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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은혜/부활

자비주일 :하느님 자비의 호소 : 의탁하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하느님 자비의 호소 : 의탁하라!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롭게도 성령님을 통하여 늘 새롭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자비로우신 주님 덕분에 우리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나서 희망을 갖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오늘 부활 제2주일을 맞아 주님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받아들인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따라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자비의 사도, 성녀 파우스티나의 일기를 잠시 보면, “나는 이 초상화가 부활 대축일 후 첫 주일에 성대하게 축성되기를 바란다. 그 주일은 자비의 축일이 되어야 한다”(일기 49). “내 자비의 축일이 모든 영혼들, 특히 불쌍한 죄인들의 피난처, 은신처가 되기를 바란다”(일기 699).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5단 기도를 매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부활 후 첫 주일을 자비의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신비와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의 전례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비 축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흠숭을 드러내는 날이며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모든 사람, 특별히 죄인들을 위한 은총의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축일에 하신 위대한 약속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날 영성체할 때 얻게 되는 은총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하여, 특히 복음 말씀을 통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그것이 증명됩니다. 죄인인 우리 모든 인간을 살리시고자 헤아릴 길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 곧 우리 모든 인간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위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주셔서 교회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베풀지 못한다면, 늘 죄를 짓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고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상태로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께로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롭게도 성령님을 통하여 늘 새롭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주님 덕분에 우리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나서 희망을 갖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하여 더욱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라고 호소합니다.
 
끝으로 오늘 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그것을 전하는 동료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않아 불신앙의 표본이 되어버린 토마스 사도에게 그분께서 나타나십니다. 믿지 않던 토마스 사도뿐만 아니라 주님 부활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될 미래의 세대 사람들, 바로 우리의 불신앙과 의심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사도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손가락으로 못 자국을 만져 봄으로써 확인하지 않고서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늘 간절히 부르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멘.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4.27)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하느님의 자비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20,19-31)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발현사화'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1.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토마스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보고서야 믿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2000년 대희년 부활 제2주일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셨습니다. 교회는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이름이며,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이제와 영원히 살게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지상 순례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교황 프란치스코는 평화의 사도이셨고, 하느님의 자비의 사도이셨습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를 향해 있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이사16,14)

이병우 루카 신부
제목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4.28)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다시 태어남!'

'요한복음 3장 1절에서 21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복음으로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3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고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표징(기적)을 보고 생겨난 믿음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3.5)

육에 갇혀 있었던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태어남'은 육의 태어남이 아니라 '영의 태어남,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입니다. 그것이 또한 '위로부터의 태어남이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고, 매순간 다시 태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육에 갇혀 있으면, 곧 재물이나 권력 등 이 세상을 떠날 때 결코 가져갈 수 없는 것들 안에 갇혀 있으면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성령과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 이사17,14)

육에 갇혀 있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결코 가져갈 수 없는 것들 안에 갇혀 있으면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성령과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다시 태어남!'---부활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 끝까지*** 찾아오셔서 *** 괜찮다***고 말씀하시고 ***힘을내고 믿으라*** 하신 예수님!!!--   돌들마저도 떼구르르 구르며 기뻐하는 참 부활 --저두 그렇게 기쁘게 살겠습니다                                                                                                                                                                                                                                              요즘은 성령 묵상회 9주간 마산까지 가서 월요일마다 합니다 오늘은 3번째여요  3이라는 숫자는 정말 든든한것 같아요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40일 그리고 성령강림--- 오순절 동안  많은 은총 고모님께 가득하시실 빌겠습니다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4.29)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5)

'우리도 증언의 삶을 살자!'

오늘 복음(요한3,7ㄱ.8-15)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려면,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증언, 곧 당신의 말과 삶으로 당신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들어 올려지는 것, 곧 십자나무에 매달리는 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를 이 세상 안으로 보내신 이유였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케리그마(Kerygma)', 곧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세상에 증언한 내용이며, 이 증언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4,33)

예수님 자신이 증언하시고, 그 제자들인 사도들이 증언하고,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증언되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참되게 믿고,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다시 부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증언의 삶'입니다.

'우리도 증언의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 이사19,25)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증언의 삶'입니다.

'우리도 증언의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빛처럼 짭짤한 소금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닐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제목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4.30)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

'나도 하느님의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3,16-21)도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입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 마지막 단락에서 세상을 향한,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

하느님의 사랑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졌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하시는 성령과 날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21세기 가장 큰 병폐로 보신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 제2항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 버립니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나도 너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이사21,17)

이병우 루카 신부

<노동자 성 요셉>(5.1 목)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5)

'노동의 참의미!'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고향 사람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13,55ㄱㄴ.57ㄱ)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ㄷ)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 날인 '노동자 성 요셉'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많은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노동절', 곧 '근로자의 날'입니다.

노동은 땀의 찬가로써, 하느님의 창조이며,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이어가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오늘 독서(창세1,26-2,3)에서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곧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신 창조를 보존하면서, 우리의 땀(노동)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계속 이어갑니다.

신성한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근로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해드리면서, 하느님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속 이어가자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은 목수 노동자였습니다. 예수님도 노동자이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도 노동자이셨습니다.

나의 땀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계속 이어갑시다!

(~이사22,25)

이병우 루카 신부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5.2 금)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주셨다."(요한6,11ㄱ)

'날마다 일어나는 빵의 기적과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기적!'

오늘 복음(요한6,1-15)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입니다. 이 빵의 기적이 네 복음서에서 똑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로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ㄴ) 하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에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니리온(노동자 약 7개월 가량의 일당)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소용이 없어 보이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자리를 잡은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빵의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6,14) 하고 말합니다.

이 빵의 기적이 날마다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미사)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빵의 기적을 통해 날마다 우리 안에서 '회개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다.

회개의 기적을 위해 오늘도 파이팅 합시다!

(~이사27,13)

이병우 루카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5.3)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4,6-14)은 '아버지께 가는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필립보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어제 교회가 기억한 성 아타나시오는 초대 교회 때 대주교로 부르심을 받아 활동하신 분으로서, 당시 교회의 근본인 삼위일체 교리를 흔들고 있었던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싸우면서 정통 신앙을 지켜내신 분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이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매우 훌륭한 분이시지만, 하느님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갖추신 분, 곧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그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필립보가 그랬습니다. 필립보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님을 보고도, '저희가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오늘 독서(1코린15,1-8)는 우리가 간직해야 할 믿음의 본질과 신앙의 핵심인 케리그마(Kerygma),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발현'에 대한 말씀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참되게 믿고, 날마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부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사28,29)

이병우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