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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요한

[스크랩]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가르멜 수도원 창립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가르멜 수도원 창립


▣ 아빌라의 『영화로운 성 요셉 수도원』(1562년 8월 24일 창립)

 성녀가 계시던 강생 수녀원은 많은 인원의 수녀들이 완화된 회칙을 따르며 비교적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은인들의 요청에 따라 바깥출입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기에 성녀는 온갖 피조물을 떠나 세상을 완전히 멀리하여 관상생활을 쉽게 할 수 있게끔 작은 곳에 살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되었다. 성녀가 기도 중 지옥에 대한 환시를 경험한 뒤, 많은 영혼들, 특히 루터파 사람들의 멸망에 대해 큰 고통을 느끼고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열렬한 소망과 구원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힘자라는 데까지 온갖 것을 하려는 열망을 품게 되었고 생각 끝에 회칙을 깔축없이 지키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수도생활의 소명을 다 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님께서는 성 요셉께 봉헌되기를 원하시는 수도원 설립에 대한 약속을 하셨기에  성녀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기오마르 부인과 함께 엄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창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시가에 알려지자 큰 박해가 일어났으며 갖은 욕과 비웃음이 퍼부어졌으며 관구장은 창립허가를 취소하였다. 도미니코회의 이바네즈 신부의 권유로 기오마르 부인이 자기 이름으로 가르멜회의 원시회칙을 지킬 수도원 창립허가를 극비리에 로마에 청원하여 아빌라 주교의 관할 아래 개혁 가르멜을 창립하라는 허가서를 받았고 알칸타라의 베드로 수사의 도움으로 연금 없는 수도원 창립 허가를 주교로부터 받았다.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시키기로 결정하고  동생 라우렌시오가 준 기부금으로 여동생 요한나 부부 명의로 집을 사고 수리를 하여 수도원 창립을 준비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도원을 가난하게 다스려 나가는 것을 게을리 말 것을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몸소 성녀를 도우시리라고 말씀 하셨다. 

 1562년 8월 24일 성 요셉 수도원은 필요한 온갖 허가와 권리를 갖추고 가스파르 신부가 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에 성체를 모심으로써 창립되었고 그날 4명의 지원자가 착복을 하였다.

 강생 수녀원과 온 시가는 연금 없는 수도원 창립에 분노와 욕설로 뒤끓었으며 창립하던 날 강생수녀원으로 소환된 성녀는 고참 수녀들 앞에서 관구장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으나 변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라는 분부가 내려졌을 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확신과 겸손으로 말씀을 드렸기에 설명을 들은 관구장은 흐뭇해져 시내의 소동이 잠잠해지면 성 요셉 수도원으로 돌아갈 허가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6개월에 걸친 싸움 끝에 소동이 멎고 성녀는 강생 수녀원을 떠날 허가를 받아 네 명의 수녀를 동반하고 성 요셉 수도원으로 돌아가면서 성 빈첸시오 성당에 들러 성모상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이렇게 아우마다의 데레사는 이 세상에서 죽었고 그 잿더미 속에서 예수의 데레사가 태어난 것이다. (천주자비의 글 32-36장)


◁ 성요셉 수도원을 창립하고 성녀 생애의 가장 평화스런 시기를 보내시던 즈음에 성녀는 신대륙에서 돌아 온 프란치스코회의 알론소 말도나도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영혼을 구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던 중 “딸아, 잠깐 기다려라, 그대는 위대한 것을 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신다.

 반 년 후 필립2세의 초청으로 아빌라에 온 가르멜회의 총장인 루베오 신부가 성 요셉수도원을 방문하여 겸손과 고행에 힘쓰는 자매들을 보고 매우 놀라며 만족하여 성녀에게 카스틸랴의 모든 장소에 수도원을 창립할 허가를 주게 되며 원시 회칙을 지키는 남자 수도원을 세우는 것도 허락한다.▷


▣ 메디나 델 캄포의 『성요셉 수도원』(1567년 8월 15일 창립)

 발타사르 알바레스 신부의 도움으로 메디나 델 캄포 시를 두 번째 창립지로 정하고 한 아가씨가 기부한 약간의 비용만 가지고 여섯 명이 아빌라를 떠났다. 메디나의 예수회 신부님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수도원 창립을 위한 교섭을 하였으며, 8월 성모님 축일 전날 한밤중에 메디나에 도착하여 물색해 둔 헐어빠진 황폐한 집의 문간방을 벽으로 막아 성당으로 쓰도록 쓸고 닦고 벽걸이나 종을 달고 못질을 하며 제단을 마련하여 성체를 모시고 1567년 8월 15일 해가 뜨자 첫 미사를 알리는 종을 치고  미사를 봉헌하여 성 요셉 수도원이 창립되었다. 창립을 마친 뒤 무너져가는 수도원을 수리하는 두 달 동안은 은인이 자기의 집 이층을 내놓아 그곳에서 지냈다. 수도원으로 사용하려고 물색한 집이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옆에 있어 그 수사들의 반대가 심했고, 메디나 시내의 권위자들과 그 지방의 수도자들이 모여 사정없이 규탄을 하였으나 성녀는 “악마가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 것을 보니 이 수도원 창립이 주님의 영광이 되기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일단 주께로부터 수도원을  창립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좋은 끝을 맺기까지 다른 사람들의 반대 따위에 구애되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일을 추진하셨다. 수도원으로 쓸 집의 담이 군데군데 헐려져 있어 허술하게 성체를 모시는 것이 걱정이 되어 성녀는 밤에도 자지 않고 달빛 속에서 다락방의 작은 창을 통해 성체를 지켰다. 당시 메디나는 상업도시로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중에는 루터파 사람들도 많아서 그들로 인해 독성행위가 생기지나 않을까 성녀는 불안해하셨다. (창립사 2장, 3장)



▣ 말라곤의 『성 요셉 수도원』 (1568년 4월 11일 창립)

 세르다의 루이사 공작부인이 메디나에 수도원 창립을 제안했을 때 성녀는 말라곤에서는 수녀원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연금을 제안하는 루이사의 청을 거절하였으나 “가난하게 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도 다른 집착과 다를 바 없다”는 도밍고 바네즈 신부의 중재에 양보하여 루이사가 주는 연금과 수녀들의 생활에 적합한 집을 받아들였다.

 4월 11일 수녀원을 창립했지만 시장광장이 너무 가까이 있어 장바닥의 소음으로 침묵과 잠심의 분위기를 이룰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곳의 소녀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동정한 성녀는 재봉이나 살림을 가르칠 예수회식 교육을 받은 여선생을 동반했으므로 마을 주민으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 부인은 가정 선생이지만 실은 ‘종교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치도록 성녀의 부탁을 받았다. 여기서도 성녀는 전교를 기도와 같은 차원에 두고 배려했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창립사 7장, 아빌라의 데레사 전기 3부 3장)


▣ 똘레도의 『영화로우신 성 요셉 수도원』 (1569년 창립)

 예수회의 바오로 헬난데즈 신부가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된 마르틴 라미레즈에게 수도원 창립에 그의 재산을 쓰도록 권유하여 그는 동생 알론소 라미레즈에게 일체를 맡기고 죽었다. 발랴돌리드에서 수도원을 창립하고 있던 성녀는 연락을 받고 똘레도로 가서 알론소와 교섭을 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아 교섭이 중단되었고 교구장과 고문들의 반대로 창립 허가도 받지 못하였다. 성녀가 직접 교구장을 만나 “봉쇄 안에서 고행과 완덕의 생활을 이룩하려고 열망하는 여자들이 고행도 해 보지 못하고 그저 안일한 나날을 보내는 것 밖에 생각지 않는 사내들에게 훼방을 받아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이런 좋은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한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교구장을 감동시켜 창립허가를 받았다. 짚요 두 장과 담요 한 장, 액자 두 개를 사는 데 전 재산 3,4듀캇을 다 쓰고 집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을 때  안드라다라는 가난뱅이 청년이 나타나 마음에 드는 셋집을 구해주었다. 다른 수도회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밤중에 몰래 집에 들어가 밤을 새워 준비를 하고 새벽에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수도원을 창립하였다. 짚요 두 개와 담요 한 장만으로 가난하게 사는 생활을 하면서 빈곤이 감미로운 관상생활의 절대 조건이라는 위안과 기쁨을 체험하였지만 머지않아 알론소 알바레즈와 많은 사람들이 적선을 하여서 성녀는 가난함이 없어진 처지를 슬퍼하였다. 수도원이 창립 된 후 알론소 알바레즈와 교섭이 다시 시작되어 그의 도움으로 똘레도에서 가장 좋은 집 가운데 하나를 사서 큰 성당은 알론소 가문에 주고 수도원에는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게 처리하였다. (창립사 15장)


▣ 살라망카의 『성 요셉 수도원』 (1570년 11월1일)

 살라망카의 예수회 원장 신부의 초대로 대학도시에 수녀원 창립을 위해 1570년 10월 모든 성인의 축일 전날 성녀는 말라곤의 원장 성체의 마리아 수녀를 데리고 짚 한 다발만 들고 살라망카에 도착하였다. 미리 빌려 둔 집은 세 들었던 학생들이 불평을 하면서 집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저녁 늦게야 집을 내주었고 학생들이 불량배처럼 떠들썩하게 시가를 돌아다니고 있어 추위와 피로에 지친 두 수녀는 겁에 질리고 공포에 싸여 떨면서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십자가를 그으며 성수를 뿌렸다. 밤새 집안을 치우는데 애를 먹고 다음날 아침 미사를 드렸는데 성체를 모시지 않고 창립한 첫 번째 수도원이었다. 이 집은 습하고 추운데다가 집안이 너무 넓어 손질이 힘들었으며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1573년 8월에 성녀가 살라망카에 다시 가서 새집을 구하여 수리하고 성 미카엘 축일에 성체를 모셨다. 그러나 그 뒤에도 집 주인과의 마찰로 시련이 계속되었다. (창립사 18-19장)


▣ 알바 데 또르메스의 『성모 영보 수도원』 (1571년 1월 25일 창립)

 알바 공작의 집사인 프란치스코와 그의 부인 데레사가 알바에 수도원을 창립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인구가 적은 곳이라 연금이 필요했으므로 성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고해신부님이신 도미니코회의 바네즈 신부의 충고로 창립을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 부부는 수녀들에게 필요한 연금을 주고 자신의 집을 수도원으로 쓰도록 내주어서 1571년 성 바오로 귀화 축일에 창립이 이루어졌다.

 성녀께서는 이 수도원에서 1582년 10월 4일에 돌아가셨는데 이 수도원은 전쟁 중에도 극진히 존경스러운 대우를 받았다. (창립사 20장)



▣ 베아스의 『구세주의 성 요셉 수도원』 (1575년 창립)

 베아스의 대단히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인 카타리나는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고 싶다는 세찬 소망에 가득 차 수도원에 가고 싶어 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기도와 극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고향에 수도원을 창립하기 위해 허가를 받으려고 수년간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중병에 걸려 8년간 고생을 하였다. 주님의 은총으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뒤 임금님께 탄원서를 제출하여 허가를 받고 1576년 2월 16일 수도원을 창립하고 카타리나와 함께 동생 마리아도 함께 수도복을 입었다.

 카타리나가 20년 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수도회를 찾아서 그 회의 수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꿈에서 가르멜 수사의 인도로 많은 수녀들이 모여 있는 어떤 집으로 갔는데 원장수녀는 “내 딸이여, 나는 그대가 이 집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며 회헌과 회칙을 보여주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예수회의 신부님으로부터 그것이 가르멜산의 동정마리아회의 회칙이라는 말을 듣고 성녀와 연락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 베아스에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하여 가르멜회 수녀가 되었다. (창립사 22장)


▣ 세비야의『영화로우신 성 요셉 수도원』(1575년)

 성녀는 주님으로부터 마드리드에 창립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교황 시찰사 그라시안 신부는 세비야에 수도원을 창립하라는 부탁을 하면서 세비야 대주교가 도와 줄 것이며, 유복한 이 고장에서는 아무런 걱정거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성녀를 안심시켰다. 성녀는 안달루시아의 기후, 풍습, 주민과 반란이 두려웠지만 그라시안 신부에게 순명하여 베아스 수녀원에서 여섯 명의 수녀를 데리고 출발하였다. 타는듯한 태양의 열기와 숨 막히는 더위는 연옥이나 지옥의 고통과 같았으며 더럽고 시끄러운 여인숙에서 벼룩과 고열에 시달리면서 여행을 계속하여 세비야에 도착했다. 대주교는 연금 없는 수도원의 창립을 허락하지 않았고 부유한 세비야 사람들은 전혀 도와주지 않아서 수녀들은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가르멜을 떠난 한 수련자에 의해 이단 심문소에 고발당하기도 하였고 새 창립을 금하고 카스틸랴로 돌아가 한 수녀원을 선택하여 그곳에서 아예 나와선 안 된다는 총회의 명령을 받았다. 성녀는 루베오 총장에게 순명하여 세비야 창립을 단념하고 곧바로 떠날 생각을 했지만 교황대사가 이를 승낙하지 않았고 그라시안 신부도 세비야 창립을 마무리 지으라고 명령했다. 이승의 견디기 어려운 생활을 탄식하며 “주님, 이 삶을 견딜 방법을 주십시오.” 하고 청했을 때 주님께서는 “딸아, 이 생활이 끝나면 이미 지금처럼 나를 섬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먹든 자든 그밖에 무엇을 하든 이미 그대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대 안에 살듯 모든 것을 내게 대한 사랑 때문에 행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듣고는 하느님을 섬기고 싶어서 ‘너무 빨리 죽고 싶지 않다’는 원의를 품게 되었다. 남미에서 동생 라우렌시오가 돌아와 경제적 도움을 줌으로써 가르멜 수녀들은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집을 사기 위한 교섭 중 집 주인과 말썽이 생겨서  라우렌시오가 투옥당할 위험도 생겼고 이웃의 프란치스코회에서 가르멜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멋진 전망과 아름다운 과수원이 있는 집을 사서 성 요셉 수녀원을 축성하였다. 성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몰래 성체를 감실에 모시려고 했는데 대주교의 분부로 성직자와 여러 신심 단체가 성체를 모시는 행렬에 참가하고 대주교가 친히 성체를 감실에 모심으로써 성대한 축제가 되어 온 세비야에 수녀원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창립사 23장, 아빌라의 데레사 전기 4부 1-3장)


▣ 부르고스의 『성 안나의 영화로우신 성 요셉 수도원』 (1582년 4월 창립)

 부르고스에 수도원을 창립을 위한 준비로 유복한 미망인 돌로사의 카타리나가 시 당국의 허락을 받고, 수도생활을 곧 할 수 있는 집을 구하여 격자까지 달고 대주교는 허가를 주겠다는 명백한 약속을 해서 창립에는 문제가 없었다. 성녀는 부르고스의 추위와 자신의 악화된 건강 때문에 빨렌시아의 원장수녀를 대신 파견하려 했을 때 주님께서는 “추위를 꺼리지 말라. 나야말로 참 열(熱)이다. 악마는 이 창립을 막으려고 기를 써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너는 그 실현을 목표로 내 이름을 위해 분발하라. 그리고 반드시 네가 가라. 그러면 유익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라시안 관구장 신부와 8명의 수녀가 부르고스로 가는 여행길은 폭우 속에서 계속되어 일행은 물구덩이 속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성녀의 건강은 아주 나빠서 1월 26일 부르고스에 도착했을 때 한때 의식불명이 되기도 했다.

 변덕이 심한 대주교는 자신이 했던 약속과 다른 말을 하며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으면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교섭하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 그라시안 신부의 노력이 신통한 결과가 없자 성녀는 자신의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직접 대주교를 만나 수도원은 정식으로 사들인 집에서 시작할 것과 자매들의 생활에 충분한 연금을 가질 것의 두 가지 조건 하에서 허가를 받았다. 집을 구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였지만 수도공동체의 기도가 받아들여져 성 요셉 축일에 매매계약이 이루어졌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3개월이나 거절해오던 대주교도 양보를 하여 만소 박사의 주례로 장엄하게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 창립되었다. 이 수도원이 창립되는 데는 카타리나의 수고와 넉넉한 희사가 있었기에 성녀는 카타리나에게 창립자의 칭호를 주신다. “카타리나 데 돌로사는 애당초의 내 생각으로선, 창립자가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고 예측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분의 그 거룩한 생활이 이 은혜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주께서는 카타리나가 창립자의 칭호를 거절할 수 없도록 일을 진행시키셨으니 말입니다.”(창립사 31장)














출처 : 한국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관구 교육참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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