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예로니모 사제의 ‘전도서 주해’에서 | (PL 23,1057-1059) |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
전도서에 의한 독서 | 5,9-6,8 |
재물의 헛됨 |
후렴3주께서 당신 종 다윗에게 맹세하셨도다. 그의 자손은 영원하리라. |
○ 주님의 말씀은 빛을 내시도다. ◎ 우둔한 사람도 깨달음을 얻는도다. |
제1독서 |
전도서에 의한 독서 재물의 헛됨 |
5,9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욕심 부린다고 더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또한 헛된 일이다. 10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먹여 살릴 사람이 많은 것, 그러니 많은 재산은 눈요기밖에 될 것이 없다. 11 막일을 하는 사람은 많이 먹든 적게 먹든 단잠이나 자지만, 부자는 아쉬운 것 없어도 뒤척이기만 하며 제대로 잠을 못 이룬다. 12 하늘 아래서 나는 기막히게 억울한 일을 보았다. 일껏 재산을 모아 놓았는데 그 재산 때문에 우환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13 불운이 닥쳐 재산이 달아나, 제 몸에서 난 아들에게도 물려줄 것 하나 없이 14 세상에 떨어졌을 때처럼 알몸으로 돌아가더라. 일껏 수고해서 얻은 것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니, 15 이 또한 기막힌 노릇이다. 사람은 세상에 올 때처럼 빈손으로 갈 것뿐이라,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16 인생은 평생 암담한 나날을 울며 애타고 병을 앓으며 분노하는 일로 괴로워하며 사는 것이다. 17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멋지게 잘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느님께 허락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몫이다. 18 먹고 살 돈과 재산을 하느님께 몫으로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아 수고한 보람으로 즐길 일이다. 19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6,1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억울한 일이 하늘 아래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2 부귀 영화를 아쉬움 없이 하느님께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마음껏 누려 보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이 있다. 헛되다뿐이랴! 통탄할 일이다. 3 자식을 백 명이나 두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할지라도 인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죽어서도 편안히 묻히지 못할 신세라면, 이것은 아예 낙태된 아이보다 못하지 않겠는가? 4 물거품처럼 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이름도 못 남기는 아이, 5 빛을 보며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아이지만 이 아이가 그 사람보다 편안한 신세다. 6 즐기지도 못하는 인생, 천 년의 갑절을 살아 보아도 별 수가 없다. 모두 다 같은 곳으로 가는 몸들이 아닌가? 7 사람이 수고하는 것은 잘 먹자고 하는 것 아닌가? 그뿐이랴?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는 것이다. 8 그렇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고 해도 가난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
제2독서 |
성 예로니모 사제의 ‘전도서 주해’에서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
“먹고 살 돈과 재산을 하느님께 몫으로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아 수고한 보람으로 즐길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근심 걱정 속에 자기 재산을 믿고 살며 생활이 주는 무거운 짐으로서 썩어 버릴 것을 쌓아 저장해 두는 사람보다 현재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해 줍니다. 둘째 경우의 사람은 재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첫째 경우의 사람에게는 근심 덩어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재물을 즐기는 것이 왜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인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마음의 기쁨으로 불러 주십니다. 그는 현재의 즐거움과 행복에 잠겨 있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근심으로 고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의 말씀에 따라 물질적 양식과 음료를 즐기는 것보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영적 양식을 즐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노력과 수고로써만 참된 재화를 관조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수고 가운데서도 선을 찾을 수 있습니다. 노력과 수고 가운데서 즐기는 것 - 이것이 우리 과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록 선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는 완전한 선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수고하는 것은 잘 먹자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 점에 있어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고 해도 가난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수고로 얻는 것은 입에 들어가 이로 바수어져 위장으로 내려가 소화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입에 있을 동안만 미각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그 즐거움은 잠시뿐입니다. 결국 음식을 먹는 이의 영혼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한 가지 이유로서 사람은 자기가 이미 먹은 것을 다시 먹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음식 없이는 살 수 없고 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가련한 육신의 유기체를 생존시키고 굶주림을 피할까 하는 생각밖에 모릅니다. 또 다른 이유로서는 육신적 충족에서 영혼에게 이득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똑같은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수고하는 것은 잘 먹자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성서의 말씀을 잘 알고 그것을 언제나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복음에서는 이런 가난한 사람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을 부지런히 찾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작고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는 악행에서 빈약하지만,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
마침기도 |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천주여,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항상 영신 사정을 생각하며 또한 말과 행동으로 당신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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