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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스크랩] 기도 - 루스 버로우스’(영국의 가르멜 수녀)님의 번역글

<!-by_daum->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신 분이심을 고백하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도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덜 복잡한 활동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도에 관한 수많은 책이나 세미나, 또는 성공적으로 잘 기도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조바심 내는 모습들을 보면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사실 아무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기도를 두고 이처럼 초조해 한다든가, 기교를 익히려고 애쓰는 것은 신앙 부족을 말해 줄 뿐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신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믿는 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예수께서도 잘 알고 계셨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너무나 뜻밖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이시다.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는 예수의 하느님, 하느님은 언제나 거기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가 창조된 그 완전에 목표에 이르기까지 당신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우리편에서 볼 때 기도란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하느님께 내맡기면서 개방되고 노출된 채로 그냥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활동이 아니다.우리가 하느님과 접촉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나서서 하느님과 맞붙는 것도,우리 자신이 하느님 눈에 더 바람직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일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을 뿐더러 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은 아무 조건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지 다 해주실 양으로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이론으로는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삶으로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우리 나름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 비쳐지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 자신의 견해를 진실한 것으로 믿어버리며 우리 자신의 영성 생활, 우리 자신의 기도를 원하고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움이 있다면 신약의 예수님을 열심히 파고 들어서 ’올바른 하느님상’을 얻으라는 것과 더욱 큰 신앙을 주십사고 끊임없이 청하라는 권고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더 필요치 않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는 삶이란 끊임없는 갈망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 실제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하고 정화시키고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인다. 개인기도, 전례기도, 활동중의 기도는 모두 하나이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큰 업적이며 거기에 우리가 협력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기도는 모두 필요한 것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해준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한가지 뿐이다. 당신이 보내신 분을 믿는 것. 과연 우리는 믿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론적 지식과 실제 삶의 태도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틈을 좁히고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살펴 예수 자신이신 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기도에 대해 걱정하거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염려하는 것은 신앙이 부족한 소치이다. 아직도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는 표다. 아주 세세한 일에까지 극진한 염려로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잘 보호받고 있는 가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토록 애쓰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한 가지 현명한 일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 손에 안심하고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성생활에서 풀려 나오지 않는 한 오직 혼란과 방해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반응에 대한 관심을 끄고 우리가 영적으로 어디쯤 와있나 따져보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믿는 다면 우리 안에서 어떤 보증을 얻으려하거나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는 증거가 될만한 감정이나 암시 같은 표를 얻으려는 미친듯한 갈망을 그냥 지나가게 벼려둘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보증을 원하지만 완전한 보증이란 없다. 그런 것은 갖게 되어 있지 않다. 대신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빠" 안에서 절대적 보증, 기막힌 안전성을 보장받고 있다. 조만간에 우리는 모두 예수 외에는 어떤 것에도, 아무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놀라운 진실과-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복된 진실- 마주치게 될 것이다. 우리 생활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우리 자신의 노력과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실제로 우리는 어른으로서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현실, 우리가 하느님과 맞대면하고 있는 그곳에서는 우리는 단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상태도 이보더 더 잘 맞지 않고, 또 있을 수도 없다. 두려움, 복잡성, 망설임, 자기 만족, 기만 등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우리 눈을 고정시키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심지어는 우리 비참에까지도 끌리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 강한 자기 중심을 감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즉시로 우리 자신이 허무로 떨어져 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허를 두려워하고 영적으로 부적격하다는 느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명목하여 단순하고 신뢰에 찬 자세로 사랑이신 분께 자신을 펼쳐 보이는 대신 다른 데로 정신을 흩어버리고 만다. "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어리석음이여!"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아셨고, 그 마음에 왜곡된 하느님 상이 박혀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우리가 그런 분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만남을 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도에 대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이다. 즉,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고, 우리가 좀 더 낫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서투른 더듬거림이나 영적인 무능력을 싫어하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께 전혀 원하시지 않는 것, 하느님께서 조금도 관심두지 않는 것을 해보려고 안달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신뢰하기를 꺼리고 거절하는 태도들이다. 기도 때 참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여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충실한 시간 엄수. 첫 번째로 할 일은 하루 중 어떤 시간을 기도에 바칠 것인가를 정하고 거기에 충실히 해라. 이것이 우리의 성실성을 증명하는 첫 표시이다. 일정한 시간에 한다고 기도가 삶의 한 부분일 수 만은 없다. 기도는 삶의 방편이고 우리의 온 하루가 기도를 향해 있어야 한다. 둘째, 마음과 정신의 준비. 기도 시간이 가까워 오면 더 의식적으로 생각을 모으고 거룩한 만남의 시간에 대비해야 한다. 세째, 영적 독서. 영적독서, 특히 성서 독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여유가 있는 날은 좀 더 읽는 것이 좋다. 결론적으로 충실한 시간엄수, 마음과 정신의 준비, 영적독서... 이 세 가지 활동은 미사 때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처럼 우리가 봉헌하여 협력해야 할 부분들이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뭔가가 금방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그저 정처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노력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도록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그 누구도 어떤 기도방식이 더 좋다거나 더 높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사람은 이런 방법을, 저 사람은 저런 방법을 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요와 묵상의 구송기도에서 한마디만 하거나 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해서 그것이 사다리를 한층 더 높이 올라갔다거나 하느님께 더 가까워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올라가야 할 사다리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미천한 이들, 가난한 이들, 도무지 자신을 찾지 않고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내려오신다. 항구하게 같은 방법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고정된 형식 없이 그날그날 경향에 따라 바꿔가면서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틀림없이 기도의 본질을 깨닫고 진정으로 하느님만 원하고 있다면, 또 기도에 충실히 머물면서 어쩔 수 없는 그 어려움을 감수하고만 있다면 비록 기도에서 만족할만한 체험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어떤 지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면 그들을 기도의 문지방에까지 데레가는 것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그들을 거기에 놔두고 홀로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홀로 기도의 문지방을 넘어간다. 기도에서 우리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거센바람도 아니고 오로지 완전한 침묵뿐인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대면하여 버티어낼 수 없을 것이다. 신앙, 신뢰, 위탁- 이것이 기도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모든 일은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참된 기도, 가장 본질적 의미의 기도는 우리의 직접적인 의식을 피해간다.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끝없이 충실하시며 선하시고 관대한 분이심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눈에 보이는 확실성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안배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림에 있다. 신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다. 그러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선하심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길은 이 신뢰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아버지를 아시는 분, 아버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 즉 "하느님은 듣고 계신다. 그리고 사랑하는 너희들에게 응답하고 계신다. 사랑이신 분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응답하고 계신다. 믿기만 하여라."  

첨부파일 기도.hwp

--지금까지 내용은 ’루스 버로우스’(영국의 가르멜 수녀)님의 번역글입니다.

 

출처 : 한국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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