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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침묵

[스크랩] 위대한 침묵 카르투시안 수도회 탐방 - 박 찬 |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2년 10월

       카르투시안 수도회 탐방 - 박 찬 

                                                                     |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2년 10월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2년 10월 호에 실렸던 카르투시오 수도회에 관한 글이 있어 옮겨왔습니다. 가톨릭을 움직이는 힘은, 이런 분들의 기도를 통한 주님의 섭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카르투시안 수도회 탐방

                                                                                         - 박    찬

 

연중 내내 눈 덮인 프랑스 알프스산 중턱(해발 1300미터)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 주위에 민가라곤 없고 오직 고요와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샤르트뢰즈>라고도 하는 이 카르투시안 수도원은 철저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원으로 1081년 성 브르노가 창설했다.

사방이 벽으로 갇힌 곳에서 바깥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매일 한 끼만의 식사로 소재를 지키며 세상 모든 인간적 재미와 흥미를 떠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누리는 이곳 수도승들이 세상을 떠나 홀로 선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성소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수도회가 세상의 몰이해 때문에 가끔 악명(?)높은 수도회라는 조롱을 듣기도 하는데, 이는 이 수도회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들 수도승들의 희생과 보속을 시대에 뒤떨어진 우둔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 희생과 보속이 쓰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사실 이들에게는 너무도 즐거운 영예이다. 부모님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의 철저한 운둔을 세상은 비인간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망덕과 봉헌을 몰라주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이들의 은둔생활이 세상을 외면하는 사랑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들이 매일 홀로 숨어서 주님께 올려 바치는 미사성제, 희생과 보속, 기도, 모든 인간적 아픔 등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안다면! 이들이야말로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주님께 호소하고 있다… 이 혼탁한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사랑의 주체인 것이다!

 

이 수도원은 세상의 변천에 동승하지 않고 거의 천년 동안 초기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 계승하고 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거의 모든 수도회가 더 이상 엄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모두 완화된 규칙을 채택했으며,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도 원래의 엄률로 돌아오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카르투시안회만이 단 한번의 회칙 개정도 없이 고유의 엄률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수도회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행정체제 덕분이었다. 이는 일종의 감시제도인데 중앙위원회에서 구성된 일단의 봉쇄사제들이 전 유럽 카르투시안 수도원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몇 달간 생활하며 각 수도원(분원)에 혹시 흐트러지거나 변질된 모습이 있지 않나 감찰하는 제도이다. 만약 그런 부분이 눈에 띈다면 중앙위원회에 보고되고 즉시 시정통보를 받게 된다. 이 제도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유럽의 역사 특히 프랑스의 역사를 보면 풍파가 너무 많았다. 무수한 전쟁, 전염병, 종교혁명, 시민혁명 등…이 난관 속에서도 카르투시안회는 그 정신의 원형을 유지하는 데 수도회 사활을 걸었다. 많은 수도원이 폐쇄되는 아픔 속에서도 수적 유? 幟릿募?그 본직적 정신의 유지를 선택한 것이다. 이 수도원은 한 때 유럽 전역에 190개의 수도원을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십여 군데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카르투시안 수도승들은 각자 은수처에서 독거생활을 한다. 돌덩어리로 지은 수 백년된 은수처는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작업실, 장 작 보관소, 화장실이 있고, 2층은 침실, 기도실, 공부방, 성모경당이 있으며, 3층은 바닥 전체가 모래가 깔려 있다. 하느님과 함께 숨고 싶을 때 사막 같은 이곳에서 기도할 수 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저녁 7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저녁 11시 30분에 다시 일어나서 밤기도를 마친 후 다시 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잠을 하루에 두 번 나누어 자는 것이 특징이다. 천년 세월 동안 고풍스런 은수처에서 살다 죽은 수 많은 수도승들을 생각하면 거룩함까지 느껴진다. 각자의 은수처에는 약 30평 정도 되는 정원이 있다. 음식은 점심 한끼만 제공되는데, 조그만 구멍문을 통해 들어 온다. 아침 식사라는 것은 없고 저녁은 빵과 음료수만 먹을 수 있다. 카르투시안은 어떤 경우에도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백질이 많은 콩이나 치즈를 자주 먹는다. 매주 금요일은 물과 빵으로 떼운다. 청원자에게 이런 결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초보자는 저녁 때 맨 빵이 아닌 버터와 치즈를 곁들어 먹을 수 있고 또 과일과 야채를 먹을 수 있다.

 

 매일 식사 때 마실 음료수의 종류를 적어 놓으면 담당 평수사가 요구한 양의 빵과 음료수를 넣어준다. 점심에 먹은 식사가 남았더라도 저녁을 위해 남겨 놓을 수가 없고 오후 2시 이전에 음식창을 통해 모두 반납한다. 하루에 3번―미사, 저녁기도, 아침 기도 때―수도승들은 각! 자의 은수처를 나와 성당으로 향한다. 수도원 내의 고풍스러움, 조각들, 성화들, 수도원임을 인식시켜주는 여러 분위기들을 연출하고 있는 복도만 걸어도 벌써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수도복 두건을 푹 덮어 쓴 채 성당으로 향하는 수도승들의 모습에 이미 기도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진다. 이들은 복도를 걸어 갈 때나 성당에서 기도할 때 항상 두건을 푹 덮어 쓴다.

 

이는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는 불필요한 것들을 차단하고 시선을 주님께만 두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다. 또 밤 기도 떄도 암흑 속에서조차 노출을 피하고 기도하고 싶어 하고, 기도가 끝나고 각자 은수처수도원의 배가 넘는다. 수 백년 동안 전승된 고유의 성무일도서가 있는데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되어 있어 이 기도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중세기부터 내려오는 가톨릭 전례를 그 원형대로 보존해온 수도원이다. 로 돌아 갈 때도 복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걸어간다.

 

이곳의 기도의 양은 타 수도원의 배가 넘는다. 수 백년 동안 전승된 고유의 성무일도서가 있는데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되어 있어 이 기도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중세기부터 내려오는 가톨릭 전례를 그 원형대로 보존해온 수도원이다. 모든 전례는 라틴어로 한다. 라틴어만큼 하느님을 아름답게 찬미할 수 있는 언어 또한 없기 때문이란다. 전례의 절정은 '녹턴'이라는 밤 기도(성무일도의 아침기도에 해당된다)인데, 자정에 시작해서 새벽 3시에 끝나는 장대한 기도다.그레고리안 성가로 읊어지는 모든 시편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이곳 수도승들은 거의 모든 시편을 암송하기 때문에 불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은은히 성가로 암송한다.

 

옆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중세풍의 대성당에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그 여운이란…. 불빛이라곤 감실의 불빛만이 보인다. 이곳 수도승들은 봉쇄수도승, 평수도승, 일반수도승, 이렇게 3계층으로 나눠져 있다. 봉쇄수도승들은 모두 사제이다.

 

하루에 세 번 성당에 모여 아침기도, 미사,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절대로 각자의 은수처를 떠날 수 없다. 철저히 갇혀서 하느님과의 일대일 관상에 정진한다. 이 사제들은, 제대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미사를 드린다. 봉쇄수도승들이 각자의 미사를 봉헌하는 경당이 50여개나 된다. 그렇지만 대성당에서는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 그리고 아직 서품을 받지 않은 봉쇄수도승을 위해 한 명의 사제가 교대로 미사를 봉헌한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사목적인 지향이 전혀 없고―심지어 수도원 안의 다른 수도승에게 까지도―오로지 관상에만 힘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한 채 각자 영신수련에만 힘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갇힘, 세상과의 결별, 희생, 은수를 통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충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평수도승들은 서품을 받지 않은 채 봉쇄수도승들이 방해받지 않고 고독과 은수 생활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하는 관상에 정진하도록 돕는다. 음식을 만들고, 또 이 음식을 각 봉쇄수도승의 은수처에 나르는 일, 수도복 빨래, 옷 수선 등 봉쇄수도승들이 관상생활 외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물질적 도움을 준다. 이런 일들 때문에 평수도승들은 철저히 봉쇄를 지킬 의무는 없으나 그들 나름대로 각자의 은수처에서 관상생활에 힘쓰기 때문에 바깥 출입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성당에서 기도할 때 봉쇄수도승, 평수도승, 일반수도승의 자리가 나눠져 있다, 평수도승은 맨 끝자리, 일반수도승은 아예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간에 있는 그들의 자리에서 기도한다. 주일 점심 식사는 모두 모여 대식당에서 하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로 순서대로 앉는다.

 

중세 때는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들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기도에 참석할 의무가 없었다. 봉쇄수도승 옆에서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이다. 식당에서도 라틴어를 알아 듣는 봉쇄수도승이 윗자리에 앉아 독서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리가 배치된 것이다.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들은 하느님께서 봉쇄수도승들에게 주신 사제 성소를 공경하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순명하고 그들보다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봉쇄수도승들 또한 이들 수도승들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신 사정을 항상 염려해 준다.

 

이곳 수도승들은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오후에 산악 행군을 한다. 이는 기분전환이나 레크레이션 차원이 아니라, 운동 부족을 보충해서 육체적, 정신적 침체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극기 훈련인 셈이다. 비가 와도 이 산악 등반은 취소되지 않는다. 등반은 굉장히 힘든 강행군이다. 도중에 가다 쉬는 일이 없다. 이 날만큼은 서로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가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짝을 바꾼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 수 있도록 모두 한번 씩 만나게 된다. 이때 나누는 대화는 영적 주제들 뿐이다. 이들의 대화는 어떻게 그렇게도 영적인지, 또 어쩌면 그렇게들 사랑이 많은지, 숨어 계신 하느님을 공공연히 찾아내며 상대방은 또 얼마나 열성을 다해 맞장구쳐주는지… "저 바위들 좀 봐!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아?"… 드러내놓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대화들이 오갈 뿐이다.

 

수도원 내에서의 침묵은 거의 절대적이다. 말 뿐만 아니라 발걸음, 문소리 하나하나에 조심려고 애쓴다. 대성당 입구엔 일렬로 나열된 개인 사물함이 있는데 뭔가 전할 말이 있을 경우 쪽지를 써서 당사자 사물함에 넣는다. 이웃 사랑이 말 없이도 침묵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료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어주며 미소 지어주는 얼굴에서 장대한 말이나 행동으로 전하는 사랑보다 더 크고 강렬한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많이 힘들지?" 또는 "잘 지내? 별일 없어?"하는 내용의 미소들이다.

 

'녹턴' 또는 저녁기도 때 사용하는 카르투시안 성무일과 기도서는 어른 팔 길이만큼 크다. 건강한 수도승이 힘을 다해야 들 수 있을 만 큼 무겁다. 그런데 성당에 맨 먼저 도착해서 이 모든 기도서를 꺼내 수도승들 가대에 페이지까지 정확히 펼쳐 놓은 수도승은 70이 넘은 폴 신부. 백내장으로 이미 한쪽 눈을 잃고 당뇨가 심해 방광을 절개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양 다리는 만성 류머티즘으로 양 손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겨우 겨우 걷는다. 이 신부는 단 한 차례도 자신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묵묵히 견? ?뺐?있다. 그런 신부의 기력과 건강 상태로 그 무거운 책들을 들어 올리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어느 누구도 그 신부의 기쁨을 빼앗지 못한다. 초보 수도승이 한번은 얼마나 힘드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그런 질문을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참 후 입을 열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재미로 달려 계신가요?"하면서, "의사들은 내가 하루속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난 내게 온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는 말과 함께.

 

카르투시안을 아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겉으로 보이는 엄격함과 금욕적인 모습에 속아 카르투시안들은 인간적인 정감이 결여된 사람들인 줄 안다. 그들은 이 수도회 내부에 들어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카르투시안들이 지닌 온유함과 사랑 깊은 미소를 본다면 그들은 참 놀랄 것이다. 카르투시안이 지닌 온유함과 따뜻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카루투시안들은 남에게 용서를 청하는 행위가 있다. 이는 '베니암'인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예를 들어 주일 점심식사때(이 때만은 공동식사를 한다)누군가 실수로 포크나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려 '쩡그렁' 소음이 나서 주위에 분심을 초래했다고 하자. 그때 실수한 당사자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테이블에 입을 맞춤으로써 자신의 실수에 대한 용서를 청한다. 또 기도시간에 좀 늦게 도착했거나 그레고리안 성가의 음이나 가사를 틀리게 불러 주위에 분심을 초래했을 때도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가대에 입을 맞춘다. 그 모습은 참 겸손해보이고 수도자다워 보인다.

 

신학 과정에 있는 수도승들은 수도원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 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없을 경우, 외부에서 신학교 교수를 초빙한다. 이곳 수도승들은 절대 외출을 하지 않는다.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받는 제도는 전혀 없다. 일반 신학교처럼 일정 시간에 마쳐야 할 진도를 정해 놓고 일률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승마다 그 진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수도승들이 진도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각자의 역량대로 학업을 해나가도록 각자 따로 지도한다. 이곳은 수업이 없다. 신학이 수업을 통한 지식의 주입이 아닌 각 수도승의 관상 생활 자체가 되도록 지도한다. 신학과 철학을 가슴으로 체험하고 이해하도록 지도하기 때문에 진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본인 스스로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학이 기도의 삶이 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이곳은 대축일이 오면, 그 전날 물과 빵만으로 단식을 하며 미리 마음을 준비한다. 대축일이라고 해서 평소와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미사나 성무일과가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장대하다는 것 뿐이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본인 스스로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학이 기도의 삶이 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이곳은 대축일이 오면, 그 전날 물과 빵만으로 단식을 하며 미리 마음을 준비한다. 대축일이라고 해서 평소와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미사나 성무일과가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장대하다는 것 뿐이다. 지난 10월 6일은 이 수도원의 창립자이며 카르투시안 은수 생활의 시조인 브루노 성인이 서거한 지 900년 된 대축일이었다. 유럽 가톨릭교회는 그 해를 '브루노의 해'로 선포했기 때문에 전 유럽의 눈길이 이 수도원에 쏠렸다.

그러나 카르투시안 수도회는 성인의 은수자적 정신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의미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숲 속 암자 같은 작은 성당에서 조촐하게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의 주례를 맡은 추기경과 지역 주교 외에는 그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 수도원에게 그 날은 더없이 큰 축일이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침묵과 평소와 다름없는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다.

 

그것은 과연 진정한 대축일의 정신이었다. 대축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제는 십자가상을 향해 미사를 드린다. 인상적인 것은 성찬전례 때 정적과 침묵 속에서 미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변화시키고, 거양하고, 교회와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순간이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주례사제도 정적 속에서 속으로 경문을 외운다. 너무 엄숙하고 고요해서 긴장감마저 감돈다. 이 순간 미사 참례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하느님께 최고의 흠숭을 드린다.

 

작업이라는 것은 각자의 은둔생활에 필요한 일을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기도 시간이라 장작을 패는 일과 정원을 가꾸는 일 등 작업 시간은 얼마 안된다.

이곳은 항상 조심스럽고 절제된 분위기다. 발걸음 하나 하나가 조심스럽고 문 소리 하나 하나가 조심스럽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수도원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이 수도원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 유적으로 지정돼 있어 많은 보조를 받고 있다.

 

현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수도회의 영성은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교회가 택한 새로운 방향 전환이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결정된 교회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 움직임은 거의 모든 수도회의 영성에 영향을 끼쳤고 실제로 관상수도회조차 이에 동승하는 추세이다.

 

사랑·기쁨·화합의 영성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주신 선물임에 분명하지만, 이 영성이 과거의 침묵·고독·희생 등 수덕적 영성보다 더 낫고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교회가 몰랐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 과거의 길을 폐쇄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쁨과 화합의 영성이 현시대의 주류를 이룬다고 해서 과거의 수덕적 영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침묵·고독·희생을 통해 주님께 나아간 과거의 수많은 성인 성녀들도 미워해야 할 것이다.

 

                                                                

출처 : 한국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박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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