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령기도회 봉사

♡2621회 하느님보다 지옥에 떨어진 내 친족이 더 좋으면 자신도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2621회 하느님보다 지옥에 떨어진 내 친족이 더 좋으면 자신도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1일<신명기 2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행복을 주는 기쁨》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 열렬한 신앙이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희망에 있다. (마태오 24장 42절부터 43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뜷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것이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준비한 ‘기름’ 은 ‘성령’ 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얻는 방식은 ‘기도’ 입니다. 기도는 꾸준해야 합니다. 사막 달리기 대회에서 가끔 탈수로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규칙적으로 물을 마셔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려고 하면 늦습니다. 아플 때 치료하려고 하면 늦는 것과 같다. 연료가 다 떨어져 도로에 섰을 때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름을 넣으려고 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의 오늘 행동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바로 기름이 떨어진 동료들에게 자신의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행동입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라도 좀 나누어주어 다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면 좋은 일 아닐까요?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는 동료들에게 현명한 처녀들은 이렇게 모질게 말합니다.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현명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주어도 기름이 모자라게 될 것이란 확신은 없다. 다만 추측으로 그럴 것 같아서 주지 않는 것.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의 자세일까요?

어떤 유명한 스님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랬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자기는 천국에서 잘 살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모른 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라면 지옥으로 가서라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불교에는 ‘지장보살’ 이 있다. 그는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입니다. 그 스님은 이런 것이 사랑이지 지옥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내버려 두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불교에서는 모기도 조상으로 봅니다. 그러면 모기를 구제하기 위해 모기떼 가운데 가서 뜯기고 있을 스님이 있습니까? 혹은 뱀이 득실대는 곳에서 교화하려는 스님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할 것. 왜냐하면, 모기가 회개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모기보다 더 그 본성이 모기다워진 지옥의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명한 처녀들이 등잔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잘한 일입니다. 자칫 자신의 등잔이 꺼지면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가 되면 나누어주고, 어느 정도가 되면 상대가 지옥에 가더라도 나누어주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상에서 유다를 가차 없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거기까지가 그분이 기름을 나누어주실 수 있는 한계였다. 우리는 이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수영도 못 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러다 결국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영화 ‘그랑 블루’(1988)는 프리다이빙을 하는 엔조와 자크, 그리고 돌고래와 바다, 또 자크를 사랑한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엔조와 자크는 친구 사이지만 또한 누가 산소통 없이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경쟁 관계기도 합니다. 자크는 특별한 폐를 가지고 있고 특별히 돌고래와의 소통이 마치 가족과 같다. 이 와중에 자크를 사랑하게 된 조안나가 등장합니다. 조안나는 자크를 사랑하지만, 자크는 자신보다 바다와 돌고래를 더 좋아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다와 돌고래와 함께 하는 시간의 1/10 정도만 자신과 함께 하는 자크를 몇 번이고 떠나고 싶지만, 임신까지 합니다. 엔조와 자크의 경쟁에서 엔조는 경쟁심을 못 이기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자크도 무언가 찾기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조안나는 자신에게 아기가 있다고 말립니다. 하지만 자크는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크는 밤 속 깊고 어두운 곳에서 돌고래의 인도를 따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립니다. 이야기는 엔조와 자크가 무언가 고향을 찾은 느낌을 주지만 혼자 남겨지는 엔조의 어머니와 임신한 자크의 애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크는 물속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물에 들어가면 항상 나와야 하는 더 큰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자신의 아기를 가진 자신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사랑보다 물속의 돌고래가 더 좋다면 그 물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 하느님보다 지옥에 떨어진 내 친족이 더 좋으면 자신도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이것 때문에 현명한 처녀들은 남은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 무엇이 우선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대죄를 짓지 않을 정도의 기도시간을 찾아냈다. 세 시간 정도는 기도해야 알고 짓는 죄를 간신히 면할 수 있다. 이것이 최소 기도 시간이고 이것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빼앗기지 않을 것.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더 많은 영혼에 도움을 줄 힘이 된다는 것도 압니다. 내가 어느 정도의 기름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 알려면 기도를 통해 죄를 이겨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최소량의 기름의 양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절대 나누어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게 될 것. 현명한 처녀는 규칙적인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그 기도시간도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기도]

가끔은 돈 자랑하는 부자들이 부럽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행복한 때를 맞이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자연계에는 공짜라는 것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목적을 가장 빨리 달성시켜 주는 길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22회 구원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2일<여호수아기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모든 사람이 용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남의 용기를 자신 속에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결국 배반이 생기는 것이다.''

《남을 기쁘게 해주는 삶》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 주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십시요. 햇빛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줍니다.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사랑을 받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면 먼저 찌푸린 얼굴을 거두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건강법입니다. 값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중에서>

루카복음에 있는 ‘미나의 비유’ 는, 비유 자체는 마태오복음에 있는 ‘탈렌트의 비유’(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30절)와 같은 비유인데, ‘탈렌트의 비유’ 에는 없는 이야기가 비유 앞뒤에 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복음 19장 12절)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복음 19장 14절)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 ."(루카복음 19장 15절)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루카복음 19장 27절)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 2장 22절에 나오는 '아르켈라오스' 의 실제 이야기에서 빌려온 것. 이스라엘 전역을 통치하던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경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왕위를 계승하려고 로마 황제를 찾아갔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왕이나 영주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르켈라오스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고 민간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했다. 로마 황제는 절충안으로 아르켈라오스를 헤로데 대왕의 왕국의 절반인 유다와 사마리아만 다스리는 지방 영주로 책봉했다. 아르켈라오스는 로마에서 귀국한 다음에 자기를 반대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잘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을 소재로 하여 당신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셨다. 비유에서 ‘어떤 귀족’ 은 예수님입니다.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간 그 귀족이 떠나 있는 기간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 입니다. 그 귀족을 미워해서 사절을 보내어 그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백성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칭 메시아들도 많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다른 메시아를 믿는 이단 종파들도 많은데, 메시아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사도들이 이어받아서 선포한 그 복음 하나뿐입니다.(갈라디아서 1장 7절) 하느님만 믿고 예수님을 안 믿는 종파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안 믿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귀족이 왕권을 받고 돌아오는 일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왕권을 받고 돌아온 그가 반대자들을 처형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의 심판을(최후의 심판을) 뜻합니다. 비유의 표현만 보면 정치보복처럼 보이는데, 최후의 심판은 보복이 아닙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왕권을 받고 돌아온 귀족의 비유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말씀하신 비유이고, ‘미나의 비유’ 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복음 19장 13절)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복음 19장 15절부터 17절) 한 미나는 육십 데나리온이고, 한 탈렌트는 삼천육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따라서 탈렌트는 거액의 돈인데, 미나는 그렇게 큰돈은 아닙니다. 비유에는 ‘종 열 사람’ 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모든 종들’ 입니다. 심판은 어떤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고,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미나’ 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뜻하고, 미나로 벌이를 하는 것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속해 있는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시간 동안에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활용해서, ‘은총의 열매’ 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비유에서는, 주인은 종들이 한 일의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뜻으로는 ‘과정의 성실함’ 이 강조되어 있는 비유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업적을 남기는 등의 결과보다도 “‘어떻게’ 살았느냐?” 가 더 중요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는 심판이 될 것. 주인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다.” 고 말하면서 첫째 종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 종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 을 즉 ‘대단히 큰 상’ 을 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아주 작은 일’ 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대단히 큰 상’ 입니다. 이것은 양쪽을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지, 실제로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아주 작은 일’ 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상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의 신앙생활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비유에서는 종들이 한 일의 결과에 따라서 ‘열 고을’ 과 ‘다섯 고을’ 로 종들이 받게 되는 상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 표현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는 어떤 차이나 차별이 없고, 모두가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 은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 그런 권한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세 번째 종의 변명은(루카복음 19장 20절부터 21절) ‘탈렌트의 비유’ 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의 변명과 같다.(마태복음 25장 24절부터 25절) 세 번째 종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기 싫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무섭고, 그래서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는 마음으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죄 짓는 일은 하지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믿음과 사랑과 회개를 실천한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의 기도]

이제 기도로 빚을 갚은 우리들의 손에 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힘을 써서 화해하시고, 우리들의 인생 순례 길에 수많은 보람을 선물로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대화는 사상의 배출구일 뿐 아니라 성품의 출구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23회 “늘 깨어 기도하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3일<판관기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내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어떤 면에서 나보다 더 낫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에게서 배운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하느님 나라는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다.’ 는 뜻은 아닐 것.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엿볼 수 있다. 아기의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는 어머니의 다정한 눈길에서, 정답게 인사하는 이웃의 웃음에서, 돌 틈에 핀 풀 한 포기에서, 차선을 양보하는 차량에서, 순박한 농부의 정직한 땀방울에서, 덤을 얹어주는 상인의 넉넉한 손끝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위장 취업한 신부님의 미담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부드러운 입맞춤에서, 두 손을 모은 고사리 같은 기도손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일상 안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전부 볼 수 있거나 지속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아직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는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다. 마르틴 부버는 온 존재를 기울여 내면의 자기에게 다가갈 때, 또 심혈을 다하여 만나는 모든 관계 안에서 ‘영원한 분의 옷자락’ 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누구도 그분을 직접 볼 수는 없기에 그분의 ‘옷자락’ 이라고 표현한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진솔하게 만나는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 또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 부버는 영원한 분의 자취를 보게 되는 그러한 찰나를 일컬어 ‘영원이 묻어나는 순간’ 이라 했다. 한편 그렇게 체험된 하느님 나라는 번개처럼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고 마는데, 부버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한계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안에 영원히 머물 수 없고, 어떤 순간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것을 일컬어 그는  ‘숭고한 우수’ 라 했다. 그렇다면 우수가 서린 인간의 운명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바꾸어 주실 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영원히 그분과 함께 머물 수 있는복된 날이 바로 ‘종말’ 이다. 하느님 나라가 통째로 도래한다는 종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종말, 그 종말을 가져다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래서 그날이 희망의 날, 기다려야 할 날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복음 21장 34절)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 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서 7장 15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복음 21장 36절)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몸은 예수님 앞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서 8장 5절).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 “늘 깨어 기도하라” 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복음 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장 8절부터 9절)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 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소서 6장 18절). 세상에 너무 푹 빠져 있어도 문제요,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늘은 세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영생을 희망하는 만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의 삶이 어둠이 골짜기라도 주님과 함께하심으로 희망과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감사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다정하고 조용한 말은 힘이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24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4일<판관기 1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영웅이란 보통 사람보다 용기가 더 많은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5분 정도 더 오래 용기를 지속시킬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행복연합군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만약 가족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꼭 성공해야만, 혹은 성공을 위해서만 가야 하는 곳이라면 참 가족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챙기기 위해, 혹은 다른 형제들보다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면 그런 가족은 가족의 참 의미를 잃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거대한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면 그 거대함 속에 약간은 성만찬 식탁의 의미가 묻혀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성당이 너무 크고 화려해서 전통시장처럼 편안한 것이 아니라 백화점처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곳이 되어버렸다. 백화점이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 크고 화려함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들어서 새 옷을 사게 만들고 새 구두를 신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당이 백화점과 같아서 그곳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주눅 들게 된다면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 싶다.

연극 ‘금관의 예수’ 에서 거지는 신자들이 성탄 미사를 마치고 갈 때까지 밖에서 떨고 있어야 했다. 미사를 드리는 이들은 자녀들 대학 걱정, 새로운 사업에 대한 걱정들을 아기 예수님께 쏟아붓고 갔다. 내년에 잘 되게 해 주면 비단 이불과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아기 예수님께 약속하고 떠났다. 거지는 그들 틈에 끼일 수 없었다. 부자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손가락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돌아가고 아기 예수님께 자기 누더기를 벗어 덮어준 사람은 바로 그 거지였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거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는 교회를 말한다면 부자들로서는 역차별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부자들도 부담 없이 올 수는 있지만, 부자인 교회에 가난한 이들이 편안하게 올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지역보다도 부자 동네에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성당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백화점의 모습이 아니라 전통시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로마로 들어오는 돈 수레들을 보며 “‘이제 나는 은도 금도 없소!’ 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토마스도 “맞습니다. ‘자 일어나 가시오!’ 라고 말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라테라노 성전의 최후의 만찬 식탁은 황금 장식품으로 거의 가려져 있다. 우리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될 것. “참으로 화려하다!” 라는 감탄이 나오는 성전이 아니라 ‘내가 꾸미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드는 성전이 되어야 할 것. 거지라도 자기 누더기를 덮어드리고 싶은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과 같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지도 부담 없이 성전으로 나올 수 있다. 이것이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유튜브에 「자신을 끔찍이 학대한 주인을 법정에서 다시 만난 반려견」이란 동영상이 있다. 어느 날 행인이 쓰레기통 안에서 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여행 가방 안에 넣어져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 주인은 동물 학대죄로 7년이나 이어지는 재판을 받고 있었다. 주인은 개가 죽었는지 알고 가방에 넣어 버렸다고 말했지만 실상 학대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재판관은 그럼 마지막으로 개를 만나보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7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개는 멋쩍어하는 주인과는 다르게 바로 달려가 꼬리를 치며 좋아했다. 자신을 가방에 넣어 버릴 때부터 개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주인이 그전에는 개의 그런 반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반응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필요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하셨다. 요한은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한겨울 마구간에서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계셨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세상에서 박해받고 옷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헛간이라도 있다면 좀 쉬고 가시라고 내어드리고 싶고, 수건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분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삶을 사셨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되찾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참 성전의 모범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 모습이어야 함을 깨우쳐주려 하실 것. 우리 자신이나 성당이 온전한 성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을 닮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대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짓는 성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지어진 성전이라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성당이 되려면 가난한 이들보다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십자가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이자,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는 은혜로 누군가에게 엄마의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돌보고 함께 나누는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의복에만 마음이 쏠리는 것은 마음과 인격이 잠든 탓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25회 오늘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5일<롯기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옷을 잘 입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즉, 개들도 옷 잘 입은 것을 존경하여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공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란》

1) 침묵 부부 : 부부 사이에 침묵은 금이 아니라 금이 간다.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으로 그들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대화를 잘 이루지 못하고 발표력도 부족하다.
2) 퉁명 부부 : 부부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퉁명스러움이다. 짜증이 결국 부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자라나는 자녀들도 짜증을 잘 낸다.
3) 돈돈 부부 : 무엇이든 돈과 연결시키는부부는 곤란하다. 결혼 생활의 행복에 있어서돈은 필요조건이지충분조건이 아니다. 자녀들의 모든 문제를돈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자녀들도 부모나 사람들의기준을 돈에 따라 정하고 모든 인생을 돈으로 환산을 하고결국 돈이 없으면 끝장을 내고 만다.  
4) 달달 부부 :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각자의 영역과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꼬치꼬치 캐묻고 달달 볶지 말라.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잔소리 또는 이론가이다.
5) 험담 부부 :  부부 서로 간에도상스런 말을 해선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의 흉을보아서는 더욱 안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남의 흉을 잘 보고 결국참소하는 자가 되어 어떤 그룹에서나 결국은소외(왕따)를 당하게 된다.
6) 외도 부부 : 바람 피우는 것만이 외도는 아니다. 가정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도는 남편이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외로움을 곧잘 느끼고  부모의 사랑 결핍으로 자신감이 결여되고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을 하다가 안 되면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사고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7) 따로 부부 : 상대방에 대해서지나치게 간섭하거나달달 볶는 것도 문제지만 무관심 무간섭의 부부 관계도그에 못지않게 위험하다. 이들 부부는 결국 자녀에게도무관심을 하고자신들의 일만 하기에 자녀들은 고아처럼자라나는 외톨이가 된다.  문제아가 많이 발생을 하게 되고, 결국은 부모의 의견을 무시하고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을 한다.
8) 대화 부부 :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용납하고, 오고가는 대화 속에 자라는 아이는사랑을 알고 사랑을 베풀줄 안다..

산보를 가면서 새를 보기도 하고, 다람쥐를 보기도 합니다. 전선 위로 다니는 다람쥐를 보았다. 조금 위험해 보이지만 다람쥐는 전선 위를 잘 다니고 있다. 차도로 다니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다람쥐가 처음으로 전선 위로 걷는 모험을 했을 것 같다. 다른 다람쥐들도 전선 위를 걷게 되었을 것 같다. 우리의 문명과 문화도 첫 발을 딛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제자들은 기뻤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으로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었다. 

바벨탑은 인간의 욕망과 교만으로 세워진 탑입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과 재물로 쌓으려는 탑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땀으로 세워진 탑입니다. 착취와 폭력으로 쌓으려는 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바벨탑을 무너트리셨다.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탑을 원하시지 않으셨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여전히 욕망의 바벨탑을 세우려고 합니다. 물질과 자본을 이용해서 성공과 명예의 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탑을 높이 세울수록 밑에서부터 탑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는 극심한 가뭄과 긴 장마가 되었다.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코로나19는 어쩌면 지구가 인간에게 보내는 백신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멈추지 않으면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가 쌓아온 바벨탑을 무너트릴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탑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도구였다. 교회는 야곱의 사다리에는 4개의 계단이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독서라고 부릅니다. 가장 아래의 계단에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단한 기둥이 되어서 시련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깊은 샘물이 되어서 영적인 갈증을 풀어줍니다. 말씀은 씨앗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열매를 맺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는 묵상이 있다. 밥을 할 때 ‘뜸’이 들어야 맛이 있다. 한국의 음식은 ‘발효’ 의 과정을 거치면 새로운 맛을 냅니다. 김치, 젓갈, 홍어와 같은 음식이 그렇다. 말씀은 묵상의 과정을 거치면 마음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는 기도가 있다. 운전면허를 따면 어디론가 차를 몰고 가고 싶어집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가슴에서 떠오른 것이 있다. 찬미, 감사, 청원, 나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받아 주십니다. 과부의 헌금을 받아주십니다. 기도는 능력과 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내적인 침묵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네 번째 단계에는 관상이 있다. 처음부터 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분도 있다.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그리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상은 말씀, 묵상, 기도의 단계를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10명 중 2명은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건물의 교회, 엄숙한 전례, 아름답고 화려한 행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교회는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될 수는 없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바벨탑은 결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 수 없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오늘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다. 

[오늘의 기도]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들 마음 안에 담으십시오. 그리고 사흘만 꾹 참고 기다리는 은혜로 기쁘고 행복하고 좋았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가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아름다운 이별은 없습니다.. 다만 아름답게 사랑한 후에는 좋은 추억이 남습니다.. 소중한 추억을 남겨준 사랑에 감사합니다.." <샤론 스톤>


♡2626회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다. 양다리도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6일<사무엘하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온 세계가 맑고 깨끗하게 보이고, 마음이 잡된 사람은 온 세계가 또한 잡되고 더럽게 보인다.''

《미워하지 말고 잊어버려라.》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그러나 언덕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여유롭고 평화롭다. 내게 미움이 다가 왔을때 미움 안으로 몸을 담그지 마십시오. 내게 걱정이 다가왔을때 긴 한숨에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미움과 걱정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속에 빛을 떠올려 보십시오. 미움과 걱정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 언덕에 서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움은 미움으로 갚을 수 없고 걱정은 걱정으로 지울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언덕에 서서 미움과 걱정을 향해 손 흔들 수 있을 것.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죄를 고백하며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많으면 죄가 큽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 더 큰 사랑을 베풀지 못한 죄, 봉사하면서 자만한 잘못,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남을 미워한 죄,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성당에는 열심히 하면서 가족에게 소홀한 잘못, 내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 잘못. 이사야예언자의 표현을 인용하면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야서 64장 7절) 우리는 하느님이 작품입니다. 주 하느님의 작품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리서12장 14절부터 15절).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기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침에는‘저희가 회개할 테니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당신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준비할 것. 기다림이 간절하면 그 기다림의 여정에 따르는 모든 수고는 기쁨일 수밖에 없다. 더 더욱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손님을 모시려 할 때에 청소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부산을 떠는데 예수님을 모시길 원하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있어라”(마르코복음 13장 37절).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 는 것은 영적인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 9절) 찾아 나서시던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탈출기 3장 참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탈출기 13장 22절)으로 이끄시며 물도 주시고(탈출기 15장 22절부터 27절)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야서 49장 15절).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묵시록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묵시록 3장 20절). 라고 기록되어 있다. 깨어있을 때 우리를 위한 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우리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뵐 수 없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국 주님을 만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있으십시오. 깨어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작품으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는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철저히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마음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자만자족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만큼 사랑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겠다. 믿는 이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된 천상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보고 전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를 모른 체하면서 미래 속에서만 산다면 비현실적인 세상에 산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지금 이 순간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동경 없이 현재에만 집착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다. 양다리도 없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조배 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큰 자비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게 해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으로, 깨어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을 기대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기 49장 18절) 

[오늘의 기도]

햇살 가득한 행복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행복한 마음이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에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에게 생선을 한 마리 주면 하루를 걱정 안 해도 되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일주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대교 경전 중에서>

♡2627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겸손은 기쁨과 감사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7일<열왕기상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죽으려 하지 말라. 어깨에 진 짐이야말로 인간의 목표를 달성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짐을 벗어버리는 유일한 길은 목표를 달성시킨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의 씨앗》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사랑을 나눌 줄 알고 베풀줄 아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검소함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 친구간에 사랑, 이웃간에 사랑, 사랑이 없는 곳에는 웃음과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그리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입니다. 이보다 더 듣기좋은 말은 없을테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 수있다면 마음안엔 날마다 행복의 씨앗이 자라게 된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복음 17장 7절부터 10절) 주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비유 속의 주인은 표현만 보면, 인정도 없고 아주 차가운, 나쁜 주인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주기 위한 과장된 표현일 뿐입니다.
1)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2) 신앙생활은 주인을 위해서 종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3) 하느님의 명령(계명)들은 당신을 위해서 정해 놓으신 강제 규정들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당부이고 호소입니다.
4) 우리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느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십니다.
5)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쓸모없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 자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또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사’ 와 ‘겸손’ 입니다. 신앙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겸손’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뭔가 잘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난 체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에페소서 1장 3절부터 8절ㄱ)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은총’ 이고 ‘사랑’ 입니다. ‘계명들’ 도 당연히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은총과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1베드로 1장 3절부터 5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노예로서 주인을 위해서 하는 강제 노동이 아니라, 자녀로서 아버지로부터 상속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하는 ‘나의 일’ 이고, ‘기쁜 일’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상속 재산을 주시는 일은 ‘자비’ 입니다. 우리가 어떤 권한이나 권리로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 와 ‘겸손’ 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가르침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코복음 12장 30절)  ‘되찾은 아들의 비유’ 에 나오는 큰아들처럼(루카복음 15장 29절) ‘사랑 없이’ 억지로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고마워하라고, 또 일에 대한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것.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리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겸손’ 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겸손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하시니까 마지못해서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진정한 겸손도 아니고 낮춤도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를 낮춘다는 의식 없이 자기를 낮춥니다. 만일에 자기가 실천한 겸손을(낮춤을) 기억하고 있거나 의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라는 가르침은,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겉으로만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생색내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마라. 온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드리는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겸손은 기쁨과 감사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은혜를 빌어주고, 그 평화의 은혜로 우리들 자신의 모든 과거의 불안과 아픔을 씻어내고 기쁘게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상식이나 솔직한 처신만큼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28회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8일<열왕기하 1장부터>

캐서린 햅번은 "사랑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저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100여년을 살면서 내가 깨달은 단 한 가지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하는 일 인줄 알았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인 줄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도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니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줄 알았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가슴에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 줄 알았다.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니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쌓아 놓았더니 시들고 힘이 없어 죽어 갔다. 때로는 문을 열어 바람도 주고 때로는 흘려보내 물기도 주고 때로는 자유롭게 놀려도 주고 그래야 한답니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영혼을 앓듯 놓아주고 죽을 만큼 아파도 해봐야 한답니다. 모아둔 만큼 퍼내야 하고 쌓아둔 만큼 내주어야 하고 아플만큼 아파야 한다는걸 수 없이 이별 연습을 하고 난 후에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해같이 빛나며, 별처럼 반짝이며 달처럼 온유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며 슬퍼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 모두도 성전인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면 예루살렘처럼 멸망하고 말 것. 예수님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다” 라고 호되게 야단치십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지 못하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자연인으로 소개된 인물 중에 ‘씨돌’ 씨가 있다. 본명은 김용현이고 세례명은 요한입니다. 그는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SOS 어린이 마을’ 에서 자랐다. 미혼으로 사는 여성이 고아 아이를 맡아 기르는 시스템인데 1호 엄마의 1호 아들이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와 같은 TV를 통해서입니다.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다시 SBS 스페셜 제작팀에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방영하여 그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앞에서 언제나 자리를 지켰던 인물입니다. 고문으로 허리를 다쳐 평생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였다. 군대에서 기합을 받다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정연관 상병의 누명을 벗겨준 장본인도 김용현입니다. 17년 만에 정 상병이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참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밝혀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구조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려고 할 때 사라졌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를 ‘의인’ 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출혈로 병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아왔느냐고 묻는 말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왼손으로 이렇게 씁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그에게 인간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 분은 당연히 그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을 것. 그러나 그는 왜 사제들과 종교와 단절하고 산에서 살았을까요? 최근에 종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다고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니야. 측은지심이 필요해. 신천지는 개천지. 종교가 기생충. 종교가 다 거짓말해.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도둑놈들.” 한 인간으로서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이분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이분을 끝까지 품어주지 못했던 우리도 반성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다. 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요한이란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책임도 크겠습니다. ‘기도의 집’ 이 왜 ‘도둑의 소굴’ 이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가르침’ 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후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즉, 날마다 진리의 가르침이 지속하지 않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 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고,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멈추면 그 자리에 세속적 욕심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주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 에서는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제보를 받은 제작팀은 4차선 도로 밑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산에서 약초나 떨어진 이삭 등을 주워서 끼니를 때우며 사는 한 사람을 취재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와 동생과 누나를 부양하겠다며 돈을 벌러 집을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벌어도 모이지 않았다. 일단 나왔으니 성공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34년을 길거리에서 살게 된 것. 제작진은 누나를 찾아갔다. 동생을 만나고 싶냐고 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니 동생도 누나를 만날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34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누나는 왜 살아있었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며, 그 세월을 허비한 게 아깝지 않으냐며 오열하였다. 동생도 눈물을 흘립니다. 만약 제작팀이 그분의 가족을 찾아서 그 가족의 마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이 프로그램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을 것.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일 것. 그러나 가족의 마음을 알려주어 동생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렇게 34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게 했다. 그러니 기도의 집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과 항상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나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 받은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이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게 될 것.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란 말을 다시 듣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받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겠다. 하느님을 만나 전할 말씀을 받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이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기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흐르고 있음을 감사하며 행복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들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우리들의 한가지 연구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29회 ''나를 따라오너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9일<역대기상 1장부터>

도라에몽은 ''너는 착각하고 있어.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반드시 걷기 쉬운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아니야.''

《위대한 가르침》

하느님을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어느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하느님을 어디서 찾느냐?"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글쎄 어디 계신지 그곳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포옹하라. 그때 너의 두 팔이 바로 나다. 너의 입을 열어 사랑을 말하라. 그때 너의 입이 바로 나다. 너의 두 눈을 열어 세상을 바라보라. 그때 너의 두 눈이 바로 나다. 따뜻한 마음으로 나그네를 맞이하라. 그때 너의 마음이 바로 나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존재하며 너를 통해 나타나리라. 너의 행동이 바로 내가 되게 하여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복음 4장 18절부터 22절)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너희는 이제까지는 먹고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만들겠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사도가 된 일은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복음 15장 16절) 어부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선택하셨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만드셨다. 이 말은 어부 출신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를 선택한 일도 우리가 한 일이고, 신앙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도 우리가 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뽑으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소서 1장 3절부터 5절)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 낚는 어부’ 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인생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고, 또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과 목표로 삼고서 살아간다는 것. “나를 따라오너라.”  ‘부르심’ 이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부르시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직’ 을 맡기기 위해서 부르시는 말씀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은총의 말씀’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닌데, 응답한다면 받게 될 큰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응답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복음 선포도 부르심이고, ‘강제 명령’ 은 아니지만, 만일에 자기에게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멸망의 길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것.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그래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을 낚는다.’ 는 표현은 많이 이상한 표현입니다. 다른 좋은 표현들이 많이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이 표현은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의 직업이 ‘어부’ 였기 때문에 사용하셨을 뿐이고, 표현 자체에 특별한 뜻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물’ 은 ‘죽음’ 을 상징하고, 물 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신앙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낚인 사람’ 이 아니라 ‘구원된 사람’ 입니다.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또 ‘사람 낚는 어부’ 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을 실제로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버리다.’ 라는 말은, ‘초월, 이탈’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또는 방해만 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애착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일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복음 9장 62절) 선교활동은 ‘돈의 힘’ 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믿음의 힘’ 으로 하는 활동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활동비와 생활비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돈의 힘’ 에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선교활동에 필요한 것은 ‘돈’ 이 아니라 ‘믿음’ 과 ‘열정’ 입니다. ‘곧바로’ 라는 말은, 부르심에 응답할 때 제자들이 전혀 망설이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 말은, 그들이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다는 것. 어부들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42절)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음을 나타냅니다. 선교활동은 ‘교회의 설립 목적’ 이기도 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 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채로 혼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 밖에 있는 사람들도 초대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생활,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을 온 세상으로 확산시키는 생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사랑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 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는(선교활동은) 사랑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을 그리워하니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영적인 목마름을 없애주시고, 성체로 우리들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진다고 도전하지 않는 것 보다는, 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도전하는 것이 훨씬 멋지다.'' <도라에몽>


♡2630회 주님의 뜻을 만나면 내 뜻은 죽습니다. 내 뜻이 죽을 때 평화가 옵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30일<역대기하 1장부터>

법정스님은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세요.''

《나 그대에게 영원한 선물이면 좋겠네》

나 그대에게 영원한 선물이면 좋겠네 그대 나에게 영원한 선물이듯이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놓고 열어보지 않아도 잔잔한 기쁨으로 고이 간직하고 싶은 나 그대에게 그런 선물이면 좋겠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나 그대에게 변함없이 애틋하여 하늘까지 품고가 영원히 사랑 할 수 있는 나 그대에게 영혼이 아름다운그런 선물이면 좋겠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몇일 후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에게 전대사가 주어집니다. 전대사를 받으면 연옥의 모든 잠벌을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부족하게나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간 이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나는 너를 안다” 라고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한 번을 만났더라도 주님께서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 하지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들으면 큰일일 것.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어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지 못했다. 우리는 죽음과 그 죽음을 잘 준비한 이들을 기념하며 우리 또한 그 대열에 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안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교통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에이미 커디’ 는 이런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사고로 인한 지능 저하로 남들보다 4년 늦게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교수직을 따기 위해 지도교수와 여러 중소 규모의 콘퍼런스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이 함께 모이는데 박사과정에 있는 이들은 이 교수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합니다. 이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엘리베이터 스피치’ 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함께 탄 교수에게 약 90초 동안 자신이 연구한 모든 것을 핵심적으로 쏟아내어 그 교수가 자신을 채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몇 년 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해 이런 콘퍼런스를 배회하는 사람도 많았다. 에이미 커디도 단단히 준비하고 중소도시 평범한 콘퍼런스에 지도교수와 함께 참석하였다. 개회 만찬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 명의 거장이 타고 있었다. 이런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세 명의 스타 교수들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멍하였다. 이때 한 교수가 “아하,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네요. 연설 한 번 들어볼까요?” 라고 말했다. 에이미 커디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하늘의 별과도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초긴장한 상태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단어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첫 문장부터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 저, 잠깐만요,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 에이미는 말하면서도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 번도 잡기 힘든 기회를 세 번이나 동시에 날려버리는 셈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다른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테니 그녀의 교수직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또 자신을 여기까지 믿고 데려온 지도교수를 볼 면목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세 스타 교수들의 얼굴을 빠르게 살피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자신을 지지한다거나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거나 하는 아주 작은 표정만이라도 애타게 갈구하였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두 교수는 머리를 숙인 채 내렸고 마지막 교수는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엘리베이터 스피치 중 최악이었네” 라고 말하며 내렸다. 에이미는 그들과 함께 내리지 못했고 자궁 속 아기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로비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4년 넘게 공부한 내용에 대해 어째서 단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게다가 실패하고 나서 안도감이라니? 왜 이제야 준비한 내용이 떠오르는가?’ 그녀는 이 경험을 깊이 성찰하며 ‘프레즌스’ 라는 심리학 용어에 집중하게 되었다. 프레즌스는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 그녀는 ‘내가 왜 그때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까?’ 를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미련한 처녀들은 분명 그렇게도 기다리던 신랑이 왔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복음 7장 22절부터 23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을 것.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경배했다. 자신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던 것’. 금송아지는 각자 자신이 섬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에이미 커디는 그때 ‘나는 세계의 유명한 스타 교수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지 그 교수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교수들은 자신을 증명하게 만들 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상태로는 누구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려면 ‘그들을 만나고 있는 나를 잊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초조해집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나의 뜻을 이루려 누군가를 만나면 나를 만나는 것이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상대의 뜻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 21절) 주님의 뜻을 만나면 내 뜻은 죽습니다. 내 뜻이 죽을 때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의 주인이 될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지배자로 두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을 위해 나는 봉사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챙길 수가 없다. 이때 비로소 ‘프레즌스’ 가 성취됩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과거의 걱정과 미래의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면 현재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머물 수 있는 것. 진정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온전히 만나려면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어야 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만, 아주 잠시라도 이 프레즌스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잠깐이지만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너를 안다” 라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프레즌스를 연습하는 방법은 짧은 기도를 통해 자주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것. 자주 짧은 대화를 나누어도 되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도 됩니다. 나의 의식을 나에게 두지 말고 주님의 뜻에만 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봉헌할 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자아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보게 되어 나를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람은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그 불안함을 금방 알아챕니다. 속이려 해도 소용없다.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프레즌스를 먼저 봅니다. 이것은 생존본능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항상 피해를 봐 왔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에 그런 사람들을 회피하도록 시스템 되어 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지금 이 순간 하루 회심하는 삶을 살아, 우리들이 자신이 누군가에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은총 충만한 삶을 보낼 수 있으시고 뜻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한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연습이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쉽게 신뢰하게 될 것. 주님, 주님 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오늘 하루 회심하는 삶을 살아, 우리들이 자신이 누군가에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은총 충만한 삶을 보낼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고난과 시련은 인생의 성장의 기회입니다.'' <법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