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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601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인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 ,

♡2601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1일<루카복음 1장부터>

안셀름 그륀은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 ‘위기는 선물이다’, 

《멋있는말과 맛있는말》

멋지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가 달라져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듣고 낙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윤택한 인간관계를 형성합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감이 듭니다. 낙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즐거워지고 기쁨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편안감과 안정감을 주는 말,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멋진 사람이지요. 말은 요리와도 같습니다. 맛있고 멋있는 요리를 또다시 찾듯이 맛과 멋을 느끼게 하는 말은 더 듣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요리의 맛과 멋을 내기 위해서는 신선하고 다양한 재료를 선택하여 정성을 다해 조리해야 합니다. 말의 맛과 멋도 시대적 상황에 맞는 밝고 올바른 용어를 선택하여 자신있게 표현해야 합니다. '멋있는 말' 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사랑의 말입니다. '맛있는 말' 은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신뢰와 믿음의 말입니다. 사랑의 재료는 이해와 관용, 화합과 배려와 포용입니다. 믿음의 재료는 용기와 격려, 위로와 존경과 감사입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재료를 선택하여 희망의 요리를 만들어 주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재료를 선택하여 용기의 요리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살맛나는 세상은 서로를 사랑함에 있고, 멋있는 세상은 믿음에 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종이 주인이 시킨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라고 하신 비유에 이어지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분명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였다면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을 것. 누군가는 누군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소명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10명을 치유해 주십니다. 어쩌면 이것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주님을 받아들여 새로운 소명의 길로 나아가면 그 이전의 상태는 마치 나병이 걸렸을 때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소명으로 받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소명도 주시지만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도 주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고 치유해 줄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불러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불러주신 것에 감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 채널 ‘감동 실화 영상’ 에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준 남성을 만나자...’ 란 사연이 소개되었다. 캐나다에 사는 와그너씨는 심한 피부병에 걸린 유기견을 근처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는 와그너씨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아 목숨엔 지장이 없었지만 아무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그 녀석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조’ 란 이름을 지어준 그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와그너씨가 동물 병원에 전화했지만, 모조는 여전히 동물 병원에 있었다. 와그너씨가 모조를 키우기로 하고 병원에 다다르자 피부병으로 털이 하나도 없는 모조는 와그너씨에게 달려들어 마구 반가운 모습을 나타냈다. 와그너씨로부터 키워진 모조는 이제 털도 자라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모조는 길거리에서 지내던 삶에서 와그너씨 집에서 살기 위한 규칙을 준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규칙을 강요한다고 와그너씨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분명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이와 같은 것을 느낍니다. 나병이 치유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봉사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또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 에선 4년 동안 계속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은 재개발로 지정돼 허물어졌다. 그렇지만 백구는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는데도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이것을 안 동네 아주머니가 2년 동안 백구에게 먹을 것을 놓아주었다. 백구에게 지금 가장 행복한 일은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이와 같다. 무엇을 해야 좋은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삶의 의미를 알려주셨다. 그 의미를 일단 맛보았다면 다른 삶은 다시 나병이 걸리는 삶과 같다.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불러준 행복이 이 정도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행복은 얼마나 더 클까요?

본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다. 본당 신부님이 억지로 시켜서 자신도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봉사하면서 받는 주님의 성령을 느끼지 못하는 것.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봉사하기 이전의 삶은 나병에 걸렸던 삶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봉사하며 감사하지 못한다면 아직 영적인 나병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봉사한다면 감사하고 주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오는 성령의 보답은 그 봉사를 통해 겪는 모든 고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더 완고한 파라오로부터 빼내는 작업은 엄청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에게 성령으로 상징되는 지팡이를 주셨다. 자신이 이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능력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도망치기 급급했던 4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은 나병이 걸렸던 것과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봉사하기 이전의 삶이 그립다면 그건 절대 주님께서 불러주신 봉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응답했다면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마치 나병의 상태와 같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작은 일에도 지극 정성을 다하는 열정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일과 오락이 규칙적으로 교대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 생활이 즐거워진다.'' <톨스토이>


2602회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2일<요한복음 1장부터

존 맥스웰「리더십의 법칙」中 ''무슨 일이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박수라도 실컷 쳐주고 싶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적어도 나는, 목표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의지를 배울 수는 있으니. "비전이 있는 사람은 말은 적으며 행동은 많이 한다. 몽상가는 말이 많으나 행동은 적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확신에서 힘을 얻는다. 몽상가는 외부 환경에서 힘을 찾는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문제가 생겨도 계속 전진한다. 몽상가는 가는 길이 힘들면 그만둔다." 

《지금 이시간에》

행복할수있는 시간엔 최대의 행복을 맛보라 그리고 힘겨운 시간엔 그 행복한 시간을 꺼내어 그 힘겨움을 지혜롭게 넘겨보아라 밀물과 썰물처럼 삶이란것도 잃는것과 얻는것이 있듯 사는데 어찌 좋은 시간만 있으랴 앞만보고 달리다 잠시 쉬어 뒤돌아본다. 힘겨웠던 시간보단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더 많았던것 같다. 현실이 벗어나고 싶다하여 벗어 던질수 없다면 그 벽을 뚫으리라 삶에서 무너져 내린 순간은 한번으로 끝이리라 내 길에 아무리 깊게 파인 웅덩이가 가로막는다 하여도 난 그 길을 넘어갈것. 내 가슴이 뛰고있는한 나는 달릴것이며 내 삶을 소중히 아주 소중히 할것이며 내 삶의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내 선택이 힘겨움의 길일지라도 난 이순간이 내 선택이었고 내 길이니 최선을 다 함이라 아이들 웃음소리에 행복이 묻어나면 난 그것이 곳 행복이다. 그러하여 난 힘을다하여 삶을 피해가진 않을것이며 내 등의 짐을 내려 놓지 않을것. 내 등의 짐은 내가 곧은 걸음 걷게하는 기름이며 삶의 힘이기에 난 이순간도 삶을 부여 잡는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복음 17장 20절부터 21절) 예수님 말씀을 보면,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종말의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오는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어디로 오는가?” 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세속의 나라들이 세워지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또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그런 표징과 함께 오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복음 18장 36절)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그러나 이 세상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정 지역에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말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 안에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시간적으로는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고,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 안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 ‘지금’ 이라는 시간은 그 완성이 진행 중인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 은 특정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때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말은, 그때 종말이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바로 종말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인류가 ‘멸망’ 하는 때로만 생각하는데, ‘멸망’ 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은 곧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라 ‘기쁜 날’ 이고, ‘잔칫날’ 입니다. “그래도 심판은 두려운 일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 은 구원을 최종적으로 선고받는 ‘기쁜 날’ 이고,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살았거나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멸망을 최종적으로 선고받는 ‘공포의 날’ 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만 그 날이 무서운 날이 됩니다. 사실 심판의 결과는, 즉 어떤 선고를 받게 되는지는 각자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살았느냐?” 가 그대로 심판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과 멸망은 각자 자신들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복음 2장 10절부터 12절)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고, 동시에 메시아의 나라(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정치 지도자나 군사 지도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말씀을,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실재’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 있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안에(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에, 또 우리 곁에, 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존’ 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게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기도하고 묵상할 때에 그런 체험을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실천할 때에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더욱 잘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장 8절)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라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이 말은 “사랑이 있는 곳에만 하느님이 계시고 그곳에만 하느님 나라가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더욱 잘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깨닫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장 16절) 그런데 하느님 나라와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듯이 우리 가운데에는 사탄의 세력도 있다. 그리고 그것의 악한 영향력이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장 11절)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모르고, 그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모두가 십자가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매 순간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라는 은혜로운 고백으로 살아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  <러시아 속담>


♡2603회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인가?’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3일<사도행전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힘은 그 재능이나 이해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재능과 이해력이 뛰어나고 풍부하여도 실천력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력이 그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인듯 둘이고 둘인듯 하나인 삶》

부부라고 해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어떤시인은 '부부란 결코 하나가 돼서는 안되는 것’ 이라고 말 합니다. 그것은 한쪽이 완전히 굴복하여 하나가 된다거나 자기 존재를 전혀 찾을 수 없는 삶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뿌리는 하나지만 머리는 둘인 콩나물처럼 상대방의 정신세계를 인정하면서 한 곳을 향해가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한몸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두사람의 존재가 각각 살아 있는 삶이 진정한 부부의 삶인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을 비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있어야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상대방을 내것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분재처럼 만들어가려는 욕심 상대방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하려는 집착. 모두 버리고 그가 살아 움직이는 그 모습그대로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결혼 생활의 고통은 소유욕과 집착과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지나친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보십시오. 손의 따듯함이 전해져오거든 이 따듯함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그렇게 따뜻하게 살아있기에 내 손도 함께 따뜻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심판관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양과 염소로 나뉘어 있다. 양과 염소는 본성의 차이를 말합니다. 태어날 때 본성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자기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내가 늑대라 믿으면 늑대의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 것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 것. 그러나 사람은 워낙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심판 기준대로 ‘가장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나의 정체성에 있다는 것을 내용이 막장인 한 영화를 통해 보고자 합니다. ‘경축! 우리사랑’(2007)입니다. 이야기는 노래방을 함께 운영하는 한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봉순씨는 쉰이 된 가정을 책임지는 여자입니다. 남편은 노는 것만 좋아하고 심지어 외도까지 합니다. 딸도 집에서 놀기만 하며 하숙하고 있는 남자와 사귑니다. 무작정 결혼만 하겠다던 딸은 취직이 되어 결혼자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다 자기 멋대로입니다. 졸지에 헤어지게 된 하숙집 남자 구상은 술에 찌들어 갑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봉순씨는 술 취해 쓰러져 있는 구상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의 아기를 임신하게 됩니다. 남편도 외도 중이라 뭐라 하지 못하고 빨리 딸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봉순씨의 사랑은 진심입니다. 구상도 봉순씨의 딸보다는 봉순씨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봉순씨는 결국 딸의 애인이었던 구상의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 중 아무도 자신을 아내나 엄마 취급해 주지 않았기에, 지금 이 순간 엄마, 아내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봉순씨를 뭐라 하지 못합니다. 물론 구상에게 계속 마음이 있는 딸이 엄마에게 울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엄마가 뭐 이래? 엄마가 뭐 이래!” 이때 봉순은 잠깐 흔들립니다. 그러나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다시 포기하고 구상의 애인이기를 선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지만 지금까지 남편이 남편답지 않게, 자식이 자식답지 않게 살던 그 가정에서 봉순씨도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모습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인가?’ 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

구원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아닌 행동만을 바꾸려 하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됩니다. 행위만 바꾸려 하면 본성은 안 그러면서 그런 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정체성이 우리 본성을 염소에서 양으로 바꾸고 결국 양으로써 당연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김신조 씨도 삶과 죽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를 물었다. 그리고 김일성과 북한을 위해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다. ‘나는 나!’ 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으니 나도 사랑이라던가의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본성이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하게 살게 만들고 마지막 날 심판 때 양으로 분류됩니다.

어느분이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 위에서 발이 끼어 있는 사람을 구급차에 신고만 하고 자기 갈 길을 간 적이 있다. 만약 우리 가족이었다면 그렇게 바로 떠나지는 않았을 것. 혹은 ‘나는 봉사자다!’ 라는 생각만 했어도 행동이 달랐을 것. 나의 행동은 나의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결국, 나와 나의 자녀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싶으냐는 어떤 자기 정체성을 넣어주고 싶으냐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그 정체성은 진리와 은총, 즉 나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겨줄 수 있다. 그 정체성이 나에게 왕이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 되십니다. 그분을 왕으로 여기는 정체성으로 산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 때에 양으로 인정받습니다.

[오늘의 기도]

나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내 안에 은총과 자비가 흐르는 하느님의 햇살이 비추고 있음을 느끼는 충만한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속에 미치광이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미치광이가 날뛰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04회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4일<사도행전 14장부터>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마음먹는 만큼 행복해진다.》

지금 이 순간 당장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하라.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늘 자신에게는 행복보다 불행만 찾아온다고 생각하면서 매사에 자신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기쁘게 받아들일 줄 모르므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행복하겠다고 결심을 해야 행복해진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지금 이 순간 마음껏 기뻐하라.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할 때도 마찬가지다.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것임을 명심하라.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마음먹는 만큼 행복해진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이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시련과 고난에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행복의 수준이 결정된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 살다보면 불행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 혹은 친척이 병이 들거나 죽을 수도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왠지 세상이 막막해질 때도 있을 것.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느낌에 자유로워지는 것. 행복해지려고 지나치게 애쓰다 보면 오히려 더 비참해질 수도 있다. 어느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 엄마가 행복해지려고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져 계실 텐데.“ 행복은 욕심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아멘, 감사합니다.

레몬즙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과일을 짜야 할까요? 오렌지나 사과로 레몬즙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없다. 레몬즙을 내기 위해서는 레몬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즙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따라 그것이 내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행복’ 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이, ‘기쁨’ 을 가지고 있으면 기쁨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슬픔’ 을 가지고 있다면, 또 ‘화나 증오’ 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스스로는 행복해지고 싶어, 기뻐하고 싶다고는 말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이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내 안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열등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결국, 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마음보다 긍정적인 마음이, 세상의 것보다 주님의 것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라고 말하는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의 말처럼, 지금을 사는 우리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행동은 그렇지 못합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세상일이 가득 차 있어 잔치에 올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잔치에 가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던 것. 우리도 이렇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가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기 안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을 하나도 간직하지 않으면 초대에 응할 수가 없게 됩니다. 계속 핑계만 댈 뿐입니다. 이제 주인은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리가 남아 있다고 종이 말합니다. 이제 주인은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라고 하지요. 세상 모든 민족을 품으려는 예수님의 바람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는 핑계 대지 않고 주님의 초대에 기쁘게 응답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으면서 커다란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인생을 문장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어입니다. 주어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물론 내가 주어가 되어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만 주어가 되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모습이 어떻습니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며, 본인 자신이 무엇을 성취해도 공허함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어가 되면 어떤지를 많은 성인·성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어의 위치에 있게 되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주어가 되면 시야가 넓어지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또 이 안에서 커다란 만족감과 행복을 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정답을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인, 성녀를 통해 알 수가 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하면서, 내 인생에서 누가 주어의 위치에 있을 때 하늘나라에서 행복할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적당한 때를 기다리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기도하면 때가 차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임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보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좋은 항아리가 있으면 아낌없이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질지도 모른다!''  <탈무드>


♡2605회 신앙인은 ‘일상생활의 소중함’ 이 아니라 ‘회개의 중요함’ 을 먼저 생각해야  -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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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5일<로마서 1장부터>사람의 아들의 날>

  랄프 왈도 에머슨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말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 받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 한마디 여하가 남 앞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놓는 셈이다.''

《행복을 얻기 위한 기다림》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 목소리가 좋은 사람. 얼굴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 마음이 너무나 예쁜 사람. 애교가 많은 사람. 곰같은 사람. 다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 주는 행복도 모두 다르다. 만나면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 만나면 애처로와 보이는 사람. 만나면 시간이 빨리가는 느낌의 사람. 만나면 마냥 행복한 사람. 시간이 가는게 너무나 안타깝게 만드는 사람. 이렇게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주는 공통점은 기다림이 있다는 것. 언제 누굴 어떻게 만나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그 기다림이 절대 싫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음에 그 기다림이 행복인 것. 하루가 될지 한달이 될지 일년이 될지 아니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라도 기다림이 있기에 하루 하루가 행복인 것. 기다림이 있는 동안은 그 누구보다 행복인것. 평생을 기다리는 행복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지도 나에게 기다림이 있어 행복한 하루다 사랑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고 그 기다림이 있기에 행복인 것을 오늘도 나는 행복을 얻기위해 기다림을 시작한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복음 17장 26절부터 30절)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테살로니카 전서에 나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장 2절부터 6절) 노아 때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던 모습들은, 또 소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했던 모습들은, ‘평화롭다, 안전하다.’ 하면서 일상생활을 했던 모습들인데, 그 일상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나 소돔 사람들이 일상생활 때문에 멸망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일으키시기 전에 그 일을 미리 예고하셨다.(창세기 7장 4절)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레가 지나면” 이라고 예고하셨는데, 그 7일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였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지시하실 때에 이미 대홍수를 예고하셨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도 대홍수를 예고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든 예고를 무시했고, 회개하지 않았고, 무사태평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다. 또 소돔의 멸망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예고하셨는데(창세기 18장 16절부터 33절), 아브라함이 소돔의 멸망을 막으려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예고를 소돔 쪽에 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소돔 멸망 전날 밤에 롯을 찾아온 천사들은 소돔의 멸망을 롯에게 알려 주었고, 롯은 다시 그 일을 사위들에게 알려 주었다.(창세기 19장 12절부터 14절) 그때 롯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롯의 말을 무시했다. 아마도 그들의 태도는 곧 소돔 사람들의 태도였을 것. 어떻든 소돔의 멸망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리 예고된 일이었고, 그 예고는 회개하라고 기회를 준 일이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멸망 예고를 무시했고, 죄 속에서 살던 대로 살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신앙인은 ‘일상생활의 소중함’ 이 아니라 ‘회개의 중요함’ 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 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 입니다. 일상생활의 소중함만 생각하고 ‘삶의 변화’ 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 바오로 사도가 말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 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구원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복음 17장 31절부터 33절) 이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만 집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그날’ 이 된 뒤에 실행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날’ 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바로 실행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속의 재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지 말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복음 17장 34절부터 35절) 이 말씀은, “심판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일’ 입니다. 동시에 각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별로 따로 심판함으로써 결정된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일’ 입니다. 심판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아무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고, 어떤 특혜도 없고, 어떤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심판이 개별적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에게 물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멸망을 당할 때, 그 죄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억울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 반대로 말하면, 회개한 의인이 구원을 받을 때, 그 의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의인과 함께 구원을 얻는 불공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 ‘나의 죄’ 는 ‘나의 책임’ 입니다. 물론 어떤 죄에 대해서 ‘연대책임’ 을 묻는 경우도 있을 것. 그 경우에도, 내가 짓지 않은 죄인데도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대표적인 예가 ‘선과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죄’ 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에게 그 살인죄를 물으시겠지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고관들, 무관들, 유지들에게도(마르코복음 6장 21절) 죄를 물으실 것. 아마도 그들은 “저희는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라고 항의할 텐데, 그들이 헤로데와 공범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살인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일도 안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죄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내 몸과 마음으로 기도에 힘쓰지 않는 내 삶을 반성하면서, 매순간 순간 마다 화살기도라도 바치는 은총의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들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우리들의 한가지 연구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1.행운아이다  2.좋아하는 일을 하라. 3.현명한 사람을 만나라 4. 스스로 결정하고 웬만하면 인내하라  5.이미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라  6.베풀어라 
♡2606회 💔💔풍요롭고 행복한 추석 되세요. 추석연휴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6일<코린토1서 1장부터>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명절은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이다.💔💔
아직도 코로나 이후 함께 모이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 놀러 가는 것도 썩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의 큰 명절을 잘 지키며 힘을 얻고 살아가야 할 것. 축제를 지내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같은 축제라도 어떤 때는 뒤끝이 좋지 않고, 어떤 때는 좋다는 것.'' 우리는 뒤끝이 좋은 축제를 지향해야 합니다. 뒤끝이 좋지 않은 축제 안에는 항상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다.

1946년 미국의 한 의과대학 2학년생 ‘모턴’ 은 실험을 하던 중 강력한 마취기능을 가진 에테르라는 약물을 만들어냈다. 마취 없이 수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에테르의 발견은 외과 수술 역사상 획기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발견해 낸 사람은 축제를 즐겨야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 에테르 특허를 신청하려 했던 모턴은 그의 지도교수인 ‘웰치’ 와 그에게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 에게 저지를 당했다. 서로 자신의 이름이 의학 역사에 기록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결국 법정 싸움까지 갔고 축제가 되어야 했던 이 발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람의 몸을 마취시키는 물질을 개발해 낸 그들이 명예욕으로 곪은 정신은 마취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조: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쑤쑤, 유튜브 채널: 책 읽는 다락방]

아무리 축젯날이 되어도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축제가 비극으로 끝납니다. 물론 장례식은 축제는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어떤 장례식에서는 돈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모습은 아닌듯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장 10절)라고 말합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듯이,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아마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할 때 추수감사절이나 추석 명절이 있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이 가장 줄어드는 풍요의 시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라질은 삼바축제로 엄청난 관광소득을 올리는 나라입니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이 축제에 약 4천만 명이 몰립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축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해 2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할 위험에 있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축제를 시행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는 무렵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고, 그후 확진자가 470만 명을 넘었다. 사망자도 14만 명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코로나는 그저 감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도 걸리고 가족도 걸렸다. 그런데도 마스크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등 거친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겉만 보고 이렇게 말해서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 또한, 삼바 축제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다. 다만 그런 축제를 지내는 정신이 코로나 확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그리고 그 축제가 오염되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 보통 삼바축제라고 하는 ‘카니발’ 은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카르네 발레는 ‘고기여 안녕!’ 이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에 당분간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충분히 먹어두려고 하는 가톨릭 전통이 축제가 된 것.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로 시작된 이 축제가 그 정신은 사라지고 돈과 쾌락의 축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뒤끝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명절과 축제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전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축제’ 는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주신 주님께 ‘감사’ 하고 그 기억을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교육’ 적인 차원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식 때마다 자녀들이 그 예식은 왜 행하는 것이냐고 부모에게 묻고, 부모는 하느님께서 이래저래서 그 감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녀를 교육합니다. 교육하면서도 부모 자신도 더 배우고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떠돌면서도 이런 축제 기간을 중요시 여기며 후대에도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없이 살면서도 축제를 통해 하느님은 감사한 분이심을 자녀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설과 추석이라는 좋은 명절이 있다. 설에는 세배하며 감사하고 추석에는 풍요로움이 있게 해 준 조상님께 감사합니다. 왜 그런 제사를 지내야 하고 성묘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하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덕임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코르나 당시 추석에 제주도에 30만 명이 몰린다고 하였습니다. 제주도 주민은 자녀들에게도 이번 명절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30만 명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걱정이 많다고 하였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전통의 축제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명절이 어떤 교육보다 자녀들에게 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물려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여러 번의 명절을 거치며 배워왔던 것 같다. 놀러 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런 특별한 때야만 가능합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부모도 자신들도 없었음을 깨닫게 하십시오. 그 감사가 진정한 예배로 이루어질 때, 명절은 기쁘게 끝나지 않을 수 없을 것. 명절이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으로 길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곁에는 넘어져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선하신 주님이 계시니, 오늘도 주님의 향기를 입고 은총으로 충만한 삶을 보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을 가장 인생답게 인도하는 힘은 의지력이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는 것처럼 의지가 약하면 생활이 흔들린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07회 한가위의 정신은 “감사” 와 “기억” 그리고 “친교” 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7일<코린토2서 1장부터>

법정 스님 은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행복을 만들자》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그런데도 좀처럼 행복이 오지 않는다. 심지어 주위에서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앵앵댈 때는 속만 타게 된다. 어떻게 하면 주위에서 맴도는 행복을 잡을 수 있을까? 그 행복을 잡는 방법으로는
1. 우선, 나의 행복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행복이 내 것으로 되고자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괜한 시간 낭비요, 감정 낭비다.
2. 주고자 할 때 행복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직 그 사람에 마음이 빼앗기는데 하나같이 사랑의 노예요, 종이 된다. 그리고 오직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지기만 한다. 내 시간 내고, 내 돈 주고, 내 마음을 온통 주는데도 신바람이 난다. 이것이 행복이 아닐까? 행복의 바람이 절로 솔솔 분다.
3. 이기는 자가 행복하다. 이긴다고 하니 생존경쟁을 언뜻 떠올리게 되는데, 물론 살아가기 위한 이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운동도 이겨야 기쁘고 행복하고, 공부도 잘해야 기쁘고 행복하고, 돈도 벌어야 기쁘고 행복해진다. 자기의 이김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 이는 모두를 이김과 같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조용한 행복의 물결이 강물처럼 밀려온다. 고집을 이김이요, 자존심을 죽임이요. 무엇보다 비생산적인 모든 것에서 이기면 행복은 곧바로 내 속에서 싹이 트게 된다. 우리 모두 행복의 씨앗을 심어 자기와 싸움에서 이겨 장성한 나무가 되어 그 나무의 그늘로 지친 자들에게 행복을 나눠주자.

즐거운 한가위 명절 보내고 계십니까? 한가위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윗날만 같아라.’ 는 말이 있다. 한가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기에 많은 음식을 장만해서 잘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지내게 되므로 늘 이 날만 같았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것. 다른 때에는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일에만 시달렸던 백성들의 소망을 대변했던 말이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송편을 빚어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풍성한 한가위 명절에 자신들만 챙겼던 것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과 조상님들께도 감사를 드렸던 것. 우리도 이런 한가위 명절을 맞아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봉헌하고 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맺은 결실은 전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입니다. 물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도움과 하느님의 도우심이 더 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한가위 명절에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우리 가족들과 조상님들께도 감사를 드리면서 위령미사를 봉헌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태어나고 이만큼 살 수 있게 된 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조상님과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감사를 드리는 것. 한가위의 정신은 “감사” 와 “기억” 그리고 “친교” 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생명을 자신의 살과 피, 그리고 뼈로 지금의 우리가 있도록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파스카 사건을 기억하면서 민족의 정체를 지키며 살듯이, 우리는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정신들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는 데에 또 다른 힘과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가족친지들과 함께 하는 만찬을 통한 친교가 새롭고도 풍요한 관계를 이루는 소중한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 와 “기억” 그리고 “친교” 의 구체적 표현이 바로 제사(미사)와 성묘입니다. 그러므로 가벼운 이유로 함께하지 않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제사(미사)와 성묘를 미리 앞당겨 지내버리는 모습은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정말 죄스런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온 부자를 보면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언제나 저런 말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부자에게서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감사드리지 못했다는 것. 곡식과 재물이 많았던 부자의 창고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쌓아두고 있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겠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나 봅니다. 만약에 부자가 자신의 삶에 만족했었다면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두시기까지 자신의 재물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선물에 만족한 사람이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 만약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었다면 하느님께서 조금 더 이 세상에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지만, 아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인지 생활에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한가위 명절만이라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윗날만 같아라.’ 라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시는 풍성한 명절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품고 드리는 기도 안에서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신 우리들은 이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의 기도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히 머물러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시간은 묻지 않았는데도 말을 해주는 수다쟁이다.''  <에우리피데스>


♡2608회 하나가 살면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8일<갈라티아서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아무리 위대한 일도 열심히 하지 않고 성공된 예는 없다.''

《사랑하며 사는 세상》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유명한 셀 실버스타인의 동화 <잃어버린 조각>>은 '완벽함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며, 때로는 완벽함이 모자람보다 못하다' 는것을 알려준다. 귀퉁이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 온전치 못한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동그라미는 때로는 눈에 묻히고, 때로는 비를 맞고 햇볕에 그을리면서 이리저리 해맸다. 그런데 한 조각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빨리 구를 수 없었다. 그래서 힘겹게 천천히 구르면서 핀 꽃냄새를 맡고 머리 위에 내려앉은 나비와 이야기도 나눴다. 오랜 여행 끝에 몸에 꼭 맞는 조각을 만난 동그라미는 이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어 예전보다 몇 배는 더 빠르고 쉽게 구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떼굴떼굴 정신없이 구르다 보니 오랜 여행길에 친구가 되어주었던 딱정벌레와 인사도 할 수 없었고 꽃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휙휙 굴러가는 동드라미 위로 나비가 앉을 수도 없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너무 빨리 굴러 숨이 차서 부를 수가 없었다. 동그라미는 구르기를 멈추고 찾았던 조각을 살짝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조각이 떨어져나간 몸으로 천천히 굴러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나비 한 마리가 동그라미의 위에 내려앉았고, 동그라미는 다시 행복해졌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다. 어떤 이들은 풍족한 가운데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생활비를 다 넣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은 봉헌의 참다운 의미와 목적을 알려주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봉헌은 돈을 내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과부는 봉헌함으로써 생활이 불편해졌고 부자들은 봉헌을 많이 해도 불편해지지 않습니다. 삶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포기하고 죽였다는 뜻입니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 전에는 과부들을 등쳐먹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율법학자들이 나옵니다. 그들보다 과부가 더 영성이 높다는 것을 봉헌을 통해 말씀해주십니다. 그 다음은 성전 파괴의 예언이 나오는데 결국 봉헌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전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듯이 봉헌은 풍족한 데서 일부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합니다. 불편해져야 봉헌입니다. 그렇다면 왜 봉헌을 통해 자신을 죽여가야 할까요? 그 이유는 구원은 분명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고 봉헌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말을 임금의 것으로 내어주었는데 임금을 말 위에 태우고는 고삐를 주지 않은 것과 같다. 임금은 자기 마음대로 널뛰는 말 위에서 그 말을 조종하지 못하고 떨어지고 맙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믿어봐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죽어야 변합니다.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써머스비’(1993)입니다. 남북 전쟁에 나간 ‘잭 써머스비’ 가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 친구와 친척들은 그의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포도 농장의 주인이었던 써머스비는 거칠고 잔인한 데다 농사와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말썽만 피우던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에다 농장일까지 맡아 고생하던 아내 로렐은 그 지긋지긋한 남자가 사라져 해방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는 남자 오린 미첨은 써머스비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로렐을 도와주며 써머스비의 죽음이 공식화되면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써머스비가 돌아온 것. 그런데 돌아온 써머스비는 조금 달랐다. 아니 이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아내를 따듯하게 대해줬고 흑인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농장에다 함께 담배 농사를 짓자고 제안합니다. 담배 농사를 지으며 번 돈의 일부를 매년 내고 그 지급한 값이 땅값을 넘어서면 그 땅은 농사를 지은 사람들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이만큼 큰 혜택은 없었다. 모두가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처음엔 써머스비를 무서워하던 아내 로렐도 써머스비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낳습니다. 모든 게 잘 되어갈 무렵 써머스비가 살인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오직 로렐만이 지금의 남편이 써머스비가 아님을 압니다. 사실 이 마을을 찾아온 써머스비는 감옥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던 진짜 써머스비가 죽고 난 후 그 사람이 살던 곳으로 와봤던 것. 지금의 써머스비는 호레이스란 사기꾼입니다. 그러나 로렐과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만약 자신이 써머스비가 아니라면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누리는 혜택이 사라지고 맙니다. 계약이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써머스비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그의 목숨을 살리려고 하지만 써머스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진짜 써머스비라며 사형을 받아들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되고 써머스비는 사형을 당합니다. 끝까지 자신이 아닌 써머스비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야곱이 자신은 끝까지 에사우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하나가 살면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써머스비가 되려면 호레이스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레이스는 죽습니다. 두 정체성이 양립할 수 없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 정체성을 흔드는 것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동물들에 고삐를 매는 것입니다.

이전의 자신의 정체성을 죽이려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얻은 정체성이 죽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이를 위해 시작하는 것이 ‘봉헌’ 입니다. 봉헌은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시작입니다. 그렇기에 봉헌을 하며 이전의 자기가 힘들지 않다면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이런 면에서 과부는 자신의 주님을 위해 더 많이 비워낸 사람이고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위선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 고삐를 주지 않으면서 주인을 섬기겠다고 말하는 짐승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체성을 그리스도로 정하는 것 이전에 자신은 죽었다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던가,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는 고백, 혹은 자신이 죽었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도로 “저는 사랑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 앞에 “저는 죽었습니다” 를 덧붙이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죽지 않으며 믿겠다는 말은 고삐를 주지 않으며 자신을 타라는 것과 같은 위선임을 잊지 맙시다. 자기 봉헌은 자신을 죽여 새로운 정체성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적당한 때를 기다리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기도하면 때가 차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임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보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얼음 위를 안전하게 미끄러지려면 속도를 내는 것이 안전하다.  <랄프 왈도 에머슨>

♡2609회 . ‘회개하는 삶’ 은 항상 ‘바로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일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9일<티모1서 1장부터>

키케로는 ''우정은 풍요를 더 빛나게 하고, 풍요를 나누고 공유해 역경을 줄인다.''

《예수 새 시대를 여심》

한 걸음 한 걸음 그분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길 상태가 어떻든 자기가 가고 있는 곳을 분명히 알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길 상태가 나빠지면 곧바로 불평을 한다. 물론 삶의 어려움 앞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다. 그만큼 그분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망과 불평을 계속하다 보면 어차피 걸어야 할 시련의 길을 걸어갈 힘조차 잃게 된다.우리가 시련 중에도 주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주님! 이 길에서 제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련을 통해 저를 어떻게 성장시키려 하시는지요?" <송봉모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절) 이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가족은 가장 중요한 영적 동반자이고,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에게 오면서” 라는 말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기를 바라면서”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 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도 바로 그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이 가르침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장 7절부터 8절) ‘나에게 이롭던 것들’ 은, 세속의 기준으로 볼 때에 출세와 성공에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해로운 것’ 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만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은,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긴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가지고 있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즉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7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물처럼 아끼는 것들을 신앙인들이 쓰레기처럼 버리는 것을 보면, 신앙인들이 자기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요한복음 15장 19절) 그런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한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복음 14장 28절부터 30절) 이 말씀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다면 시작도 하지 마라.”라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다가 어떤 이유로 중간에 멈춘다면, 그래서 그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남아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 것이고, 그러면 ‘멸망’ 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근처까지 갔더라도, 그 나라 입구의 바로 앞까지 갔더라도 들어가지 못하면, 또는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는 것이 아니면 죽는 것입. 신앙생활을 하다가 냉담을 하거나 다른 종교로 넘어간 이들이, “나도 전에는 성당에 다녔었는데...”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전에 다닌 적이 있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회개’ 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회개한 적이 있었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회개하는 삶’ 은 항상 ‘바로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복음 14장 31절부터 32절)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맞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죄입니다.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코헬렛 12장 1절)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렛 12장 7절)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은, 패배도 굴복도 항복도 아닙니다. 죽어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먼지 같은 피조물의 운명을 극복하는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복음 18장 14절) ‘모든 사람’ 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그 뜻은 내가 응답하고 노력해야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33절)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게 내 마음속과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면 끊어내야 할 것. 욕심, 이기심, 자존심, 명예욕 같은 것들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너무 어렵다.” 라고 불평할 사람도 있을 텐데, 불평만 하지 말고,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또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의 기도]

모든 즐거움은 잠깐입니다. 모든 고통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영원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고백의 기도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과 축복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설명하지마라. 친구라면 설명할 필요가 없고, 적이라면 어차피 당신을 믿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엘버트 허버드>


♡2610회 믿음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만듭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10월10일<히브리서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고뇌 없이 정신적 성장이란 있을 수 없고 인생의 향상도 불가능하다. 고뇌는 생활에 있어서 필요불가결의 유익한 존재이다.''

《10분의 기적》

첫째, 아침에 10분만 일찍 일어나십시오. 하루가 내 손 안에 들어옵니다.
둘째, 10분만 더 잘 씹어드십시오. 만병이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셋째, 10분만 먼저 출근하십시오. 업무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갑니다.
넷째, 10분만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십시오. 관계를 주도적으로 맺게 됩니다.
다섯째, 10분만 화를 가라앉히고 생각한 후 말을 하십시오. 다툼이 더 좋은 사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여섯째, 10분만 하루를 돌아보고 잠자리에 드십시오. 오늘의 기쁨과 보람이 내일로 이어지며 오늘의 실수가 내일 되풀이되지 않게 됩니다.
일곱째, 10분만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 데 쓰십시오. 사랑과 감사의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여덟째, 10분만 더 걸으십시오. 건강이 찾아옵니다.
아홉째, 10분만 잡담과 불필요한 인터넷과 전화를 줄이십시오. 하루가 여유로운 중에 집중될 것입니다.
열째, 10분만 더 웃으십시오. 이웃님의 삶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선 ‘주님의 종’ 이 됩니다. 계속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엔 주님의 종이 된 것에 ‘감사’ 해 합니다. 사탄의 종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꾸준히 기도’ 한다고 마무리하십니다. 기도는 무언가 청하는 것. 그런데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것.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려 찾을 때 조금 찾다가 포기한다면 그 물건이 거기에 있을 것이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찾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재판관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재판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끊임없이 청하자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준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주님의 기도’ 를 알려주신 다음에 해 주셨다.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바쳐야 한다고 하시며 밤에 빵 세 덩어리를 얻으려고 친구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린다는 비유입니다. 세상의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금 이 순간 끊임없이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것들도 들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하게 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겐 믿음이 있는 것. 이처럼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른 것처럼, 기도하며 주님을 뵈면 나에게 영향이 오지 않을 수 없다.

한 노인 신자분이 아침 일정한 시간이 되면 성당에 기도하러 오셨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것이었다. 본당 신부님은 ‘단 1분이라도 좀 앉아계시지’ 라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어느 날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여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그 병원에 찾아간 신부님은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신부님이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좋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는 기도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체 대전에 나가 ‘예수님, 저 왔어요’ 라고 인사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당에 갈 수 없으니 그분이 매일 찾아오셔요. 제 이름을 부르며 ‘요셉아, 내가 왔다’ 라고 인사하고 가십니다. 아침마다 예수님께 이렇게 인사를 받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보상을 받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그 보답이 ‘성령’ 입니다. 만약 그 보답을 받았다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은 기도 안에서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청년이 코로나로 성당에 나가지 못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미사에 다니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요즘 안 좋은 일도 있고 해서 한 달 정도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일도 꼬여 화를 많이 내게 되고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도 하게 되었다는 것.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기도 안에서 받아오던 것이 끊어졌을 때 꾸준히 기도하던 사람은 대번 그 은총의 끊어짐으로 오는 고통을 체감합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 고프고 물을 안 마시면 목이 타는 것처럼 너무도 명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도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죄명은 ‘낙담시키는 자’ 라는 것이었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불안한 말을 떠벌리고 다녔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반역죄가 적용되었다. 우리 안에도 끊임없이 ‘기도하면 뭐해?’ 라고 반역을 일으키는 자아의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꾸준한 기도는 이 자아의 목소리를 이겼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만듭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것. 아침, 저녁으로 주님의 기도 꼭 한 번씩이라도 바치며 성령을 청합시다. 지옥에 가면 하루 단 2분도 꾸준히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 청해서 은총을 받아보기만 한다면 절대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기도가 꾸준하지 않다면 아직 믿음이 없는 것. 하루 가장 적게 기도한 시간이 나의 믿음의 정도입니다. 기도를 몰아서 많이 하는 것보다 짧더라도 꾸준한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최소한의 기도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도록 합시다.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꾸준함’ 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머물면서 ‘기쁘게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아프지 말고 살아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용기가 모든 사물에 새로운 모양새를 부여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