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위 . 렘브란트, <마태와 천사>, 1661, 유화, 96×81cm, 허미티지, 성 페테스부르크. * 그림 아래. 카라바조, <마태와 천사>, 1602, 유화, 292×186cm, 산 루이지 데이 프란케시, 로마. 신약성서 맨 처음에 나오는 복음서는 스스로 저자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초기 교회의 저술가였던 이레네우스(Irenaeus)의 증언에 따라 첫 번째 복음서는 통상적으로 ‘마태’복음서라 불린다. 마태복음서는 렘브란트가 예수의 이야기를 그릴 때 즐겨 참조했던 복음서인데 아마도 이는 렘브란트가 마태의 예수상, 곧 교사와 치유자로서의 예수상을 선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가 인간의 창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글이라는 주장은 렘브란트 당시 일종의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유독 사도 마태의 상징(attribute)은 펜이나 책이 아닌 천사였다. 회화 전통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글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중개 역할을 담당한다. 렘브란트는 전통에 따라 마태와 천사를 함께 그려, 글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마태임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렘브란트의 <마태와 천사>(그림 1)을 차분하게 살펴보자. 렘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빛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는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대비하는 미술 기법, 이른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화가였다. 키아로스쿠로는 빛과 어둠의 강한 명암 대비를 가리키는데 화면의 특정 부분은 밝고 선명하게, 나머지 부분은 짙은 그림자 안에 처리하는 기법이다. 이를 통해 화가는 자신이 강조하고픈 바를 도드라지게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극적인 정서를 유발하도록 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우리는 렘브란트가 그림에서 마태의 머리와 이마, 그가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책을 강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관객은 그림 중앙에 자리 잡은 마태의 턱수염과 그 속으로 살며시 넣은 왼손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닿게 된다. 마태의 빛난 이마, 그가 쓰고 있는 글, 그리고 그 사이에 턱수염과 그것을 만지는 손가락. 이 세 가지 요소는 마태가 지금 숙고(熟考)하며 글을 쓰고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 성서를 기록하는 데에 천사의 역할이 대폭 줄어들었다. 렘브란트는 천사에게 작게 벌린 입과 코, 그리고 마태를 접촉하는 오른손에만 빛의 한 조각을 던질 뿐이다. 렘브란트의 마태는 한 뼘의 빛을 받고 있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몸의 대부분이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천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마태의 눈은 깊은 사색 가운데 앞을 응시한다. 렘브란트의 마태는 천사의 소리를 듣고 글을 적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지적 고투를 글로 옮기고 있다. 물론 마태가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천사는 분명 존재하며 그는 마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다. 렘브란트의 <마태와 천사>는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화가이자 렘브란트가 의식적으로 경쟁하던 선배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의 그림(그림 2)과 대조해 볼 때 그 특징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마태와 천사>에서 천사를 ‘위’에, 마태를 ‘아래’에 둔다. 이런 수직적 인물 배치는 렘브란트의 수평적,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태 뒤에 숨어 있는 듯한 마태와 천사 관계와 사뭇 다르다. 카라바조의 천사는 마태에게 손을 대지도 않고 속삭이지도 않는다. 천사는 ‘위’에서 ‘아래’ 있는 마태에게 무엇을 써야 할 지를 알려준다. 아마도 이 그림에서 마태가 천사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조금 천천히 말해 주시오” 외에는 없을 듯하다. 카라바조의 마태는 생각하거나 골똘할 필요가 없다. 그는 발을 의자에 얹고 그가 듣는 말을 지체 없이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 반면 렘브란트의 마태는 은밀한 계시를 받고 골몰히 자신이 써야 할 바를 숙고한다. 곧 그는 요란하지 않은 계시와 자신의 지적 노력 사이에 있다. 반면 카라바조의 마태는 천상의 계시에 직접 노출되어 있다. 렘브란트가 이해한 성서의 영감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하느님의 계시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지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렘브란트의 마태와 카라바조의 마태 사이에 우리의 경험과 더 친숙한 쪽은 아무래도 렘브란트 쪽이다. 물론 다급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을 때 우리는 카라바조의 마태처럼 되고 싶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마태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 렘브란트는 나아가 카라바조의 마태 머리 위에 있던 사도의 후광(aura)마저 제거한다. 종교적 후광이 사라진 마태의 머리에는 이마를 드러나게 하는 일종의 끈, 곧 숙고와 명상의 상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없는 듯 있는 신적 영역을 모를 듯 아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사도 마태를 표현한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로써 사도 마태와 신적 후광이 없는 일반인들의 접촉점을 만들어냈다. |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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