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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봉사

♡2541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 ,

♡2541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2일(코린토2서 1장부터 )

  나폴레온 힐은 ''나는 하루하루 모든 면에서 더욱 더 성공한 사람이 되어간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꽃피게 하소서》

  비록 내가 가진 것 많지 않아도 주위 나보다 힘들고 아픈 이들을 두루 살펴 작은 마음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수많은 시련에 슬프고 힘들고 아팠던 어제가 나에게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희망의 등불이 되게 하시고 내 말 한 마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받은 상처 모두 사랑으로 품어 찬바람 이는 겨울지나 따사로움 속 고운 봄 향기 피어나듯 우리들 가슴 속에 사랑의 언어들로 한가득 피어나게 하소서. 서로에게 믿음 주는 밝은 인생을 살게 하시고 잘못된 소문들은 모두 땅에 묻고 올바르고 진실 된 언행으로 피어 모두 함께 사랑으로 어우러져 서로가 하나 되는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게 하소서. 물질적 부자 아닌 마음의 부자로 살아가게 하시고 물질로 얻은 행복보다 사랑으로 다져진 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말이나 글로 옮기는 사랑 아닌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꽃피게 하소서.

  미국에서 워싱턴 주 부시자로 활동하던 촉망받던 시각장애 정치인 사이러스 하빌의 이야기를 들었다.(미주가톨릭평화신문 9월 13일자 보도) 하빌은 어린아이였을 때 안구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였지만 시력을 상실하였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놀고 있을 때였다. 교장 선생님은 다칠 수 있으니 감시 카메라 앞에 있으라고 했다. 하빌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을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머리를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영혼이 다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도록 해 주십시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하빌은 어머니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도 정상인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친 적이 있지만 하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정치인이 되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하빌은 본당 신부로부터 ‘모든 것 안에서 계신 하느님 발견하기’ 라는 마틴 신부의 책을 선물 받았다. 정치인으로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하빌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다.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남은 삶을 사제로 살기로 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해서 살기로 했다.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영적인 장애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을 통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보다는 가난을, 건강보다는 아픔을, 오래 사는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인전을 읽으면 공주였던 분이 수도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군인이었던 분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정치인이 사제가 되기도 했다. 시각 장애이면서 정치인이 사제가 되었던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제의 길을 선택한 하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다. 만일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으셨다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없었을 것. 인류의 역사와 예술은 없었을 것. 비록 넘어지고, 다치고, 하느님과 멀어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와 욕심 때문에 차별하였다. ‘종교, 국적, 신분, 계층, 성별, 이념, 사상, 학벌, 지역’ 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하였다. 육체적인 장애를 ‘죄인’ 이라고 차별하기도 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카메라 앞에 세워 놓기도 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이야기였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젓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른 대답을 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 이 있을 것.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 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더욱 행복할 것.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에게 주어진 알맞은 십자가를 잘 안고 간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평소에 원하던 선물을 주시겠지요.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게 되는 주님의 평화가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승리는 언제나 싸움에서 물러서길 거부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나폴레온 힐>


♡2542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3일(갈라티아 1장부터 )

  찰스 F. 키틀링은 "처음부터 잘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실패, 또 실패, 반복되는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이정표다. 당신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당연히 성공도 없다. 사람들은 실패하면서 성공을 향해 나간다." 오늘은 내가 어떤 일에서 실패를 했는지 기억해보자. 실패한 기억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자신들의 운명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개개인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회 관념론이 오늘날에도 일반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자신들보다는 사회적 구조에다 그 탓을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28절) 당신께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금 살려주시는 분이시다.

 (마태복음 21장 28절부터 32절) 맏아들은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두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유다인들의 자세를 말한다. 즉 율법에는 ‘예!’ 하면서도 그리스도께는 ‘아니오!’ 라고 하는 모습이다. 두 가지 질문,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28절) 와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라는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경각심 내지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어떤 아들과 같은지 판단하게 될 것.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지를 잘 분별하고 있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두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초대에 인간들이 응답하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의미한다. ‘예!’ 하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인 존경에 의한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나중에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일치 행동이 그것이다. 맏아들은 무례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의 ‘뜻’ 을 받아들인 것.

  이는 또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는 추상적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식주의적 종교로서 의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요구를 실현하는 행동주의적 형태로 많은 수고를 치르는 형태이다. 처음에는 ‘아니오!’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나중에 힘겨운 자기반성과 생각을 바꾸어 다시 받아들인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29절).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종교를 만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같이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규정을 엄격히 지켰던(마태복음 23장 13절부터 32절)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 이 그들의 ‘뜻’ 과 일치할 때 쉽게 ‘예!’ 하며 응답하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의 뜻하는 길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반대하고, 그들이 예수께 한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까지 쓰기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였을 때, 그 뜻은 더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들 주변에는 강도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힘겹게 들릴 수도 있었을 것. 또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복음은 ‘해방’ 의 메시지로서 그들을 ‘아버지’ 의 집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복음은 그들의 인간적 품위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자신들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를 치명적인 모욕으로 느꼈을 것.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라고 하신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할’ 수 있으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올바르다’ 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이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첫째’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빛으로는 ‘꼴찌’ 가 될 수 있음(마태복음 19장 30절; 20장 16절)을 표현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범적 태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8절)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일치하신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5절) 하도록, 하느님의 뜻에 완전한 ‘순명’ 의 태도를 보이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 의심이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철저한 ‘예!’ 의 태도였다. '아니오!‘ 의 부정적인 태도도 아니었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예!‘ 의 태도가 아니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해관계로 빚어지는 내적 분열이며, 이기심과 교만에서 야기된다고 한다(1절부터 4절).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새겨주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든다.(6절부터 8절) 그러나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높이 올려주셨고’ 온 세상의 ‘주님’ 으로 세워주셨다.(9절부터 11절)

  하느님의 뜻에 대해, 하느님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선택과 이에 따른 철저한 응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담을 수 있으며, 그분을 닮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하겠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께서는 부러진 갈대인 저희를 꺾지 않으셨음을 하느님께서는 연기 나는 심지를 뜨지 않으셨음을 하느님께서는 늘 저희에게 희망을 걸고 계심을 그러니 걱정하거나 두려워말고 기도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자기 신뢰가 성공의 제1의 비결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2543회 “성공에는 재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재능은 타고나야 하는 반면, - 끈기를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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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4일(테살1서 1장부터 )

  유베날리스는 ''부자로 죽기 위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미쳐도 이만저만 미친 짓이 아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여건이 충분한데도 아까워서 쓰지 못했다면, 그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을 잃어버리고, 사람에 집착하면 사람을 잃어버리기 쉬운게 인생이다. 돈은 소유의 대상인 동시에 자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죽을 ? 후회하지 말고, 가진 돈 몽땅 쓰자. 단 멋있게, 그리고 가치 있게!

《행복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 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입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수종병자는 아마도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만들 양으로 그곳에 오게 되었을 것. 그러잖아도 자신이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죄인이라는 죄책감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을 것.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올가미와 속셈을 간파하셨을 것. 예수님의 마음은 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머물렀다.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져 안식일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나서는 부모의 마음, 주인의 마음으로 수종 앓는 이를 자유롭게 해주셨다. 

  율법의 요구보다 사랑의 요구가 앞서시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SNS에 자신의 일상을 올려놓는 사람이 많다. 맛있는 음식을 그리고 하루의 일상을 사진과 짧은 글로 올립니다. 또 여행에 대한 기록도 남겨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지금 힘든가 보구나. 어렵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잘 사는구나.’, ‘돈도 많아. 맛있는 것만 먹고 여행만 다니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모습만 다른 이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어렵고 힘든 모습보다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이런 것이나 올리는 철부지구나.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기 잘 산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까?’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더 힘들어서 그 반대의 모습을 올릴 때가 더 많다고 합니다. 한 부분만을 보고서 쉽게 평가하는 우리의 섣부름을 지워야 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더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지방 지도자로부터 안식일에 초대를 받으셨다. 이 자리에서 안식일 문제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지요.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라고 물으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의료 행위를 하나의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낼 수 없어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 더군다나 안식일 말고도, 사람을 고쳐 줄 수 있는 다른 날도 많은데 굳이 안식일에 고쳐줘야 하냐는 것.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영적 제물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바로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특히 바라봐야 하는 것은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수종을 앓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는 과연 안식일이라고 해서 병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1분 1초라도 빨리 병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을 것. 이렇게 사람의 마음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기준을 늘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 뜻에 맞게 온전하게 살 수 있다.

  심리학자 안젤라 리 더크워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재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어. 넌 머리가 나쁜 편이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그녀는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아버지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실험을 계획했다. 학생 130명에게 5분 동안 전속력으로 뛰게 했다. 이후 연구진은 40년간 이들을 추적한 것. 이들이 60대가 되었을 때, 직업만족도, 행복도, 연봉 등이 유난히 높은 사람, 소위 ‘성공한 사람’ 이라 부를만한 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40년 전 달리기에서, ‘더는 뛰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 몇 걸음이라도 더 뛴 사람’ 이었다. 그녀는 말합니다. 

  “성공에는 재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재능은 타고나야 하는 반면, 끈기를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의 기도]

  매 순간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 안에서, 그리고 자녀들에게 주어진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로운 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아침에 당신을 벌떡 깨울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한다.'' <빌리 와일더>


♡2544회 신앙생활은 그 초대장을 입장권으로 바꾸기 위한 생활입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5일(히브리서 1장부터 )

  니체는 ''자신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명령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목표를 갖는 것과 동시에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어쩌면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은 목표를 세우려 하지 않거나 남들에게 "나의 목표는 이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들한테 패배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목표를 세우지도 못하는 어리석음보다 훨씬 강하게 그 사람의 의지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나부터가 내 뜻대로 사는 것 보다는 남의 눈치를 보며 사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자.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우리가 간절하게 희망하고 원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는 것. 하느님은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초대장’ 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 은 간절하게 원하고, 자격을 갖추려고 충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초대장’ 을 주신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초대장을 입장권으로 바꾸기 위한 생활입니다. 초대장을 받기 싫다는 사람에게 그것을 억지로 주는 일은 없다. 초대장을 받아들이긴 했어도 입장권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밖에 남아 있는 것을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복음 22장 2절부터 5절) 이 비유를 겉으로만 보면,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임금이 사람들에게 사정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쪽에서 잔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임금에게 애원을 하고, 임금이 그 애원을 받아들여서 초대장을 주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잔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몇 사람이 안 온다고 해도 임금 쪽에서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가지 않고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간 것은, 눈앞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 자기들이 애원했던 일은 잊어버렸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자기들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임금이 아쉬운 상황이라고 착각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쉬울 때에는 하느님께 울고불고 하면서 매달리고, 아쉬운 상황이 지나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사실 그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참석을 거부했으니 그들은 자격을 영영 잃어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마태복음 22장 6절부터 7절)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살인자들에게 엄한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처벌한 일은,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자들을 처벌한 일이 아니라, 임금의 심부름꾼들을 죽인 자들을 처벌한 일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해서 결과적으로 참석하지 못한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것 자체가 처벌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복응 22장 8절부터 10절) 표현만 보면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무나 불러다가 잔칫방을 채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새로 초대받은 사람들도 초대받기를 원하고, 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복음 선포가 이스라엘에게 먼저 선포되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모든 민족에게) 선포된 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순서가 그렇게 된 것이고,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서 10장 12절부터 13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이 비유의 상황은 이렇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잔칫방에 들어갈 수 있는데,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려면 입장권을 받아야 합니다. 입장권을 받으려면 혼인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쫓겨난 그 사람은, 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가서 예복을 입을 틈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 없다.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예복을 입고 있었을까? 초대받기를 원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리 예복을 입고 있었거나, 아니면 초대를 받자마자 바로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었을 것. 초대에 응답하고 성당에 들어가서 앉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세례를 받았더라도 대죄가 없어야 성체를 받아먹을 수 있다. 잔치를 구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잔치 음식을 먹는 것은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할 수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구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자격을 얻은 사람만 할 수 있다. 그 자격은 ‘충실한 신앙생활’ 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비유에서 혼인 예복은 ‘충실한 신앙생활’ 을 상징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주 그리스도 예수님” 이라는 보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육신은 나약해지지만, 영혼에는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한 은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자기의 힘이 되지 않는 지식은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


♡2545회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면담자료]]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6일(야고보서 1장부터 )

  벤자민 프랭클린은 ''명작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예술가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남의 눈치나 보고 대충 ?우려는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능력의 100% 이상을 투자한다. "정직과 성실을 그대의 벗으로 만들라. 제아무리 친한 누구라도 그대 안의 정직과 성실만큼 그대를 돕지는 못하리라. 남의 믿음을 잃었을 때 사람은 가장 비참해진다. 사람은 백 권의 책보다 하나의 성실함에 움직인다."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연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치 말게 하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인생의 가치를 일깨우는 소설들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명성이 점점 더 올라감에 따라 그의 작품은 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부와 명예 모두를 얻을 수가 있었지요.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는 저택이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가 있었다. 은행에도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었다.

이렇게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부족한 것이 하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에 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이 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그의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1년 동안 알 수 없는 소리만 지르다가 4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말년에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모파상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모두 아무것도 갖지 못할 인생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갖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려고 지금 이 순간 힘을 쓰고 있습니까? 알면서도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을 구별하시기 위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 에 올 주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불충실한 종들은 자기 임무를 소홀히 했으므로 큰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죄는 몰라서 저지른 죄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따라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을 행하는 실수를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추구하는 부와 명예가 남지 않습니다. 남는 유일한 것은 ‘사랑’ 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을 강조하셨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것은 사랑밖에 없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고 하십니다. 

많이 준 것이 바로 사랑이었고, 많이 맡긴 것 역시 사랑이었다. 받은 만큼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것을 요구하시며, 우리에게 계속해서 청구하시는 주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파상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심리학자 데니얼 네틀의 연구 결과가 아주 흥미롭다. 그는 한 사람의 10년 후 행복을 예측하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를 조사했다. 나이, 건강, 가족 관계, 돈, 지위, 친구 등등 여러 가지 요소를 비교했지요. 이를 통해 미래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이 요소들이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미래의 행복을 예측하는 데는 정확도가 너무 낮았다. 

정확도가 높은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현재의 행복 지수.’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행복하냐에 미래의 행복이 좌우되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사람이 미래에도 행복하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을 희생해야 미래가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께서 저희를 사랑해주셔서,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계시는 자리가 축복된 자리가 되어, 보아야 할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말아라. 부를 얻는 것에 절망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안 좋다.'' <베이컨>


♡2546회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7일(요한묵시록 1장부터 )

  나폴레온 힐은 ''가장 열광적인 꿈을 꿔라. 그러면 열광적인 삶을 살게 된다.''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나 불행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그들이 궁지에서 벗어나 마음 편해지기 위해 즉각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물론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직면해야 하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면 책임을 떠넘기는 건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습관으로 굳어지게 된다. 

진심만을 말하라. 상대의 환심을 사면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상대는 늘 기분 좋게 느끼고 당신에 대해서 좋은 감정으로 갖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은 아부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또한 상대를 마음대로 하려는 얄팍한 술책이거나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아첨이라고 말한다. 칭찬과 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칭찬은 진심이 뒷받침 된 것. 따라서 칭찬을 할 때 칭찬 그 자체 외에 다른 뜻이 없는 진실한 마음은 눈빛으로도 알 수 있다. 

똑똑한 척하지 말라. 똑똑한 척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도 운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우선 똑똑한 척 행동하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그를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똑똑하면 이로울 게 없는 것.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선 감사하라. 당신 스스로 행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지금껏 당신이 이룬 것들을 열심히 생각해 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건강 가정 가족의 사랑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 고마워한다면 불행에 괴로워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분명한 유형을 알게 되고 더 많은 행운을 만드는데 주력하게 될 것. 

단정하게 차려 입어라. 단정하고 화려하게 차려 입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유행을 잘 따르는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 색상이나 잘 어울리는 옷차림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당신이 단정하게 매력적으로 차려 입으면 보는 사람들의 감각이 적극적으로 자극을 받아 당신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다. 

인내심을 가져라. 운 좋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마감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 어느 순간에 페달을 밟지 앓고 미끄러져 내려가야 할 지도 잘 알고 있다. 

질투심을 반드시 버려라.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감정은 질투심이다. 질투를 하면 스스로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적극적인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운과 기회를 망치게 된다. 질투심이 많아 보이면 당신은 결코 운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운 나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행운에 배 아파하고 인색하게 구는 것. 

마음을 편히 가져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삶이 뜻한 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는 어쩌다 힘든 날일뿐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오늘 너무 너무 힘들다면 내일은 더 밝은 날이 기다릴 것.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한숨 자고 나서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쉽게 풀리기도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가복음 14장 11절) 주님께서는 몸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그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셨다.(필리 2장 7절부터 8절)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코복음 10장 45절) 하신 대로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하셨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위엄에 대해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고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그런 위치를 당연히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혹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

“잘나가는 파리들만 모여 사는 높은 동네에 어느 날 밑바닥에서 놀던 파리 한 마리가 냉큼 날아들었다. 잘나가는 파리들이 물었다. ‘아니, 당신은 저 밑바닥 파린데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소?’ 그러자 밑바닥 파리가 말했다. ‘예, 줄을 잡았지요. 소꼬리를 꽉 잡고 있다가 소가 휙 꼬리치는 덕에 이곳까지 올라오게 됐죠.’”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줄을 잡아야 하나요? 줄을 잡고 올라온 것이 그리 배가 아프던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 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 는 생각입니다.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 하는 따위의 말은 물론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하고 겸손을 가르치셨다.

오늘 하루라도 겸손함으로 주님을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보서 4장 10절)

시편에는 “주님께서는 높으셔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신다.”(시편 138편 6절)고 적고 있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 은 겸손한 자의 '마음의 골짜기’ 로 흘러듭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겸손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것. 깊은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매 순간 다른 사람을 내 눈 잣대로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기다리지 마라. 시간은 결코 ‘ 딱 맞은 ’ 때가 되지 않는다.'' <나폴레온 힐>


♡2547회 ‘천사들과 성인들의 통공’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8일(창세기 1장부터 )

  랄프 왈도 에머슨은 ''정직은 가장 확실한 자본이다.''

《내가 가진것》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면 그것은 "만남" 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 빼면 그것은 "그리움" 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곱하면 그것은 "행복" 이며 내가 가진 것에 당신이 가진 것을나누면 그것은 "배려" 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과 당신이 가진 것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도 "하나" 라면 그것은 바로 ''사랑" 입니다. "사랑" 은 살아가면서 가장 따뜻한 인간관계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아끼고 또한 그 관계를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3월 오스트리아 잘쯔부르그 신학대학의 페르티난트 홀뵉 교수는 ≪천사론≫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여기서 교수는 오늘날 가톨릭신자들의 일상에서 천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의식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그렇다. 과거보다 현대에 들어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 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존재마저 의심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성전건축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중세기부터 근대 이전에 봉헌된 유럽의 성전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천사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이 요즘 현대식 성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행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에도 벌써 스며든 것인가?

홀뵉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부제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통공’ 을 언급하고 있는데, 천사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다.” 하고 외치면서(요한묵시록 4장 8절)

성인들과 함께 천상예배를 드리며, 지상에서도 수많은 영혼들과 함께 하여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그들의 기도를 하느님께 올려 바치고 때로는 영혼들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까지 한다는 확고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한 수많은 성인들이 천사, 특히 자신들의 수호천사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두드러졌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과 친교를 나누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성인들은 천사의 현존에 대한 계시된 진리를 직접 생활로 보여 준 사람들이다. 이미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와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천사의 현존을 교의상의 진리로 밝힌바 있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도 천사에 관한 진리는 교의상 최우선적인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내려온 고귀한 신앙유산임을 천명하였다.

이 신앙의 유산은 교회 스스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성서에 계시된 확고한 진리라는 것. 9월 29일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에 언급하였듯이, 천사의 존재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이며,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다.(마태복음 18장 10절 ; 히브리서 1장 14절)

신구약성서를 통틀어 볼 때 천사들은 하느님을 보필하는 천상에서의 역할 외에도 세상에 파견되어 인간을 도와주고 이끌고 지켜주는 등 하느님의 인간 세상에 대한 계획을 다양한 차원에서 수행한다. 특히 수호천사에 대한 공경과 신앙은 중세기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전례 속에 자리를 잡았고, 클레멘스 10세 교황(1670~1676)은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온 교회가 기념토록 하였다.

천사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천사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성과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하느님을 보좌하고 인간을 위해 수고와 도움을 주도록 창조된 순수 영적인 존재라는 것.

천사들의 숫자는 대략 세상에 사는 인간의 수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다니엘 7장 10절 ; 요한묵시록 5장 11절) 수많은 천사들이 다 같지 않고 서로 다르며, 그 가운데 등급이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실제로 천사들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것은 성서에 언급된 상이한 명칭들에서 드러난다.

케룹(창세기 3장 24절; 탈출기 25장 18절부터 19절 등 71번), 사랍(이사야서 6장 2절. 6절), 천사(창세기 19장 1절 ; 요한묵시록 5장 2절 등 321번), 대천사(1테살 4장 16절 ; 유다 1장 9절), 권세의 천신과 능력의 천신(로마서 8장 38절),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천신(콜로세서 1장 16절),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천신(에페소서 1장 21절), 커룹 천신(히브리서 9장 5절) 외에도 이름으로 명명된 미카엘(다니엘 10장 13절 ; 10장 21절 ; 12장 1절 ; 유다서 1장 9절 ; 요한묵시록 12장 7절), 가브리엘(다니엘 8장 16절 ; 루카복음 1장 11절.19장 26절), 라파엘(토비기 5장 4절 ; 6장 5절 ; 6장 7절) 등이 그것이다.

이를 근거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오스(200~265년경)는 구품(九品)의 천사들을 3등급으로 나눈 천사계급을 상상하였다. 소개하자면 1등급에 세라핌, 케루빔, 좌품천사가 속하고 2등급에 권품천사, 능품천사, 역품천사가 3등급에 주품천사, 대천사, 천사들이 속한다는 것.

천사들이 부여받은 이성은 인간의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고도의 인지능력을 구사하며 사물의 본성을 직관하여 통찰한다. 그들의 자유의지 또한 인간의 것보다 틀림없이 뛰어난 것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또는 인간에서보다 오용될 가능성이 높다. 성서에 등장하는 악마와 나쁜 영신들은 첫 인간(아담)의 경우와 같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죄를 저지름으로써 타락한 천사들이다.(이사야서 14장 12절 ; 2베드로서 2장 4절 ; 제4차 라테란공의회)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예수회 신학자 프란츠 수아레즈(1548~1617)는 하느님께서 천사들로 하여금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과 똑같은 흠숭으로 섬기라고 했을 때 자신들의 교만함으로 이를 거부한 천사들의 무리가 사탄과 악령들이 되었다고 추론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해주신 것도 모자라 모든 인간에게 각자의 수호천사를 붙여주셨다. 수호천사들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다.(히브리서 1장 14절) 천사들은 하느님의 파견명령을 절대적인 겸손과 순명으로 보필하면서, 그들이 섬겨야할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준다.

수호천사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① 위험과 화로부터 보호하며, ② 악마의 해로부터 지켜주며, ③ 선한 생각과 관심을 불어넣어 주며, ④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➄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 대전에 올려준다. 따라서 이런 수호천사와 함께 사는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마태복음 18장 10절)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런 점들을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손에 보호를 받는다.” 라는 축복이 베풀어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의 운명은 그의 성격의 결과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2548회 “회개해서 구원을 받아라.”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9일(창세기 26장부터 )

  랄프 왈도 에머슨은 ''악에 고통 받는 일이 없이 악을 행할 수는 없다.''

《기도》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라...(타고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낫다, 는 말이 있다. 고통은 우리네 삶의 일부입니다. 당연한 걸로 생각하세요. 神이 선물을 줄 땐 고통의 보자기에 싸서 준다고 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다가올 때. 아, 내게도 축복이 임하겠구나. 하고 감사해 보세요. 오늘 밤, 기도하실 때,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이겨낼 능력과 사랑의 마음"을 주십사고.

  ‘심판’ 이 아니라 ‘구원’ 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요한복음 3장 17절)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심판 예고 말씀’ 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호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해서 구원을 받아라.” 라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심판 예언’ 과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 와 그 회개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잘 나타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서 3장 4절)”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멸망한다.” 였을 것. 무조건 멸망한다는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예언이었다는 것. 그것은 사실상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예언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그 예언을 듣고서 단식하고 회개한 것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어떻든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했고, 심판과 멸망을 피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서 3장 10절) 

요나는 자기가 예언한 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요나서 4장 1절) 하느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이렇게 타이르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4장 10절부터 11절)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 은 ‘어린이들’ 입니다. 어린이들은 죄가 없고, 또 짐승들도 죄가 없다. 하느님은 짐승들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심판과 멸망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것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모습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또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 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그 용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용서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랑과 용서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복음 11장 29절부터 30절)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복음 11장 32절)

여기서 ‘이 세대’ 는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악한 세대’ 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에 빠져서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고 구조대원이 손을 내밀 때,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구조대원이 내민 손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고, 구조대원이라는 것을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면? 믿으면 사는 것이고, 안 믿으면 죽는 것.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좁은 뜻으로는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서 나온 일을 가리킵니다.(요나서 2장 1절)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요나의 예언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회개하여라.” 로 해석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 이라는 말을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러면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이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 ‘표징’ 이라는 말은,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 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증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루카복음 10장 21절)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시비를 거는 일이 많이 있다.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그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고 ‘어리석음’ 일 뿐이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은 ‘죄’ 일 뿐입니다. ‘철부지들’ 같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믿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지혜’ 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복음 11장 31절)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를 보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1열왕기 10장 1절부터 9절)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복음’ 에 비하면 솔로몬의 지혜는 하찮은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에 비하면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기도]

  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명하는 낚시대를 던져 우리들의 문제도 해결 받는 살맛나는 기적을 맛보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사람은 슬픔을 딛고 서고, 어떤 사람은 슬픔 밑에 깔린다.'' <랄프 왈도 에머슨>


♡2549회 사랑하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10일(탈출기 1장부터 )

  찰스 핸디은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만이 가진 생각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사촌이고 누구의 부모인가로 결정된다." 정체성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느끼는 것들 또한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들 중에는 물론 알게 모르게 강요된 엉터리 생각들도 있다.

《침묵 속의 사랑》

  나는 과거에 자신을 믿었고 자신에게 희망을 두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제 나는 오직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게 희망을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렇듯 단순하고 실증적인 진리의 총체적 적용은 참으로 어렵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침묵하는 것. 하느님께서 더 잘 들으시는 말은 침묵 속의 '사랑' 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뭔가 뚜렸한 것을 체험하거나 느끼려는 원의를 갖지 말고 사랑이 충만한 시선으로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하느님께 집중 사랑의 시선을 통해 영적 고요를 간직하십시오.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평화로운 고요 그 자체를 통해 말하십시오 (십자가의 성 요한) 영적 고요 속에서 하느님께 사랑의 시선을 집중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러면 차츰차츰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하느님의 평화와 안식이 거룩한 사랑에 감싸여 잇는 하느님께 대한 놀라운 최상의 인식과 더불어 당신의 영혼 안에 쏟아져 내릴 것. 당신이 독서를 통해 노력한다면 묵상을 통해 은총을 얻게 될 것이고 기도에 의탁한다면 관상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 결국 당신은 사랑의 시험대에 올려질 것.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사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터득하십시오. 나머지 일은 내맡기십시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은밀히 이루어지는 일은 그것이 하찮은 일일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루어지는 수천가지의 일보다 하느님께 더 기쁨을 드립니다. 사랑 때문에 여정에 오르는 동안 영혼은 피로하지도 않고, 남을 피로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까를르 까레또의 매일 묵상 중에서>

  누군가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 다시는 안 만나겠어.’ 가 아닙니다. 그보다 ‘그도 아프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아픔은 늘 산처럼 크고, 상대는 그냥 편하게 살면서 욕심만 부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 거절에 돌아온 아들의 대답은 문자 한 통이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를 찾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충격적인 이 문자 메시지에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 회사는 부도 처리가 되고 말았다. 정말로 아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아들의 상처, 아버지의 상처. 누가 더 클까요? 각자의 처지에서 가장 큰 상처일 수밖에 없다. ‘그는 아프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렇게 서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아픔만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힘있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평화의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습과 다르게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가족의 분열이 일어나게 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세상의 모습과 분리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마음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삶이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그도 아프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분리되는 곳에서 아픔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순간의 아픔에서 벗어나서 커다란 기쁨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됩니다.

어떤 꼬마 아이가 옷가게 들어왔다. 자기 엄마가 생일이어서 옷을 선물하고 싶다면서 자신이 지금껏 모았던 돈을 들고 온 것. 가게 주인은 아이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가지고 온 돈보다 훨씬 비싼 옷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신체 사이즈가 어떻게 되니?” 그러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 엄마는 완벽해요. 우리 엄마는 너무나 예뻐요.”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보통 사이즈보다 약간 작은,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입는 옷을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다. 그날 저녁, 아이는 자신이 사 간 옷을 다시 들고 왔다. 그리고 울상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해요. “엄마가 너무 작대요. 이 가게에서 제일 큰 것으로 바꿔오래요.”

아이에게 엄마는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였을 것. 왜 그럴까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오늘의 기도]

  부스러기 은총이라도 좋습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우리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샘물을 흘러넘치도록 받아 누리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벗을 최선의 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의 벗과 적대할 때 그대의 마음은 벗을 더없이 가깝게 여겨야 한다.''
<프레드 리히 니체>


♡2550회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8월 11일(탈출기 21장부터 )

랄프 왈도 에머슨은 ''아무리 위대한 일도 열심히 하지 않고 성공된 예는 없다.''

《집착을 벗어놓고...》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처럼 여기며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아 소유하며 삽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 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잠시 온 것을 '내 것' 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 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 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 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다. '나' '내것' 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 나' 가 드러나게 될 것. 놓음... 잡은 것은 놓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으십시오. 특히 무아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 에만 집착하여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 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 자아를 의미하는 것.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 나의 자리에 돌려 놓으라는 것.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어느분께서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는 가운데, 가장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물은 호박입니다. 봄에 1000원쯤 하는 모종 몇 개를 둔덕에 심어놓고, 거름을 듬뿍 줍니다.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는데, 가을이 오면 온 둔덕이 호박넝쿨과 호박잎 천지로 변합니다. 여기 저기 묵직하고 탐스런 호박들이 숨어있다. 어떤 녀석들은 얼마나 무거운지 혼자서 들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녀석들 때문에 올 가을축제 때는 호박죽을 제대로 쑤어 팔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올 호박 농사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호박과실파리라는 녀석들 때문입니다. 호박재배 농가의 피해는 심각합니다. 더 괴로운 것은 퇴치를 위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 누렇게 잘 자란 호박의 겉모양은 정말 멀쩡합니다. 오랜 나날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잘 키웠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수확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거나, 호박 즙을 생산하는 건강원에 납품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항의가 빗발칩니다. 물건 도로 가져가라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이따위 호박을 팔 수 있냐는 말을 들으며 호박을 거두어 와야 합니다. 호박을 잘라보면 호박과실파리 유층들로 가득 차있다. 호박과실파리 녀석들이 애호박 시절, 애호박 안에 자리를 잡은 것. 호박 내면에 자리 잡은 알들은 애벌레가 될 때까지 그 안에서 성장을 거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불행하게도 그들은 호박과실파리들로부터 철저하게 유린된 썩은 호박과 같았다. 겉은 멀쩡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봉헌하는 헌금의 액수도 대단했다.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을까요? 그들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가식적이었다. 위선적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께 잘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바빴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비쳐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는 호박씨를 깠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보다 더 잘 꿰뚫어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인간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할 것이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기입니다. 언행일치, 기도와 삶의 조화, 신앙과 생활의 통합, 전례와 삶의 일치입니다.

미사 가운데서는 천사가 따로 없다. 그러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바칠 수가 없다. 그러나 기도시간이 ‘땡’ 하기 무섭게 주변사람들 괴롭히고 족치는 사람들, 예수님의 무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시편 126편 5-6절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한호하며 돌아오리라.” 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순간 우리들에게도 좋은 일을 기다리는 은총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명언]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일장춘몽(一場春夢)과 다를 바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