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1회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삶이지만 환경을 극복하는 것도 삶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1일<에제키엘서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어서 누구나 잘 하고 있지만, 이참에 나는 여러분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도록 요청한다.'' 《환하게 웃는 사람을》 친절은 사람을 기분 좋게도 하지만 때론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찿아 그 안에 만족하면 삶은 행복해 집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걸려 있는 행복을 바라보며 오늘을 불행하다고 하지 말고 손 닿는 곳에 있는 행복을 가까이 두고 언제나 행복하게 사세요.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한해가 끝나갈 무렵 바로 그때가 시작하던 때보다 나았다고 느끼는 것.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데 환하게 웃으며 사는 사람을 보면 그 행복이 나한테도 전해옴을 느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하면서 살면 그 일이 자유를 주고 여행을 주고 행복을 줍니다. 그대는 지금 어떤 마음을 먹고 있습니까? 물론 풍경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세상이겠지요. 마음을 닦는 사람은 스스로 비굴하지도 않고, 또 스스로 뽑내지도 않습니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오늘의 슬픔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꿉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람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전화위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곁에 힘을 합칠 다른 그대가 있어 그대 삶은 행복한 것.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목표를 갖고 끝없이 노력한 뒤에 얻을 수 있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은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것.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 중 하나가 즐거운 인간관계입니다. 존중하고 존중받는 삶을 주위 사람들과 만들어가세요. 인간은 자기가 남을 존경할 때만 존경받을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은 삶에 의욕을 불어넣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하는 생각하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남보다 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살 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남들이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일을 해내면 자신이 꿈꾸는 일을 해낼 수 있다. 시련은 시련 당하는 사람을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보석공과 같은 것. 독수리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까지의 연습은 몇 번이고 강풍때문에 그 약한 날개를 지상에 처박는 일입니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면 독수리라 할지라도 지상을 기어다니는 일밖에 못할 것.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영원히 추방하는것이 아주좋아요. 일의 폭을 넒히려 하는 모험은 마음의 폭도 넓히고 자기 인식에 풍경을 더해줍니다. 아직 세상에 최초가 될 수 있는 것이 많다. 그 중에 그대를 위한 것도 있다. 그대 몸의 주치의는 의사여야 하지만 그대 삶의 주치의는 그대 자신이여야 합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삶이지만 환경을 극복하는 것도 삶입니다. 용기는 그대속에 있다 그 용기를 썩히지 말고 그대 삶에 활용하는 사람이 되세요. 그대가 모든 것을 버려도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결코 그대가 모든 것을 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사람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녹아서 작아지는 비누가 되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로주신 오늘도 행복하게 시작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나는 해 떨어지면 아무것도 먹지 않을 거야.” 라고 말했고, 두 번째 사람은 “나는 해 떨어진 뒤에 배가 고프면, 우유와 물만 마실 거야.” 라고 말했다. 이 두 다짐 중에서 어떤 다짐이 목표에 달성할 가능성이 클까요? 두 번째 사람의 다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도에는 목표 의도와 실행 의도가 있다. 그런데 목표 의도에는 단순히 바라는 결과 상태만 들어 있고, 실행 의도에는 상황과 행동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른 행동을 구체화하는 실행 의도가 있을 때, 목표에 달성할 가능성에 가까워진다는 것. 사실 우리는 목표 의도만을 세우고 있을 때가 참 많다. 그래서 작심삼일이 되고 마는 것. 금연하겠다. 절주하겠다. 운동하겠다. 살을 빼겠다. 등등의 목표 의도만 내세우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정말로 나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상황과 행동이 들어있는 실행 의도를 담아야 할 것. 이는 우리 신앙인들도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하늘 나라에 가겠다는 목표는 있는데, 그 실행 의도는 있을까요? 그냥 막연하게 하늘 나라에 가겠다는 말만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를 내리십니다. 재판정으로 가는 길에 합의를 보아 소송을 피하지 않으면 결국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거기서 끝내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지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 한 일을 재판관이신 그리스도의 판결을 결정합니다. 우리에게 빚이 있다면, 그 빚이 많든 적든, 재판관은 우리를 우리의 주인인 채권자에게 맡길 것이고, 우리는 그 빚을 모두 갚기 전에는 풀려나지 못할 것. 우리의 빚이 많든 적든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이 탕감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탕감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기 빚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이 빚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 빚을 미리 갚아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빚을 미리 갚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실행 의도를 실천하는 것.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목표 의도에서만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실행 의도가 더 해지고 더 해질 때, 우리의 목표 의도도 이룰 수가 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쁜 위로’ 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정신신경학과 애덤 캐플렌 박사가 소개한 우울증 환자에게 건네서는 안 될 여섯 가지 말이 있다. “힘내.”, “네가 감정을 잘 다스려야지.”, “가족을 생각해.”, “네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네 심정 알아.”, “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어.” 어떻습니까? 솔직히 이 글을 보고서 뜨끔했다. 저 역시 평소에 종종 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이지만, 아무 위로나 가능한 것은 아닐 것. 좋은 위로,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심에 감사드리며, 그분께서 항상 우리들과 동행함으로써 지금도, 먼 훗날 생애 마지막 날에는 크게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나의 실제적인 독서 법칙은 세 가지다. 첫째, 1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다. 둘째, 유명한 책만 읽는다. 셋째, 좋아하는 책만 읽는다.'' <랄프 왈도 에머슨> |
| ♡2592회 “나는 지금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2일<에제키엘서 21장부터> 마크 트웨인은 ''허구는 가능성에 매달려야한다. 진실은 그렇지 않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양심은 마음의 방을 밝히는 등불이오니 그 불빛을 가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양심은 마음에 가득 찬 하느님 말씀의 메아리오니 작은 양심의 소리에도 주의 깊게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게 하소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는 기뻐하리라."(요한복음 14장 18절)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복음 22장 37절부터 40절)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곧 신앙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절대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또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가장 큰 계명’ 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계명의 근본정신’ 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 번째, 두 번째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명’ 은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계명의 근본정신’ 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 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인데,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너희를 사랑하시니 너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장 9절부터 10절) 아버지와 아드님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일과 같다.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마음이 자꾸 다른 곳을 향하거나, 쓸데없는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거나, 두 마음을 품거나, 마음이 불순한 것들로 오염되어 있지는 않은가?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의 예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에 나오는 ‘가시덤불’ 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복음 13장 22절) 여기서 말씀의 숨을 막아버린다는 말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심각하게 방해한다는 것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다. 마음이 걱정거리들 쪽으로 쏠려 있거나 유혹들 때문에 흐려져 있으면, 여러 갈래로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서 7장 15절.19장 21절부터 24절)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머리로는(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가는 때가 있다. 마음이 내 의지대로 통제가 안 되고, 이성과 마음이 충돌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비참한 심정이 될 때가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 해법으로 ‘믿음과 기도’ 를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서 7장 25절) 이 말에는,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느님(예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성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상태를, 또는 걱정들과 유혹들을 믿음과 기도로 극복할 수 있고, 그러면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어서 기도를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기도를 하란 말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가 안 된다면,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마귀가 끈질기게 방해하겠지만, 그 방해를 이기려면, 또 그 마귀를 물리치려면 우리 쪽에서도 더욱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마르코복음 9장 29절).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가 있고, 그런 일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웃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한다.” 같은 무정한 말만 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죽을 것처럼 힘든 사람은 “힘들어 죽겠다.” 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덜 힘들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체력이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고, 사랑이 부족한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믿음에는 감격이, 감동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지고, 그러한 죄인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지혜로운 마음은 계속 무언가를 배울 여유를 가진다.'' <조지 산타야나> |
| ♡2593회 말투란 말을 담는 그릇이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3일<다니엘서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이면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오늘이 일 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 당신이 입는 옷이 개의 감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마치 좁은 줄무늬 셔츠가 그들을 불편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같은 말도 듣기 싫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투가 퉁명스럽거나 거친 용어를 사용하거나 목소리가 유난히 공격적일 때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말투가 좋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된다. 당신의 좋은 말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하면 듣는 사람은 "나한테 화난 것일까?" 라고 오해할 수 있다. 당신의 거친 말투는 당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를 겁주려는 것일까?" 라는 메시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말이란 내용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도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당신이 속마음과 달리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한다면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을 것. 남편인 당신이 결혼 전과 달리 결혼 후 퉁명스러운 말투를 사용한다면 아내는 당신의 애정이 식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상사인 당신이 부하직원을 아끼면서도 욕을 섞어 거칠게 말하면 부하직원은 당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장성한 자녀인 당신이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한다며 "담배 좀 그만 피우세요. 큰일나고 싶으세요?" 라고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 부모님은 당신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내가 나이가 들어서 자식 간섭이나 받는다" 라는 슬픔에 빠질 것. 따라서 당신은 칭찬할 때와 꾸짖을 때 걱정할 때와 간섭할 때 등 경우에 따라 말투를 달리해야 한다. 말투란 말을 담는 그릇이다. 물을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세숫물로 보이기도 하고 먹는 물로 보이기도 하듯 말투는 그 나름대로 독립된 의미를 지닌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말투는 어떠한지 묵상해 보시고 고은 말, 다정한 말로 미소 천사가 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전에 자녀의 사춘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분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했어요. 정말로 혹독하게 사춘기를 보냈거든요.” 라고 아이의 엄마가 말하는 것. 종종 “우리 아이는 사춘기라는 것을 모르고 컸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많은 심리학자는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성장은 위기를 헤쳐나갈 때만 주어지기에, 사춘기가 없었다는 것은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한 가지는 ‘더 큰 위기’ 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기에 그때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 이 사실을 이 아이들의 부모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독한 사춘기가 온 것을 오히려 감사해했다. 어렸을 때의 사춘기가 성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대한 시각을 다시 갖게 합니다. 피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정면에서 부딪히고 이겨내야 할 것. 이때 삶은 또 다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루카복음 12장 35절)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육과 영과 정신이 깨어 있으라는 것.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언제 오시는지 알 수 없는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루카복음 12장 38절) 라고 하시지요. 이는 인간의 세 시기인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시기 내내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깨어 있다는 것은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새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참 많다. 암과 같은 중병,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 오해나 순간의 실수로 생기는 불명예의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 큰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것. 분명히 큰 고통이여 지금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시련입니다. 이를 마주했을 때 보이는 반응이 보통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통과 시련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이런 유형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고통과 시련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며 견디어 내는 사람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 내기가 힘들어 술이나 약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셋째,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며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안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찾으며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삶의 기회가 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역사 안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도,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연민, 즉 하느님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은사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이 그대를 찾는 사람이 되라. 세상은 반드시 그대에게 양식을 주리라.'' <랄프 왈도 에머슨> |
| ♡2594회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 - 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3일<호세아서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건강은 제일의 재산이다.'' 《하루를 잘 사는 비결》 그날 하루를 잘 사는 비결은 그 시작에 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모든 일을 할 때 사람에게 존경받으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찬미할 목적으로 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무기력하게 목숨을 ‘빼앗긴 일’ 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일’ 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음 10장 11절)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응 10장 15절)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복음 10장 17절부터 18절)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나,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같은 일로 보일 것.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서 ‘권한’ 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당신의 권한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 목숨을 ‘내놓는 일’ 은 ‘빼앗기는 일’ 과는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박해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실 때 그 일의 진행을 거들어 준 도구가 된 셈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설명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살인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서 2장 2절) 그 제물에 대한 권한은 아버지 하느님에게만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과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신비’ 에 속한 일, 즉 하느님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가 우리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생활도 각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바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서 12장 1절부더 2절)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 백성의 여론을 걱정했습니다.(마태복음 14장 5절) 요한을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자기의 권력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고 슬퍼했더라도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켰을 것. 그러자 헤로데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다. 여기서 ‘바리사이 몇 사람’ 은 헤로데가 보낸 사람들일 것.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마도 실제로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 라는 협박이었을 것. ‘이곳’ 은 헤로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여우’ 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교활함을 꾸짖으신 것이기도 하고, 헤로데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과 내일” 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 기간을 가리키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가리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 를 가리킵니다. 그 ‘때’ 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7장 30절) 여기서 ‘그러나’ 는 ‘그렇기 때문에’ 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 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에 관해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복음 5장 36절)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복음 17장 4절)라고 기도하셨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일이 실패로 보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는 것뿐이고, 그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언자’ 는 넓은 뜻으로 ‘하느님께서 어떤 임무를 맡겨서 세상에 보내신 사람’ 을 모두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도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은 헤로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임무 완수를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으신 특별한 도시입니다(루카복음 24장 47절).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을 말해주고 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보다는 다른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싸운 적이 많았다. 믿음, 성령, 진리, 구원의 확신에 의지하기보다는 권력, 재물, 명예에 의지한 적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 바오로 사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가야하겠다. 비록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십자가와 죽음이 기다릴지라도 우리는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이고, 지고, 안고 은총의 어좌인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자비를 입고, 은총을 얻어 우리들이 바라는 적당한 때가 되면 주님에 도움을 입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열의 없이 성취된 위업은 하나도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 |
| ♡2595회 겸손은 당당함과 함께 가고 교만은 비굴함과 단짝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5일<아모서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역경은 청년에게 있어서 빛나는 기회이다. 젊은 시절 고생은 발전의 밑거름이다.'' 《거룩하고 소중한 삶》 각자의 삶과 역사는 거룩합니다. 각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며 소중합니다. 영원히 이어질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살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를 지었다고 당신께 오지 말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분 앞에는 큰 죄도 없고 작은 죄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구분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정 우리는 많이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사람이 꼰대가 되는 이유는 현재와 이웃사랑의 가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받거든 항상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과거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교만’ 이 사람을 꼰대로 만든다는 것을 알려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이웃사랑에만 집중하려면 나 자신만 생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겸손’ 입니다. 겸손해지려 해도 잘 안 됩니다. 어느 순간엔가 윗자리를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겸손이 힘들까요?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더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은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면 겸손에 이를 수 없는 것.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조금씩 겸손하여지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가치를 오히려 교만으로 여겨 그냥 무시하고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종교와 한 번 비교해 보겠다. ‘불교’ 에서는 스님들이 불자들을 부를 때 ‘보살님’ 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구도자를 말합니다. 보살은 어찌 보면 부처가 되기 직전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스님들이 불자들을 들어 높이며 자신들이 먼저 합장하고 불자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로 치면 신자들을 거의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 스님들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아서 자신을 보살이라고 믿게 되면 교만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불러주지 않으면 스스로 그렇게 불림을 받으려고 명성을 구걸하게 됩니다. 그 비굴함이 나중에 스스로 자신을 부처로 만들려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보살 대접을 받으면 오히려 합당하지 않다고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고 더 보살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 개신교에서는 신자들을 부를 때 ‘성도님’ 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 부처가 되면 성불한 것이고 개신교에서 그리스도가 되면 성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성인입니다. 신자를 부를 때 이미 ‘성인’ 이라고 여기고 부르는 것. 개신교 목사님들은 교회를 ‘섬긴다’ 라고 말합니다. 성인들을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자신을 성인으로 섬겨준다고 교만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아무도 성인으로 여겨주지 않을 때 그 사람 스스로 그렇게 여겨달라고 거룩한 척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남이 보지 않을 때는 모든 죄를 짓고도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천주교도 이 모든 의미를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왠지 신자들을 부를 때는 그저 ‘신자’ 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믿는 자’ 라는 뜻입니다. 믿으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의미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 앞에 ‘평’ 자를 붙이며, 스스로 비하하듯이 ‘평신도’ 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평신도분이 사제들 앞에서 강의하실 때, 당신들은 사제들과 비교하면 아는 것도 없고 믿음도 부족하니 ‘평신도’ 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분의 말에서 평신도라는 말이 성직자들이 신자들과의 구분을 두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라는 비판이 담겨있음을 느꼈습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사제들이 신자들을 평신도라고 부를 때 신자들은 겸손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뭐가 잘나서?’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제들 앞에서 자신들도 사제들과 같이, 혹은 더 나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스스로는 평신도라고 말하며 성직자들과 차이가 난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런 비굴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겸손은 당당함과 함께 가고 교만은 비굴함과 단짝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겸손해지고 당당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 불려도 된다고 말하면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해도 되고, 또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성체를 하느님이라고 해도 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왜 우리는 하느님이라 하면 안 될까요? 겸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당당함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비굴하게 ‘그저 나는 조금 믿는 신자입니다’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것 이상은 살고 있어서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이웃을 높여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살이요 성도를 넘어서 이미 부처가 되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온종일 내가 예수님이라 믿고 살아보십시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겸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나 자신을 미리 낮추는 비굴함은 오히려 교만으로 표현됩니다. 가난하기만 해서 부자들에게 비굴하게 돈을 구걸하던 사람이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비굴해지기를 바랄 것이고 그래서 교만하게 첫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그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하느님처럼 부를 수는 없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나 성체처럼 여겨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겸손하게 될 것. 구약성서에도 야훼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고 했다.(잠언 3장 34절; 18장 12절)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약이다. 라틴어의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노자도 겸손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한번도 높이 가려하지 않으며 그릇에 담으면 그릇 모양대로 자신을 베푼다고 했다. 겸손과 겸양은 참으로 좋은 덕이다. 누구든 이 덕을 한번이라도 행한 사람은 그 놀라움을 알고 있을 것. 겸손과 겸양은 사람을 결코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은 오히려 자유를 선물로 받는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여기서 자유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 겸손은 의기소침도 아니고 자의식에 대한 결핍도 아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에 대한 기쁨이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은 나보다 너를 먼저 찾고, 너보다 하느님을 먼저 찾는 사람이다 [오늘의 기도] 주 예수님, 당신의 큰 십자가 상처로 저희의 작은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믿습니다. 이제 그 당신의 큰 상처로 주신 치유로 우리들 마음 안에 기쁨이 넘치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씨를 뿌리면 거둬들이기 마련이다. 남을 때리면 당신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 남을 도우면 도움을 받을 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
| ♡2596회 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그만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어질 것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6일<아모서 1장부터> 피에르 샤롱은 ''친구의 충고는 신중하게 곱씹어 받아들어야 한다. 옳건 그른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친구의 충고를 무조건 따라서는 안된다.'' 《'노(no)' 를 거꾸로 쓰면》 '노(no)' 를 거꾸로 쓰면 전진을 의미하는 '온(on)' 이 된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아 내어라. <노먼 빈센트 필> 인생의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열쇠가 있다. 우리가 그 열쇠를 알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에겐 만사가 부정적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늘 긍정적으로 보고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에겐 모든 게 가능성이며, 모든 일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능치 못한 일이 없음을 믿습니다. 'NO' 가 아니라 'ON' 입니다. '자살' 이 아니라 '살자' 입니다. 당신은 지금 'NO' 입니까? 'ON' 입니까? 우리가 감당치 못할 때에는 반드시 피할 길이 있습니다.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아낼 수 있는 능력있는 그대이시길...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마치 “저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었으니 저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부러워하며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생각을 조금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을 알려면 고통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진정한 고통이 아닐 수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시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몸의 고통이 불행이라고 믿는다면 젊고 예쁜 나이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한 뒤에도 지금 행복하여 자신은 이전의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지선씨를 보면 될 것. 혹은 못생기고 병이 들고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야 했던 김희아씨를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불행과 고통은 다른 곳에 있다. 불행과 행복을 조금 더 본성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다. 불행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불행과 고통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 정태춘씨 노래에 ‘우리들의 죽음’ 이란 제목이 있다. 이 곡은 1990년 3월 실제 발생했던 어린 남매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애절한 멜로디와 슬픈 가사로 표현한 곡입니다. 서울 지하 셋방에서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힘에 겨워 서울에 올라와 지하 셋방을 얻어놓고 맞벌이를 하던 중이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방에 두 아이를 놓고 혹시 부엌에 칼을 만지거나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성냥으로 불장난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사고가 발생한 것.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 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인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오직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세상에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 두 번째 고통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아의 본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기쁜 것을 우리 기쁨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아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산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마를린 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였고,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많은 부자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자유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이런 공허함을 마를린 먼로는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다고 표현했고 헤밍웨이는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표현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항상 다 채워져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세 번째 고통은 더 큰 행복이 무엇을 따름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 자신이 인간일 수도 있음을 믿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늑대의 그것을 정확히 닮아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성모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셨던 것일까요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부르실 때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였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셨던 것. 그 뜻을 따르는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건 여행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위 세 개의 인간의 큰 고통을 넘어서는 참 기쁨이었다. 우리에게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하느님의 뜻’ 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에게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뜻인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행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어떤 실행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많은 경우 말로 사람의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그런데 만약 말하는 능력만 있고 듣는 능력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 봅시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댈 것. 거기엔 말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물원의 동물이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같아질 것. 말이라는 것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언어행위에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말을 잘 하지만 듣는 것에는 서툽니다. 잘 들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 있다. 특히 진리를 행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 순명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나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에 대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그만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주 예수님께 감동을 드려보시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를 적당한 때가 되면 덤으로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한 선물까지도 받는 하느님의 은총의 때가 임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가끔 우정의 척도는 피해를 주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너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능력이다.'' <랜디k, 멀홀랜드> |
| ♡2597회 저와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는 ‘지금 이 순간, 여기’ 뿐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7일<요나서 1장부터> 웨인 다이버는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든 절반의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것입니다. 당신이 하는일에 대해 다른 사람의 찬성을 얻고자 한다면, 당신은 이미 비참해질 운명인것입니다.'' 《내 영혼을 울리게 하는 글》 하늘에게 소중한 건 별 입니다. 땅에게 소중한 건 꽃이며 나에게 소중한 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입니다. 내가 힘들어 지칠때 빗방울 같은 눈물을 흘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못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보여 줄수 있다. 난 그대를 만날 때보다 그대를 생각할 때가 더 행복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혼자 넓은 바다에 홀로 남은 기분이 들 때 나에게 힘이 되어줄수 있는 그런 나룻배가 되어주세요. 언제부터인가 내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인 것 같다.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하면 자기가 살고있는 집의 하늘 위에 별이 뜬데요. 오늘 밤에 하늘을 좀 봐줄래요. 하늘 위에 떠 있는 나의 별을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대를 지켜주기 위함입니다. 나는 언제부턴가 하늘이 좋아졌어요. 이유는 이 하늘 아래 당신이 살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며 그런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언제나 바라볼수 있는 곳 그 곳에서 항상 제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 언제나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갈 것. 다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대를 위한 나의 작고 소중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아주 소중한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사랑입니다. 나무는 그늘을 약속하고, 구름은 비를 약속하는데, 난 당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난 오늘도 기도합니다. 오늘 역시 당신의 하루가 잊지못할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쁜 하루 중에 나의 목소리가 당신에게 잠시동안의 달콤한 휴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과 내가 만나서 숱한 그리움 속에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 고백할께요. 당신을 언제까지나 사랑한다고 아침햇살이 아무리 눈부셔도 내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제겐 큰 행복입니다. 소리없이 내리는 새벽 가랑비처럼 내 사랑도 당신곁에 내리고 싶습니다. 구두장이 <세몬>의 가게에 <미하일>이라는 청년이 수선공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땅으로 쫓겨난 천사입니다. 그가 풀어야 할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사람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문제를 풀면 미하일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이야기 안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당신도 이 문제를 풀고 그 해답대로 산다면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 한 번 풀어보시겠습니까?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운명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큰 창고를 다시 짓고 곡식과 재산을 쌓아둘 궁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그는 다음 날 아침 해 뜨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다. 한 시간 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것. 저와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는 ‘지금 이 순간, 여기’ 뿐입니다. 한 시간 후 나와 당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서 사랑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가장 지혜로운 재화의 사용은? 자신이 가진 재물이나 재능이나 시간을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고 세상을 떠나는 것.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진정 내 것이고, 남겨둔 것은 누구의 치지가 될 지 모르는 일, "주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진정 필요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고 떠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회와 지혜와 넓은 마음을 불어넣어 주시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오늘의 기도] 우리들이 주 예수님께 감동을 드려보시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를 적당한 때가 되면 덤으로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한 선물까지도 받는 하느님의 은총의 때가 임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가끔 우정의 척도는 피해를 주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너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능력이다.'' <랜디k, 멀홀랜드> |
| ♡2598회 “인생은 허무한 여행일 뿐이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8일<즈카르야 1장부터> 우디 앨런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건 새로운 일을 전혀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다.'' 《인연 통장》 어느 날 문득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확인한 적이 있다. 그 많은 번호 중에 몇 번이나 통화를 하고 몇 번이나 만났을까? 정작 필요할 때 거침없이 전화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니 많지 않았다. 우리는 살면서 인연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 소중한 인연들을 너무 쉽게 보내거나 방치해서 멀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지금 인연 통장에 저축되어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요? 따뜻한 마음을 속 깊은 배려를 아름다운 사랑을 많이 저축해 놓은 사람은 마음 부자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인연은 그렇게 쌓여 갑니다. 이 특별한 통장 하나 잘 간직하고 싶다. 당신의 인연 통장에 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연 통장에 오래오래 당신이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몰라도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 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또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요한묵시록 7장 2절부터 4절) 여기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도 ‘상징’ 이고, 십사만 사천 명도 ‘상징’ 입니다.(‘144,000’은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 으로 풀이되는데, 성경에서 ‘12’ 는 ‘완전함’ 을 상징하고, ‘1,000’ 은 ‘아주 많음, 충만함’ 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144,000’ 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그 수가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실제 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요한묵시록에는 ‘십사만 사천 명’ 을 언급한 뒤에 다음 말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요한묵시록 7장 9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십사만 사천 명’ 이 실제 수가 아니라 상징이라는 근거가 되고, 또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 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 상징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들’ 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복음 13장 24절)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묵시록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간다.”, 또는 “적은 수의 사람만 들어간다.” 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이론적으로는, 자격만 갖추면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격을 갖추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들어가는 사람의 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닌가?” 입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루카복음 13장 28절) 밖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밖에 있는 사람들’ 은 스스로 ‘밖’ 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 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고, 응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즉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여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밖에 있는 자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고집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뒤늦은 후회와 절망에 빠질 것. 요한묵시록은 ‘안에 들어간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요한묵시록 7장 14절)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큰 환난’ 은 종교박해를 가리키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는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는 말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믿음’ 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을 실행하는 믿음을(마태복음 7장 21절)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요한묵시록 7,15-17) 이 말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행복과 안식은 지상에서의 인생의 고단함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편 10절)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인생은 허무한 여행일 뿐이다.” 입니다. 오래 살았든지 짧게 살았든지 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든지 그렇게 살지 못했든지 간에, 인생이란 결국에는 먼지처럼 사라지는(시편 90편 3절부터 6절) 고달픈 방랑일 뿐입니다. 그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노력하면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성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행복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서 8장 18절)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20절)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서 8장 24절부터 25절) [오늘의 기도] 살아있음의 가치로 전체를 보시는 주 예수님을 소망하고 따름으로써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까닭에 실수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괴테> |
| ♡2599회 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29일<마태복음 1장부터> 찰스 핸디은 ''굶주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저차원의 굶주림이고 다른 하나는 고차원의 굶주림이다. 저차원의 굶주림이란 돈에 대한 것이고, 고차원의 굶주림이란 삶의 목적에 대한 것이다.'' 《주옥같은 향기로운 말》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말을 하는데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평생 5백만 마디의 말을 한다는 것. 원석도 갈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듯 말도 갈고 닦고 다듬으면 보석처럼 빛나는 예술이 된다.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라. 그 곳에서는 히트곡이 여기서는 소음이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말에도 온도가 있으니 썰렁한 말 대신 화끈한 말을 써라.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열 올리지 말고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라.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지 말라. 체로 거르듯 곱게 말해도 불량율은 생기게 마련이다. 상대방을 보며 말하라. 눈이 맞아야 마음도 맞게 된다. 풍부한 예화를 들어가며 말하라. 예화는 말의 맛을 내는 훌륭한 천연 조미료이다. 한번 한 말을 두번 다시 하지를 말라. 듣는 사람을 지겹게 하려면 그렇게 하라. 일관성 있게 말하라. 믿음을 잃으면 진실도 거짓이 되어 버린다. 말을 독점 말고 상대방에게도 기회를 주어라.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류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라. 말을 자꾸 가로채면 돈 빼앗긴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대방의 의견도 옳다고 받아들여라.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죽는 소리를 하면 천하장사도 살아 남지 못한다. 상대방이 말할 때는 열심히 경청하라. 지방방송은 자신의 무식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불평불만을 입에서 꺼내지 말라. 불평불만은 불운의 동업자다. 재판관이 아니라면 시시비비를 가리려 말라. 옳고 그름은 시간이 판결한다.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표정으로도 말을 하라. 조리있게 말하라. 전개가 잘못되면 동쪽이 서쪽된다. 결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감싸주는 것이 덕망있는 사람의 태도다. 편집하며 말하라. 분위기에 맞게 넣고 빼면 차원높은 예술이 된다. 미운 사람에게 각별히 대하여라. 각별하게 대해주면 적군도 아군이 된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 자신의 가슴에 명중된다. 재미있게 말하라. 사람들이 돈내고 극장가는 것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선한 말로 기분좋게 해주어라. 그래야 좋은 기의 파장이 주위를 둘러 싼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 듣고 싶어하는 얘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말에도 맛이 있다. 입맛 떨어지는 말을 하지 말고 감칠 맛나는 말을 하라.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말하라. 속으로 웅얼거리면 염불하는지 욕하는지 남들은 모른다.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말라.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라.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면 올바른 말이 나오게 된다. 부정적인 말은하지도 듣지도 전하지도 말라. 부정적인 말은 부정타는 말이다.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열번이라도 물어라.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니다. 밝은 음색을 만들어 말하라. 듣기좋은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상대방을 높여서 말하라. 말의 예절은 몸으로 하는 예절보다 윗자리에 있다. 칭찬, 감사, 사랑의 말을 많이 사용하라. 그렇게 하면 사람이 따른다. 공통화제를 선택하라. 화제가 잘못되면 남의 다리를 긁는 셈이 된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다.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말을 하라. 대상에 맞는 말을 하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좋아하는 말도 다르게 마련이다.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말에는 지우개가 없으니 조심해서 말하라. 품위있는 말을 사용하라. 자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낸다. 자만, 교만, 거만은 적을 만드는 언어다.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말하라.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말라. 그것은 임종할 때 쓰는 말이다. 표정을 지으며 온 몸으로 말하라. 드라마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활기있게 말하라. 생동감은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원동력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하라. 그것이 승리자의 길이다.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라. 실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변명이 나쁘다. 실언을 했을때는 곧바로 사과하라 말에는 메아리의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말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말이 씨가 된다.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 말하는 방법을 전문가에게 배워라. 스스로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 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다. 아직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경우도 없다. 근심과 걱정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좋다.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기적’ 이라는 책이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 라고 하지만 부부는 엄연히 ‘이심이체(二心異體)’ 입니다. 단정하고 깔끔해서 좋았고, 자유롭고 편해서 좋았지만 결혼하면 깔끔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자유로운 것은 질서를 깨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몸을 가진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삶의 기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공동체는 부족함에도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오늘의 기도] 무관심을 벗어나 사랑의 맘으로, 감사의 맘으로 우리들 자신과 또 우리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받는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돈에 대한 욕구는 하위욕구이고, 참된 삶을 향한 욕구는 상위 욕구다." <메슬로우> 자신만의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자.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 그러나 돈은 필요한 것이다. |
| ♡2600회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9월30일<마르코복음 1장부터> 랄프 왈도 에머슨은 ''모든 인간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말씨나 행동 속에 드러나는 각 인물을 판단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는 최종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수수께끼가 된다. 그러나 그 열쇠가 발견만 되면 그 뒤의 예전 말씨나 행동이 우리들의 눈앞에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생각》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스럽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광고지를 살짝 떼어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선 추운 겨울벌판 같을 것. 이제 시작하는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 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때때로 향하는 길에서 지쳐 멈춰서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로 또다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은 한 닥친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불꽃을 강하게 피우는 마른 장작에 불과 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가는 너그럽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너희에게 이만한 믿음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들은 “한 말씀만 하시어 곧 낫게 됩니다.”라는 온전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응답으로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너 자신을 누구에겐가 필요한 존재로 만들라. 누구에게든지 인생을 고달프게 만들지 말라.'' <랄프 왈도 에머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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