 청중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누구입니까? 그 단어로 정의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반대자들인 바리사이인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일부 비평가들은 이 단어가 고의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침입자’, 즉 범죄자, 무법자로 정의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추문을 당하고 그분을 무책임하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사람으로 여길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마치 사제가 마피아나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데 익숙해져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핑계로 그들의 점심 초대에 응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인들은 율법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었고,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엄격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죄인은 모두 그들의 전통과 계명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논리에 따라 쿨람 에세네인들은 바리사인들을 불의하고 율법을 어긴 자들로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초정통파 사람들은 동일한 잣대로 모든 사람들을 이단자로 간주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명한 학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거듭나고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거나 죄인의 존재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계명밖에 없는 것처럼 하여 하느님의 은총은 열외로 생각하였습니다(제임스 던).’


예수님께서는 죄와 지인의 존재를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병자라고 부르신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 점에서 그분은 반대자들보다 더 엄격하십니다. 반대자들이 간음을 비판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간음을 하려고 하는 욕망까지도 비판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다면 형제를 미워하거나 학대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죄인들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서 예전처럼 계속 살아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것은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여 변화 가능성을 모두 부인하는 것입니다. 루카가 바리사이인과 세리의 비유를 소개하는 방식은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18:9).’ 예수님께서는 죄인 자신보다 죄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더 엄격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죄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유례가 없는 부분은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예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아닙니다. 그분의 태도에는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용서하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느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반대자들은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씁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의 죄가 사해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이 그 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이는 기적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과 죄인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보면 다음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셨습니까? 다른 사람, 예언자 또는 그 이상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상에서의 삶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이유에 대해서는 이전에 설명하였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하느님의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제 이번 주일 복음 말씀과 탕자의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루카 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탕자의 비유가 나오고 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은전을 찾은 부인은 뭐라고 합니까?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 비유의 끝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들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늘에서 기쁨이 더할 것입니다.’


세 비유의 근간은 하느님 자신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기쁨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기쁨이 있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비유에서는 기쁨이 넘쳐서 배불리 먹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기다리지도 못하고 무엇을 궁리하지도 못하고 종들에게 명령하여 가장 좋은 옷과 가족 인장이 찍힌 반지를 가져오라 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모든 이에게 말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소설 중 하나에서 실제 상황에서 일어난 일처럼 하나의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 중 한 여성이 생후 몇 주 밖에 안 된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기가 처음으로 엄마를 보고 미소 짓는 것을 봅니다. 그녀가 너무 심각하게 웅크리고 있으니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왜 그렇게 앉아있냐 묻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지을 때 엄마가 느끼는 기쁨처럼, 하느님의 자녀들이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그분에게 기도할 때 하느님도 기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 중에 누군가는 마침내 하느님께 그 기쁨을 줄 수 있을지, 죽기 전에 그분에게 그 미소의 기쁨을 줄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사순 제4주일>(3.27)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나는???'
오늘 복음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를 묵상하면서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인가?'
'나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작은 아들의 모습인가?'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앞에서 불만이 많은 큰 아들의 모습인가?'
'복음 중에 복음'인 '탕자의 비유'가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하고,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나의 허물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품어 안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알거지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종들에게 이르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2-24)
그래서 돌아온 탕자를 위한 즐거운 잔치가 한바탕
벌어집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여호5,9)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5,17.20)
"나의 은밀한 생각까지 아시는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엄마의노트'를 보니, 울 엄마는 항상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셨다.)
나의 수치를 치워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과,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을 드립시다!

그리고 어제의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치워버리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그래서 다시 부활하고, 다시 시작합시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3.28)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
'나를 살리시는 주님!'
오늘 복음(요한4,43-54)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 번째 표징(기적)에 이어, 두 번째 일으키신 표징인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앓아누워 있는 죽게 된 아들을 둔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왕실 관리의 아들이 살아납니다.
나를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살고 싶으면 왕실 관리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하고,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께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65,17)
이것이 바로 '사순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본질'입니다.

나를 살리러 오신 예수님,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께로 나의 몸과 마음이 향해 있도록 오늘 하루도 노력합니다♡
함께 노력해 봅시다!
오늘부터 '강길웅 신부님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을 매일 1처씩 걷도록 하겠습니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어떻게 죄 많은 인간이 하느님을 심판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살다 보면 황당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십자가 앞에 깊은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순 제4주간 화요일>(3.29)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8)
'믿습니까?'
오늘 복음(요한5,1-16)은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는 병자,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어 치유의 연못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는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에게 다가가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갑니다.

어제 복음에서 왕실 관리가 보여준 것처럼,
벳자타 못 가의 병자도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 신뢰'를 드러냅니다. 전폭적 신뢰인 '이 큰 믿음'이 놀라운 치유를 낳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치료 행위도 할 수 없다는 율법 규정을 들어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행위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인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 곧 '생명을 창조하는 일과 너를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인데.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본질'인데.
유다인들은 율법 규정에만 갇혀 있으면서,
율법의 본질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에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나의 영육이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왜 짊어지셨습니까? 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짊어지셨지만 특히 나를 위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공연히 찌르거나 때리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저번 4주일 복음화 분과 연수를 갔는데 겸손을 강조하시고 성경교리 성사생활로 나자신이 먼저 복음화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간에 멈추어서 *****주님 말씀을 들을수있는 멈줌******을  주님 말씀을 알아듣는 또 듣는 은총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아멘!아멘!아멘!                

<사순 제4주간 수요일>(3.30)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아버지와 아들!'
오늘 복음(요한5,17-30)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어겼고,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권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5,23)
'우리의 신원'도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고백하시고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고, 말과 행동으로 이를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아들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죽였던 '유다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삼위일체를 부정했던 '아리우스파 이단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아들들이 됩시다!
제3처 :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이 넘어지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처음엔 잘 짊어지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내며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세상은 다시 일어서는 이의 것입니다."


<사순 제4주간 목요일>(3.31)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5,43)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
오늘 복음(요한5,31-47)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써, 이미 다 드러나 있는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증언들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고, 둘째는 '예수님께 맡겨진 일들'이고, 셋째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넷째는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들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증언들을 잘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는 나의 모습인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으로써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이미 내 앞에 잘 드러나 있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들을 잘 믿고 따라가는 형제자매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행실을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나는 '또 하나의 증언'이 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탈출32,7-14)는 모세의 중재기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몸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 말씀입니다.
'나의 중재기도'로 네가 다시 살아나는 '또 하나의 모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4처 :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십자가의 길에 성모님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용기를 내어라. 힘을 내어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위로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모님이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힘을 내어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오 늘?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오늘 입니다.
오늘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이 희망이고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이 기쁨 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들을 지나면서 어찌 내 마음이 흡족 하기만 할까요-?
울퉁 불퉁 돌 뿌리에 채이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맥없이 휩쓸리기도 하면서 오늘의 시간을 채워 갑니다.

그럼에도 웃을수 있는건 함께 호흡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 입니다.

오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긍정의 눈을 떠서 시야를 넓히고,
배려의 귀를 열고
소통의 귀를 열어 둡니다.
그리고 제게 말합니다.

오늘 내 이름을 불러 주는이 있어 감사 하고,
내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해 주는이 있어 감사 합니다.

상쾌한 아침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 하시구요.?

<사순 제4주간 금요일>(4.1)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7,30)
'예수님의 때!'
우리를 살리시려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 아들 예수를 죽게 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지혜2,1.12-22)도 유다인들처럼 의인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인들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2,12.13.14.19.20)
'예수님의 때'(Kairos)는 '예수님께서 십자 나무에 달리시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으러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죽음으로 순명하신 예수님!

먼저 이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두를 살리기 위해 내가 먼저 죽고, 나의 부활을 위해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그래서 시몬처럼 십자가가 나에게 행운이 되는, 그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제4처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시몬은 자신이 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게 아닙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행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도 때로는 재수 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다는 마음만 먹으면 우리에게도 행운이 됩니다.


<사순 제4주간 토요일>(4.2)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요한7,46)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논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논란이 일어납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두 그룹은 예수님에 관하여 긍정적 믿음을 지녔으나, 나머지 한 그룹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낸 성전 경비병들은 그냥 돌아와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어떤가?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 안에서도 예수님에 관한 이러한 논란은 계속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가?
'우리가 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그들의 외침이 아닌가?
이러한 외침이 일부 신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우리가 하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외침으로도 들려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은둔소에서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삶에 깊숙이 개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제6처 :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림을 묵상합시다.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릴 때, 주님은 그 수건에 당신의 얼굴을 새겨 주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열심히 짊어지면 만나는 사람마다 은인이 되어 그들에게 내 모습을 감동으로 새겨 주지만, 내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원수가 되어 나 스스로 괴롭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