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시다가 악령 들린 한 사람을 만나셨는데,
그는 등골이 오싹하게도 무덤 옆 토굴에서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악령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 5,9)
당시 군사 조직에 따르면
로마 군대는 6100명의 사병과 726명의 기병,
합해서 총 6826명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이름의 악령이 들린 사람 안에는
거의 7천 마리의 악령이 뱀 무더기처럼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원래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거룩한 성전이었던 한 인간이
이다지도 참혹하게 악령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무덤은 ‘악령의 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이 수시로 활개를 치니
한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삶은 끝났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충혈된 눈, 온 몸의 상처, 기괴한 몰골, 엄청난 파괴력, 음산한 분위기...
사람들은 다들 그를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거처는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속 토굴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섭고 폭력적이며
듣도 보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군대라는 악령이었는데...
예수님의 출현 앞에 바짝 꼬리를 내립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마르 5, 6)
참으로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광란의 낮과 밤을 보내면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놓던 악령들이
예수님 앞에 완전한 무능을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군대라는 악령 집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끝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악령 들린 사람의 참혹한 현실을 측은히 여기시며
단체 투어 중인 악령들을 일거에 몰아내십니다.
그리고 비참했던 한 인간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주십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악의 세력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내 삶에서 성령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
곧 악령이 활동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비하신 하느님 현존 체험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그분과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여겨지는
부재 체험 가운데서도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내 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여기가 끝인가 보다 느껴질 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 또 하느님과 함께 삽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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