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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요한

[스크랩] 십자가의 성 요한의 ‘통나무가 불속에서 타는’ 비유

 

 

 

       

         십자가의 성 요한의

                             ‘통나무가 불속에서 타는’ 비유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고통스러운 자아인식은 늘 병행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통나무가 불 속에서 타는 유명한 비유로써 표현하고 있다.

나무가 타면 시커멓게 되어 우지직 소리를 내며 터지고 연기가 난다.

 

그리고 옹이와 흠집이 드러난다. 만약 그 통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불타고 싶어 하던 나의 소망은 실수였어! 나는 처음보다 더 나빠졌어.

시커멓고, 추하고, 흠투성이가 되었어. 옛날의 내 모습이 더 나았어”

라고 소리칠 것이다.

 

통나무는 영혼이고 불은 하느님이다. 사실 통나무 자체가 전보다 더 나빠진

것은 없다. 모든 추한 모습과 흠집은 숨겨져 있던 현실이었다. 통나무가

불타오를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통나무인 그대로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나타내 보이는 것뿐이다.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외모와는 반대로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참된

성숙의 표시이다. 그래서 참으로 진보하고 있는 훌륭한 영혼들은 가끔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퇴보하고 있다고 느낀다.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영혼의 밤이니 영혼의 사막 체험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의

‘통나무가 타는 비유’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통나무가 타기 시작하면(하느님의

사랑의 불길), 연기가 나고 눈물이 나서 앞이 보이질 않고 캄캄한 밤이 되어

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형체가 시커멓게 그을려 자신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무지의 구름’을 헤매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추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볼품없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의 시기입니다.

이러한 어둔 밤과 고뇌의 사막과 같이 영혼이 메마른 시기는 바로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성숙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넘어져서 오히려 퇴보한다는 것입니다.

좌절의 단계를 이겨내면 하느님의 사랑의 타오르기 시작하여 통나무는

없어지고 하느님의 사랑의 불꽃만이 피어나는 최종 단계인 온전한 일치의

단계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너무 부정적인 내적 성찰은 오히려 해가 되고 너무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마침내 소심증을 부채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관상기도 생활의 큰 위험은 기도를 자기 분석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장미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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