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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예수의데레사(소화)

[스크랩]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아침기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제2저녁기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제2저녁기도 후 끝기도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특히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심을 수련하고, 이 같은 덕행을 말과 모범으로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쇄신 및 선교 지역에서의 신앙 전파를 위해 생애를 바치고, 1897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1925년 성인 품에 올랐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녀의 자서전'에서
(안응렬 역, 1975년, 가톨릭 출판사 pp.229-230)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묵상할 때 이 간절한 원이 순교에 못지 않은 고통이 되어서, 무슨 대답을 찾을 양으로, 성 바울로의 서간집을 폈습니다. 고린토 전서 12장과 13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이가 한꺼번에 사도와 예언자와 학자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없다는 것, 교회는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눈은 동시에 손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답은 분명하였지마는, 제 원이 채워진 것은 아니었고, 평화가 온 것도 못되었습니다. 성녀 막달레나가 텅빈 무덤가에 앉아 줄곧 굽어보다가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을 발견했던 것같이, 저도 제 허무의 깊은 속까지 저를 낮춤으로 몹시도 높이 올라가 제 목적에 다다르게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실망치 않고 그대로 읽어 나가다가 이 구절에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사도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아무리 완전한 특은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지를 설명하시고, 천주께로 확실히 가기 위해서는 애덕이 가장 훌륭한 길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마침내 저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성교회의 신비체를 살펴보니, 성 바울로께서 설명하신 아무 지체에서도 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지체에서 저를 찾아 내고자 하였습니다. “애덕”이 제 “성소”의 열쇠를 주었습니다. 저는 만일 교회가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다면, 모든 기관 중에 제일 필요하고 제일 귀한 것이 그에게는 없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지경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리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말로 말해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미칠 듯이 기쁜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오 제 사랑이신 예수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자리를 찾아냈습니다. 천주여, 이 자리를 제게 주신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제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포교 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 대축일(10월 1일)
 
가장 강한 힘, 겸손 
 
요즈음 경쟁력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다른 이들, 다른 분야와 차별화하고 두드러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사람들이 더 선호하는 것이어야 경쟁력, 곧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과 능력을 키우려고 애를 쓴다. 또 가장 어려운 때가 투자의 적기라며 여러 가지 공부를 한다. 무슨 언어 능력이며, 자격증이며, 경쟁력이 되는 것들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힘이라고 생각한다. 힘을 가지려고 능력을 키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재물도 능력이므로 그것으로 힘을 발휘하려고 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명예도 그러하며, 무엇이든 가진 것은 다 능력이고, 그것으로 힘을 쓰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능력이다. 그것이 내 삶에서 힘이 된다. 아는 것도 힘이고 그래서 알아야 면장을 한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것이 능력이다. 감지하고 느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베풀 줄 알고, 도와줄 줄 알고, 새로운 것을 성취할 줄 알고, 남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앞서서 할 줄 아는 것, 이 모든 것이 능력이며 힘이다.
 
이런 것을 특출하게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난사람’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각계 각층에 난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능력 있는 사람들이며, 훌륭하며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어떤 사람일까? 제자들이 물었다.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그것도 ’하늘나라’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라.’ 또 말씀하시기를,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는 것은 난사람이 아니라, 철부지처럼 순진한 ’어린이’이며,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 ’겸손한 사람’이다.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복음적으로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겸손한 성인들 가운데 ’소화 데레사’ 성녀가 있다. 작은 꽃이라는 뜻으로 ’소화(小花)’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마다 시월 첫날이 되면, 우리는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 대축일’을 지낸다. 이날이 주일이 되어도 이 성녀의 축일을 지낸다. 또 ’포교 사업의 수호자’라 부른다.
 
이 성녀가 어떤 분이시기에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크신 분으로 교회에서 축제를 지내는 것일까? 데레사 성녀(1873-1897년)는 프랑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리지외 지방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가르멜 수녀원은 사회에서 활동하는 수도회가 아니어서 그들의 삶을 세상이 잘 알지 못했다. 옛날에는 더욱 그러했다. 수도원에서 그의 삶은 길지도 않았다. 스물다섯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위대하고 크신 성인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것은 가장 작은 분이며 가장 겸손한 분이었기에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신 분이 되신 것이다. 그는 가르멜 수도원에서 오직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배우고 익혔으며, 이 덕행을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고 후배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이분께 ’예수 아기의 성녀’, 작은 꽃 ’소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또 주님께 충실한 순명 정신으로 자신의 소명이 사랑임을 깨달았고, 그 사랑이 열렬한 선교 정신이었기에 ’포교 사업의 수호자’가 되신 것이다.
 
이날 축일은 우리 모두에게 ’작은 길’ 곧 겸손의 길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어머니 팔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음을 깨닫고,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선에 자신을 내맡기라고 일깨우고 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화를 누리는 것이 큰 기쁨이 된다(제1독서).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복음). 그러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며 오로지 주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고 주님만을 섬기는 ’한마음의 동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제2독서).
 
현대 사회는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생존경쟁의 사회이다. 강한 사람, 힘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러나 이 축일의 소화 데레사 성녀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뜻은 그 반대이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위대하고 힘있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다.
 
우리는 생활 가까운 곳에서부터, 일상에서, 작은 것에서부터 소중한 가치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성녀께서 가르치신 작은 길로 나아가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이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75. 여성편 (9) 리지외의 데레사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꿋꿋하고 위대한 영혼을 지녔던 인물이다.

 

“가장 이상적인 영적 삶 살아”

세상 떠난후 자서전이 출판되자
감춰졌던 ‘영성과 믿음’ 드러나

 

 

“거대한 태양을 끌어안고

단숨에 타버린

작은 별이여
완성을 향해

아픔의 씨앗 품고

우주를 색칠하던 꽃

백 년이 넘어도

빛 바래지 않은

겸허한 얼굴

순한 향기로

끝없이 피어나는

작은 꽃이여


숨고 싶어 숨고 싶어

하찮은 일도

환희로 꽃 피우며

기도로 열매 맺고

다함 없는 믿음과

‘사랑의 학문’ 밖엔

가진 게 없던

우리가 닮고 싶은

고운 님이여”
(이해인 수녀의 ‘소화(小花) 데레사 성녀에게’)

 

 

불과 24년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며, 꿋꿋하고 위대한 영혼을 지녔던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온전하게 자신을 봉헌했고, 평생을 그를 휘감고 있던 어둠 가운데에서도 오직 순명의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한 삶을 살았다.

 

죽음을 맞기 18개월 전, 처음으로 결핵의 증세가 나타나 각혈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주님과 만날 때가 왔음을 깨닫고 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믿음과 희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1897년 9월 30일 숨을 거두며 말했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너무나 연약했던 데레사 성녀는 그러나 그 약함을 주님께 대한 온전한 의탁과 신뢰로 가다듬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고린 12, 10)라고 선언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그는 자신의 평생을 통해 증거했다.

 

약함을 통해 강함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손길은 성녀의 영혼 깊숙이, 사랑만이 자신의 성소이고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14세 때 체험한 ‘사랑의 열’에 대해 토로한다.

 

“이 사랑의 열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집어다 통째로 불 속에 던지는 듯 했습니다. 아아! 무어라 할 수 없는 그 불, 또한 동시에 이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사랑에 탔습니다.”

 

데레사 성녀의 이 애덕이 곧 그에게 성소의 열쇠를 주었으며, 바로 그 애덕 때문에 데레사 성녀는 결코 로마 순례 외에는 고향인 알랑쏭을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도록 했다.

 

애칭 ‘소화 데레사’

 

가르멜회의 수녀이자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소화 데레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리 프랑스와즈 테레즈 마르탱은 1873년 1월 2일 프랑스 알랑쏭에서 아홉 자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비교적 큰 어려움이 없었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수도 생활을 열망했을 만큼 믿음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선과 사랑의 실천에도 모범적이었다. 이러한 성가정의 분위기는 성녀의 다정한 성품과 깊은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녀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생애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즉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리지외로 이사한 후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혹독한 세심증과 영적 고통을 겪던 8년간의 시절, 그리고 깊은 내적 회심의 경험을 한 이후의 시기이다.

 

지극히 평범했던 생활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고통스런 병으로 앓는 경험을 가졌다. 열 살 때인 1883년 알 수 없는 병으로 석달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경련과 환각, 때로는 의식을 잃으며 육체적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했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15살에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해서도 수녀원의 식당과 세탁실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녀회에 입회해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지낸 9년 반의 데레사 성녀의 생활은 지극히 평범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활력이 없고, 아무런 특별한 소명이나 역할을 하는 것 같지 않았던 성녀의 내적 삶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적인 형태였던 것이다.

 

그의 영성을 나타내는 ‘작은 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이상적인 길이었다. 그것은 특히 삶의 방법이나 형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지니고 있는 가장 순수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렇듯,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영적 삶을 살았던 성녀이기에 그 생전에 그의 삶의 영성은 감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서전이 출판되자 수많은 이들이 데레사의 영성과 그 믿음의 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자서전이 수없이 번역돼 출간됐고, 성녀의 전구로 나타난 은총의 표지들이 드러났다. 마침내, 시성은 사후 50년이 지나야 한다는 교회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를 ‘성덕의 으뜸이며 기적의 천재’라고 불러 사후 28년이 지난 1925년 5월 17일 성녀로 선포했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얻은 영광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 그로부터 매일 매일 자신의 본분, 가장 사소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일까지 충실하게 지켜나간 그 충실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11월 27일, 박영호 기자]

 

생명으로 통하는 작은 길 - 성녀 소화 데레사
(1873. 1. 2~1897. 9. 30, 축일:10. 1)
 
정재성(요한) | 신부, 대구대교구 봉덕동성당 보좌
 
 
이번호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과 함께 ‘선교의 주보성인’으로 꼽히는 ‘소화 데레사 성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대 데레사’로 불리는 데 비해, 소화 데레사 성녀는 ‘리지외(Lisieux)의 데레사 성녀’, ‘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 성녀’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뿐만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2년 반 동안의 유학생활 중 마지막 1년을 이 성녀에 대해 연구하고 석사학위논문을 썼다. 논문제목은 <리지외의 데레사에 의해 제안된 교회의 신비>인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논문내용과 다른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책으로 발간할 생각이다. 그러면 이 성녀에 대해 공부하게 된 동기와 함께 성녀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 말해보겠다.
 
1997년 성탄 방학 때 교구사제 모임(2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대주교님께서 함께 참여하시는 모임)이 헝가리에서 열렸다. 그 당시 나보다 먼저 유학생활을 시작하신 선배 신부님들 중 영성신학을 전공하고 계신 김준년 신부님(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전공)과 손군옥 신부님(십자가의 성 요한 전공)께 조언을 구하였고, 소화 데레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겨우 24년밖에 살지 못했고 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소화 데레사 수녀가 어떻게 성녀뿐만 아니라 교회박사까지 될 수 있었는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녀의 가족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상처와 치유
 
시계 보석상(1850~1870)이었던 루이 마르땡(Louis Martin:1823. 8. 22~1894. 6. 29)과 레이스 제조직공이었던 젤리 게렝(Z럏ie Gu럕in:1831. 12. 23~1877. 8. 28)은 1858년 7월 13일에 결혼하여, 17년 동안 9명의 자녀(딸 7명, 아들 2명)를 낳았는데, 4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5명이 살아남았다(마리(Marie:1860. 2. 22~1940. 1. 19), 뽈린(Pauline:1861. 9. 7~1951. 7. 28), 레오니(L럒nie:1863. 6. 3~1941. 6. 16), 셀린(C럏ine:1869. 4. 28~1959. 2. 25), 데레사(Th럕뢵e:1873. 1. 2~1897. 9. 30)). 이 딸들은 단 한 명도 결혼하지 않고 모두 수도자가 되었다(셋째딸 레오니는 프랑스 북부도시 깽(Caen)의 성모방문회(Visitation)에 입회). 데레사의 가족은 하루일과를 새벽 5시 30분 미사로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로서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부모님 모두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혼했으므로 자녀들의 종교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가족의 막내로 태어난 데레사의 생애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알랑송(Alen뛬n)에서의 시기(1873~1877), 뷔쏘네(Buissonnets)에서 리지외까지의 시기(1877~1888), 리지외의 가르멜(Carmel)수녀원에서의 시기(1888~1897)이다.
 
데레사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북부 알랑송에서 태어나, 이틀 후 첫째 언니 마리를 대모로 알랑송의 성모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엄마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서말레’(Semall?에 있는 유모 ‘로즈 따이예(Rose Taill?’가 1873년 3월부터 1874년 4월 2일까지 데레사를 양육하였고, 그 이후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877년 8월 28일, 엄마 젤리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시자, 데레사는 두 번째 엄마로 둘째 언니 뽈린을 선택하였는데, 그때부터 활달하고 발랄하던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어 끊임없는 신경증과 눈물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를 잃고 낯선 곳으로 이사간 데레사는 뷔쏘네에서 리지외까지의 시기(1877~1888)를 보냈다. 데레사는 4살 반의 나이에 엄마를 잃어버린 우울함을 간직한 채, 1881년 10월 3일부터 1885년까지 리지외에 있는 분도수녀원 소속 여학교의 반기숙생으로 생활했는데, 이는 데레사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다섯 해였다.
 
1882년 10월 2일, 두 번째 엄마였던 뽈린은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예수의 아녜스 수녀)했다. 뽈린의 착복식인 1883년 3월 13일, 데레사는 이별의 큰 상처 때문에 중병을 얻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지만, 5월 13일 성모 마리아의 미소로 완치되었다. 1884년 5월 8일 첫 영성체를 했고, 1886년 2월 초등학교 중퇴 후 1주에 3~4회씩 사설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0월 15일 첫째 언니이자 세 번째 엄마였던 ‘마리’마저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성심의 마리아 수녀)하자, 1885년 5월부터 시작되었던 ‘세심증’이 악화되었다.
 
1886년 성탄날 밤에 치유의 은총을 경험(일명 ‘소화 데레사의 회심’)한 데레사는 어머니의 죽음 후 9년 여 동안 괴로워하며 잃었던 힘을 되찾게 되었고, 그 후로 다시는 잃지 않았다. 마침내 가르멜수녀원 입회를 결심한 데레사는 1887년 5월 29일, 아버지께 허락받았지만 성소에 대한 굳은 확신이 없었다. 마침 그때 3명의 여자를 살해한 프란지니(H. Pranzini)에 관한 기사를 <라 크롸(La Croix:가톨릭신문)>에서 읽은 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그가 회개하고 자신의 가르멜 성소가 이루어지기를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결국 죽기 직전 프란지니는 사제를 청하여 십자가에 세 번이나 입맞추었고, 데레사는 사형수의 회개를 얻어낸 동시에 가르멜 성소를 확신하였다.
 

작은 길, 언제나 어린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 수녀)한 1888년 4월 9일, 데레사는 “나는 영혼을 구하려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가르멜에 왔습니다”고 했으며, 착복식(1889. 1. 10), 허원(1890. 9. 8)과 공적 착복예식(9. 24)을 받았다. 1893년 2월 20일 예수의 아녜스 수녀(뽈린)가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1894년 6월 29일에 아버지가 운명하자, 9월 14일에 셋째딸 셀린도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하였다(성면(聖面)의 즈느비에브 수녀). 이로써 한 가정 출신의 4명의 수녀가 한 수녀원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데레사의 영성이 확립되는 데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건이 바로 ‘셀린의 입회’였는데, 이는 셀린의 지참물(사진기, 시편주해서 등)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데레사는 순명에 의해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은 길’(영적 어린이의 길)을 발견하였으며,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 미사에서 자비로우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하였다. 8월 15일 사촌언니 마리 게렝(Marie Gu럕in:1870. 8. 22~1905. 4. 14)도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성체의 마리아 수녀)하였다. 1896년 3월 21일 수녀원장으로 선출된 ‘공자그의 마리(Marie de Gonzague)’ 수녀는 5명의 수련자들을 보조 수련장인 데레사에게 맡겼고, 데레사는 ‘작은 길’로써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해 성 목요일과 성 금요일, 결핵 때문에 두 번이나 각혈했던 데레사는 1897년 9월 30일, “나는 죽지 않습니다. 나는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만 1년 뒤인 1898년 9월 30일, 자서전 <한 영혼의 역사>가 출판(2,000부)되었고,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1899년부터 허가)한 사람들에게 무수한 기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데레사는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1923. 4. 29), 시성(1925. 5. 17)되었으며,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1927. 12. 14), 비오 12세에 의해 성녀 쟌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1944. 5. 3)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6월 2일 리지외를 순례하였고, 성녀 소화 데레사 서거 100주년(1997년 9월 30일)을 기념하여, 1997년 10월 19일에 성녀를 서른세 번째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는, 성인의 길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를 삶으로 증명하였으며, 사제들의 성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남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기꺼이 자청하였다. 데레사의 소명은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발견했던 ‘작은 길’은 모든 이를 위한 성성(聖性)의 길이기에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자들, 심지아 무신론자들까지도 성녀를 공경하고 있다. 우리도 데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앞에서 작은 채로 남아 있고, 점점 더 그렇게 되길 원하며,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월간 빛, 2001년 10월호]

 

 

꽃과 선교의 수호성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작은 여왕’, ‘소화(小花) 데레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부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의 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 테레즈.
 
그녀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노르망디의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익히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 같은 덕행을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소화 데레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바쳤고, 어둠 가운데서도 순명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하였다. 그녀는 처음 각혈을 하였을 때, 주님과 만날 때가 다가왔다는 예고를 겸손과 온유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느님을 열애하고 또 다른 사람도 뜨겁게 사랑하여 모든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탔던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와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특히 먼 지방에 가 있는 선교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오랜 중병으로 병석에 누운 마지막까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불평 한마디 없이 견디며 머나먼 지방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헌하였다.
 
1897년 24세의 나이로 짧은 삶을 마감하였고, 1925년 시성되었다. 축일은 10월 1일이며 꽃과 선교의 수호성인이다.
 
[경향잡지, 2004년 6월호]
출처 : 한국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고진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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