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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전도서에 대한 강론’에서)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전도서에 대한 강론’에서 (Hom. 6: PG 44,702-703)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
전도서에 의한 독서 3,1-22
세월의 흐름이 가져다 주는 변화
후렴3세상의 나라들아, 하느님을 찬송하라. 노랫소리 맞추어 주를 찬송하라.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듣고 싶나이다.
 당신은 백성에게 평화를 말씀하시나이다.
제1독서
전도서에 의한 독서 세월의 흐름이 가져다 주는 변화
1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2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5 연장을 쓸 때가 있으면 써서 안될 때가 있고
서로 껴안을 때가 있으면 그만둘 때가 있다.
6 모아 들일 때가 있으면 없앨 때가 있고
건사할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9 그러니 사람이 애써 수고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신 일을 생각해 보았더니, 11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더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12 결국 좋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잘살며 즐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3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14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한결같아서 누가 보탤 수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다만 그의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15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은 전에 있던 일이요, 앞으로 있을 어떤 일도 전에 있던 일이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마냥 그 일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16 그뿐만 아니라 공평 무사하게 정의가 이루어져야 할 세상에 불의가 판치는 것을 나는 또 보았다. 17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느님께서 때를 정하시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심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 사람이란 본디가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 없어 사람도 짐승도 같은 숨을 쉬다가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은 헛되기만 한데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20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21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장담하랴! 22 그러니 제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즐기는 것밖에 좋은 일이 없다. 그것이 사람마다 누릴 몫이다. 죽은 다음에 어찌 될지를 알려줄 자 어디 있는가!
 
제2독서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전도서에 대한 강론’에서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
성서는 말합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 이 성서의 저자는 태어남과 죽음을 연결시킴으로써 이 두 가지 필연적 사실들의 연관성을 서두에서 잘 맺어 주었습니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출생을 뒤따르고 출생은 그 어떤 출생이라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분해되고 맙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 나 자신도 때에 맞게 태어나고 적절한 때 죽음을 맞게 해주시기를! 전도서가 말해 주는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출생과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그 자체로 공로가 되는 행위임을 보여 준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생이 한 여자의 의지적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도 죽는 자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덕행 또는 악행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때에 맞는 출생이고 무엇이 적절한 때의 죽음인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내 생각으로는 때에 맞는 출생이란 유산 또는 조산이 아니라 만기가 차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즉,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잉태하는 사람은 영혼의 산고로 구원의 열매를 낳습니다.” 우리가 선한 지향과 자유 의지의 선한 사용으로써 우리 자신을 잉태하고 또 키우며 마침내 그것을 낳을 때 어느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모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어 하느님의 자녀, 그분의 풍요의 자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때 그 결과로써 되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자신을 유산시켜 버리고, 불완전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숙한 자로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은 온전하고도 완전해야 합니다.

때에 맞게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적절한 때에 죽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어느 때이건 복된 죽음을 맞기에 적절한 때입니다. 그는 맹세로써 확인하듯 서간에서 이 점을 말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의 영광을 위해 날마다 죽고 있습니다.” 또 다른 데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날마다 죽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자기 육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을 지니고 다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언제나 십자가에 못박히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참된 생명과 잘 이어진 적절한 때의 죽음이라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 이 말씀은 죄에서 죽고 영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죽음을 주는 반면 생명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천주여,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항상 영신 사정을 생각하며 또한 말과 행동으로 당신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