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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 과 비움 /독서

이운진의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 꿈이라면 보일까


꿈이라면 보일까


눈 코 입 손발
다 지우고 이름과 목소리도
몸이 되어 실루엣만 남은 사람
보지 못해도 걷지 못해도 어디로 가는가

아무리 멀어도 꿈이라면 닿으려나
아무리 지워도 꿈이라면 보이려나


- 이운진의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 중에서 -


* 꿈에서라도
보고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몸은 떠나고 모습은 사라졌어도
그의 자취, 그의 체취는 나의 마음에 영구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나의 60조 개의 세포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꿈이라면 보일까,
그래서 눈을 감습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시와 에세이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이운진 시인이 디카시집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를 출간한다.
디카시는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장르로 직접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하는 시를 말하는 것이다. 하여 시인은 디카시의 이런 방식을 적용하여 스스로를 순간과 우연의 수집가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의 눈길이 닿은 한 순간의 장면에 짧은 시를 더하여 한 편의 디카시를 창작하는 일은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고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준다고 말한다.
이번 책은 일상이라고 불리는 공간과 그곳에서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놓치는 것들, 상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인생의 깊이, 잠자리와 매미, 고양이, 비둘기 같은 다른 존재와 나누는 마음 등을 두루 담았다. 특히 사진을 찍고 시를 쓰는 행위를 동시에 아우르면서 느꼈던 생각을 시작메모로 풀어놓았으므로 독자들은 시인의 마음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 찬찬히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의 찬란한 비밀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삶에 대한 애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운진

 
1971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했다. 1995년 시인이 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를 비롯해 청소년시집 『셀카와 자화상』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여기, 카미유 클로델』 『시인을 만나다』 『고흐씨, 시 읽어 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가 있다. 제 5회 디카시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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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글을 시작하며
    ?사물의 시선
    할머니의 실꾸리
    하얀 심장
    신발 한 켤레
    엄마의 편지
    달항아리
    낡은 여행 가방의 여정
    솟대
    빈 집의 우편함
    드림캐처
    빈 의자
    시간의 법칙
    전봇대가 있는 골목
    아직 이 가을을 더
    오래된 유혹
    ?풍경의 초대
    나비의 꿈
    선셋 증후군 2
    꽃비
    뒤의 초상 2
    빗물에 뜬 봄
    날씨가 전하는 당신
    두 개의 침묵
    우화(羽化)
    기이한 밤
    눈길에서 삶을 읽다
    멀어지는 사람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버려지다
    이웃집 고양이
    슬픔의 방향
    어떤 첫눈
    불꽃
    풍장(風葬)
    밤의 틈으로
    첫 키스
    ?여행의 기록
    바람의 편지
    포옹
    거룩한 한 끼
    기원의 방식 1
    허공의 문
    우도(牛島)에서
    기원의 방식 2
    정동진
    이중섭의 방
    물길
    동해의 오후
    삶의 폭죽
    기원의 방식 3
    지극한 슬픔
    터미널에서
    우리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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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순간과 우연의 수집가.

사진과 원고를 묶고 정리하면서 나는 나를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우연의 순간들이었다. 우연히 만난 풍경, 우연히 보게 된 표정, 우연히 듣게 된 한 마디.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사로잡은 느낌들. 단 한 번, 그 순간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것을 사진으로 찍고 그 우연의 만남을 글로 적곤 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행위는 무엇일까.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것은 내 안의 무엇과 합치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구름을 찍었다면 구름에 대한 내 마음이나 생각을 찍었다는 것이지 구름의 관찰일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구름을 글로 적는 순간 물리적 거리는 마음 속 거리로 좁혀지고 새로운 의미로 자리매김 된다. 디카시는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부추긴다는 점에서 새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대단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우리의 일상은 일부러 보려하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의 시선은 철저히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인데, 디카시는 이런 시선을 바꾸어 주는 힘도 가지고 있다. 더 작고 더 낮은 곳, 일상 속의 아름다운 단면들, 내 하루를 빛내준 사소한 사건들을 향해 눈과 마음을 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밋밋한 삶에서 특별한 순간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해서 내가 여전히 사랑에 대해 쓰도록 가슴을 뜨겁게 덥혀준다.
그러나 사진에는 사진만의 개성이 있고 글에는 글만의 개성이 있어서 둘 사이의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다. 또한 시와 사진은 기억하고 망각하는 방식도 다르므로 그 사이의 여백을 조금 채우고자 시작노트를 붙여 보았다. 사진을 찍던 순간의 느낌이 다시 떠오르며 한 줄의 문장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시와 사진이 불러온 기억이 저절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때도 있었다. 시든 사진이든 짧은 글이든 간에 그 모두는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들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으므로 한데 어우러져 더 큰 물결이 되길 바라본다.

남의 일기를 펼치면 쉽게 닫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손에서 이 시집의 책장이 조용히 넘겨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또 한 계절을 보낸다.

- 글을 시작하며

애쓰지 않아도 겨울은 가고
목숨처럼 무서운 사랑도 잊는데
무슨 미련이 있어
지나온 그 길들 잊지 못하겠는가
-「신발 한 켤레」

인생의 뒷모습이 보여주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듯이 뒷모습이 감추는 모든 것 또한 알 수 없어도, 단 하나의 사실만은 누구라도 안다. 가족이라는 복잡한 울타리를 지킨 두 사람의 등이 얼마나 크고 단단한 것인지를. 무언가를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온몸의 힘이 필요할 일이 있다면 바로 늙어가는 부모님의 등을 볼 때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뒤의 초상2」 중에서

갈 곳을 잃은 마음이 지치면 저렇게 굳어가는 걸까. 저 심장을 버린 이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살아있는 한 한 번쯤은 불쑥 다시 만나길 기다리며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월에 의한 풍화도 간단히 허락하지 않으려고 돌 속에 마음을 다 박아 넣었나. 이런 여러 생각을 하다가 돌이 있던 자리에 다시 돌을 가져다 놓기로 했다. 내가 함부로 취해도 될 돌이 아닌 듯했다. 어떤 누구의 인생이더라도 잃어버린 마음 하나쯤은 있을 거고 떠나지 못하는 하루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을 담고 있는 돌이라면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듯싶었다.
처음처럼 그 자리에 돌을 반쯤 묻고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에게 물었다.
‘내가 줄 수밖에 없는 이것을 당신에게 줘도 될까요?’
-「하얀 심장」 중에서

그래 맞아
바로 이런 식으로 심장이 녹는 거야

이 순간
숨결보다 강한 폭발은 없어
-「첫 키스」

하루가 가는 일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은
뭔가를 참아낸 날이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맹세를
허공의 문을 열고 한 날이다.
-「허공의 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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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특별한 사물이 있다. 마음이라는 보드라운 천으로만 닦을 수 있는 것. 그런 사물은 나를 울게 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첫 번째 장 〈사물의 시선〉에는 시인이 애틋한 눈으로 바라본 사물들이 등장한다. 이십 년이 넘은 할머니의 실꾸리와 엄마의 편지 같이 눈물을 머금은 사물에서부터 주인 모르는 낡은 신발 한 켤레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이 사물들을 통해 시인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두 번째 〈풍경의 초대〉는 하루를 채우는 소소한 사건들과 장면들이 불러낸 것들이다. 봄꽃이 지는 날, 눈이 온 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곳, 불꽃이 터지는 시간, 골목길과 빈집처럼 누구에게나 익숙한 풍경들은 작은 공감과 함께 각자의 일상을 떠올리게 해줄 것이다. 그 속에서 다시 한 번 일상 속의 아름다운 단면들을 발견한다면 삶이 늘 찬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잔잔히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여행의 기록〉은 여행지에서 발견한 생각들을 풀어놓았다. 여행에서의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행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은 그 생각들을 나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이면 내 일상의 사물에게 다시 눈길이 돌려질 것이고, 지나간 여행의 기록들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질 것이고, 눈앞의 풍경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범하지만 사는 일의 소소한 아름다움과 나를 이루는 것들에 대한 행복의 감각이 조금 열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