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 위, 렘브란트, <예언자 안나>, 1631, 유화, 60 x 48cm, 라이크스 박물관, 암스테르담. * 그림 아래, 헤리트 다우, <예언자 안나>,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리.
독자들은 계시와 숙고 사이에서 탄생한 성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성서를 기록하는 마태가 그의 지성을 한껏 사용해야 했듯 성서를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적 고투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적 태도로 성서를 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서를 ‘읽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렘브란트는 성서란 ‘손을 대고’ 곧 그것을 이해하며 읽을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명확히 드러난 그림이 바로 <예언자 안나>이다
누가복음서 2장 36-38절은 예수를 기다리던 여성 예언자 안나를 소개한다. 안나는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그의 나이 84살이 되도록 예루살렘의 구원자를 기다리며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던 예언자였다. 마침내 그는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 그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전통적으로 서양 회화는 안나를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와 함께 그렸다. 흔히 안나는 손을 들어 예수를 가리키며 그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거나, 그가 예언자였기 때문에 정교회 도상학(iconography)에서는 종종 두루마리와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렘브란트가 성서를 읽고 있는 예언자 안나를 그린 것은 정교회 전통의 도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특유의 빛의 처리와 예언자 안나의 특정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서 그림에 담긴 자신의 의도를 강조했다.
빛은 안나의 뒤로부터 와서 그가 머리에 두른 천을 금색과 갈색으로 빛나게 한다. 렘브란트의 안나는 빛이 자신의 뒤로부터 와서 자신의 머리 부분을 비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렘브란트의 마태가 천사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 빛은 성서의 뜻을 밝혀주는 진리의 빛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빛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비친다. 그리고 그 빛이 가 닿은 곳, 곧 안나의 손은 렘브란트의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붓질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히브리 글자 밑에 놓인 안나의 손, 곧 주름진 피부와 혈관이 뚜렷이 보이는 손은 마치 눈 대신 성서를 읽는 듯하다. 렘브란트는 안나가 손으로 성서를 읽는 장면을 그려내는 것이다. <예언자 안나>는 렘브란트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몇몇은 그의 천재성을 이미 알아본 상태였지만, 그는 아직 무명이었고 경제적으로 모델을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와 더불어 렘브란트는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를 프로테스탄트적 예언자 안나로 ‘거듭 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낳아 주었던 어머니를 그림 속에서 태어나게 하면서 렘브란트는 어떤 감상을 가졌을까?
렘브란트의 안나가 보여주는 특징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렘브란트의 첫 제자이자 이후 렘브란트보다 비싼 값에 그림을 팔기도 했던 헤리트 다우(Gerrit Dou)의 <예언자 안나>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다우 역시 렘브란트의 어머니를 모델로 하였다.(그림 4) 다우는 렘브란트의 제자였지만 이후 렘브란트의 화풍에서 다소 멀어지기도 하였다. 여하튼 다우의 그림에서 안나 역시 성서를 갖고 있다. 나는 일부러 ‘읽고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우의 그림을 보라. 다우의 안나는 성서를 읽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렘브란트의 안나의 특징을 살피기 위해서 안나의 손을 보았듯이 다우의 안나의 손을 보자. 다우가 그린 안나의 손은 성서를 읽고 이해하는 손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이다. 기도하는 손에 들린 성서는 읽고 이해하는 성서가 아니라 낭송되는 성서이다. 낭송하기 위해 기도하듯 모은 손은 성서의 뜻을 해명하는 데에 관심이 있지 않다. 성서 본문을 낭송함은 이해와는 다른 차원에 속한 종교적 행위이다. (김학철 지음) |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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