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령기도회 봉사

♡2402회 남편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아내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살수록 더 사랑해야 합니 - 다. ♡

♡2402회 남편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아내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살수록 더 사랑해야 합니 - 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16일(토빗기 1장~  )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주여, 당신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이 좋사오니 내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잠깐이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당신의 얼굴, 아내는 당신의 마음입니다.》세상에 이혼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부가 어디 있으랴.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못 살것 같던 날들 흘러가고 고민하던 사랑의 고백과 열정 모두 식어가고 일상의 반복되는 습관에 의해 사랑을 말하면서. 서로 그 틀에 맞춰지지 않는 상대방을 못 마땅해 하고 자신을 괴로워하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하기 귀챃고 번거롭고 어느새 마음도 몸도 늙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 헤어지자 작정하고 아이들에게 누구랑 살 거냐고 물어보면 열번 모두 엄마 아빠랑 같이 살겠다는 아이들 때문에 눈물짓고 비싼 옷 입고 주렁주렁 보석 달고 나타나는 친구.비싼 차와 풍광 좋은 별장 갖고 명함 내미는 친구 까마득한 날 흘러가도 은행 융자에 내 집 마련 멀것 같고 한숨 푹푹 쉬며 아이고 내 팔자야 노래를 불러도 열감기 라도 호되게 앓아 보면 빗길에 달려가 약 사오는 사람은 그래도 지겨운 아내, 지겨운 남편인 걸 가난해도 좋으니 저 사람 옆에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하루를 살고 헤어져도 저 사람의 배필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시든 꽃 한송이에 대한 추억이 있었기에 첫아이 낳던 날 함께 흘리던 눈물이 있었기에 무덤 속에서도 같이 눕자고 말하던 날들이 있었기에 결국 죽음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날이 있을 것이기에 어느 햇살 좋은 날 드문드문 돋은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그래도 너밖에 없노라고.. 남편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아내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살수록 더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조화되어 함께 이루는 삶처럼 풍요로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들” 이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 이라고 불린 “이 사람들” 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마태 12,49),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마르 3,34)을, 그리고 여기 <루카복음>에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군중” 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을 동일시 하셨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 라고 칭하지는 않으셨다. 오직 십자가 아래서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를 맡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어머니가 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신 것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 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이들’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 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셋째>로,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 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이 하느님께 부르짖고 은혜 받는 축복된 삶임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우리는 성경에서 위로와 건설적인 충고를 찾을 수 있다.'' - 찰스 메이요 -


♡2403회 "윗물이 맑아야 아래 물도 맑다." ​ "윗사람이 하는 대로 아랫사람이 그대로 - 모방(模倣) 한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17일(유딧기 1장~  )

  베토벤은 ''고난의 시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 이것은 진정 칭찬받을 만한 뛰어난 인물의 증거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은 훌륭한 인성의 증거입니다. 인생은 항상 순탄하지 않지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력과 용기가 있다면 반드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삶에 적용되는 멋진 생각들》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책임이다. 당신이 하루종일 아무런 문제에 부닥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성공을 위한 3가지 필수 조건
ㄱ.남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
ㄴ.남보다 더 열심히 일할 것.
ㄷ.남보다 큰 기대를 갖지 말 것. 승리하는 자는 설명이 필요없다. 패배하는 자는 변명 전에 스스로 사라져야 한다. 당신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을 모욕하는 것. 당신이 보이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1등이 꼭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보다 더 잘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 나는 1000번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실패할 수 있는 1000가지 방법을 알아낸 것. 모두들 세상을 바꾸려 들지만 스스로를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무나 믿는 것은 위험한 짓이지만 아무도 못 믿는 것은 더욱 위험한 짓이다. 인생에 있어 실패를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다. 
삶에 있어 소중히 지켜야 할 것들은 믿음, 약속, 인간 관계 그리고 상대의 마음이다. 이 네 가지는 깨질 때 소리는 나지 않지만 큰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길을 잘 몰라도 자신 있게 운전할 수 있다.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떤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저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어디도 가지 못해요. 그래서 가까운 거리를 가도 항상 내비게이션을 켜야만 합니다.” 내비게이션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어서, 혼자 하는 운전이 자신 없는 것. 사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기 전에는 지도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운전해야만 했다. 그러면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 만이 아니라, 지도 전체에서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를 인식하면서 운전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시야를 지니고 있기에 길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만 의지하다 보면 조그만 화면상의 안내만을 듣고 충실하게 따라 할 뿐입니다. 전체적인 시야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뜻밖의 일이 내게 주어져도,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서 앞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다. 그런데 코앞의 일만을 바라보면서 쉽게 좌절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는 말씀을 따랐을 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솔직히 예수님의 조언에 고기를 잡고 있었던 제자들은 기분이 안 좋았을 것만 같다. 그래도 어부인 자신들이 전문가인데, 비전문가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알려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따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임을 알아봤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세상 기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하느님 기준을 보고 있었던 것. 이렇게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베드로는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부르심을 받을 수가 있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일 순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나요? 나의 일 순위에 주님을 두고 있나요?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나의 시야를 넓혀줄 것.

  상행하효(上行下效) "윗물이 맑아야 아래 물도 맑다." ​ "윗사람이 하는 대로 아랫사람이 그대로 모방(模倣) 한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당하관 벼슬에 있던 이관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영남지방을 시찰(視察)한 뒤 돌아왔다. 숙종(肅宗)이 여러 고을의 민폐(民弊)가 없는지 묻자, 곧은 성품(性品)을 지닌 이관명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한 가지만 아뢰옵나이다. 통영에 소속된 섬 하나가 있는데, 무슨 일인지 대궐의 후궁 한 분의 소유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섬 관리(管理)의 수탈(收奪)이 어찌나 심한지 백성(百姓)들의 궁핍을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숙종(肅宗)은 화(火)를 벌컥 내면서 책상을 내리쳤다. "과인이 그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後宮)에게 준 것이 그렇게도 불찰(不察)이란 말인가." 갑자기 궐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이관명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아뢰었습니다. "신은 어사(御使)로서 어명(御命)을 받들고, 밖으로 나가 1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殿下)의 지나친 행동(行動)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구 하나 전하(殿下)의 거친 행동(行動)을 막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저를 비롯하여 이제껏 전하(殿下)에게 직언(直言)하지 못한 대신들도 아울러 법으로 다스려 주십시오." 숙종(肅宗)은 여러 신하(臣下) 앞에서 창피를 당하자, 화(火)가 치밀어 올랐다. 곧 승지(承旨)를 불러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였다. 신하(臣下)들은 이관명에게 큰 벌이 내려질 것으로 알고 숨을 죽였다. "전 수의어사(繡衣御史) 이관명에게 부제학(副提學)을 제수(除授)한다." 숙종(肅宗)의 분부에 승지(承旨)는 깜짝 놀라면서 교지(敎旨)를 써내러 갔다. 주위에 함께 있던 신하(臣下)들도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숙종(肅宗)이 다시 명했다. "부제학(副提學) 이관명에게 홍문제학을 제수한다."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승지(承旨)만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저마다 웅성거렸다. 또다시 숙종(肅宗)은 승지(承旨)에게 명(命)을 내렸다. "홍문제학(弘文提學) 이관명에게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제수(除授)한다." 숙종(肅宗)은 이관명을 불러들여 말했다. "경의 간언(諫言)으로 이제 과인(寡人)의 잘못을 깨달았소. 앞으로도 그와 같은 신념(信念)으로 짐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라를 태평(太平)하게 하시오." 권력(權力) 앞에서 그릇된 것을 그릇되다 말하는 용기(勇氣)도 훌륭하지만, 충직(忠直)한 신하(臣下)를 알아보는 숙종(肅宗) 임금의 안목(眼目)도 훌륭합니다. "정의(正義)를 외칠 수 있는 사회(社會)... "현자(賢者)를 알아보는 사회(社會)... "상식(常識)이 통하는 사회(社會)..

  지금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이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순시기에 기도하고 전념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서 우리들이 바라는 기원들이 주님의 뜻 때로 잘 이루어지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알려줄 것이고, 그건 실제 가치보다 더 저렴할 것이다.'' - 버나드 홉킨스 -


♡2404회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18일(에스테르기 1장~  )

  괴테는 ''확실한 일을 실행할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21.1.28
 《내어맡김》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사랑은 우리 안의 모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조건과 환경을 넘어 선한 일을 이뤄가는 하느님의 방법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결단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아우성치듯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 지금의 문제를 온전히 맡겨 드리십시오. 우리의 순종을 통해 주님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못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용서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왠지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수가 있다. 영화 ‘밀양’ 에서 전도연은 자기 아들 유괴범이 마음이 편한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용서하였지만,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 마음으로 용서하였다면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동요할 필요가 없을 것.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진정 용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용서는 아직 진정한 용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 앞에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알바니아 예수회의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 그러자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다. 고문자들에게 그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다.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룰릭 신부는 우연히 만난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안톤 룰릭 신부의 용서는 거짓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을 들어 높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만 당신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100데나리온은 1만 탈렌트의 6십만 분의 1입니다. 6조 원의 로또가 당첨된 사람이 천만 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다. 우리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는 내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6조 원을 거저 받아도 기분이 좋지 못한 것. 기분이 좋지 못하니 작은 일에도 분통이 터지는 것.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조금은 써봐야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아기에게 그 많은 돈을 주어봐야 사탕 하나 때문에 짜증 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받는 1만 탈렌트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만 탈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 대신 죗값을 치러주신 것.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없다. 다만 조금은 알 수 있다. 1만 탈렌트를 다 써봐야 그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한 데나리온만 써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내가 고행을 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님 피의 값을 알기 위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 요즘 고행을 말하면 중세시대 낡은 골동품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과 어느 한 젊은 사제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신부가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비안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다.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 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받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은총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그들에게 흘려주는 은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 자체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갖은 고행을 할 필요가 있다특별히 아침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시간을 짧게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 받은 1만 탈렌트에 감사하게 되고 하루 동안 나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행하기 어려우면 운동을 조금 힘들게 해도 됩니다. 건강도 좋아지니 일거양득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고 고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 우리 죄의 용서는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일만 탈렌트입니다. 그 기쁨은 많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이 기쁨 없인 어떠한 용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진실 되게 믿음으로 적당한 때가 되면 저희에게 필요한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선(善)도 그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 - 그라시안 -


♡2405회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19일(마카베오상 1장~  )

  키케로는 ''도저히 손댈 수가 없는 곤란에 부딪혔다면 과감하게 그 속으로 뛰어들라. 그리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가능해진다. 용기있는 자로 살아라.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용기 있는 가슴으로 불행에 맞서라.''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용기 있게 도전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나의 기도는 당신의 눈물입니다》이 땅에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다. 인생 길에 목이 메어 눈가에 뿌옇게 이슬이 맺힐 때 아프면 아픈 대로 소리 나면 소리 나는 대로 울게 하소서. 나의 기도는 당신의 눈물입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단 한 방울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내 영혼의 우물에 그대로 고여 인생길이 외롭고 힘들 때 그 눈물로 나를 씻어주고 닦아주소서. 알알이 꽉 차있는 석류 알처럼 눈물방울 하나하나가 그대로 굳어서 내 가슴에 영롱한 진주빛으로 빛나게 하소서. 나의 눈물샘에 기쁨의 눈물 사랑의 눈물 은혜의 눈물 감사의 눈물만이 흐르게 하소서. 눈물겹도록 힘겨운 인생 길이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으니 살아갈 만한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할 일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 고 하셨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당신 사랑의 계획에서 제외되는 걸 원치 않으시기에, 사람들을 찾아 계속해서 나가십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 당부 하셨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다. 바깥으로 나가되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오그라든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길 원하며 가끔은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가십시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잠언 대목에는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이의 진실된 바람이 나옵니다. "그분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잠언 30,6) 짧지만 엄청난 무게가 담긴 권고입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합니다. 온갖 지혜를 쌓은 이가 말씀을 해석한다고 해도, 말씀 자체의 의미와 힘을 넘어설 수 없지요. 그분 말씀에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입니다. 말씀에 다가갈 때, 오늘 파견되는 복음 속 제자들처럼 여분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것도" 만을 지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즉,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섣부른 감성과 현학적 지식, 얕은 성찰은 말씀의 본류에 가닿기 어렵다. 말씀 자체가 순수하고 진실되기에 모든 곁가지나 치장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잠언 30,8) 잠언 저자의 기도에서 지혜를 배웁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치의 과도한 부나 생존을 위해 죄악에 기대야 할 정도의 극심한 가난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려는 이에게 장애가 될 수 있으니, 제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을 섬기기에 알맞도록 섭리해 달라는 겸손한 청입니다. 이기주의와 탐욕을 제거한 순수한 바람이 담백하고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이 지향은 자기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이에게 필요한 듯합니다. 영으로든 물질로든 가진 것이 많으면 하느님 말씀에 자꾸 보태고 싶을 테고,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으면 다가오시는 말씀과 제가 하고싶은 말 사이에서 분별을 잃고 헤매다 길을 잃을 우려가 크니까요. 스스로 넉넉하다는 오만 못지 않게 계속 모자란다는 불안도 말씀과의 만남을 방해합니다. 말씀 앞에 선 이가 모든 잉여분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만 지닌 채 맑고 순수하게 머무를 때, 비로소 말씀께서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유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의 요구는 커다란 부담과 도전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를 물질적 기준으로만 보면 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를 소유 기준이 아니라, 기꺼이 "어디에서나" 주님을 전할 수 있는 비움과 헌신의 자유로 생각한다면 접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다. 우리를 치장하던 온갖 군더더기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말씀 앞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복음 선포의 힘은 이 머무름과 만남에서 나옵니다. 외출을 자제하고 머물러야 하는 집이든, 소박하게 나누는 안부 안에서든, 또 온라인 활동 안에서든 "어디에서나" 주님 사랑의 기운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다음은 말씀께서 친히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용서가 우리들 몸과 마음 안에서, 그리고 기도로서 우리들 삶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충만한 은총이 이루어질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지식은 나눌 수 있지만 지혜는 나눌 수 없다.'' - 헤르만 헤세 -

♡2406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0일(마카베오하 1장~  )

  생떽쥐베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고 암담한 상황이라도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상황 속에도 희망의 씨앗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씨앗을 찾아내고 키워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입니다.

 《만남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던 원치않던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만남으로 인하여 고마워하며, 행복해하며, 때로는 눈물나게 괴로워하며, 아파하며 삶을 엮어갑니다. 처음부터 느낀 좋은 감정이 끝까지 좋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처음엔 괜찮았다가 만날수록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그저그런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만날수록 가슴에 새겨지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같은 생각이겠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이 마음 안에 가득한 사람, 늘 한결같은 사람을 우린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이 가까이 이웃으로 있을 때 그의 이웃들은 평화를 갖게 됩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풍요롭고, 그 사람이 있어 주위가 환하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듯 아늑함을 느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목마를 땐 시원한 물이 되고, 힘들고 어려울 땐 안식처가 되고, 배고파 허기질 땐 한그릇의 따뜻한 밥이 되고, 먼 길을 함께 가 주는 길동무가 되는 만남, 그런 고마운 만남도 있지만 반면에 힘들고 상처가 되는 만남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도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기에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여정에 지금 곁에서 함께 삶을 엮어 가는 그 사람과의 만남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만남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만남' 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기대고 싶은 만남을 통하여서는 힘겹고 어려울 땐 힘이 되어 주고, 피하고 싶은 만남을 통하여서는 지혜를 터득하고 교훈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에서 고마운 만남은 그릇된 자신의 모습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 비록 그 만남이 바로 잡혀가는 과정 중에는 피하고 싶고,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 크나큰 은혜요, 선물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통하여 거울이 되고 깨달음도 얻게 되는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일상에 주어지는 만남 하나하나를 지혜롭게 그리고 소중하게 잘 보듬고 살아야 가야 합니다. 아픔을 주는 만남도, 힘듦을 주는 만남도, 웃음을 선사하는 만남도, 행복을 느끼게 하는 만남도,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 가는 것이 삶이기에, 씨실과 날실이 한올 한올 서로 엮여져 한 필의 천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엮어져 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기에 살아가는 동안 주어지는 모든 '만남' 은 소중한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누구나의 바람일 것. 참사람 하나 만나면 주님을 만난 듯 반가울 것. 참사람은 아주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사람입니다. 참으로 꿈과 비전을 지닌 섬세와 배려, 예의와 존중, 겸손과 섬김의 사람입니다. 한마디 말에 인격을 담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사람’ 이라면 참 좋은 참사람일 것. “1. 대화중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는다. 2. 잘 모를 때는 정중하게 질문한다. 3.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한다. 4. 계산적이지 않고 요점을 간략하게 말한다. 5. 평소 비속어나 욕설을 쓰지 않는다. 6. 강단있게 말하되 인상은 환하게 유지한다.“
아들 청원형제에 대한 세 긍정적인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1. 변덕이 없다. 2. 남을 판단할줄 모른다. 3. 손재주가 좋다.
정말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공부가, 평생공부가 참영성을 지닌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학식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참사람이 되는 것.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라는 토마스 머튼의 평가를 기억합니다. “머튼은 가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인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참사람이요, 영성의 최고봉 경지에 이른 머튼임을 깨닫습니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새 부대’ 는 ‘변화된 삶’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착한 강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날드 롤하이저)를 들려드립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어느 날 그 강에서 세 사람이 떠내려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심하게 부상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아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강에서 건져내어 죽은 사람은 정성껏 매장해 주고, 부상당한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어린 아이는 돌볼 가정에 의탁했다. 이 마을에 이런 사건들이 수년 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떠내려 오는 사람들을 잘 건져낼 방법을 고안하고, 그들을 잘 돌볼 제도를 만들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런 자선행위에 자부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무도 강 상류에 올라가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죽거나 다쳐서 떠내려 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착한 마을 사람들처럼 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이해대로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의한 사회적 환경에 대하여 교회가 갈등할 이유가 없을 것. 왜냐하면 교회는 그저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떠내려 오는 이들만 도우면 될 테니까요. 만약,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환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빛’ 으로 세상을 식별하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과 공동선, 인간과 생명이 존중되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 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요한 7,7)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아멘.

   “어처구니가 있는 십자가” 를 바라보면서 무슨 일이든지 포기하지도 말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내가 나” 임을 알려주신 주님과 늘 함께 하시는 복된 은총의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2407회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1일(욥기 1장~  )

찰스다윈은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나에게 인연된 모든 이들을》감싸 주고 아껴 주며그들의 아픔까지 헤아릴 수 있는 아량(雅量)을 주소서! 행여 나에게 아픔을 주는 이가 있어도 상처 난 가슴 감추고 미소로 대하도록 하소서! 내게 주신 부모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 설령 그들이 부족하여, 날 서운케 하여도 그 모든 걸 털어 버리고, 바다같은 이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친구를 대함에 있어 변함없이 대하도록 하시고 친구의 허물까지, 다 덮어 주고 아껴 주며 끝까지 기다려 주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함에 있어 사랑하는 이의 허물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천만번의 사연 속에 맺어진 인연 헛되이 여기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내 목숨 다하는 그 날 까지 그 사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도록 하소서! 일을 함에 있어 항상 배움의 자세를 늦추지 않게 하시고 겸손(謙遜) 함으로 자만함을 누르게 하시고 나로 인해 상처받는 동료가 없도록 하소서!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던지 최고가 되도록, 끊임 없이 발전해가는 모습이게 하소서! 나 自身을 사랑함에 있어 世上에 하나뿐인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게 하시고 世上을 향해 당당함으로 내어 놀 수 있도록 가꾸는 부지런함으로 살게 하소서! 남은 一生동안에 이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미소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소서! 아멘!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질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하고 고백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하지 못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다.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심판보다는 구원을 앞세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삶에 있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 하느님의 헤아림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욱 따뜻하게 누리는 거룩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가난하되 만족하면 더할 나위 없는 부자다.'' - 셰익스피어 -

♡2408회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2일(시편 1편~  )

  F. 카프카는 ''침대 속에서는 아무리 생각해 본다고 해도 별로 신통한 생각을 얻을 수 없다.''

  《성공적 화법과 비성공적 화법》아이 메시지(I-message)와 유 메시지(You-message) 화법 아이 메시지(I-message) 화법은 대화시 상대방에게 '내 입장을 설명하라' 는 것이 주안점이며, 유 메시지(You-message) 화법은 대화시 어떤 결과에 대해 '상대방에게 핑계를 돌리는 것' 을 말한다. 직장에 다니는 어떤 이가 경기도 안양시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데 하루는 퇴근길에 친구들과 술을 한 잔 나누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려고 시흥 고갯길에서 소위 총알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잠시 후 세 사람의 손님을 더 데리고 왔다. 택시 기사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네 사람을 태우고 쏜살같이 달렸다. 물론 매일 달리는 길이라 운전에 자신이 있겠지만 뒷좌석에 앉은 한 손님이 가만히 보니까 이 기사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달리다가 건너 주행선에서 다른 차량이오면, 또 중앙선을 넘어서 원래의 주행선으로 들어서며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곡예 운전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것을 본 손님이 화를 내면서 "여보, 기사양반! 천천히 갑시다." 하고 큰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지른 소리에 놀란 기사가 화가 나서 "걱정말아요" 하고 외마디 대꾸를 하고는 아까보다 더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다른 택시를 한밤중에 탔던 또 다른 손님은 총알택시의 운전사가 중앙선 침범 등 무서운 교통위반 운전을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손님은 앞에서 말한 손님과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 했다. 겁에 질린 손님은 낮은 목소리로 "아저씨, 나는 부양가족이 있는사람이오" 라고 조용히 말했다. 택시 기사는 '부양 가족이 있다' 는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차를 빨리 몰아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기사는 비로소 자신이 난폭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네, 손님! 미안합니다. 천천히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중앙선을 넘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두 이야기에서 보면 택시 기사를 보고 전자의 손님처럼 '천천히 가자' 고 소리친 것은 핑게를 기사에게 돌린 유 메시지(You-message) 화법 이고, 후자의 손님처럼 '아저씨, 나는 부양 가족이 있는 사람이오' 라고 한 것은 내 입장을 설명한 아이 메시지(I-message) 기법이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끊임없이 발생되는 인간 관계에서 항상 상대방에게 핑계를 돌리는 것보다 내 입장을 설명하여 이해를 구하는아이 메시지(I-message)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성공적인 화법이다. - 성공하는 직장인 예절 중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다. 주님을 가까이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 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 을 결합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 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약속을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잘못보다 훨씬 더 자비롭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갈 수 은총이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 오늘의 명언 💖💖💖

  ''불필요한 것을 사면 필요한 것을 팔게 된다.'' - B.프랭클린 -

♡2409회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을 합시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3일(시편 51편~  )

  헬렌 켈러는 ''모든 것들에는 나름의 경이로움과 심지어 어둠과 침묵이 있고, 내가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나는 그 속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삶의 모든 순간에는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3천원이 가져다 준 행복》그날 따라 대형할인 매점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모두 카터에 물건들을 가득 싣고 분주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적어도 이 할인점 안에서 불행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 역시 바쁘게 할인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주일치 식품을 사는 김에 남편 선물로 튼튼해 보이는 새 등산화를 샀고 아들 녀석을 위해서는 특별히 큰 맘 먹고 녀석이 그토록 목매어 사달라고 조르던 '인라인 스케이트' 를 샀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계산대 역시 북적거렸다. 어림잡아 한 20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지루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섯 살 쯤 된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옷은 초라하게 입고 있었지만 눈매가 총명했으며 착하고 똘똘해 보였다. 내 눈길을 한 번 더 잡아끈 것은 그아이가 들고 있는 작은 꽃병이었다. '저 꽃병 하나 사려고 이렇게 오래 줄을 서 있다니. 아이 엄마는 어디 갔지?' 그 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오자 깨질세라 꽃병을 자기 키 높이만한 계산대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았다. 계산원은 기계적으로 바코드에 식별기를 갖다댔고 가격을 말해줬다. "6천 8백원이다." 아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6천8백 원이라구요? 이상하다 4천원이라고 써 있었는데." "네가 선반에 붙은 가격표를 잘못 봤나 보구나. 위쪽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봐야 하는데 밑에 있는 가격표를 봤구나." "4천 원밖에 없는데······," 아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가 딱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지켜봤다. 순간 나는 계산대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있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아이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자 내 뒤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빨리 빨리 합시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요." 계산원도 거들었다. "어떻게 할 거니? 다른 걸 골라 오든지, 아니면 집에 가서 돈을 더 가지고 와라."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보다 못한 내가 얼른 천 원짜리 세 장을 계산원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일단 계산해 주세요 "아 아이를 아세요?" "아니요. 그냥 해 주세요." 계산이 끝나자 아이는 계산대 옆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계산을 한 후 카트를 밀고 나오자 아이가 내 앞으로 와서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거스름돈 2백원을 내밀었다. "그건 놔둬라. 그런데 엄마는 어디 가셨니?"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지난 여름에 돌아가셨어요."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럼 너 혼자 이 꽃병을 사러 왔니?" "지난번에 엄마 산소에 갔는데 엄마 산소 앞에만 꽃병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럼, 아빠하고 같이 오지 그랬니?" "아빠는 병원에 계세요. 집에는 할머니밖에 안 계세요."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꽃병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시간까지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했다. 제발 그 아이가 더 이상 큰 아픔 없이 잘 자랄 수 있게 도와 주시라고... 난 그날 단돈 3천 원으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샀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밀 이삭을 비벼 먹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 몇 사람이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하고 말합니다. '안식일' 은 하느님께서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신 것을 기억하는 '주님의 날' 입니다. '주님의 날' 은 단순하게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쉬는 그런 날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면서 그저 미사와 기도와 성경 쓰기만 하면서 지내는 그런 날이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주님의 날' 은 내가 주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날', 곧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날' 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사랑' 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주일)은 내 사랑,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하는 날' 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행하신 사랑은 나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너 중심의 사랑' 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네가 원하는 것, 지금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하는 사랑입니다. 배고픈 이에게는 빵을 나누어 주고, 목마른 이에게는 마실 것을 주고, 아픈 이에게는 아픔을 낫게 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본질인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보여준 사랑은 너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나 중심의 사랑이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율법 중심의 사랑이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4,7) 율법의 본질이며, 안식일의 본질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며, 우리가 되돌려 주어야 할 사랑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을 합시다!

  “할 수 있다.” “뭐든지 된다.” 라는 은총 가득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그리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산 이들과 죽은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이 있는 복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 - 성 토마스 아 켐퍼스 -


♡2410회 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열매를 선물합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4일(시편 101편~  )

  솔론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다.'' 진정한 부는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만족하고 평안하면 진정으로 부유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진실로 가난한 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유》노자(老子)는 주나라의 궁정 도서실의 기록 계장 (도서 관리인)이었다가 후에 궁중 생활이 싫어 유랑의 길을 떠났다. 노자의 행적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자의 '도덕경' 에 나타난 사상에서 인간관계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진실함이 없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을 추켜세우거나 머지않아 밝혀질 사실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회유하면서 재주로 인생을 살아 가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언젠가는 신뢰 받지 못하여 사람 위에 설 수 없게 된다. 둘째, 말 많음을 삼가라, 말이 없는 편이 좋다. 말 없이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신뢰를 갖게 한다. 말보다 태도로서 나타내 보여야 한다. 셋째, 아는 체하지 말라.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너무 아는 체하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편이 낫다. 지혜 있는 자는 지식이 있더라도 이를 남에게 나타내려 하지 않는 법이다. 넷째,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돈은 인생의 윤활유로서는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돈에 집착한 채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섯째, 다투지 말라. 남과 다툰다는 것은 손해다. 어떠한 일에나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가려는 사람은 이익보다 손해를 많이 본다. 다투어서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도 인간 관계가 좋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도 많다. 좋은 인간 관계는 인생의 윤활유이자 처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가슴에 와 닿은 글》중에서-

  어떤 이들은 성모 마리아가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는데 그것이 무슨 공로가 되느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아래 있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에 어머니가 되기 위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그저 아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려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교회라는 새로운 자녀를 낳는 데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마리아들도 십자가 아래 있었지만 성모님 고통만이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당신 고통을 합칠 줄 아는 어머니의 공로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어머니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무슨 고통인지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아기를 낳는 것도 동시에 포기할 수 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알 때야만 창조의 도구가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고통이 교회를 낳는 창조사업을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고통임을 아셨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 간호사들이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침대에 누가 시체의 다리를 잘라서 가져다 놓았다는 것. 그는 왼쪽 다리의 신경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그래서 입원 치료 중이었는데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의 다리가 만져진 것. 깜짝 놀라 그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그런데 자신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그 다리는 자기 다리였다. 올리버 색스 박사는 당혹스러워하는 그 사람에게 “그럼 당신의 왼쪽 다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안색이 창백해지며 “모르겠어요. 전혀 모르겠어요. 사라져버렸어요. 그냥 없어져 버렸다고요.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는걸요” 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왼발로 오는 마비 증상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고통이 자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통이 있는 자기 다리도 함께 집어 던진 것. 성모님께서 고통을 거부하셨다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 밑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는 말씀은 들으실 수 없으셨을 것. 성모님은 고통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다. 

  같은 책에 「수평으로」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에서는 93세 노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분은 걸을 때 몸이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자칫 넘어질 위험성이 있는 것. 달팽이관의 수평을 유지하는 부분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 노인에게 그렇게 몸이 기울어져서 걷는다는 것을 알아듣게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다. 자신은 정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자 수긍하였다. 만약 위의 사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어차피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이렇게 걷다가 죽을래요.”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목수였다며 어떠한 건축물이 평평한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수준기’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무나 콘크리트 위에 그 수준기를 놓으면 그 건축물이 기울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자신 머리에 있는 그 수준기가 고장 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평평한 선이 있는 안경을 만들기를 원했다. 안경을 통해 밖을 볼 때 평평한 선이 그어있으면 자신이 그것을 보며 비뚜로 걷는지 올바로 걷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경에다 그 선을 만들었더니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안경 앞으로 조금 나오게 그 작은 수준기를 달았다. 수준기를 보랴, 앞을 보랴 처음엔 매우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일주일 뒤에는 능숙하게 걸으며 자신의 자세를 꼿꼿이 피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이 안경은 여러 어려움으로 수평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발명품이 되었다. 고통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90세가 넘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창조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작정 나에게서 던져내려고만 한다면 결국 그 고통과 하나가 된 나 자신도 침대 밖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다. 고통은 내가 유익하고 의미 있어 잘 받아들일 때만 나에게 그 의미를 주고 창조의 계기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께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 있게 여겨서 그것을 교회를 낳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 만들었다. 우리에게도 앞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당연히 올 것.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주시는 의미 있는 고통임을 믿는 것. 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열매를 선물합니

  내 몸과 마음에서 잊혀졌던 한 영혼을 기억하시기를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잊혀졌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그 한 영혼에게도 함께 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병을 앓아본 사람이 아니면 불행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을 갖지 못한다.''  - 앙드레지드 -


♡2411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5일(잠언 1장~  )

  바이런은 ''내 자신의 무식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의 첫걸음이다.''

 《도움이 되는 삶》우리는 남에게 나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해진다 해도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작은 좁쌀 개미보다도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누가 위대한가를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의 업적, 자기가 한 일 등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실패는 도저히 시인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보이지않지만, 드러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꿈꾸어 봅니다.

  코헬렛 저자는 우리에게 그 유명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는 말씀을 주제로 가르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 그리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코헬렛 3장 1~5절) 때와 관련된 코헬렛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 보니, 정말이지 천 번 만 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때로 인간적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였다. 그때는 그저 마음 크게 먹고,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때로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침묵하실 때가 있다. 존경하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경우도 평생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셨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은 바로 인간의 때입니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입니다. 이상하게 움직일 때마다 좌충우돌, 여기 상처 저기 상처, 상처 투성이일 때가 있다. 그 순간은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입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침묵 속에 자숙하고 성찰할 때입니다. 순풍에 돛단듯이 만사 형통, 승승장구할 때가 있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탄탄대로를 달릴 때가 있다. 그때는 더 겸손해지고, 더 예의 바르게 처신 할 때입니다. 곳간마다 추수한 곡식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일 때, 갑작스레 은행 잔고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때가 있다. 그때는 그것들을 주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때입니다. 적당한 때를 파악하지 못해 패가망신하고 동네방네 창피스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해먹을만큼 해먹었기에, 이제 연세도 연세인만큼, 모든 것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물러설 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기 남아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얼마나 더 추한 모습을 보이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겸손되이 여쭈어야겠다. ‘지금은 제게 어떤 때입니까? 오늘 이 순간은 제가 어떤 일을 할 때입니까?’ 코헬렛이 강조하는 ‘때’ 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카이로스’, 곧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올바른 때(제 때)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무 때나 의미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올바른 때의 선택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고, 성공에로 이끕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는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 입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오직 희망을 두고 바라며, 그 분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고통을 거치지 않고 얻은 승리는 영광이 아니다.'' - 나폴레옹 -


♡2412회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6일(코헬렛 1장~  )

  명심보감에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 심지 말고 의리 없는 벗은 사귀지 말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 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 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따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 칼릴 지브란 -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다. 먼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1970년 당시 잉글랜드는 400년이 넘게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다. 이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민간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무직자인 제리 콘론은 지붕을 뜯어내 파는 좀도둑이었다. 그런데 총으로 영국군을 저격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또 도망가는 중에 독립 시위를 하는 틈에 끼여 폭동 주동자 혐의까지 받았다. 이렇게 아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잉글랜드에 있는 작은어머니 집에 보냅니다. 아버지에게 제리는 나이 먹고도 철없는 어린애 같고, 제리 입장에서 아버지는 잔소리와 억압을 하는 존재입니다. 제리는 배에서 폴이라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제리는 작은어머니 집에 가지 않고 폴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히피족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피들조차 아일랜드인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다. 다시 런던 시내를 방황하던 제리는 길에서 우연히 화류계 여자의 집 열쇠를 줍고, 그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때 런던 길포트 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리는 훔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폴이 경찰에 잡혀갔고, 영국 경찰이 제리의 집에도 들이닥쳤다. 영국 경찰은 아버지를 쏴버리겠다는 협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공범으로 몰려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힙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기에 종신형을 받고 제리는 아버지와 함께 수감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교의 힘으로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렇게 14년이 흐릅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데, 그가 15년 전 런던 길포드 식당 폭탄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일로 제리는 지금까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리는 변호사 가레스에게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녹음해서 보내고, 변호사도 애초에 사건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냅니다. 가레스는 끈질기게 진실을 파헤쳤고, 결국 1976년에 항소심에서 제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제리 콘론은 한 마디로 동네 양아치였다. 물론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밖에서 사나 감옥에서 사나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다. 자신은 괜찮으나 죽은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이 무죄를 받아내야 아버지도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아버지의 명예가 되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제리 콘론의 노력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었듯,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본성이고 권한입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죄를 사해 주도록 하셨다. 이 권한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나 소공동체 등을 작은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없다. 죄 사함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톨릭교회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분의 명예와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예이고 권한이고 본성입니다.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아무리 힘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만나고, 붙들면서 그분의 자애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또한, 우리들이 기억하는 한 영혼에도 똑같은 은총이 임할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 - 소포클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