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5일(잠언 1장~ ) 바이런은 ''내 자신의 무식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의 첫걸음이다.'' 《도움이 되는 삶》우리는 남에게 나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해진다 해도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작은 좁쌀 개미보다도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누가 위대한가를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의 업적, 자기가 한 일 등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실패는 도저히 시인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보이지않지만, 드러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꿈꾸어 봅니다. 코헬렛 저자는 우리에게 그 유명한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는 말씀을 주제로 가르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 그리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코헬렛 3장 1~5절) 때와 관련된 코헬렛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 보니, 정말이지 천 번 만 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때로 인간적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였다. 그때는 그저 마음 크게 먹고,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때로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침묵하실 때가 있다. 존경하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경우도 평생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셨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은 바로 인간의 때입니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입니다. 이상하게 움직일 때마다 좌충우돌, 여기 상처 저기 상처, 상처 투성이일 때가 있다. 그 순간은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입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침묵 속에 자숙하고 성찰할 때입니다. 순풍에 돛단듯이 만사 형통, 승승장구할 때가 있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탄탄대로를 달릴 때가 있다. 그때는 더 겸손해지고, 더 예의 바르게 처신 할 때입니다. 곳간마다 추수한 곡식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일 때, 갑작스레 은행 잔고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때가 있다. 그때는 그것들을 주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때입니다. 적당한 때를 파악하지 못해 패가망신하고 동네방네 창피스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해먹을만큼 해먹었기에, 이제 연세도 연세인만큼, 모든 것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물러설 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기 남아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얼마나 더 추한 모습을 보이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겸손되이 여쭈어야겠다. ‘지금은 제게 어떤 때입니까? 오늘 이 순간은 제가 어떤 일을 할 때입니까?’ 코헬렛이 강조하는 ‘때’ 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카이로스’, 곧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올바른 때(제 때)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아무 때나 의미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올바른 때의 선택을 할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고, 성공에로 이끕니다.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어떤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 수시로 하느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는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 입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오직 희망을 두고 바라며, 그 분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복된 우리들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고통을 거치지 않고 얻은 승리는 영광이 아니다.'' - 나폴레옹 - |
♡2413회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7일(지혜서 1장~ ) 록펠러는 ''나는 그저 나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채용했을 뿐이다.'' 《역경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준다.》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한 번도 역경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다. 역경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한번도 시험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진정한 자아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다. 참된 자아는 번영의 때가 아니라역경의 때에 발견된다. 번영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성향이 있다. 역경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준다.영혼을 민감하게 만들어 준다. 자신 안에 있는 참된 모습은 시련의 때에 드러난다. 그 시련의 강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자아는 새롭게 태어난다. ‘마리아 발토르타’ 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는 어느 신부님께서 사제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 읽기 시작해 마칠 때쯤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 준 책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갔더니 이 책은 거의 금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랜턴을 비추며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을 가보니 로마에서 바티칸 방송국에서 어떤 사제가 이 책을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한때는 금서였지만 지금은 바티칸 방송국에서도 해설해주는 책이 된 것. 그런데도 한때 금서였다는 이유로 많은 분이 책 이름만 듣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좀 지나친 듯 보이나 그런 분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그 열매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시려는 것과 같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일 것. 예수님은 참 지혜와 좋은 것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분별력이 없었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불통이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신부님께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행복의 기준이 ‘돈과 여자와 성공’ 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사제가 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신부님께서는 이 열매가 지혜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은 구약의 ‘광야’ 의 삶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삶이란 ‘돈과 여자와 성공’ 을 떠나는 삶입니다. ‘파라오’ 를 떠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 빵과 포도주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신 천상의 ‘양식과 음료’ 입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는 삶은 살 수가 없다. 예수님은 파라오라는 자아를 떠나 삼구를 죽이는 광야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 곧 ‘지혜’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파라오가 나를 괴롭히는 뱀과 같은 자아임을 깨닫고 그를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이끄는 모든 것은 지혜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 도구를 통해 지혜의 자녀를 탄생시키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귀와 눈을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부분적인 기억력을 상실한 두 대비되는 환자가 나옵니다. 이 환자들은 어느 시간 이후의 기억이 모조리 삭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도 1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짧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이지만 딱 군대 있을 때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러니 쾌활하고 젊었을 때의 삶을 계속 즐기는 것 같다. 이 사람은 그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사에 참례합니다. 기억이 20대 초반에 머물러있지만, 자기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다. 올리버 색스는 그 사람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것.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식료품 주인으로 여기며 “어떤 치즈를 드릴까요?” 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말을 해 댑니다. 아니면 가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해집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람 안에는 영혼이 없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소멸하였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니 정체성이 명확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한 사람은 지혜의 자녀이고 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카라바지오는 천재 화가였다. 그러나 자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 일쑤였다. 이때마다 추기경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 번은 여자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더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인생을 나폴리와 말타섬에서 도망자로 살았다. 그러다 후회하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있는 유명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 안의 자아인 골리앗을 이제 죽였다는 뜻으로 추기경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칼에는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 는 글을 새겨넣었다. 참 행복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아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추기경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죽습니다. 어쨌든 그는 어리석음의 자녀에서 지혜의 자녀로 넘어오게 된 것. 참 지혜는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것.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탈출시켜 광야로 이끌려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십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것들은 지혜의 자녀가 탄생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키우는 것들은 모두 악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리석음의 자녀가 아니라 지혜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에 말씀, 사랑의 말씀, 용서의 은총, 치유의 은사 그리고 영원한 구원이 있음을 간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복된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 헨리 포드 - |
♡2414회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8일(집회서 1장~ ) 한국속담에 ''기와 한 장 아껴서 대들보 썩는다.'' 《자신과 연애하듯 삶을 살아라.》당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원망하느라 기운과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라. 어느 누구도 당신의 인생의 길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모든 것은 타인의 행동에 반응하는 자신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자신과 다른 뭔과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라. 당신은 이미 중요한 사람이다. 당신은 당신이다.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 당신 본연의 모습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면 절대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할 것. 자부심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말고 심지어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도 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 언제나 당신 자신과 연애하듯 삶을 살아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영화 ‘조커’ 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 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또한 누구를 만나든지 먼저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서서 그리스도 주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은총 충만한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 - 윈스턴 처칠 - |
♡2415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 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29일(이사야서 1장~ ) 예악지에 ''강에서 물고기를 보고 탐내는 것보다 돌아가서 그물을 짜는 것이 옳다.'' 《11층의 여자》11층에 사는 여자가 괴로운 세상을 하직하기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그녀는 보았다. 10층에서는 금슬이 좋고 화목했던 부부가 싸우는게 보였고, 9층에서는 밝고 유쾌하고 잘 웃던 남자가 우는게 보였고, 8층에서는 남자들과 말도 하지 않던 여자가 바람 피우는게 보였고, 7층에서는 건강하기로 소문 났던 여자가 약 먹는게 보였고, 6층에서는 돈 많다고 자랑하던 남자가 일자리 찾는게 보였고, 5층에서는 듬직하고 정직했던 남자가 여자 속옷 입는걸 보았고, 4층에서는 닭살 커플로 엄청 사랑했던 연인이 헤어질려고 싸우는걸 보았고, 3층에서는 남녀관계가 복잡하던 할아버지가 혼자 보내는걸 보았고, 2층에서는 이혼하고 남편을 욕했던 여자가 남편을 그리워하는걸 보았고. 11층에서 뛰어 내리기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마다 말 못 할 사정과 어려움은 다 있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불행한건 아니었다. 내가 보았던 사람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 그들도 나를 보며 자기는 괜찮다고 자기 위안을 했을거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만으로는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또한 인내하여야 멋진 열매를 얻어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경청이 아니라 말씀의 체화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 합니다. 근사한 지식의 열매를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가려 하지요. ‘진즉에 공부를 좀 더 할 것을’ 하는 후회가 다양한 지식을 쌓는 열정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러하였다. 힘든 시대일수록 지식인의 똑 부러진 단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예언자로 이름을 날리셨던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 에서 말씀의 체화를 당부하십니다. 속 시원한 삶의 해답을 다른 이에게 얻는다고 네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저 스스로 자신만의 고유한 열매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화려한 언변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길이든 바위든 가시덤불이든 아니면 좋은 땅이든 삶의 우연과 결을 같이합니다. 누구든 이 집안, 이 사회, 이 나라에 태어나고파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일단 그곳에 떨어진 이상, 그곳에서 나만의 열매를 맺고 고유한 삶의 가치를 건져 내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타인의 지식을 배워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체화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어 누립니다. 구원은 본디 제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다른 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과 쾌락과 유혹에 흔들려 자신을 잃어버린 이에게는 말씀도 구원도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이 있다고 한들, 열매 맺는 내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뿌리는 분은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밭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변화되고,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서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신앙인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세상에서의 재물, 명예, 권력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님은 오늘 마음의 밭을 네 부류로 말합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처럼 신앙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현실적인 삶에만 관심을 가지는 밭, 돌처럼 신앙은 있으나 믿음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현세적 안일과 행복을 위한 도구로써의 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신앙이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씨앗임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일과 신앙을 혼동하여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밭,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열매 맺는 밭이 그것입니다. 💖💖💖 ‘산 위의 마을’ 가족들은 성체성혈의 주님을 영접할 때 다음 기도를 바친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 주 예수님, 당신 앞에 오롯이 왔나이다. 저의 죄를 참회하오며 뉘우치오니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용서하소서. 다른 모든 이들이 저에게 저지른 것을 용서하나이다. 악마와 악령과 그것들의 모든 악행을 끊어버립니다. 주 예수님, 제 자신을 온전히 이제와 영원히 당신께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을 저의 삶에 초대하오며 저의 주님으로 영접하옵니다. 하느님, 그리고 구세주시여. 저를 치유하소서, 저를 변화시키소서. 저의 몸과 영혼과 정신을 강건케 하소서.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의 고귀한 피로 저를 덮어주소서. 당신의 거룩한 영혼으로 저를 채워주소서.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예수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예수님,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제 삶의 모든 날에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아멘. 나의 어머니이시며 평화의 여왕이신 마리아님, 모든 천사와 성인들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 ‘사순절의 아침에 하느님을 향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내 마음 속에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묵상하면서 이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빵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채우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역경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지는 않으나 지혜롭게 한다.'' - 풀러 - |
♡2416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30일(이사야서 1장~ ) 알랭은 ''성공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성공은 목표를 달성한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누린 만족감에 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하면 자연스럽게 성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길들여 진다는것 그리고 책임》아- 어린왕자여! 그의 작은 별과 그의 자존심 강한 장미와 그의 세상에 하나 뿐인 여우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의 순수함...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볼 수 없다.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그건 마음으로 보는 거야. 네 장미가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그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잊으면 안돼. 넌 언제까지 네가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어."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다시 장미들을 보러 가렴. 네 꽃이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이란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다시 작별 인사를 하러 와 줘. 선물로 비밀 하나를 알려 줄게." 어린 왕자는 장미들을 다시 보러 갔다. 그는 꽃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 장미와 전혀 비슷하지 않아. 너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너희를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도 누구를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옛날 내 여우와 같아. 그 여우는 세상의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다를 게 없었지. 그러나 나와 친구가 되면서, 그 여우는 이제 내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여우가 됐어." 장미꽃들은 당황했다. "너희는 아름다워, 그러나 너희는 비어 있어." 어린 왕자는 다시 말했다. "아무도 너희를 위해 죽지는 않을 거야. 물론 내 장미도 멋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에겐 너희와 비슷하겠지. 그러나 그 꽃 하나가 너희들 전부보다 소중해. 그건 내가 물을 준 꽃이니까. 내가 바람막이를 세워준 꽃이니까. 내가 벌레를 잡아 준 꽃이니까 (나비가 되라고 두세 마리는 남겨 놓았어). 내가 불평을 들어 주고, 허풍을 들어 주고, 어쩔 때는 침묵까지 들어 준 꽃이니까. 그건 내 장미란 말이야." 그는 여우에게 돌아왔다. "잘 있어." 그가 말했다. "잘 가."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기억하려고 했다. "네 장미가 그렇게 소중해진 건 네가 장미에게 바친 시간 때문이야." "나의 장미에게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따라 말했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그러나 너는 잊으면 안 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너는 네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나는 내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따라 말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죄인인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죄인이라 불렸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마을에서 죄인이라고 불린 여인임은 분명합니다. 그 여인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가장 불편한 장소로 찾아왔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죄인 취급을 하면서 멸시하는 바리사이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다.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길래, 그 따가운 눈총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그 값비싼 향유를 발라드렸을까요?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삶의 모든 것이 바뀔 정도의 영향을 받은 여인이었을 것이고, 그분을 간절하게 만나고자 했던 여인이었을 것. 그리고 진정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던 여인이었을 것.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용서를 청하는 것조차 죄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여인이었을 것. 자신 안에서의 변화를 체험하게 한 예수님께 모든 것이 집중된 상태였을 것. 그러니 주변의 그 어떤 부정적 시선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 그녀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들어 왔을 테니까요.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짧고 강렬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7.48)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체험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이 여인이 보여주었던 참된 회개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생겨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참고) 루카 복음이 전하는 죄 많은 여인이 막달래나 마리아일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리 개연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자매이자,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 넘는 나르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다고 전합니다. (요한12.1-8) 마태오 복음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이 아닌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전합니다. (마태오 26.6-13) 이야기의 중복성을 볼 때, 한 여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편집과정에서 복음에 따라 달라진 것일 수도 있고, 각기 다른 사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성서학자들이 밝혀야 할 일입니다. 한 가지 참고로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300데나리온 정도였다 하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평균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 금액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몸과 마음이 아픈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일찍 성전에 나아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전에 성체 앞에서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 하며 묵상하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수호천사에게 바치는 기도"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 오늘의 명언 💖💖💖 ''상대에게 은혜를 베풀면 혀끝의 독도 감사로 변한다.'' -그라시안 - |
♡2417회 ''지금 이 순간 행동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믿음이 없기 - 때문입니다.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3월 31일(이사야서 31장~ )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인 간 사》벌이 꿀을 애써 모아 놓으면 자신은 먹어 보지도 못하고 사람이 빼앗아 가듯, 사람도 동분서주하며 재산을 모으는데에만 급급하다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죽고 나면 쓰는 사람은 따로있다. 새가 살아 있을 때는, 개미를 먹는다. 그런데 새가 죽으면, 개미가 새를 먹는다. 시간과 환경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당신 인생에서 만나는 누구든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지 마라. 지금 당신은 힘이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라. 시간이 당신보다 더 힘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나무가 백만개의 성냥 개비를 만든다. 그러나 백만개의 나무를 태우는 데는 성냥 한 개비로도 족하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 되고, 좋게 행동하라.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다.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라고 이릅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일하러 갑니다. 둘째는 처음엔 간다고 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는 싶었지만, 몸이 따르지 않은 것.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맏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하고, 둘째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상징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처음엔 따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처음엔 하느님 뜻을 따르는 듯하였지만 실제로는 계속 죄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일어난 것일까요? 어째서 어떤 사람은 변하고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는 행위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 행위에 대한 태도는 ‘믿음’ 에 의해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이 요한이 가르치는 길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가리켰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삶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분을 믿으면 행위에 대한 시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5분을 주었다. 이는 처음부터 러시아 황제가 계획한 일이었다. 젊은 사람들을 사형시키느니 그런 척하면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5분은 평생만큼 소중한 시간이었고 1분씩 쪼개어 많은 기도를 드렸다. 그는 동생에게 “인생은 신의 선물이고,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다” 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순간마다 그 5분처럼 아껴 쓰며 의미 있게 살고자 결심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종이 대신 머리로 소설을 쓴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을 남겼다. 그렇게 그는 훌륭하게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책을 판 돈을 마약과 술, 도박에 탕진하였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 그가 진정으로 변한 이유는 아내의 ‘믿음’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도박 자금으로 줄 것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반지와 보석’ 을 내어주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녜요. 나는 당신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어요” 라는 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믿음을 받아들여 모든 것을 끊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지금 하는 행위들은 마치 사람이 개같이 네 발로 걷는 것처럼 어색해집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머리로 변하려던 사람이었다. 믿음 없이 계명을 지키며 변하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담배를 끊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는 원래 담배를 안 피워요” 라고 말하는 것.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피울 확률이 매우 높다. 원래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색하게 됩니다. 실수로 피워도 곧 영원히 피우지 않게 될 것을 압니다. 유다인들이 열에 하나 계명을 지키면, ‘나 하느님 자녀 맞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녀는 ‘어 이상하다? 앞으론 죄 안 짓겠지!’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걷는 것이 이상했을까요, 물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을까요? ‘당연히 걸어야 하는데 왜 빠지지?’ 라고 생각했을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두세 발 걸은 것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게 당연한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이기에 죄짓는 게 이상한 거지!” 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곧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계획을 세워놓고는 실행을 못 하는 의지 박약자였다. 1년 안에 책을 써서 주겠다고 계약을 해 놓고 좀처럼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830년 여름까지도 빈둥대던 빅토르 위고를 보고 출판사는 1831년 2월로 마감을 못 박았다. 빅토르 위고는 옷장 안의 모든 옷을 꺼내 봉인한 뒤 치워버렸다. 속옷까지 치워버렸다. 옷을 치워서 외출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던 것. 그가 걸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숄 하나였다. 그리고 마감 시한보다 2주 빨리 『노트르담의 꼽추』를 탈고하여 제출했다. 이전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임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물 위를 당연히 걸을 수 있는 존재란 믿음을 가졌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입니다. 의사가 치료하지 않고, 선생이 가르치지 않고, 봉사자가 봉사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존재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치료를 몇 번 해서 의사가 되는 게 아니고, 가르쳐서 선생이 되는 게 아니며, 봉사를 몇번한다고 봉사자가 아닙니다. 먼저 의사이고, 선생이고, 봉사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다시 물속으로 우리를 빠뜨릴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 행동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외에는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 “따뜻한 말씀 한 마디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굳게 살아 움직이는 축복되고 은혜로운 삶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드십시오.” -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
♡2418회 '작은 흔들림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였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1일(예레미야서 1장~ ) 명심보감에 ''곧 위에 비교하면 족하지 못하나, 아래에 비교하면 남음이 있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항상 자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덜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모두 성성(聖性)이 마음 안에 있다. 그 거룩함의 씨앗을 자라게 할 수도 있고, 사멸시킬 수도 있는 것은 각자의 삶의 몫입니다. 성성(聖性)은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있다(레위 19:2).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와 자비와 정의와 사랑에서 나타나고 그 역사적 표현은 구세사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던 그 위대한 사건입니다. 성성을 저버리고 죄로 물들어버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강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요 종착점이며, 다시 우리에게 성성을 가르치신 스승이며, 모범이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새롭게 성성을 구현할 능력을 주신 분입니다. 마태오 복음 5:48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성의 본질은 대인(對人)관계인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완성하는 것. 성덕은 단순한 윤리적 선행이 아니고 완덕(完德)의 추구입니다. 이 완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그분을 가까이 닮는 것을 의미하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완전한 사랑의 실천은 성령의 힘인 은총으로써만 가능하며 성성의 근본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협력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기에 하느님으로 부터 거저 받은 성화의 은총에 협력하는 노력으로써 각자 자기 안에 성성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데살 4:3)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성성에로 불리움을 받았다. 또한 우리는 신앙과 세례로써 성령과 그 은총으로 하느님의 성성에 참여할 자격과 능력을 받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을 통하여, 부부는 사랑의 공동생활을 충실히 함으로써, 주부는 가정에서 그 가정을 성가정으로 이끌도록 힘쓰며, 노동하는 사람은 그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며,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고난을 주님의 수난에 합치시킴으로써 높은 성덕에 이를 수 있도록 그래서 세속에 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삶' 안에서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성성이 번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혼탁한 물을 정화시키듯. 오염된 땅을 되살리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들 삶의 자리로 들어오셨고, 땀을 흘리셨고, 마침내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나무에 매달리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기쁨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21,5)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구해주신 하느님의 업적을 망각하면서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시고, 지금도 베풀어 주고 계시는 은총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의 사랑 안에 머물러 봅시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 ''작은 흔들림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 였다.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는 감사한 지도 모르고, 모든 것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 사람은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미>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이미’ 라는 제목의 최영미 시인의 시입니다. ‘이미’ 라는 단어로 표현한 시인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무심코 썼던 단어 하나에도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각자는 어떨까요? ‘이미’ 많은 뜻을 간직하며 사는 우리입니다. “당신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작은 베풂과 나눔을 한다면, 자신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은총의 시작이면서, 우리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어지게 하는 희망의 선물이 되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 크리스티 메튜슨 - |
♡2419회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인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2일(애가 1장~ 블랙은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지 제공받는 것이 아니다.'' 《쌓일 때와 버릴때》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 할 때마다 한 가지깨닫는 것이 있다. 많은 것들이 모르는 사이 서서히 쌓이지만 버릴 때는 한 번에, 그것도 결심을 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도 좋지 못한 것들이 많이 쌓입니다. 게으름, 불만, 교만, 욕심, 불안, 같은 것들이 날마다 서서히 쌓여갑니다. 이것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조금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버려야 합니다. 안 좋은 것은 그냥 두어도 쌓이지만 좋은 것은 날마다 결심하고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 정용철님의 "희망편지"중에서-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여기에 언급된 여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의 가장 중요한 증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루카 23,46-49)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루카 23,55-56)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1-5)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8-11) 여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전 과정을 모두 보았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보았고, 천사들의 ‘예수님 부활 선포’ 를 처음으로 들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 첫 증인들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본 증인들이고, 부활을 처음으로 증언한 첫 증인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증언’ 이라는 것은 자신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서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일이고, 자신의 증언이 거짓일 때에는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하면서 하는 일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서(확신하고서) 한 일입니다. 여자들은 ‘부활의 첫 증인’ 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믿은 신앙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교회의 신앙의 바탕이고,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사도들은 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 여자들을 사도들보다 더 사랑하셨거나 더 귀하게 여기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고, 여자들 쪽에서 사도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여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똑같은데,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사도들과 여자들이 좀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사도들이 모두 달아난 것은 사실이고, 계속 숨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현장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자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여자들이 먼저 갔고, 그래서 부활 선포를 먼저 듣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난 것은, 여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도들보다 더 능동적이었고, 적극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먼저 다가갔으니, 먼저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과 당신을 구분해서 말씀하셨지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었던”(마태 8,20) 예수님의 생활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곧 ‘작은 이’ 라고 말해도 될 것. 여자들이 한 일은 단순히 예수님을 위한 ‘시중’ 이 아니라 ‘작은 이들’ 에게 사랑을 실천한 일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만 후원하고 가난한 이들은 외면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만일에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그런 일을 막으셨을 것. 여자들은 예수님을 후원하는 일과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을 똑같이 다 잘했을 것. 여자들의 후원과 시중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호의호식한 것은 아니고, 고달프고 힘든 생활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 후원과 시중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 여자들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 일은, 사실상 ‘작은 이들’ 에게 사랑을 실천한 일과 같다는 점에서 그 일을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2코린 9,6-9) 여기서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인다.” 는 말을, “재산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는다.” 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 “재산만 많이 바치면 더 쉽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재물로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입니다. 이 말은, 사랑과 선행을 통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위선’ 이 아니라, 진심으로 실천하는 사랑과 선행일 때. 기도하고 애원하고 하소연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어 희망조차 사라져 버리는 지금, 주님만이 우리들의 희망으로 믿고 적당한 때가 되면 부활과 함께 우리들이 바라는 희망이 이루어지는 큰 덤까지 주시고 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별은 캄캄한 밤에만 볼 수 있다.'' - 에머슨 - |
♡2420회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3일(애가 1장~ ) 토마스 아켐피스는 ''지금이야 말로 일할 때다. 지금이야 말로 싸울 때다. 지금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때다 오늘 그것을 못하면 내일은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미래를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행동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내가 가진것을 생각 합니다.》두 눈이 있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두 귀가 있어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부드러움을 만질 수 있으며 두 발이 있어 자유스럽게 가고픈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가슴이 있어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의 여정에서 돌아오면 내 한 몸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날 반겨주는 소중한 이들이 기다린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내가 누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보는 햇살에 기분 맑게하며 사랑의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며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에서 마음이 밝아질 수 있으니 길을 걷다가도 향기로운 꽃들에 내 눈 반짝이며 한 줄의 글귀에 감명받으며 우연히 듣는 음악에 지난 추억을 회상할 수 있으며 위로의 한 마디에 우울한 기분 가벼이 할! 수 있으며 보여주는 마음에 내 마음도 설레일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리는 행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잊어버립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내가 누리는 행복에 대해 평범하고 주위에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 위대한 가치를 잊어 버리고 이 세상에 나 혼자라고 느끼며 움크린 채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하고 소중한 이들을 잊어버리고, 뜨거운 가슴을 잊어버립니다. 더 큰 욕심을 바라며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이 허전한 날엔 하늘을 봅니다. 아이의 활짝 웃는 모습에서 내가 꿈꾸고 있는 미래를 봅니다. 문뜩 깨달게 됩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건강한 모습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오늘도 감사하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아멘.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스트레스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진은 같은 환경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한 집단에는 2분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맞은 편 고통 받는 쥐를 관찰하도록 배치했다.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탈진한 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아니라 이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쥐였다고 합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고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힘은 무엇일까요? 함께 하는 것. 고통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는 것. 그런데 함께 하는 마음보다는 ‘나만 아니면 그만’ 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요?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육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사실 다투게 되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다. 특히 그 다툼의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함께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답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까지 받아들여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눈높이를 낮춰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행동과 어린이의 말을 따라 하게 되지요. 어린이 앞에서는 세상의 체면이나 명예가 별 소용이 없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혼자’ 가 아닙니다. 자신을 낮춰서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스티브 프레스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 내면에 있는 살지 않은 삶. 이 둘 사이에는 저항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항을 부숴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다. 무한한 선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저희에게 오시어 모든 것을 용서하심으로써, 바라는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로 우리들이 감사와 위안을 받으며 살아가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 니체 - |
♡2421회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 성경 묵상하여 하느님 말씀으로 주님 일순위의 삶 실천 매월 신ㆍ구약 완독계획, 25년 4월 4일(에제키엘서 1장~ ) 코르넬리아 토프는 ''성공은 세 번 실망한 후에 찾아온다.'' 《멋있는 사람은 하는 말도 곱다》"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긍정적인 사람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능동적인 사람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사람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헌신적인 사람 "잘못된 것은 바로 고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겸허한 사람 "참 좋은 말씀입니다." 라고 하는 수용적인 사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는 협조적인 사람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도울 일 없습니까?" 라고 하는 물을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 "이 순간 할 일이 무엇일까?" 라며 일을 찿아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 참 멋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복은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감사할 수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서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썼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것이 법칙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에게 더 감사할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행복해지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감사하려고 한다고 해서 잘 될까요? 처음 감사일기를 써 보라고 하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하루 다섯 가지, 세 가지도 찾기 어려워합니다. 얼마간 쓰다가 포기해버립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불만 쌓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왜 감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을 물어뜯고 있는 늑대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모기가 무는데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감사를 찾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말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오?”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아.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방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390원을 내놓았다. 옛날 돈 390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얼마 후 날이 밝았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했다고 하기에 확인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때 방 선생이 차분히 말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방 선생은 태연히 말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 하고 타일렀다. 그러자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강도가 강도질할 때 감사하라고 한다면 감사가 나올까요? 강도는 본성 자체가 감사가 나오지 않는 존재입니다. 부족함이 감사함보다 항상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을 강도로 만드는 세 욕구가 있다.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세속은 돈의 욕심이고 그래서 십일조도 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주님 것까지 챙기는 강도가 됩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까지는 멈출 줄 모릅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제시하는 방법은 자선(십일조)-단식-기도입니다. 자선하면 가난해집니다. 돈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돈이 주님 것이라 고백하게 되니 받은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 육체를 지나치게 만족시키려 하는 사람도 도둑입니다. 절제하며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과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이라고 하시는 것.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자기주장에서 벗어납니다. 자아가 뱀이고 늑대이고 모기입니다. 나를 물고 있는 것.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영원한 도둑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바보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슬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아침마다 러닝머신에서 일정 시간 정해놓고 뜁니다. 뛰면서 감사한 일을 찾아 기도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감사한 일이 많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지면 감사한 것보다 빨리 시간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나를 물고 있는 늑대가 있다. 나의 피를 빨고 있는 모기가 있다. 나의 주인으로 사는 뱀이 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것이 나의 주인인 이상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도둑일 수밖에 없고,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 행복할 수 없다. 러닝머신은 처음에 고문하려고 만든 도구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에서 먼저 내려와야 합니다. 봉헌과 단식과 기도가 없이는 그것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 세 개를 통해 청빈-정결-순명의 덕이 생겨나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계속해서, 충만하게 영원토록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은총이 있으시고 살아가시고저와 가족의 하느님께 자비와 구원을 받으시길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오늘의 명언 💖💖💖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 셰익스피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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