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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스크랩]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성인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올바른 생각을 지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가슴에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심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이 소망을 실현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별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성인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오며, 

자기들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실망하는 데서 옵니다.

 

 성인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성인이란 특별한 고행을 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성인에게 기적이나 고행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그 기적이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므로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고행을 해야 하지만,

성인이란 무엇인가 라든가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성인들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은 유익하고 고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가르쳐 주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육체적 고행이 아니라

오히려 맛있는 것과 부드러운것, 안락한 것을 엄격히 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을 해치지 않고 장애 없이 기도하고 일할 수 있을 만큼의

검소한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장 엄격한 자기 희생은 눈과 혀를 자제하고 일곱가지 대죄(七罪宗)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대죄는 교오, 간린, 미색, 분노, 탐도, 질투, 나태 등입니다.

 

 따라서 성인의 정의는 이렇게도 내릴 수 있습니다.

성인이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자신의 일상의 의무를 특별히 잘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의 기적도 없이 주의를 끌지 못한 채 곧 잊혀지겠지만

하느님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덕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고무적입니다.

우리가 본받아 생활하기 어려운 성인들의 생활 속에 드러나는 것들은

사실 그분들의 성덕 가운데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덕을 쌓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오늘부터라도 시작한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

최초의 굳은 의지가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아마도 뉴먼 추기경의 말씀이 그 길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끌 것입니다.

 "여러분이 완덕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날 시간이 지나서까지 잠자리에 누워 있지 말고,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성체 조배를 하고 경건하게 삼종 기도를 바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며 로사리오 기도를 잘 바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쁜 생각을 쫒아 내십시오. 또한 저녁 묵상을 착실히 하고 매일 자신을 반성하며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완전한 사람들입니다.

 

1. 어떤 사람이 성인에로의 부르심을 받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성덕을 쌓는 데 적합하지 않게 보일지라도 여러분을

성덕에 이르게 할 충분한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가능한 것에 기대를 걸 수 있고 불가능한 것에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덕은 생활방식이나 어떠한 등급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기대를 걸 수 있는 가능한 것 입니다.

이를 증명하듯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 분들 가운데는 왕과 거지, 상인과 노예,

은자(隱者)와 시민, 한 가정의 어머니와 병자와 군인들, 그리고 온갖 민족과 인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성된 성인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신자들의 모범이기 때문에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도록 초대된다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충실하게 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목표에 이르도록

하느님께서 충분한 도움을 주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2. 두가지 성공

 

  인기나 부에 대한 생각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세속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어떤 어려움이라도 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은 실패했을지라도 자녀들에게 같은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야심에 찬 청년에서 황혼기의 노인들까지 각 세대는 모두 한결같이

세속적 성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연 세속적 성공을 위해

그러한 괴로움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 성공을 위해서 건강이나 지식, 혹은 지능 면에서 불리한 여건하에서도 싸웁니다.

따라서 그 싸움은 결코 공정한 싸움일 수가 없습니다. 몇몇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단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성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얼마나 특별히 다루시는가!

여기서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노력은 보상을 받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됩니다. 건강과 질병, 가난과 부, 좋게 보이는 것과 나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 모두가 선의를 가진 인간에게는 영적 유익을 추구할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합리적인 요구를 모두 받아주시고, 청하면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며,

우리의 능력을 넘는 어떤 시련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속인들의 귀에는 이것이 동화같이 들리겠지만,

그것은 천상의 부요함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많은 착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친절하신 하느님을 불쾌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가 하는 일에 쏟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그분의 관대하심에 관대함으로 보답합시다.

 

 3. 저는 결점 투성이입니다

 

"저는 제 본성을 새로운 형태로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생활을 할 때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저에게는 의지력이 없으며 그러한 삶은 저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서 우리는 그토록 자주 우리 귀에 들리는 그 부르심을 못 들은 체 합니다.

우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리스도의 멍에를 두려워할까요?

 

 바로 우리의 관점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생각들이 우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고 있는 반면 영원한 주인이신 그분은 우리의 삶에서

수백 가지 관심사들 중의 하나로 한쪽에 밀려나 있습니다.

따라서 큰 일을 하려는 열정과 용기, 그리고 열의가 눈에 보이는 이득이나 즐거움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성덕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러한 사고방식을 바꿔 보십시오. 그리고 성덕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성덕을 위해 힘쓰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노력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그 목표를 매력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거의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4.변화된 관점

 

 관점을 변화시키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즉 우리는 사실을 직접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안에 감추어진 의미 있는 것들을 찾으려고 마음을 써야 하고

죽음과 영원이라는 중추적 사실들을 감싸고 있는 냉혹한 진리를 똑바로 대해야 합니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생각, 현세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에 대한 열망,

지상에서 머무는 시간의 짧음, 모든 것을 결정할 그 순간의 임박,

그리고 무덤을 초월해 우리의 불멸의 삶을 형성하는 짧은 매 순간들의 무한한 가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고도 여전히 무관심하게 남아있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들을 깊이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힘을 줍니다.

우리 안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은 반발하지 않으며 이성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몰아 갑니다.

여기에 약간의 사랑을 더하십시오.그러면 그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아주 오랫동안 심사숙고 해 왔습니다. 

우리가 의심에 빠져 있는 동안에 소중한 날들은 지나가 버렸고,

우리는 무덤이라는 홍수의 급류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끝없는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영원 속으로 빨려들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원! 얼마나 깊은 고려입니까!

 그러므로 아직 시간이 있고 그분을 우선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시작합시다

 

                   

 

 5. 새로운 야심

  

시작을 지체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점점 싫증이 나서 우리의 운명을 잊게 됩니다.

 "오 하느님!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그날이 저에게 닥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당신의 사업은 제게 있어서 이제까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한가한 시간을 매우는 것에 불과했음을 고백합니다.

지나간 일들이 저의 마음을 덮쳐 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저를 완전히 당신께 바칠 것 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충실히 섬기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허송세월한 지난날들을 저에게 다시 주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완전하게 보상하여 당신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선교사나 수도자, 혹은 제 주위 사람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훌륭하게 성취한 일과 같은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네게 다가오는 평범한 생활을 갈팡질팡하거나 지치지 않고 살아가며,

 

 당신을 사랑하고 또한 당신이 사랑받으시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사소한 일을 싫어합니다.

사소한 일들 속에서 위대해지고 평범한 일들을 하는 가운데 영웅이 되기는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렇한 삶이 당신의 뜻입니다. 그 안에는 분명 당신의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족합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왕관을 씌워 드리도록 저에게 마지막까지 이러한 충성을 허락해 주시고,

마지막 부르심이 계실 때 당신 품에 안겨 저의 마지막 희미한 숨을 내쉬게 되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용감하게 진실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사랑하는 예수여, 단순한 소먕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6. 참으로 열성적으로 되는 것

 

우리가 갖는 선한 것은 전진을 위한 발판입니다. 그것은 또한 목표 달성에 대한 공허한 소망이 아니라

목표로 이끄는 길을 따라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만일 우리가 완전해지려면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시련이 닥칠 때 당황한다면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시련 때문에 실망한 사람은 마침내 경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간단히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결코 열성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뿌리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 인내

 

  이것은 처음에는 대체로 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때

손으로 붙들어 주는 것과 같이 우리를 격려해 주시기 위해 아낌없이 도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항상 보호만을 받는 것은 우리의 덕에 이롭지 않기 때문에

얼마 후에는 처음에 주신 도움을 줄이십니다. 그때 우리의 결심이 시험받는 위기가 닥쳐 옵니다.

수호천사들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높은 성덕을 향한 소망을 쉽게 저버리는 것을 슬퍼할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이 쉽게 식어 금방 포기해 버리는 것은 지금까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애써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일하는 가운데서 느끼던 기쁨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 이상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렵게 일해서 준비한 봉헌물은 항상 값진 것이기 때문에 외관상으로는 우리와 별 상관 없는 것 같지만

우리가 어렵게 일하는 가운데 느끼는 하느님의 기쁨은 아마도 더 클 것입니다.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질 맨 마지막 은총이며 또 가장 큰 은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자극하는 것, 색다는 것,

혹은 여러 가지 인간적인 것들 중의 한 가지가 어떤 일을 시작하게 할지도 모르지만

것을 계속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거창하게 시작한 사람들이 또 그렇게 빨리 중단할까요? 

좋은 일이면 어떤 일이든지 지원자들을 모집하십시오.

열의에 가득 한 사람은 많지만 꾸준히 남아 끝까지 그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뒷걸음질에 대해 변명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인내심이 결여된 어떤 명확한 이유가 있을까요?

여기 유명한 삐에르드 라비앙의 말 속에 대답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속임수, 모든 정신적 결함, 불행, 실수, 그리고 가장 심각한 방황 등

모든 것이 한가지 원인, 즉 끊임없는 기도의 결여로 인해 생긴다고 단언합니다."

 

                   

 

 8. 인내의 비결은 기도

  

  어떤 사람은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성인들은 대략 관상생활에 일생을 바친 분들과

적극적인 활동에 전념한 분들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고 결론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분들은 모두 비슷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일생을 기도에 바쳤던 영혼들이었습니다.

 

 기도가 그들의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그들의 선행은 그것이 기도에서 나옴으로써만이 소중했습니다.

선행과 기도의 관계는 나무 줄기와 뿌리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선행은 기도가 눈에 보이게 드러난 부분이며, 기도 없이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현대는 자선 사업을 통한 신앙의 호소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큰 호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때 가장 평범한 행위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며,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우리를 이웃에 대한 봉사로 우리를 강하게 이끄십니다.

 

 성덕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봉사에 따르는 인내는

규칙적인 기도와 선행의 적절한 균형이 필수적 요소라는 것은 충분히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신앙심이 깊은 것이라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는 어려운 반면에 선행은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좋아하는데, 기도의 결과는 대개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조금으로 줄이거나 혹은 완전히 없애고, 우리 이웃을 위해 하고 있는 

현실적인 일들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캐논 쉐한의 독자들은 그의 저서에 나오는 주인공 루가 델메즈가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함으로써

그의 내적 생활(영성)을 완전히 잃고 그의 생이 재앙으로 끝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고상한 성품과 거룩한 결의와 

높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지점에 이르러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수효가 많든 적든 가장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대하시지 않는 단순한 선(善)의 범주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죄인을 수렁에서 건져 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우리가 앞서 지적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입시다.

이러한 모든 유감스러운 실패의 원인은 기도가 충분치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9.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데레사 성녀가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줄여서 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의 자녀가 장사를 배우기 위해서는 6년간 도제 기간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기도 하는 법을 가르쳐 줄 책을 읽는 데 여섯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매일 많은 시간을 무릎 끊고 기도하는 데 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에 두번 이상 기도하기로

작정하거나 혹은 하루에 세번이나 네 번 기도하기로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오직 무릎을 끓고서만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징이나 소리굽쇠를 가끔씩 두드려 주면 하루종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우리가 때때로 열망, 생각, 절규를 두드린다면 그것은 영혼이 끊임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도록 하십시오.

기도를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 놓을 때 우리 대부분이 느끼는 내키지 않는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

                                                                 프랭크 더프 지음

 

            

출처 : 가르멜 산길 Subida Del Monte Carmelo
글쓴이 : 구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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