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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 과 비움 /독서

오기환의 《자리 있어요》 그리움을 남기고


그리움을 남기고


그리움의 원천을
생각해 본다. 그리움의 원천은
부재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사람이나
사물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하면서 그리움의 실체와 맞선다.

사람이나 사물은 그리움을
남기면서 떠나고 사라진다.
그리움 전달자다.


- 오기환의 《자리 있어요》 중에서 -


* 모든 것은 떠납니다.
사람도, 사물도, 나조차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일러 '자연'이라 합니다. 떠나고
사라지면서 자연은 순환하는 것입니다.

떠나면서 실루엣처럼 남기는 것이
그리움입니다. 그 실루엣에 따라
그리움의 질감도 달라집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오기환 수필가의 열 번째 수필집 『자리 있어요』는 팔십팔 년 인생을 응축한 기록이다. 저자는 체중이 줄고 시력이 약해져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힘에 부치지만, 여전히 삶을 붙들고 글을 남긴다. 병원에서는 건강하다 하지만 눈앞의 활자가 흐려질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과 무게를 실감한다. 그래서 그는 큰 글자 책을 사 읽으며 독서의 끈을 이어가고, 또 한 편 한 편 수필을 엮으며 삶의 조각들을 보듬는다. 이번 수필집은 저자의 고단한 시선과 끈질긴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결과물이다.

책은 다섯 마당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팔랑개비 마을”처럼 자연과 사람의 일상 속 소박한 풍경을 통해 삶의 뿌리를 성찰하고, 2부에서는 “누군가가 일으켜 준다면”처럼 타인의 손길과 나눔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어지는 3부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제목처럼 사랑과 희망의 본질을 짚고, 4부는 “이태원역 1번 출구”라는 시대적 상처를 응시하며 사회적 기억과 연대를 담아낸다. 마지막 5부 “자리 잡기”에서는 노년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자신만의 자리와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자리 있어요』는 한 노 수필가가 삶의 뒷자락에서 내놓는 진솔한 기록이자, 동시에 지금을 사는 모두에게 건네는 자리의 초대장이다. 기차 칸에서 다음 좌석을 찾아 옮겨가듯, 인생도 또 다른 칸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임을 저자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동갑내기 아내의 손을 잡고 걷겠다는 고백처럼, 이 책은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글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자리, 아직 남아 있나요?” 이 물음 앞에서 독자는 자신만의 자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작가정보

저자(글) 오기환

 
근래 체중이 많이 줄고 시력도 나빠졌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여간힘 드는 게 아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도 건강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면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면 두고 보자며 말끝을 흐린다. 자구책으로 보양에 힘쓰며 노인이나 시력이 좋지 않은 이들이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큰 글자 책을 사서 읽고 있다.
기차나 전철은 여러 칸을 달고 달린다. 이 칸에 자리가 없으면 다음 칸으로 옮긴다. 거기도 자리가 없으면 또 다음 칸으로. 인생도 다음 칸이 있겠지만,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샤프심이 다 달아갈 때쯤 머리를 누르면 딸칵하며 심 한 칸이 밖으로 나온다. 그 심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자신의 앞날이 몇 칸이 남아있는지 어쩌면 다음 칸이 없을지도 모르는 채 가고 있다.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는다. 어찌어찌하다가 예까지 와있다. 올해 초에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다. 수필집을 내기로 했다. 저 시력으로 끙끙 대면서 이 책에 팔십팔 년을 담는 마음으로, 표지도 양장으로 멋을 부렸다. 그리고 수필집을 들고 볕 좋은 가을날에 내가 나를 위한 격려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동갑내기인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그리고 책 한 권 들고 다음을 향하여 걷고 또 걸을 작정이다.
저서로는 《자리 있어요》 외 9권이 있다.

목차

  • 004 수필가의 말

    1부 목숨 걸만큼 소중한 존재
    014 팔랑개비 마을
    018 말이 권력인 시대
    022 오를 수 없는 나무
    025 잘 우는 남자
    029 단벌 신사
    033 추어탕 집 소묘
    035 소년과 종 그리고 촛대
    038 본능
    041 목숨 걸만큼 소중한 존재
    043 자리 있어요

    2부 누군가가 일으켜 준다면
    050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
    053 예술이 되는 삶
    057 침묵하고 싶은 계절
    060 스무 살 띠지
    064 진작 사줄걸
    068 누군가가 일으켜 준다면
    072 바람이 머무는 자리
    076 제막식
    078 걱정하지 말아요, 어머니
    082 청춘의 향기

    3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088 로봇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
    092 그 숲에 가면
    096 철새만 사는 섬, 유부도
    102 따로 또 같이하는 여행
    108 그날의 풍경
    112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18 다반사(茶飯事)
    121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127 아! 나에게도
    132 참외장아찌

    4부 이태원역 1번 출구
    138 이태원역 1번 출구
    142 이태원역 10·29 골목
    147 159명 그리고 365일
    152 벙거지
    154 순수라는 말
    156 어둠이 사라지는 시대
    160 그리움 전달자
    164 조기찌개
    168 책거리
    172 시력

    5부 자리 잡기
    176 눈뜬장님
    180 내 안의 여과기(濾過器)
    184 일상의 틈 사이로
    188 누룽지
    191 연신내
    195 울어버릴 것만 같다
    198 장조카
    201 축구행정가의 길
    204 우리 집 식구(食口)
    208 자리 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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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서해안에 있는 섬을 검색했다. ‘철새만 사는 섬, 유부도’라는 문자가 뜬다. 자세히 봤다. 주민 30여 명이 잠시 쉬어가는 철새와 함께 동죽과 바지락을 캐며 사는 섬이라는 말에 마음이 끌린다. 그곳에 가려면 정기여 객선 대신 어선을 뒷거래해서 타고 가야 한다는 말에 더욱 솔깃해진다. 김 선장 전화번호가 뜬다. 걸었다. 노인들이 조개 캐는 섬이 여유. 여관도 식당도 가게도 없어유.
새를 보러 오시나유? 자기 집에서 먹고 잘 수 있다면서 볼 것이라곤 억새와 철새뿐이라며 후회하지 말라는 말에 힘을 준다.
짐을 꾸렸다. 지난해 말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둘째 아들 생각이 난다. 문자를 보냈다. 동참하겠단다. 고맙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해안 길을 달린다. 단둘이 떠나는 것은 부자로 인연을 맺은 뒤 처음이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움이 가실 때쯤 군산항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 찻집에 들렀다. 아들은 세월호 사건 이후부터 배가 가라앉는 모습이 떠올라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의 충격이 컸던 것 같다. 결 고운 심성이 느껴진다. 나는 섬에서 아들은 육지에서 따로 보내고 다음 날 같이하기로 했다. 카드를 주었다. 질색한다, 차탁에 놓고 일어났다.
김 선장의 작은 어선에 올랐다. 늙수그레한 여인이 앉아 있다. 아내라고 한다. 며칠 전 감기가 심해져서 군산병원에 갔다가 딸네 집에 다녀온다고 한다. 딸은 군산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아들은 목포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한다고 한다. 조개 캐서 아들딸 기르고 가르쳐서 지금은 걱정 없다면서 검게 그은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얼굴에 주름이 파이도록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애 많이 쓰셨다. 다 왔다면서 속력을 줄인다. 큰 섬 같으면 다리를 놓고 육지 못지않게 개발했을 텐데 어선을 뒷거래로 타고 가야 하는 외면 받는 섬, 유부도에 내렸다.
섬을 둘러본다. 2월인데도 뺌에 스치는 바람이 보드랍다. 겨우내 봄 맞을 준비를 했나 보다. 길이 움푹 파여 있고 응달에는 잔설이 남아있다. 그림 같은 풍경이 끊겼다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다. 아차 하면 발목을 접질릴 것 같아 조심조심 걷는다.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김 선장이 말한 그 억새 같다. 물보라 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지척인 듯싶다. 나무도 억새도 풀도 생긴 그대로 산다. 유부도는 거친 섬이다. 다듬고 고치는 것에 익숙한 도시 사람들에게는 거칠고 황량한 풍경이 낯설다.


주인 할머니가 선물로 싸준 동죽과 백합이든 봉지를 들고 배를 탔다. 방파제 쪽으로 간다. 새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 같다. 마지막 선물이다. 고맙다. 방파제 근처에서 엔진을 끈다. 쌍안경 너머로 보았던 검정 머리 물떼새가 눈앞에 있다. 방파제 가득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순식간에 지척에서 벌어지는 장관이다. 어선은 푸른 하늘에 검은 점을 찍으며 어지러이 나르는 바다를 지나 군산항 끝머리 방파제로 접근한다.
손을 흔든다. 나도 흔든다. 손 흔드는 사람을 알아볼 정도로 육지와 가까워졌다. 둘째 아들이 마중 나왔다. 뱃머리에서 방파제 위로 기어오르는데 내 손을 잡아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쳐다봤다. 아들 손이다. 꽉 잡았다.

_본문 ‘철새만 사는 섬, 유부도’ 중에서
 

출판사 서평

바람이 머무는 자리, 삶이 앉을 자리

『자리 있어요』는 노년의 일상을 “자리”라는 감각적 은유로 묶어내는 수필집이다. 기차 칸을 옮겨 다니며 빈자리를 찾듯, 저자는 삶의 다음 칸을 더듬어 간다. 샤프심이 ‘딸칵’ 빠져나오는 작은 소리까지 삶의 남은 칸수와 겹쳐 읽으며, 줄어드는 시력과 가벼워진 체중이라는 신체 감각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고백은 쇠락의 서술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는 방법론으로 전환된다. 큰 글자 책을 들춰 읽고, 멀리 떠나는 대신 “밖에서 안으로 걷는 여행”을 택하는 태도는, 노년의 축소가 아니라 시야의 심화를 이끄는 윤리로 자리 잡는다. 제목의 “자리”는 앉을 좌석이자 살아낼 자리, 그리고 타인에게 내어 줄 배려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 수필집의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팔랑개비 마을’과 ‘침묵하고 싶은 계절’에서 도드라진다. 두더지를 막기 위한 소박한 팔랑개비는 바람과 흙, 지렁이와 작물의 연쇄를 감지하는 생활의 장치가 된다. 오염된 흙에 지렁이가 돌아오고, 지렁이를 좇아 두더지가 오고, 그 두더지를 쫓는 팔랑개비가 선다. 이 작은 생태의 고리는 “먹는 풀과 먹지 못하는 풀”을 가르는 분별과 동시에, 인간의 삶이 자연의 호흡 위에 얹혀 있음을 일깨우는 사유로 이어진다. ‘침묵하고 싶은 계절’에서 저자는 문을 활짝 연 찻집과 담쟁이, 바람, 먼지 얹힌 책장을 천천히 훑으며, “시력”과 “세상을 보는 눈”을 구분한다. 눈앞의 해상도가 흐려질수록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려는 의지가, 읽기와 걷기, 그리고 사유라는 여과기를 통해 맑게 여과된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과 ‘이태원역 1번 출구’는 이 책이 사적 회고를 넘어 시대의 기억과 윤리를 호흡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손주의 손을 잡고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장면은 미술관의 그림이 생활의 온도와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고흐의 두 그림-울고 싶은 이와 우는 ‘별이 빛나는 밤’, 미소 지을 수 있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대비시키는 독해는, 예술을 슬픔과 평온의 문지방에서 읽는 한 노작가의 품위를 드러낸다. 반면 ‘이태원역 1번 출구’는 추모 쪽지의 문장들을 가만히 받아 적는 기록으로, 사소한 관찰이 공동체적 애도의 윤리를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평가보다 경청을, 발화보다 침묵을 길게 택함으로써, 개인의 기행문을 사회의 애도록으로 격상시킨다.

마지막으로 ‘울어버릴 것만 같다’는 기후 변동의 체감과 자두의 기억을 포개어, 사적 정조가 어떻게 시대 감각으로 번지는지를 증명한다. 여름의 무더위, 돌변하는 스콜, 폭설의 원인을 더듬는 설명 곁에, 젊은 날 연인의 손길과 기차 안 자두의 맛이 겹쳐 놓인다. 이처럼 『자리 있어요』는 노년의 감각, 생태의 미세한 떨림, 예술과 역사, 기후와 사랑을 느슨하지만 단단한 문장으로 엮는다. 미수의 작가가 “다음을 향하여 걷고 또 걷”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삶의 남은 칸수를 헤아리는 대신 오늘의 자리를 가만히 내어주는 마음을 배운다. 그 배움이야말로 이 수필집이 독자에게 약속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수필집에 실린 수필 몇 편을 분성해 본다.

작품1: 팔랑개비 마을

이 수필은 태기산의 풍경과 농막의 삶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지렁이가 돌아온 땅, 그로 인해 생겨난 두더지, 그리고 두더지를 쫓는 팔랑개비의 연쇄는 생태적 균형의 역동성을 담고 있다. 단순한 생활 도구였던 팔랑개비는 바람의 리듬을 타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부딪히고 타협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변한다.
작품 속 농막과 텃밭은 단순한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땅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윤리적 태도를 보여주는 장치다. ‘먹는 풀과 먹지 못하는 풀’의 구분은 자연 자체가 품은 포용성에 대한 대비를 부각시키며, 인간만이 취사선택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 대목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부모님의 산소에 팔랑개비를 세우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은, 개인적 기억과 생태적 실천이 맞닿는 순간을 보여준다. 팔랑개비는 두더지를 막는 도구를 넘어, 돌아가신 부모님과 다시 소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자연과의 화해를 염원하는 상징으로 확장된다. 자연, 기억, 그리고 일상의 장치가 서로 얽히며 깊은 울림을 준다.

작품2: 침묵하고 싶은 계절

이 글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미묘한 변화와 그에 어울린 내적 정서를 표현한다. 열려 있는 찻집의 풍경과 풀 내음, 담쟁이와 장미의 모습은 자연의 생명력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겸손한 계절’이라는 표현을 통해, 화려하지 않지만 내면을 깊게 성찰하게 만드는 계절의 의미를 짚는다.
중반부에서는 독서와 사유의 행위가 강조된다. 흐려져 가는 시력과는 달리,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밝게 유지해야 한다는 다짐은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생각이라는 여과기’라는 비유는 단순한 독서가 아닌, 사유와 내면화를 통해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지적·영적 태도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으며 과거의 정을 떠올리는 장면과, 걷기와 글쓰기의 자유로움은 이 계절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외부로 분출하기보다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 즉 ‘침묵하고 싶은 계절’은 단순히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성숙과도 맞닿아 있다. 글 전체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잔잔한 묵상이다.

작품3: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이 작품은 고흐의 그림과 손자와의 여행을 매개로 예술과 삶의 관계를 탐구한다. 저자는 ‘별이 빛나는 밤’과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비교하며, 전자가 슬픔의 공명을 담았다면 후자는 평온 속의 미소를 전한다고 해석한다. 이는 고흐의 삶의 궤적뿐만 아니라, 독자가 그림을 대하는 태도 역시 시기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행의 서술 속에는 가족적 정서가 깊이 배어 있다. 손자의 졸업을 맞이해 함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은 단순한 예술 기행이 아니라, 세대 간 기억을 공유하고 삶을 사유하는 과정이 된다. 특히 무덤 앞에서 합장하는 장면은, 고독한 화가의 생애와 한 가족의 애틋한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선명히 보여준다.
작품 후반부는 고흐의 불운한 생애와 당대 다른 화가들의 성공을 대비시키며, ‘죽어서 성공한 화가’라는 역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저자는 론강 앞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던 고흐의 한순간의 평온을 읽어낸다. 이는 예술을 단순한 작품 감상이 아니라, 삶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사유하는 길로 제시한다.

작품4: 이태원역 1번 출구

이 수필은 2022년 이태원 참사를 현장에서 체감한 추모의 풍경을 기록한다. 계단 벽에 붙은 쪽지, 꽃다발과 제물, 눈물 흘리는 시민들의 모습은 집단적 애도의 현장을 생생히 재현한다. 이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슬픔을 공유하는 사회적 의식의 장으로서 공간을 새롭게 의미화한다.
작품은 또한 제도적 무책임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담아낸다. 경찰과 시민들 사이의 대화, 언론의 사설 인용은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사회적 실패였음을 강조한다. 그 속에서 저자는 개인적 체험을 넘어 시대적 증언자의 위치에 선다.
마지막에 허난설헌의 ‘곡자’ 시를 소환하는 대목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보편적 슬픔을 환기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과 수백 명의 억울한 희생이 겹쳐지며, 이태원역 1번 출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와 애도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글은 애도의 기록을 넘어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문학적 증언으로 읽힌다.

작품5: 울어버릴 것만 같다

이 작품은 기후 변화와 개인적 기억을 교차시켜 서술한다. 폭염과 스콜, 폭설 같은 기상이변은 시대적 불안을 드러내고, 그 가운데 자두가 익어가는 계절은 개인적 회상의 촉매제가 된다. 현실의 위기와 과거의 기억이 한 편의 글 속에서 겹쳐지는 구성이 인상적이다.
자두를 둘러싼 회상은 단순한 과일 이야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 연인과의 추억, 여름밤 기차에서의 감각적 기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저자의 정서적 뿌리가 된다. 과일의 맛과 손길의 감촉이 연결되며, 사라져가는 자연과 잊히지 않는 그리움이 교차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지금도 울어버릴 것만 같다”라는 고백은 단순한 향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과 자연, 그리고 시간의 무상함이 불러오는 깊은 감정의 파동이다. 이 글은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통해 보편적 정서를 일깨우며, 자연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결국 『자리 있어요』의 다섯 수필은 노년의 체감(시력·체력의 쇠약)에서 출발해 자연·예술·도시의 현장을 통과하며 “어디에, 어떻게 앉을 것인가”라는 윤리로 수렴한다. 팔랑개비가 흙과 바람의 리듬을 읽는 생활의 지혜라면, ‘침묵하고 싶은 계절’의 독서와 걷기는 시야가 흐려질수록 마음의 해상도를 높이려는 실천이다. 고흐 앞에서의 미소와 이태원역에서의 침묵은 각각 심미와 애도의 두 문지방을 보여주며, ‘자두의 여름’은 사적인 기억이 시대적 기후감각과 겹쳐지는 방식을 증명한다. 이 글들은 화려한 서사의 장식 대신 낮은 자리에서의 경청과 분별, 그리고 다정한 반복(읽기·걷기·기억하기)으로 오늘을 붙드는 문장들이다.

그래서 이 수필집이 제안하는 ‘자리’란 빈 좌석의 발견이 아니라, 타자와 자연에게 내어주는 마음의 공간이다. 다음 칸이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삶이라도 우리는 팔랑개비처럼 바람에 응답하고, 편지처럼 오래 남는 언어를 고르고, 론강의 밤처럼 조용히 미소 지으며, 10·29의 골목처럼 끝내 잊지 않음으로써 제 몫의 자리를 만든다. 독자는 이 책을 덮는 순간, 남은 칸수를 헤아리기보다 지금 여기의 자리를 단정히 펴고 앉는 법-작게 살피고 깊게 듣고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운다. 그 배움이 곧 ‘오늘을 사는 품위’라는 이름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