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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 21,1-4: CCL 41,276-278) |
“의인은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 소망을 당신께 둘 것이오며 마음 바른 모든 이는 보람을 느끼리이다.” |
예언자 즈가리야서에 의한 독서 | 10,3-11,3 |
제1독서 |
예언자 즈가리야서에 의한 독서---이스라엘이 해방되어 되돌아오다 |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3 “나는 내 백성을 인도한다는 목자들에게 화를 쏟고 앞서가는 숫염소들을 치리라.” 만군의 주께서는 당신의 양 떼, 유다 가문을 돌보시어 이를 준마로 키워 몸소 타시리라. 4 그에게서 모퉁잇돌이 나오고, 천막 말뚝이 나오리라. 싸움터에서 쏠 활이 나오고 그에게서 지휘관들도 나오리라. 모두가 5 날쌘 용사 되어 원수를 길바닥의 진흙 밟듯 밟으리라. 주께서 함께 싸워 주시리니, 기병들도 하릴없이 달아나리라. 6 “나는 유다 가문을 굳세게 하고 요셉 가문을 도와주리라. 그들이 가엾어 다시 세워 주리라. 애초에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해주리라. 나 주님은 이 백성의 하느님, 어찌 그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으랴! 7 에브라임은 용사처럼 날쌔어지고 술취한 사람처럼 그 마음은 흥겨워지리니, 아이들도 덩달아 기뻐하리라. 내 도움인 줄 알고 모두 좋아하리라. 8 내가 그들을 도로 물러 내어 휘파람 소리로 모아 들이고, 예전처럼 불어나게 하리라. 9 나에게서 쫓겨나 멀리 뭇 민족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도 나를 잊지 않은 덕분에 그 자식들이 살아 있다가 돌아오리라. 10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려오고 아시리아에서 모아 오면, 길르앗 지방과 레바논에까지 자리를 잡고도 모자라 11 여울목을 쳐서 강바닥을 말리며 이집트로 건너가리라. 아시리아는 콧대가 꺾이고 이집트는 국권을 잃으리라. 12 이 백성은 나 주님을 믿고 힘을 얻어 그 이름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이르는 말이다.” 11,1 레바논아, 성문을 열어라. 네 송백을 불살라 버리리라. 2 전나무야, 통곡하여라. 송백이 넘어지고, 큰 나무들이 찍혀 쓰러졌다. 바산의 참나무야, 통곡하여라. 빽빽이 들어섰던 숲이 찍혀 넘어갔다. 3 그토록 자랑하던 목장이 결딴나니 목자들이 통곡하는구나. 요르단의 무성한 수풀이 망그러지니 사자들이 울부짖는구나. |
제2독서 |
“의인은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 소망을 당신께 둘 것이오며 마음 바른 모든 이는 보람을 느끼리이다.” 우리는 확실히 이 시편 말씀들을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입술은 이 말씀들을 하느님께 바쳐 왔습니다. “의인은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닌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시편은 또 다른 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 이 기쁨은 어디서 나옵니까? 시편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의인은 주 안에서 기뻐하리라.”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 우리가 명받는 것이 무엇이고 또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은 명령 사항은 무엇이고 또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우리가 혹시라도 지금 주님을 직접 보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분을 보리라는 약속만 받았습니다. 현세의 “우리는 육체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주님에게서 떨어져 순례하며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직접 보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직접 볼 때가 언제가 되겠습니까? 요한의 다음 말씀이 성취될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크고도 완전한 즐거움이 있고 충만한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소망의 젖을 마시기보다 단단한 실재의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재가 우리에게 당도하기 전, 우리가 그 실재에 다다르기 전, 현재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실재가 뒤따르는 그 소망이 가질 수 있는 기쁨이란 작은 기쁨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소망 안에서 사랑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의인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말하고 나서, 의인은 아직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어 “소망을 그분께 둘 것이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의 첫 열매들을 가지고 있고 아마도 그 이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그분과 가까이 있으며, 장차 실컷 먹고 마시게 될 것을 현재에도 다소나마 미리 맛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다면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멀리 계신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당신이 그분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가까이 오시어 당신 안에 거처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가까이 계신다는 확인을 받고 싶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랑이란 그를 통해서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합니까? 우리는 표현할 수 없는 선, 선을 베푸는 선, 그리고 온갖 선을 지어내신 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그분에게서 당신을 즐겁게 할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두고 즐거워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분에게서 즐거워 할 모든 것을 다 받는다고 할 때 죄까지도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만 그분에게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죄 외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받았습니다. |
마침기도 |
기도합시다 우리 주 천주여, 모든 선의 근원이신 당신을 끊임없이 받들어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는 완전하고 영구한 행복이 되오니, 우리로 하여금 항상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극진히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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